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다시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자로는 천승지국에서 그 군사업무를 다스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습니다.”
○ 賦, 兵也. 古者以田賦出兵, 故謂兵爲賦, 『春秋傳』所謂“悉索敝賦” 是也. 言子路之才, 可見者如此, 仁則不能知也. 賦는 군사다. 옛날에 전부(田賦)로 병사를 내었기 때문에 병사를 일컬어 賦라고 말하였다. 춘추전에 이른바 “悉索敝賦(폐한 병사를 모두 찾아낸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로의 재주는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으나 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春秋傳: 去聲 後凡言春秋傳者同 거성이다. 뒤에서 무릇 춘추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같다.
左傳襄公八年悉索敝賦以討于蔡 三十一年悉索敝賦以來會時事 좌전 양공 8년에 폐한 병사를 모두 찾아내어 채나라를 토벌하였다고 한다. 31년에는 폐한 병사를 모두 찾아내어 時事에 모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朱子曰 仲由可使治賦 才也 不知其仁 以學言 주자가 말하길, “중유는 군사업무를 다스리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은 재주다. 그가 어진지는 모른다는 것은 배움으로써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4 | 赤也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적은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적(공서화)는 요대를 묶고 조정에 서서 빈객과 더불어 말을 하도록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진지는 알지 못합니다.”
○ 赤, 孔子弟子, 姓公西, 字子華. 적은 공자의 제자로서, 성은 공서이고 자는 자화이다.
朱子曰 渾然天理便是仁 有一毫私意便是不仁 三子之心不是都不仁 但是不純爾 주자가 말하길, “혼연한 천리가 바로 仁이다.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다면 곧 不仁이다. 3 제자의 마음이 모두 不仁인 것은 아니지만, 단지 순수하지 못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問三子雖全體未是仁 苟於一事上能當理而無私心 亦可謂之一事之仁否 曰 不然 蓋纔說箇仁字 便用以全體言 若一事上能盡仁 便是他全體是仁了 若全體有虧 這一事上必不能盡仁 纔說箇仁字 便包盡許多事無不當理而無私了 所以三子當不得箇仁字 聖人只稱其才 聖門工夫不過居敬窮理以修身也 由求只是這些工夫未到 故夫子所以知其未仁 若能主敬而窮理工夫到此 則德性常用物欲不行而仁流行矣 누군가 묻기를, “3제자는 비록 전체가 아직 仁은 아니지만, 만약 일 하나 위에서 능히 이치에 합당하고 사심이 없을 수 있다면, 또한 이를 일컬어 일 하나의 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지 않다. 대체로 조금이라도 仁자를 말하기만 하면, 곧바로 全體를 써서 말한 것이다. 만약 하나의 일 위에서 능히 仁을 다할 수 있다면, 곧바로 그의 전체가 仁인 것이다. 만약 전체에 이지러짐이 있다면, 이 일 위에서 틀림없이 仁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仁자를 말하기만 하면, 곧바로 수많은 일을 다 포함하되,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제자가 仁자에 해당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께서는 단지 그 재주만 칭찬하였을 뿐이니, 성문에서의 공부는 敬에 거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제 몸을 수양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유와 염구는 그저 이러한 공부가 아직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께서 그가 아직 어질지 못함을 아신 것이다. 만약 능히 敬에 주안점을 두어서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가 여기에 이를 수 있다면, 德性은 늘 쓰이고 물욕은 행해지지 않아서 仁이 흘러 행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諸子之於仁 蓋亦勉焉而未能有諸己也 故或日一至焉 或月一至焉 能造其域而不能久耳 方其志氣淸明存養不懈 則是心存而有其仁 及私意橫生一有間斷 則是心亡而無其仁矣 將以爲有則有時而無 將以爲無則有時而有 旣不能必其有無 則以不知告之 경원보씨가 말하길, “여러 제자들은 仁에 있어서, 대체로 역시 힘을 쓰기는 하지만, 능히 자신 안에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하루에 한 번 仁에 이르기도 하고, 혹자는 한 달에 한 번 이르기도 한다고 말한 것이니, 그 경지에 능히 나아갈 수는 있지만, 오래 버틸 수가 없을 뿐이다. 바야흐로 그 志氣가 청명하여 存養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보존되어 그 仁이 있는 것이고, 사사로운 뜻이 마구 생겨나 한 번이라도 중간에 끊어짐이 있게 된다면, 이 마음을 사라져서 그 仁도 없어지는 것이다. 장차 있을 것으로 여기면 없을 때가 있고, 장차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 있을 때가 있다. 이미 그것의 유무를 반드시 장담할 수 없었으니,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勿軒熊氏曰 此與後篇由可使有勇 求可使足民 赤願爲小相章 互見兵財禮樂 乃國之大政而三子之才 皆足以當之 見聖門有用之學 然治事之才易見 本心之德 難全 故夫子皆不許其仁 물헌웅씨가 말하길, “이것은 후편의 ‘중유는 부릴만하니 용기가 있고, 염구는 부릴만하니 백성을 풍족하게 할 수 있고, 공서적은 작은 재상이 되기를 원한다’는 章과 더불어서 서로 병사와 재물과 예악은 곧 나라의 큰 정사로서 세 제자의 재주가 모두 충분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聖門의 유용한 학문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을 다스리는 재주는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본심의 덕은 온전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그들의 仁을 모두 인정해주지 않았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