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하나 속에 전체, 전체 속에 하나가 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일세.
一中一切(至)多即一。
【본문】 하나 가운데 일체……많음이 곧 하나이다.
法記云。問何故不守自性隨緣成之次明此句耶。
『법기』
【문】 무엇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어진다’ 다음에 이 구절을 밝히는 것인가?
答凡緣起法二無別自性。互相以他而為自性。
方能隨緣無側而起。
【답】 대개 연기법은 하나하나에 별도의 자성이 없어서
상호간에 타자[他]로써 자성을 삼고서야 바야흐로 능히 연(緣)을 따라 옆이 없이[無側] 일어나기 때문에
故不守自性之次明一中一切等義也。
‘자성을 지키지 않고’ 다음에 하나 가운데 일체[一中一切]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問若緣起法隨起無側者。唯是緣前無法之義耶。
【문】 만약 연기의 법이 따라 일어남[隨起]에 옆이 없다면
오직 이는 연(緣) 이전에 법이 없다는 뜻인가?
答就緣論之。緣前無法。就性論之。緣前有法。何者。
【답】 연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는 법이 없으나,
성품[性]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 법이 있으니, 무엇인가?
就緣論時。現於今日緣中之五尺是緣起本法無側而立。
연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금일(今日)의 연 가운데의 5척으로
나타나는 것이 연기의 본법(本法)이며 옆이 없이 서 있기 때문에
故緣以前無一法也。就性論時。本有性起法體也。
연 이전에 한 법도 없는 것이지만,
성품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본래 성기(性起)의 법체(法體)가
있는 것이다.
真記云。一中一切等二句重現緣起體之隨緣成義令明了也。
『진기』 ‘하나 가운데 일체……’ 등 2구절은 연기의 체(體)가
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뜻을 거듭 나타내어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初一句因果道理門
처음 1구는 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이니,
謂得一而定得十。得十定得一。
이른바 하나를 얻으면 정(定)히 열[十]을 얻고,
열을 얻으면 정히 하나를 얻는 것이니,
得因而即得果。得果即得因也。
인(因)을 얻으면 곧 과(果)를 얻는 것이고
과를 얻으면 곧 인을 얻는 것이다.
十緣是因。所成之一是果。
열의 연은 인이고 이루어지는 바의 일(一)은 과이니,
此因果者即一時中二位不動。故云因果道理門。
이러한 인과란 곧 하나의 시(時) 가운데
2위(位)가 부동이기 때문에 ‘인과도리문’이라 하는 것이다.
次一句德用自在門。
다음의 1구는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니,
謂此即彼彼即此。
이른바 이것은 곧 저것이며 저것은 곧 이것이니,
無礙無側。故云德用自在門及位動門也。
걸림 없고[無礙] 옆이 없기[無側] 때문에
덕용자재문 및 위동문(位動門)이라 하는 것이다.
問前是中門故有力無力門。
此是即門故有體無體門何云用耶。
【문】 앞은 중문(中門)이기 때문에 유력무력문(有力無力門)이고, 이것은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유체무체문(有體無體門)인데 어찌하여 용(用)이라 하는가?
答此則因緣當體即因即果之義名為用耳。非力用之用。
【답】 이는 곧 인연의 당체(當體)가 인에 즉하고 과에 즉하는 뜻을 용이라 이름할 뿐이니, 역용(力用)의 용이 아니다.
問一中一切者。十緣是因。所成之一是果。
然則合能所成為十一耶。
【문】 ‘일중일체’란 열의 연이 인(因)이고
이루어지는 바의 일(一)이 과이니,
그렇다면 능소를 합하여 열 하나가 되는가?
答於一緣中約望他之義為能成因。絕待之義為所成果。
然此二義無二故非十一也。
【답】 하나의 연 가운데서 ‘타자를 바라보는[望他]’ 뜻을 기준으로 하면 능히 이루는[能成] 인이 되고, ‘대함을 끊은[絶待]’ 뜻에서는 이루는 바[所成]의 과가 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 뜻이 둘이 아니므로[無二] 열 하나가 아닌 것이다.
大記云。
一中一切下欲現大緣起中因果道理及德用自在之義。
有此二句也。
『대기』 ‘하나 가운데 일체’ 아래는 대연기(大緣起) 중의
인과 도리 및 덕용 자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2구절이 있는 것이다.
崇業師云。三乘亦有此義也。
謂若初教賴耶識中三性種子與本識體同無記性故也。
숭업(崇業) 스님이 말하기를 “삼승에도 역시 이러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만일 초교의 아뢰야식 중에서라면 3성(性)의 종자가 본식의 체와 같아서 무기(無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解云。本識體中薰成之義是體門。又德用自在義也。
해석하면, 본식의 체 가운데 훈습하여 이루는 뜻은
체문(體門)이고, 또 덕용 자재의 뜻이다.
三性種子隨能薰別者是力門。因果道理義也。
3성의 종자가 능히 훈습함을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역문(力門)이니 인과 도리의 뜻인 것이다.
若熟教中如來藏體是德用自在之義。
만일 숙교 가운데라면 여래장의 체는 덕용 자재의 뜻이니,
생하거나 멸하는 것은 용이기 때문에 인과 도리의 뜻인 것이다.
若生若滅者以是用故因果道理之義也。
若一乘中隨法辨因故。十普法中隨舉一法具體具用。
만일 일승 가운데라면 법을 따라 인(因)을 변별하기 때문에
10보법(普法) 가운데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서 체를 갖추고 용을 갖추니,
體則德用自在。用則因果道理也。
체는 곧 덕용 자재이고 용은 곧 인과 도리인 것이다.
道身章云。問西風波非東風波。東風波非西風波。
『도신장』
【문】 서풍(西風)의 파도는 동풍(東風)의 파도가 아니며
동풍의 파도는 서풍의 파도가 아니지만,
但約二波之水體不二義得言即門。
다만 두 가지 파도의 물의 체[水體]가
둘이 아닌 뜻을 기준으로 하여 즉문이라 말할 수 있으며,
則約二波不得即門。
두 가지 파도를 기준으로 하면 즉문일 수 없는 것이다.
若爾但約此事彼事理體無二得言即門。
그렇다면 다만 이 현상[事]과 저 현상의 이체(理體)가
둘이 아닌 것을 기준으로 하여 즉문이라 말할 수 있는데,
何得二事不除論相即門耶。
어떻게 두 가지 현상을 제거하지 않고서
상즉문(相卽門)을 논할 수 있는가?
答若放二風水無二波。
【답】 만약 두 가지 바람[風]을 놓는다 하더라도
물에는 두 가지 파도가 없으니,
既無二波。以何即何乎。
이미 두 가지 파도가 없다면 무엇으로써 무엇에 즉하겠는가?
既以此即彼。故可知不除二波論相即耳。
이미 이것으로써 저것에 즉하므로
두 파도를 제거하지 않고서 상즉을 논했을 뿐이지
非約理體論相即矣。
이체를 기준으로 해서 상즉을 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此中此波之水與彼波之水□體是一。
이 가운데 이 파도의 물은 저 파도의 물과 파도의 체는 하나이므로,
故波雖無盡體言即一者三乘義耳。
파도가 비록 다함 없으나[無盡] 체로 말하면
곧 하나라고 하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若非此波即無彼波。
만약 이 파도가 아니면 곧 저 파도가 없고
若非彼波即無此波。是中門。
만약 저 파도가 아니면 곧 이 파도도 없다고 한다면 이는 중문이요,
此波非自性故在於彼波。
이 파도는 제 성품[自性]이 아니기 때문에 저 파도에 있고
彼波非自性故在於此波。是即門者一乘也。
저 파도는 제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 파도에 있다고 한다면
이는 즉문이라는 것은 일승이다.
古記云。入即之中諸家立名非一。
『고기』 입(入)・즉(卽) 중에 제가(諸家)에서 이름을 세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니,
謂或云中門即門。或云相入相即。
이른바 혹은 중문ㆍ즉문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상입(相入)ㆍ상즉(相卽)이라 하기도 하며,
或云相在相是。或云相資相攝。
혹은 상재(相在)ㆍ상시(相是)라 하기도 하고,
상자(相資)ㆍ상섭(相攝)이라 하기도 하며,
或云互相依持力無力義。
혹은 상호 의지하는 역(力)ㆍ무력(無力)의 뜻이기도 하며,
互相形奪體無體義。
상호 형탈(形奪)하는 체(體)ㆍ무체(無體)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중문=상입=상재=상자’이고, ‘즉문=상즉=상시=상섭’이다.
상입은 역(力)의 차원이며, 상즉은 체(體)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다.
又古人云。中門如灯光相入。故但諸灯用相入耳。
또한 옛사람은 “중문은 등불의 빛이 서로 들어가는 것[相入]과
같기 때문에 다만 모든 등불의 용이 상입할 뿐이며,
即門如波水相收。故波體水體無一相即耳。
즉문은 파도와 물이 서로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에
파도의 체와 물의 체가 둘이 아닌 상즉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