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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 10편
신달자 시인의 자선 대표시 10편 : 네이버 블로그
[신달자 자선대표시 10편]
등잔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고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줄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내 앞에 비 내리고
밤새 내리고 아침에 내리고 낮을 거쳐 저녁에 또 내리는 비
내가 적막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그래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계속 보여주는구나
고맙다, 너희들 다 안아주다가 나 늙어 버리겠다, 몇 줄기는 연 창으로 들어와
반절 내 손을 적신다, 손을 적시는데 등이 따스하다
죽 죽 죽 줄 줄 줄 비는 엄마 심부름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 내 앞에
춤추둣 노래하듯 긴 영화를 돌리고 있다 엄마 한잔할 때 부르던 가락 닮았다
큰 소리도 아니고 추적추적 혼잣말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비
내가 이젠 됐다라고 말하려다 꿀꺽 삼킨다 저 움직이는 비바람이 뚝 그치는
그 다음의 고요를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표현이 막막하다.
수서역 사거리에는
(1) 저 거리의 암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 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 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거둬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을 후려치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 갑니다
(2) 저 허공도 밥이다
겨울 강물 속을 콕콕 찍어
먹이를 삼키는 오리들
그 옆 들판 마른 풀섶에서는
이른 봄을 꼭꼭 찍어 먹는 새 떼들
그 아래 구멍 뚫린 흙속에서는
밥 짓는 개미들이 분주하다
낮은 산야를 휘돌아
나무둥지 새끼들의 입속으로 돌진하는
어미 새의 입에는
따뜻한 들판 한 가닥 물려 있지만
너른 산야의 수북한 밥상이 통으로 끌려간다
어디 밝음 속에서 만이랴
어디서나 고봉으로 늘려 있는 어둠을
쪼아 먹는 새 떼들 있어
드디어 새벽빛이 사르르 흐른다
천년 허공 위에 앉아있는
배고픈 솟대들이여!
저 허공도 밥이다
하늘 아래선 배곯지 마라
바위틈새 어린 풀씨 하나도 어제보다 더 자라있다.
(3) 침묵피정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 놓고 걸었다
한 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손가락 깍지를 기고 있다
나도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드리고 싶다
(4) 넥타이
남자들은 아침마다
무지개를 걷어다가 목을 조인다
구름을 둘둘 말아 어깨를 높인
양복을 걸치고
목을 죈 생의 목줄을 펄럭이며
출근을 한다
늘 열려 있는 근성의 위태로운 동물들에겐
약간은 목을 조이는
공포를 주어야 하는 법이지
멋을 내거나 신사다운 품위를 지키는
정장의 모습에서
결코 빼어놓을 수 없이
스스로의 두 손으로 목을 조이는
경건한 자해
그러나 그들은 능숙하고 날렵하게 목을 조인다
목을 조이지 않으면 남자들은 녹이 슬어
목을 조이지 않으면 풀이 죽어
남자들은 별빛 꿈처럼 장농 속에 걸린
꽃봉오리 하나씩으로 밥을 손짓한다
그러나
어둠을 통과하는 부적의 사향빛 무늬
심장 속에서 꺼낸 핏대 하나
사방으로 퍼지는 과욕을
지긋이 누르는 동심원의 정신이
누구나 한눈에 보이게 하는 몸 밖의 성(性)으로
꿈틀 일어선다
흰 칼라에 반듯하게 매어진 그 심장에 붙은
화려한 암호를 해석하지 마라
매면서 풀고싶은 이중성의 고독
세상을 향해 벌리는 또 하나의 손
펄떡거리는 야성을 정박시키는
개인야사의 쓸쓸한 축도
그 가슴에 길게 늘어진 입.
(5) 소
사나운 소 한 마리 몰고
여기까지 왔다
소몰이 끈이 너덜너덜 닳았다
미쳐 날뛰는 더러운 성질
골짝마다 난장 쳤다
손목 휘어지도록 잡아 끌고 왔다
뿔이 허공을 치받을 때마다
뼈가 패였다
마음의 뿌리가 잘린 채 다 드러났다
징그럽게 뒤틀리고 꼬였다
생을 패대기쳤다
세월이 소의 귀싸대기를 때려부렸나
늙은 악마의 뿔 삭아 내리고
쭈그러진 살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넝마 같다
핏발 가신 눈 꿈벅이며 이제사 졸리는가
쉿!
잠들라 운명.
(6) 사리(舍利)
누구나 자신의 몸에 두 개쯤의 사리를 가지고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보던 순간에서
열두 대문을 열고 다시 열두 계곡을 휘돌아
다시 일천 대문을 밀며 더 깊어지는 눈(眼)
어쩌다 발 헛디뎌 으윽 허리가 꺾일 때
어둠속에서 더 번뜩이는 빛으로 남아 있던 눈
태우면 태워져 사라지는 사리도 있는 것이다
강골의 푸른 심줄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하늘을 긋는 천둥으로 자기를 견디는
찬란한 정신이 빚는
태워야 만날 수 있는 수행의 열매도 있지만
쟁그랑 소리 한 번 없이 사라지는 사리도 있는 것이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있는 몸의 열매
그것은 사라지면서 별에 포개질 것이다
늙는 사람들의 눈을 보라
절벽에 떨어진 듯 쭈글쭈글한 주름이 싸고 있는 눈
쭈그러진 주름 안에 나무관세음이 있다
세상사 두루 본 생의 이력으로도 그 눈은 사리가 되리
글씨를 풀지 못하는 까막눈도
하늘과 땅을 보았으면 수행정진
세상사 본 적 없는 봉사도
마음을 읽었으면 수행정진
태우면 태워져 사라지면서 온 세상을 밝히는 사리도 있는 것이다.
(7) 강을 건너다
저 하늘의 별도 강 건넌 만큼
하늘에 걸렸겠다
하루를 건너 어둠속에
두 다리를 펴는 사람들
세월을 감다가 풍덩 빠지는 곳 있다
잠 더는 일도 강 건너는 일이다
누구를 향해
정신나게 한마디 하고 싶은데
꿀꺽 참으며 또 강 건넌다
무슨 강이든 제 등뼈를 눕혀야 건널 수 있다
무조건 등을 하늘에 두고 강 건너는 새들
하늘에도 강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엎드려 날으는 것을 보면 안다
바람이 출렁 나뭇가지 위에 주저앉았다
저것도 강 건너오기 쉽지 않았다
해 떨어질 때
하늘의 목덜미를 잡고 견뎌보려고
당기는 만큼 하늘 붉었다
해라는 것도 강 건너는데 저리 겁난다
들의 풀꽃들
소나기 한 줄에도 목 꺾인다
강이 발 아래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강 깊어
산 두어 개 등짐지고 끙끙거리는 것들
앞에 보이는 강이 더 많다
번쩍 불꽃 튄다.
(8) 저 산의 녹음
무슨 저런 짐승이 있을까
속속들이 푸짐한 초록의 몸이 무거워
뒤척거리며 누운 저 여름짐승
숨 쉴 때마다 온 산이 들썩들썩하다
몸의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끈거리는 기운
내 몸이 뜨끈뜨끈하다
삼천여자를 데리고 놀고 있는가
씩씩거리며 숨을 할딱이는
저 본능의 발작 광기를
절정으로 뿜어대는
저 사내
알몸인데도 자꾸 벗고싶어서
사내는 검푸른 근육을 출렁거리고 있다
이상하다
뜨겁게 닳아오른 천지녹음
그런 광란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나 갑자기 수태할 것 같다
그 푸른 동굴 속에서
삼천여자를 쫓아내고
나 알몸으로 누워 산을 받아들이면
산 하나 품어 나오리라
나는 산의 어미가 되리라
바다와 강이 하늘이 땅이 산이 모아
짙푸른 초록의 물결로 넘실거리다가
불끈 일어서는
저 거인
누가 엉덩이를 치받는지 다시 꿈틀한다
바람 불때마다 푸른 불이 번져나간다.
(9) 핸드백
나의 핸드백은
내 숨은 가슴속의 숨은 방과 같습니다
남들은 잘 열지 못하고
열지 못해서 남들은 조금은 궁금한 내 핸드백은
때때로 나도 궁금해 손을 넣어 뒤적거리곤 합니다
열쇠와 지갑만 잡히면 안심이지만
그 두 가지가 정확하게 보이는데도
무엇이 없어진 느낌으로 여기저기 마음의 주머니를
더듬다가 덜컹 가슴이 내려앉곤 합니다
무엇인가 밀물져왔다가
썰물처럼 밀려갔는지
황토빛 뻘이 아프게 펼쳐져 있습니다
오늘은 찾아도찾아도 찾는 것이 없어서
속을 확 뒤집어 쏟아버렸지만
알량한 내 품위가
남루한 알몸으로 햇살에 드러나
쑥밭 같은 마음들을 재빠르게 주워담습니다
내 핸드백 속에서는
내 심장박동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10) 개나리꽃 핀다
바람 부는 3월
진회색 개나리 가지들 속에서
노오란 머리 비집고 나오는
신생아들
순금의 아기부처들이
지난해 못다 준 말씀들
세상에 와르르 쏟아내고 계시네
온몸으로 순금의 등을 켜고
거리에서 순금의 자비를 내리신다
화가 잔뜩 난 사람들 여기를 봐라
하늘의 선물로 내린 빛의 아기들
세상을 순화시키려고
거리마다 신생아실을 놓았다
절하라
거기가 어디든 모두 법당 안이다
아기부처들을 태운 황금열차가
세상의 거리를 달려간다
3월 설법으로
개나리꽃 핀다.
먼 산
겨울 저녁 7시
산이 피곤하다며 다리를 쭉 뻗고 눕는다
바람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모두 내버려 두라는 듯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는 듯
머리 밑으로 노을이 잘잘 끓는 듯 불길 일어도
그 순간 그 뜨거움 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사라지는 것은 손을 흔들어주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라는 듯
종일 사라지는 것들을 위해 낮은 자세로
더 낮아지라고
셈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는 시간조차 기척 없는
그러므로 하루를 잘 벌었다
그러므로
저 먼 산의
겨울 저녁은 없다.
살 흐르다
거실에서는 소리의 입자들이 내리고 있다
살 흐르는 소리가 살 살 내리고 있다
30년 된 나무의자도 모서리가 닳았다
300년 된 옛 책장은 온몸이 으깨어져 있다
그 살들 한마디 말없이 사라져갔다
살 살 솰 솰 그 소리에 손 흔들어주지 못했다
동거하는 것들은 목숨처럼 멈추지 않고
소리의 고요로 고요의 소리로 흐르고 있다
조금씩 실어 나르는 손이 있다
멀리 갔는가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어느 흰빛 마을을 이루고 있을 것
나 거기 가끔 몽환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모습 보이지 않으나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내 집의 부스러기 내 몸의 홑겹 살비듬들 보인다
다 닳는다
내 손가락 은반지는 가끔 살 벗겨지는 소리를 낸다
다 어딘가로 흐를 것
흘러내리는 소리
흘러가는 소리
멀리 사라지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흐르는 소리
이 깊은 밤 창 안이나 창밖이 모두
나와 함께 고요히 자신의 살을 내리고 있는 중이다
외로움도 스트레칭을 한다
봄이 오는 밤 거위털 꽃이불을 덮었는데 추웠다
거위털 작은 조각들이 갑자기 산 거위 떼가 되어 날 덮는데 추웠다
푹신푹신한 거위 떼가 침대에서 방으로 내려와 비단 한 필로 방을 메웠다
모란꽃과 나비들이 수놓아진 붉은 비단이었다
꽃들은 더 커지고 나비들은 수가 더 늘었다
비단은 거실을 거쳐 마당 구석까지 꽉 메웠다 자꾸 자랐다
외로움은 온몸의 관절을 펴 수평선처럼 그 끝이 없었다
어느 날 꽃비단은 내 집 마당이 모자라 강가 돌밭으로 가 몸을 눕혔다
멈추지 않고 강가 돌밭의 굴곡을 다 메웠다
강을 넘고 황량한 들판으로 가는 걸음이 빨랐다 처소를 넓혔다
그렇다 바닥끝까지 완벽하게 뻗어 납작하게 얇아졌다
너무 뻗었는지 하얗게 질린 광목 한 필
뼈가 드러나게 바랜 저 흰빛
나는 그 서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뚝 그치다
그것은 무슨 진귀한 말씀 같아서
허벅지 종아리로 줄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교실이나 거리에나 질질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게 폭 스며 배게 해서는
소리 없는 그 물컹한 공포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숨어
몸에서 피는 꽃잎이라 떨어트리지 않고 다 주워 모아서는
부끄러운 연애편지처럼 접어 아무도 모르게 숨어 버렸던 다홍빛 생리
그 무슨 세상에는 없는 나만 들으라는 남이 알면 큰일 나는 진귀한 말씀 같기만 하여서
문 걸고 내 속의 꽃물을 슬며시 보곤 하였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사랑하듯 몰래 숨어 만졌었는데
그 말씀 좀 알아듣는데 그 냄새 은근슬쩍 야릇하게 정들었다 했는데 귀찮다 하면서 받아주는 남정네 같았는데 그랬는데 어느 날 그 말씀 갈 곳이 따로 있었나 한 말 또하고 또하고 이제 그치나 하면 또또하고 영 이상하게 굴더니 어느 날 한순간 뚝 그쳐 버렸다
다시 겨울이다
1)
얼음 베개를 베고 자려느냐
완전 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서
겨울을 입고 밤 지새는 겨울나무가 되려 하느냐
그렇다면 겨울도 벗겨 내거라
사납게 휘두르며 달겨 더는 혹한에
맨살을 맡겨 마구 쳐라 해라
내 남루한 의지를 기꺼이 던져 놓으리니
허공을 회치듯 갈겨 오는 저 하늘의 회초리
그래 나 여기 있느니 빗나가지 마라
2)
다시 겨울이 왔다 나는 매 맞는 중독자
내가 오르는 곳은 오대산 상왕봉 정상
무릎까지 차 오른 눈 속을 걸어가면 뭉툭하게 살 저미는
강풍에 둬번 먼저 쓰러진다. 돌아서려다 어금니 물고 다시 오른다 다시……
다시라는 말 입으로 하지 않고 피로 했다 늘씬하게 더 맞는다.
몸을 후려쳐도 얼음계곡 제자리 걸음이듯 올라갔다 한 걸음 오르면
두어 걸음 더 뒤로 미끄러짐, 한 발자국에 한 생이 간다
왜 오르는가 때리는 겨울이 묻는다. 터지기 위해서, 저 겨울의 정상에 서서
성한 곳 없이 뼈가 툭툭 부러지게 매를 맞노라면
*강철로 된 무지개가 보일 듯 그 빛을 따라 가노라면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저 다친 뼈 사이로
뾰죽하게 올라올 것. 나를 묻고 새로운 내가 서서히 태어 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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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의 <절정>의 한 대목
갑옷을 입은 호랑이 떼들일까
하늘이 통째로 훌렁 빠지듯 밤새 비 내리고
저 물소리 멀리서도 젖는다고 간단히 말하지 못한다
칼을 찬 이순신장군이나 김좌진장군의 생생한 전투모습으로
적의 목을 쳐 두 손으로 깃발처럼 높이 들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승자의 우렁찬 군가 같은 저 물소리
만해마을 409호실은 부처도 없고 만해도 없고 물소리만 낭자하다
해서 나는 몸이 성한 곳이 없다
아니다 칼이 지나간 자국을 만지다가 호랑이 발자국이
온몸을 찍고 간 것을 알았다 산속 호랑이 떼들
목을 쳐 흐르는 피냄새를 맡고 이것들 미친 듯 넓은 개울을 가득 메우며
달려온 것이다 동물의 왕국에서나 보았던 광야의 호랑이 떼
피 흘리며 끌려가는 인육을 겨냥해 거리의 불빛을 이글거리는 눈알에 박아 넣고
호랑이 떼들 내 앓는 몸을 밟고 지나갔구나 해서 나는 몸이 다 찢겨져 버렸다
결코 쉬는 법이 없는 저 물소리
칼을 든 장군들의 싸움인지 서너 달 굶은 호랑이 떼들의 광기어린 출몰인지
읽어 내려 봐 지난 생을 뒤적여
칼과 칼이 부딪는 펄펄 끓는 붉은 쇳가루들이 한꺼번에 떠내려
오는 내력을
눈 시퍼렇게 뜨고 흐르는 저 갑옷을 걸친 무리들의 행렬 구호가 딱 한 소절이다
단순하지만 우직하고 한 길만 아는 그래서 무슨 연유로
수세기를 저렇게 돌바닥을 온몸 쳐 흐르는 저 물소리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염불소리
늑골이 푹 패인 나를 다시 엎질러 물소리로 섞여 흐르겠다
그 소리 따라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