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심 2021년 02월 막수산행 후기
-광교산-
ㅁ 일 자: 2021. 02. 24 (막水) 10:00~
ㅁ 산 행 지: 광교산 光敎山 (582mL / 경기 용인 수지. 경기 수원)
ㅁ 모임장소 / 시간: 신분당선 수지구청역 3번 출구 / 10시 정각
ㅁ 참 가 자: 14명
수지구청역: 민동식, 박장상, 신흥윤, 심영보, 윤정건, 이영섭, 임창복, 전영도, 정우택, 최동우, 하정용, 한창희, 홍윤표 등 13명
뒤풀이장소: 정태훈 1명
ㅁ 일정 및 산행코스:
수지구청역(버스09:49 -9명 선출발, 10:00 -4명 후출발) → 법륜사 입구 합류(10:25) → 삼거리(법륜사, 수지성당, 시루봉)11:00) → 헬기장(간식자리) (11:45~12:18) → 수리봉(12:28)→ 광교산 정상(시루봉)(12:38~12:41) → 삼거리(시루봉, 비로봉, 서봉사지)13:00) → 서봉사지(13:30) → 코나헤븐(13:42) → 뒤풀이장소(청호골 송어)(13:50~15:20) → 수지구청역(버스) (16:00)
※ 산행거리 5.1km/ 산행시간 약 3.5시간/ 휴식시간 약 1.3시간/ 12천보
ㅁ 공심 03월 산행 계획
월별 | 일 자 | 행 선 지 | 집 결 지 | 시간 | 산 행 코 스 | 비 고 |
3월 | 13(토) | 관악산 연주암 | 2호선 낙성대역4출, 2번 마을버스 | 10:00 | 서울대 신공학관-정상(연주암)-과천 | 공심 정기 |
31(수) | 청계산 과천매봉 | 과천 대공원역 | 10:00 | 대공원역-매봉-청계사-인덕원역 | 공심 막수 |
ㅁ 뒤풀이: 청호골 송어 (031-896-8212 / 경기 용인 수지 신봉1로 382 1층)
☞ 마을버스 15-2 신봉동 종점
ㅁ 경 비: 수입28만원(2만x 14명) –지출28만원(식대)+전기잔액 51.2만원= 현재잔액 51.2만원 – 11월 막수산행 이후 동일
ㅁ 산행 낙수
- 이번 산행은 안내 할 때부터 강조한 예기지만 정부 방역수칙이 여전히 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행과 뒤풀이를 4명 1팀으로 조정하여 조심스럽게 실시하기로 했다. 공심 회원들은 의외로 호응이 있어 14명(1명은 뒤풀이 참석)이나 함께 할 수 있었다. 오랜 만에 서울 남부지역 산행을 계획하면서 지역 회원들의 많은 참석을 예상했지만 홍보부족을 깨닫고 앞으로 공심의 인지도를 더 높여야 한다는 마음의 짐(?)만 안고 말았다. 반면에 그 동안 건강 문제로 회복은 많이 되었지만 다소 부담이 되는 산행대장을 선뜻 승낙해준 최동우 대장과 심영보 고문 그리고 정태훈 회원 등의 참석으로 다음의 산행을 기대해본다.
- 산행 당일에 항상 전철 안에서 만나게 되는 좋은 소식이 이번에도 있었다. 박장상 교수가 지방 병원으로 부임한 이후 공심 참여도가 낮아졌는데, 동료의사와 어떻게 하든 진료시간을 조정하여 가능한 참가하겠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윤정건 고문과 함께 나타나겠다는 전갈. 그리고 용인 고참 정태훈 옹도 뒤풀이만은 함께 할 수 있다는 전갈. 수지구청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기분이 뜬다.
- 벌써 2월 하순, 雨水를 지난 지 엿새, 내주면 驚蟄이 다가온다. 봄의 전주곡은 이미 산천에 퍼져나갔다. 아직도 코로나19에 찌든 마음이지만 공심 친구들의 얼굴과 옷 매무새에서 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은현 중 도둑 산행한다는 기분을 일축하진 못했지만 모처럼 산행하기엔 정말 좋은 날을 만났다. 이번에 참가한 회원들은 마치 특공대 같았다. 신흥윤 산행 전문해설가의 평을 빌리면 “오늘 시행한 광교산 산행코스는 다소 짧았다고는 하지만 바위가 많은 길로 노인들에게는 결코 쉬운 코스가 아닌데 3시간 반 걸려 다들 안전하게 하산” 한 것으로 증명된 셈이다. 다소 아쉬운 점은 조금은 더 산 속에서 봄을 느끼고 광교산의 유래를 찾아보고 내려왔으면 더 좋았겠다 는 욕심을 가져본다.
- 3월 산행계획은 정부 방역수칙과 이에 따른 총산 시산제의 향방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다. 3월 중 총산 시산제가 개최되면 상기 소개한 공심 3월 산행계획도 조정될 수 있다. 3월에는 뭔가가 바뀌고 가슴을 활짝 열고 기지개를 크게 펴보았으면 좋겠다. 우리 홈페이지 안내를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3월 산행계획도 공심과 함께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광교산(光敎山)의 유래
- 광교산(光敎山)은 수원시 장안구와 용인시 수지구와 성남시, 의왕시에 걸쳐서 있는 582m의 산으로 풍수상으로 볼 때 수원의 진산(鎭山)으로서 한남금북정백의 주봉이며 수원에서는 이의동, 상광교동, 하광교에 이른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광악산(光岳山)이라고 하고 ‘광옥산(光獄山)’ 으로도 불리었는데, 고려 태조가 그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유래가 흥미롭다.
- 후삼국이 서로 다툴 때 왕건은 928년에 마지막 상대였던 백제의 견훤을 제거하고 송도로 귀향하면서 광악산에 있던 임시궁궐 행궁에 잠시 들렀다. 산전(山展) 에서 군사를 위로하던 중에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 이라는 의미를 살려 ‘광교산’(光敎山)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
- 고려시대에는 창성사(彰聖寺), 미학사, 성복사 등 한때는 8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현재 대부분이 사라져 그 자취는 찾을 수 없지만, 몇 군대에서 절터와 기왓장이 출토되어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광교산에서 최고봉은 사루봉으로서 산의 북서쪽에는 백운산(564.2m), 남쪽으로는 형제봉(448m)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인근의 동막천, 풍덕천을 이루면서 흘러가 숯내(炭川)으로 흘러가서 한강으로 흐르고 서쪽으로는 미륵골과 알림으로 흘러서 미륵골과 알림으로 흘러서 만석거(萬石渠), 서호(西湖)등으로 흘러 호수를 만들었다가 장지천으로 흘러가서 오목천과 합류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광교저수지에 머물다가는 화홍문을 거쳐서 수원을 관통하는 수원천이 되고, 남서쪽 계곡에서 비롯된 물줄기는 이의동 산의실을 지나서 원천리천을 이른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고천으로 해서 안양천에 합류하여 흐르면서 물의 도시 수원을 만든다.
- 특히나 만석거는 정조가 수원화성을 짓고서 1795년에 축조하였는데 수원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를 파고 방죽을 쌓았는데 북쪽에 판 것이 만석거인 데 동쪽, 지금의 수원시 지동에 축조한 것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서쪽에 축조한 것이 수원시 서둔동의 축만제(祝萬堤, 西湖)이고, 남쪽에 축조한 것이 사도세자 묘역인 화산(花山) 현륭원(顯隆園) 앞에 있는 것이 만년제(萬年堤)이다. 이들 호수는 수원성을 쌓으면서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여 사관병졸들의 급료나 기타 경비에 사용하려고 화성둔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판 것이었다.
- 그리고 광교산은 백제 때 온조왕이 머물던 행궁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고려의 태조가 머물던 광교산 행궁에 이어 조선조에서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 수원으로 옮겨오고 나중에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천도까지 하여 수원에 머물려고 지었던 ‘화성행궁’ 이 세워지게 되면서 이곳 광교산의 자락에는 백제, 고려, 조선시대 3개 왕조에 걸쳐 행궁이 세워지기도 하였던 곳이었으니 유서 깊은 곳이었다 할 것이다.
- 광교산에는 ‘종대봉(鐘臺俸, 또는 종루봉)’과 문암(文岩)‘ 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신라 말기의 유학자이던 孤雲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최치원은 통일 신라말기에 이곳을 찾았는데 전국의 유명한 문암을 비교하여 본 끝에 이곳의 문암을 제일 좋아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광교산의 비로봉인 ‘종루봉(鐘樓峰)’ 또는 종대봉에 올라 종루에 걸려 있는 종을 보고 자신의 신세와 똑같은 종루를 자주 찾았다고 전한다. 처음 그곳에 오른 최치원은 “대체 이 높은 곳에 왜 이런 종이 달려 있을까? 종이라면 당연히 사람 많은 곳에서 시간과 위험을 알려 주는 물건인데 어찌 이 산속에 누가 이 종소리를 듣는다고 이곳에 걸어 놓았단 말인가?” 그는 종을 바라보면서 종이 자신의 신세와 같다고 생각하였다고 전한다.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나 문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렇게 산중에서 쓰이지 못하고서 은거하고 있는 것이 종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종루에 자주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고는 하였다고 하는데 이제는 세월에 씻겨서 종대봉도 이름만 남아 그의 자취와 그의 아릿한 아픔을 알려줄 뿐이고 그의 아픔이 이제는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 최치원은 그리고 인근 행전 동문밖에 있던 바위를 ‘문암(文巖)’ 이라 이름하고는 그 곳과 종대봉을 즐겨 찾았다고《수원읍지》는 전한다. 지금 종루봉 6각정의 누각 위에는 누군가의 시인지 전각(篆刻)이 걸려 있어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시심을 자극하여 누구도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전각의 시는 노래한다. “산중의 좋은 친구는 나무 사이에 있는 새요. 세상 밖 맑은 소리는 돌 위의 샘이네(山中好友林間鳥 世外淸音石上泉)’ 잘 알려져 있듯이 최치원은 어려서는 문명이 널리 떨치고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골품제 사회로 왕족인 성골이나 진골이 아닌 6두품출신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가 신라에서 일정한도 이상의 출세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견일은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12살의 어린 최치원을 먼 당나라로 유학 보냈다. 당시 당나라는 재주가 있으면 외국인도 벼슬에 등용하여서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서 장안에 문명도 떨칠 수 있었다. 당나라 희종 재위 당시 879년 소금 밀매업자인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그는 27살이었을 때 토벌사령관인 고변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격문을 지어 그의 문재를 드날렸다. 그러던 중 어렵게 고향에 돌아왔으나 골품제로 이루어진 기득권 세력이 용납하지 않아 그는 출사의 꿈을 접고 은거생활에 들어갔고 그의 발걸음은 이곳의 광교산에 까지 이른 것이다.
- 광교산에서 잘 알려진 유적으로서 깁준용장군의 전승비가 전하고 있는데 이 비는 광교산 중턱 해발 400m쯤정도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형제봉으로부터 비로봉으로 가는 가파른 길을 내려가서 평탄한 길을 가다가 비로봉으로 오르는 중간정도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김준룡장군 전승비(金俊龍 將軍 戰勝碑)로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이를 따라서 조금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의미로서 지어진 ‘호항곡(胡降谷)’ 계곡에서 오르는 곳에 위치한 것으로 이 비는 별도의 기념물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자연석의 암벽에다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김준룡전승지)’ 라고 새겨져 있으며 좌우에는 ‘丙子胡亂公提湖南兵覲王至此殺淸三大將(병자호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 즉 “병자호란 당시 공이 호남의 친병을 이끌고 근왕코자 이곳에 이르러 청군의 대장 3명을 죽였다” 는 전승하였다는 전승비가 있는데 병자호란(1636년)당시 활약하던 김준용 장군의 전공을 기록한 것이다.
ㅁ 관련 사진
▶ 대표사진
▶ 수지구청역~들머리
▶ 법륜사
▶ 산행로에 접어들어
▶ 첫 번째 쉼터 1 - 삼거리(법륜사 ~ 수지성당 ~ 시루봉)
▶ 첫 번째 쉼터 2
▶ 첫 번째 쉼터 3
▶ 첫 번째 쉼터 4
▶ 계단오름 길이 많네요
▶ 헬기장
▶ 간식자리
▶ 수리봉
▶ 광교산 정상 1
▶ 광교산 정상 2
▶ 광교산 정상 3
▶하산 길로 접어든다
▶ 서봉사지 - 현오국사탑비
▶ 뒤풀이 장소로 향하여 - 청허골 송어
▶ 뒤풀이 장소 1
▶ 뒤풀이 장소 2
공심회원님들! 3월에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또 산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