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연말, 근로자 합숙소 몇 곳을 밤에 둘러본 대통령 영부인께서 청와대로 돌아오는 차 중에서 갑자기 나에게 “김 비서 사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 도봉구 쌍문동 구석에 있는 나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통금이 가까운 자정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지역은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아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먹었고 일반전화도 들어오지 않았다. 영부인께서는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또 방안에도 들어와 둘러보았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던 것 같았다. 잠을 자다가 일어난 집사람이 허둥대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육 여사께서는 우리 집에 전화가 없어서 일요일 같은 때 볼 일이 있으면 비서실 차를 우리 집으로 보내어 연락할 정도로 불편했지만 한 번도 전화를 빨리 설치하라고 독촉하는 일이 없었다. 청와대 직원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는 서울시민이 일반전화를 신청하면 최소 1년은 걸려야 가설이 되던 때였다. 나는 정식으로 전화를 신청해서 1년 만에 겨우 전화를 놓을 수가 있었다. 요사이는 누구든 신청만 하면 하루 이틀만에 전화를 가설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박 대통령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국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말단 공무원들에 대해 항상 고맙게 여기면서 미안해 했다. 영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육영수 여사는 근로자 합숙소 같은 곳을 방문했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때에는 상점에서 알사탕 같은 것을 사서 청와대 경내에 보초를 서고 있는 순경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박 대통령 가족들과 식사를 해 본 사람들은 대통령 가족의 평범한 식단에 대개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가정에서 차리는 식단과 별 차이가 없었다. 언젠가는 박 대통령이 젓가락 대신 손가락으로 바짝 말린 꽁치를 집어들고 맛있게 드시던 시골 농부 같은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한번은 영부인께서 “오늘 할당량을 다 드셔야지요”하니까 대통령께서 “아참 그래야지”하면서 볶은 멸치를 하나, 둘, 셋 이렇게 열까지 세면서 모두 드시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박 대통령께서 칼슘 성분이 풍부한 멸치를 꼭 드시기로 영부인과 약속을 한 모양이었다. 영부인은 박 대통령께서 ‘영양학 박사’라고 하실 정도로 대통령과 가족의 건강과 식생활에 남다른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각하라는 호칭
대통령 부인들이 대통령인 남편을 호칭할 때 공석에서는 각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육영수 여사는 각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대통령께서…”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남편을 각하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고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육 여사는 대통령과 함께 행사에 참석할 때는 항상 두 발쯤 뒤에 떨어져서 걸어갔으며 손을 들어 대통령과 같이 흔드는 일이 없었다. 대신 허리를 약간 굽혀서 인사했다. 육 여사는 행사장에서나 차 안에서도 등받이에 기대지를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여자가 거드름 피운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영부인의 이런 세심함 때문에 보좌진들은 그분의 뜻에 맞게 더욱 처신에 신중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흰 목련을 좋아한 육 여사
육영수 여사 영정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두 자매.
육영수 여사는 흰 목련을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청와대 경내에는 백목련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이른 봄 북악(北岳)의 잔설(殘雪)이 자취를 감추면 청와대 경내에는 그윽한 향기와 함께 하얗게 피어나는 목련의 자태가 어우러져 청와대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이라 해도 여러 가지 장식품으로 아름다움을 돋보이려고 하지만, 목련은 아무런 꾸밈없이 그리고 잎새 한 장의 도움 없이 앙상한 가지 꼭대기에 꽃만 홀로 피어 은은한 향기를 발산할 뿐 아니라, 꽃이 질 때는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채 시들기도 전에 그냥 떨어지는 것을 보면 때로는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육영수 여사의 목련 예찬론이다.
1974년 8월 15일 꽃잎이 채 시들기 전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떨어지는 목련처럼 육 여사는 49세의 아까운 나이에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비통함을 되새겨 무엇하겠는가. 장례식날 거리를 메운 수많은 사람들의 통곡소리와 그들이 흘린 눈물을 새삼 이제 와서 되새겨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민의 가슴을 후비고 지나간 그날의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득히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진심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애썼던 육영수 여사,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성으로 보살피는가 하면 사랑하는 남편의 ‘밝은 귀’가 되어 국민의 소리를 바르게 전함으로써 국민과 위정자와의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놓으려고 노력했던 ‘청와대 야당’으로서의 육영수 여사님은 많은 이의 가슴에 오늘도 살아남아 있다.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 해 삼남매가 어버이날에 카드와 카네이션 세 송이를 박 대통령에게 드렸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카드와 카네이션을 받아 들고 울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마 후 집무실에 카드와 카네이션 꽃이 없어진 것을 안 삼남매가 그것을 찾아보니 박 대통령 침실에 걸려 있는 영부인의 사진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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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이 : 김두영 (前청와대 비서관)
첫댓글 [ 육영수 소통법 - 가까이서 본 인간 육영수 ]
① ~ ⑪ 까지 마지막 편을 올리면서 (끝) 마침을 합니다.
50년이나 지난 아득한 옛 이야기이지만 몇 번을 다시
읽어보아도 뭉클해지는 감동을 여기서 마무리 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의 페이지인가요
역사적으로 남아할 육영수 여사님의
삶의 한 페이지
귀중한 자료입니다
더 많은 자료 앞으로도 함께 공유해 주셔요
최숙영작가 님
수고하신 작품 우리 함께 길이 보존 하 십 시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