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17신]형, 벌써 5일이 지난 정초正初네
친애하는 형,
세월이 진짜 이렇게 빠르면 ‘한 세상’도 금방이겠지요?
2021년 1월 5일, 금세 5일이 흐른 정초에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연말연시는 어떠셨는지요?
일곱살 외손녀의 재롱은 갈수록 더욱 빛이 나,
일상의 단조로운 생활을, 온집안을 윤택하게 하고 있겠지요?
그런 가운데 여전히 꽉 짜인 일상에, 여느 날하고 다른 것 하나 없이
맞이하고, 또 살아가고 있겠지요.
엊그제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읽으셨지요?
아버지와 동거同居한 지 딱 1년 되는 일요일(1월 3일) 저녁,
동네친구 부부와 깜짝파티를 해드렸지요. 많이 좋아하시더이다.
무엇보다 당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새 사람들’이 앞에 있으니 좋으셨겠지요.
형도 잘 아시겠지만, 다른 것은 하나도 잘 해드리지 못해드려도,
딱 그런 점에서만은, 그런 것만은 제가 잘할 수 있는 효도이겠지요.
오늘 이런저런 서류들을 정리하다보니,
기분이 괜히 멜랑꼬리해져 자판을 두들깁니다.
이제 언제 퇴직했더라? 할 정도가 되었는데,
작년이 아니고 재작년 6월이니,
1년하고도 반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난 달만 해도 작년 6월 퇴직. 낙향했다고 말하기 좋았는데, 이젠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흑흑.
지난 1년, 작년을 생각하며 처음으로 수입과 지출을 생각해 봤습니다.
지출이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잡다할 터이지만, 수입은 너무나 심플하여 정리하는데 10분도 걸리지 않더군요.
백수白手이긴 한데, 백수가 아닌 애매한 신분이라 할까요?
왜냐하면 국민연금이라는 ‘평생월급’을 작년 4월부터 앞당겨 받고 있으니까요. 1988년 제도가 시행된 이래 직장생활 내내 불입했으니 총액이 상당하겠지요. 그 덕분에 조기수령을 해도 한 달에 160여만원을 받으니, 세상에 이런 ‘효자 월급’이 어디 있겠어요. 그중에 60%에 해당하는 금액은 아내에게 월급식으로 자동이체를 해놓았지요. 제가 죽어도 배우자가 받을 금액이 60%라 하여, 그리 했답니다. 흐흐.
연금 외에 수입을 생각하니, 제법 되더이다. 친한 모교 교수가 당신이 번역한 <논어>와 <금강경> 교열을 봐달라 해서 받은 1백만원, 원로 선배가 펴낸 당신의 <시선집> 언론 홍보를 부탁한다며 준 1백만원, 전전전 직장 고참선배의 자서전을 정말로 공짜로 봐주려했는데 그럴 수 없다며 안긴 50만원, 거기에 유튜브 후원금이라며 50만원을 보내주신 근현대사자료 콜렉터 선배. 참 고마운 일이었지요. 코로나시국으로 5년째 해오던 특강이 중지되자(1, 2월 2회 특강 100만원 제외) “강사들이 얼마나 배고프겠냐?”며 ‘1등급 강사’들에게 상반기, 하반기 50만원씩을 주신 고용노동부 위촉 교육기관인 건설산업교육원 이사장님, 거듭 감사드립니다. 300명 강사 중에 50명을 선정했다지요. 흐흐.
우연하게 일간 경제신문 칼럼 4회 투고에 원고료 28만원, 제법 수입이 있었지요? 형과 여동생 3명이 ‘아버지 모신다’며 보내주는 매월 후원금 20만원, 아 참, 또 있네요. 형이 영농자금으로 4월에 22만원을 보내주기도 했지요. 아버지가 중고차를 폐차하자 ‘당장에 발이 없어서 되겠냐?’며 주신 금일봉(저야 무조건 빌린 것이므로 차차 갚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러프하게 합해 보니까 3천만원이 넘더군요. 이 정도면 준수하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경제적인 수입 외에 물질적인 후원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줄줄이 사탕’ 30건이 넘더군요. 전국 각지에서 택배로 보내온 물품은 저에게 보낸다기보다는 ‘아버지 잘 모시라’는 격려차원이 90%였습니다. 제주 갈치, 영양 사과, 장성과 해남 전통막걸리 몇 박스, 발렌타인21와 코냑, 비비고곰탕 몇 박스, 명절 곶감, 진안 인삼, 인근 친구부인들이 보내준 추어탕, 토종닭백숙, 흑염소탕, 선지국 등등등등. 제가 생각해도 참 대단한 택배행렬이 이어진 한 해였습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게 ‘책 선물’입니다. 돈이 아까워서도 구입을 망설이는 책들을 어찌 알고(제 글을 보고 알았다지만) 서슴없이 사보내기는 쉽지 않을 터인데, 20여권의 책 선물을 받았지요. 저로서는 최고의 선물이지요. 흐흐.
제가 세상을 잘 산 덕분일까요? 글쎄요.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낙향을 아쉬워하며 안타까워하는 차원도 있을 것이고, '월말부부'를 자청하여 고향살이를 하는 제가 부러운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거의 날마다 지인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졸문에 ‘글값’ ‘독서료’이라 생각하라는 친구들도 있더이다. 독서료라는 조어造語는 처음 듣지만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습니다. ‘그래, 이런 졸문이로라도 억지독서를 한다’ 생각하면 흐뭇해지곤 했지요.
형, 결코 내 자랑이 아닌 줄 아시지요? 아무튼 이제 시작되는 2021년 신축년 1년은 또 어떻게 흘러갈까요? 저는 그것이 못내 궁금합니다. 또 어떤 기쁘거나 슬픈 일들이 <우리 생生 앞에> 기다리고 있을까요? 정말로 바라는 것은, 코로나의 완전 퇴진입니다. 어찌 이런 몹쓸 전염병이 인류와 동거를 하다니요? <before Korona>, 특별한 걱정 없던 우리의 일상으로 회귀回歸하는 날이 틀림없이, 반드시, 꼭 오기는 오겠지요? 하여 쪼금만 힘을 내고 참고 견디면 되겠지요? 또한 지금은 보행이 원만하시어 ‘노치원’에 다니시지만, 연로하기에 아버지의 건강이 딱 작년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하여, 2022년 1월 3일 ‘동거 2년’기념 파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촛불을 두 개 켜야겠지요. 저는 특별한 바람은 없습니다. 솔직히 원래부터 욕심이 없는 편이라는 것도 잘 아시죠? <평생월급으로> 20년, 아니 30년 영위할 건강만 유지된다면, 지금 이 시력정도로만 나빠지지 않는다면, 책도 읽고 생활글도 쓰면서 인생을 관조觀照하고 싶은 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어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여자친구에게 들었는데, 영어 hope와 wish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영문과를 나온 제가 무색했지요. hope는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 희망을 말할 때 ‘I hope so.’로 쓰고, 이뤄질 가망이 적은 희망을 말할 때에는 ‘I wish 어쩌고저쩌고’라고 한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어찌 됐든 “hope”야겠지요. 형도 hope이어야 할 거구요. 줄입니다. 내내 평강하시길 빕니다.
정초에 우제愚弟 고향에서 소식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