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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
작가로서의 이광수의 기여는 장편소설의 개척에 있었고 또 거의 모든 작품이 신문 연재소설로 성립된 것이다. 단편소설로서의 선뜻 내세울 만한 작품이 <무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그의 성가를 처음으로 굳혀준 작품이 한글로 된 첫 장편인 <무정>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매일신보》의 청을 받고 생활비에 충당하기 위해서 씌어졌다는 이 작품은 그 매력의 태반을 역사적 흥미에 의존하고 있다. 연애소설이냐, 민족의식 고취의 소설이냐 하는 것으로 쟁점이 된 적이 있는 듯하지만 작가의 빈약한 솜씨나 일정치 못한 '관점(觀點)'의 빈번한 옮겨짐으로 말미암아 빈약한 구성에 따르게 마련인 혼란스러운 인상의 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통열한 비판자 인 김동인은 되풀이해서 이 작품이 '과도기의 조선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장면이 있음을 말하고 잇다. 주인공인 새세대의 이형식과 그의 약혼자인 신여성 김선영, 그리고 구도덕의 구현자라고 흔히 얘기되던 박영채 등을 등장시켜 작자 특유의 개화 사상도 개진시켜 보고 이 땅에 퍼져 있지 않은 연애도 시켜 보고 아울러 세태도 보여 주고 민족의 앞날에 대한 자기 나름의 비젼도 보여 준 것이 이 작품의 실상이다. 성격 묘사, 작중 인물과 행동과의 필연적인 인과관계 사건의 있을 법한 개연성, 이 모든 면에서 일관성 없고 미흡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당시의 독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그것이 새롭다던가 당대의 유일한 대중 매체의 주요 읽을거리였다는 부수적인 생각밖에도 몇 가지의 성격에 의존하고 있다.
첫째, 누누이 지적되어 온 바와 같이 그것을 새로운 스타일로서 새세대들에게 호소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직 그 문장에 있어서는 기미년《창조》잡지가 나타나서 구투를 일소하기까지는 그래도 '이러라' '이로다' '하더라' '하노라'의 투가 많이 남아서 <무정>에 있어서도 그 예를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조선 국어체로서 이만치 긴 글을 썼다 하는 것은 조선문 발달사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무정>이 조선 사회에 던진 파동은 특별할 만한 것으로서 거장 이인직이 그 새 몇 개 발표한 소설은 감정에 있어서 재래의 감정이었는데 새로운 감정이 포함된 소설이 조선에 나타난 효시로도 <무정>은 특필한 가치를 가졌다는 '춘원연구'에서의 김동인의 발언을 아직도 <무정>에 관한 한 권위 있는 유권해석이라 할 것이다. 즉, 새로운 감정이 새 스타일로 표출되어 유례없는 호소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숙련 독자들에게 있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숙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매혹된 것이다.
둘째로 그의 이 작품은 다른 당대적 주제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독자들의 가장 초급한 관심사를 다양하게 상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전환기에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관심사는 기성의 가치체계나 윤리관이 지시하지 못하는 삶에의 대처법이다. 이씨 조선의 붕괴와 식민주위자의 도래, 이에 따라 들어오는 새로운 삶의 양식, 도시와 농촌의 괴리현상의 심화, 특히 신학문이라는 다양한 지식분야의 전개는 새로운 사회적 유동성의 가능성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삶을 대처해야 할 것인가란 문제를 하나의 절실한 당면과제로서 제기한다. 적절한 것이건 닥치는 대로의 것이건 이광수의 소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한 처방의 구실을 하였다. 그의 소설을 읽고 도일 유학을 결심했다고 술회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물론 극소수의 중산층 자제들의 경우이겠지만 인생 상담적인 요청을 그의 작품이 훌륭히 대답해 주었다는 증거가 되어주고 있다. 그의 설교 취미는 김동인을 위시한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그의 자기 부과적(自己賦課的)인 사명감의 발로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류(時流)를 타는데 있어서 민첩한 그가 독자들의 묵시적인 요청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고해(告解)의 전통도 없고 구왕조의 몰락과 함께 과거의 문화가 붕괴해 가고 있는 터전에서 이광수는 요즈음의 종교가나 대학교수, 여론 형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저널리스트 및 우국지사의 역할을 작가로서 혼자서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무정>이 끼친 충격적인 영향력이 여기에 있다.
<무정>의 끝이 삼랑진 수해로 민족애의 호소와 민족의 구제란, 문제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은 소설의 숙련 독자들에겐 우연과 억지로 보일지 모르나 당시의 미숙련 독자들에겐 극히 감격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아, 우리의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연약하던 팔뚝에는 날로 힘이 오르고, 우리의 어듭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
어둡던 새상이 평생 어두운 것이 아니요,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케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
작중인물의 성격과 그 성격의 필연이 엮는 '있음직한 것'의 인과적 추구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근대소설의 이론으로 보자면 이것은 김동인의 말대로 '몽롱한 결론'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당대의 미숙련 독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소망 성취의 묵시오 희망에의 호소였을 것이다. 작품의 약점이나 결함이 도리어 독자들에겐 호소력의 소재지로 작용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성질은 그의 많은 작품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지만 <무정>은 그 단초로서의 의미를 두텁게 가지고 있다. 뒷날 이광수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계몽문학의 여러 특질이 잘 나타나는 것도 이 작품이고 그의 국사연(國士然)하는 자세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도 이 작품이다. <무정>의 성공에 고무되어 같은 해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개척자> 역시 청년층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은 바 있으나 대개 성공에 고무되어 찍어낸 작품이 그렇듯이 앞에 작품보다는 뒤지는 작품이다. 그러나 성격상으로는 비슷한 점이 많다.
이에 반해서 16년 후 작자 40대의 작품인 <유정(有情)>은 <무정>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선 계몽문학이라는 통속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작품으로 기성 도덕체계가 순수한 사랑에 파멸을 가져오게 하는 순애 소설이다. 민족의 스승임을 자처했던 그는 이 소설에서도 어떤 가락을 풍겨 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남화는 본명을 상호라 하고 호를 백파(白坡)라고도 하고 태백광노(太白狂奴)라고도 하여 백암 박은식과 함께 강유위, 장병린 같은 지사들과 교유하며 비분강개한 시와 글을 짓고 다니던 이요, 그 초취인 조선 부인은 남 백파가 중국에 유랑하는 동안 죽고 정임을 낳은 부인은 장병린의 친척이라는 중국 여자로서 장씨오. 이 장씨 부인이 남 백파의 글을 보고 사랑하였다느니만큼 글을 잘 하였소.
작품의 여주인공 남정임은 이 우국지사의 딸인 것이다. 관헌에 체포되어 복역 중 병으로 형집행 정지가 되어 석방되었다가 병원에서 죽은 남화의 딸을 맡은 최 석과 남정임의 사이는 처음 부녀 같은 사이였으나 이성간의 그것으로 변한다. 아내의 징투와 사회의 지탄이 두 사람을 일본과 시베리아로 떠나게 한다. 정임에 대한 사랑을 억제하는 최석의 노력은 죽음으로 끝나고 정임은 병을 얻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다. 10여 년에 걸친 직업작가로서의 훈련을 겪고 나서 쓴 이 작품은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한계 속에서나마 비교적 정교한 플롯을 가지고 있으며 문장에 있어서도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이 많이 가시어진 단정함을 엿보이고 있다. 분량에 있어서도 파란만장함을 꾸며내기 위한 '샛길'이 많지 않아 적당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허약한 점이 많이 있다. 남정임과 최석의 아내의 대조 같은 것은 어떤 상투성에 매여 있고 또 소설의 결말에 있어서도 적지않은 신파조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만 정도의 격조를 유지한 것은 작가 나름의 노력의 소산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작가 자신은 상당한 애착을 나타내어 가장 자신있는 작품으로 <유정>을 들었다고 한다.
작가가 47세 때 집필하여 39년 《문장》 창간호에 권두 소설로 발표되었던 <무명(無名)>은 아마도 숙련 독자들이 저항감 없이 읽을 수 있는 몇 편 안 되는 작품의 하나일 것이다. 동우회 사건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씌어진 듯이 보이는 이 꽤 긴 단편은 정확하면서 부담없이 읽히는 당당한 문장, 치밀한 인간 관찰, 그리고 선명한 묘사력으로 이 광수의 재능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가 좀더 집중적 효율적으로 운영했더라면 그릇 큰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촉발시켜 준다. 이광수가 그 후 이만한 작품을 영영 보여 주지 못했다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 큰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광수 소설의 큰 특색은 그가 누구보다도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고 신문학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독자를 가졌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후계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숙련 독자의 수많은 애독이나 찬미에도 불구하고 이광수를 문학상의 스승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일제 말기에 있어서의 그의 정당화될 수 없는 거동과 관련되는 면도 있을지 모르나 사실 그의 작품을 모델로 했다는 작가도 또 그를 통해 문학을 알게 되었다고 실토하는 숙련 독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문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개인적 은고(恩顧)를 입은 사람이거나 문학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라던가, 또는 대개의 경우 전문적인 신문소설의 작가라는 것은 흥미롭다. 사실 그의 많은 역사소설은 그의 한때의 친구였던 홍명희의 《임꺽정》을 따르지 못한다. 당대 현실을 다룬 소설로 후배인 염상섭의 《만세전》이나 《삼대》를 따르지 못한다. 그의 단편은 김동인이나 이태준의 몇몇 단편을 따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숙련 독자에게 이광수만큼 추억의 흔적을 남겨 놓은 사람은 달리 없었다. 여기에 이광수 문학의 자랑과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이광수가 닦아 놓은 데 한 몫을 한 길을 따라 그 후 많은 작가들이 등장해서 제가끔의 기여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세련도나 형태상의 고려에 있어 많은 진전이 있었음에도 그 후의 문학이 주제상의 왜소화 과정을 걸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형태상의 세련이 실은 이 왜소화 과정의 부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광수처럼 모순에 찬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의 국사적 포즈는 유명하지만 이 포즈가 그를 '직업적인 아마추어 작가'란 모순으로 굳혀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로서의 그가 얼마나 아마추어로 남아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시가(詩歌)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의 시의 한심한 무신경과 단순성을 상기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의 시론(時論)
이광수의 글과 사람됨을 아는데 있어서 소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의 시론적인 글이다. 그가 언론인으로 종사했다는 삽화적인 사실과 그가 소설가로서 만족치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작자가 '소설가'의 마스크를 벗고 설교하고 비판했다는 점에서 당대에의 충격은 한층 심각한 것이었다.
그의 최초의 시론으로 꼽히는 것은 1910년 대한 흥학보에 발표된 <금일 아한 청년(今日我韓靑年)과 정육(情育)>이다.
정치적 몰락을 가져온 조국의 과거에 대한 젊은이다운 혼신의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에서 그는 우상 파괴자로서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인 제재와 타인의 체면에 좌우되어 '능히 자동 자진(自動自進)으로 자유자재하여 자기 실리를 불경(不敬)하고 도덕 범위 내에 활동하는 자가 무하고 사회재재의 노예가 되어 신성한 독립적 도덕으로 행동을 자율치 못한다.'고 한 뒤 정육을 통해 인간을 자율적인 주체로서 활동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글인데, 그의 뒷날의 시론의 원형(原型)이 되어 주고 있다. 그리고 가장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민족개조론>과 <자녀중심론>이다.
자녀중심론은 스물 이곱 되던 해, 삼일 운동이 일어 나기 1년 전에 《청춘(靑春)》지에 실렸던 글이다. 유교적 대가족주의의 도덕율에 대한 도전적 이 글은 당시엔 실로 충격적인 글이었다. 그 이전의 <조선 가정의 개혁>, <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 등에서 개인의식이나 평등 사사의 일단을 펴 보았던 그는 이 글에서 대담한 자기 중심론을 펴고 있다.
생물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인류의 목적이 개체의 보존과 종족의 보전에 있다 하면 천하의 중심은 자기요 다음에 중한 것은 자손일 것이니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를 제한 외에는 악(惡)이라……자녀는 자기편으로 보면 독립한 개체니 자녀는 실로 자녀 자신을 위하여 난 것이요 부조 자신을 위하여 난 것이 아니니……
구조선의 자녀는 오직 부조를 위하여서만 살았고 일하였고 죽었다. 부조의 뜻이 곧 그네의 뜻이요 부조의 목적이 곧 그네의 목적이었다. 최근 삼백여 년의 조선인의 윤리 교과서되는 《소학》은 실로 효(孝)에서 시하여 효에서 종하였다하리만큼 자녀를 부조의 노예로 만들고야 말려는 효의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러한 자아 중심론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대의 기성 가치관에 대한 정면 충돌에서 나온 것임을 말할 것도 없으나 그 주장의 파격적인 과격성에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자(死者)는 사자로 하여금 장(葬)케 하고 생자는 생한 자 혹은 생할 자를 위하여 생하게 하여야 되겠다. 필요하거든 조선의 분묘도 헐고 부모의 혈육도 우리 양식을 삼아야 하겠다'는 표현의 충격성을 우리는 삼일운동 이전의 시기의 사회적 맥락 속에 옮겨 놓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유교의 기본원리의 하나인 효에서 망국의 원인의 일단을 찾고 있다. 그는 효자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며 젊은이에게 강요되는 희생인가를 실례로서 들면서 통박하고 있다. 조혼(早婚)의 구습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가장 설득력 있는 초기 논문의 하나일 것이다.
<민족 개조론>은 개벽사 주간이던 김기전(金起田)의 소청으로 붓을 든 것이라 전해진다. 31세 되던 1922년에 《개벽》에 발표되었던 논문이다. 상해로부터의 귀한을 계기로 그는 일제 권력의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의 국민 교화운동이나 자기 수양을 통한 사회적 발전이라는 시점을 갖게 된다. <민족개조론>은 그러한 시점 혹은 자기 합리화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우리 결함을 분명히 앎으로써 다시 살아날 길을 분명히 찾아내기'위해서 민족 개조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개인으로나 민족으로 신용이 없는데 모두 공상과 공론뿐이요, 실지로 행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이루어 놓은 것이 없습니다.……우리는 수십 인의 명망 높은 애국자들을 가졌거니와 그네의 명망의 유일한 기초는 떠드는 것과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 해외로 표박(漂迫)하는 것인 듯합니다……
이러한 말은 일단 귀국해서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최대한 일을 해보자는 그의 숨김 없는 심정이 반영되면서 자기 변호의 가락을 띄우고 있다. 그는 정치적 권리의 평등과 자유를 내세우는 정치 혁명론자들, 거기에 경제적 및 사회적 권리를 첨가하는 경제 혁명론자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진리와 양심의 혁명론자인 간디로 '과거의 역사에 표현되어 온 인류 구제의 이상'을 대변하고 개인의 수양을 통한 윤리적 구제의 원리를 제시한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서 현실과 대비시키고 영혼의 구제를 통해서만 인간의 구제가 가능하다는 설파는 세속 권력에 대한 순응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와 같은 수양의 원리가 식민지 현실의 묵인을 전제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독립 운동가의 비방도 서슴지 않는데 그것에 현실의 원리란 이름을 빌어서 하고 있는 것은 어느 때나 발견할 수 있는 타협의 원리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민족 개조론>의 정신이 아무리 원론적으로 일리 있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적전(敵前)에서 벌어진 자기 진영 약화의 이적행위 구실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물질적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람 속의 자연'이다. 이 때 갈등과 투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이해 관계의 합리적 조절을 통한 정의의 실현밖에 없다. 그러한 측면을 도외시하고 단결과 사랑과 합심과 협동을 강조하는 것은 일조의 야바위가 아니면 실효성 없는 구호이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한 개종자의 원한의 해소나 가상적(假想敵)에의 공격이 없이 하나의 단합을 위한 계기로서 '사랑'으로 씌여졌다면 혹 설득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 문서는 이 광수의 개종 후의 마음의 자취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더 흥미있는 읽을거리가 된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