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98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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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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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H3xImwqGGs (김정남 보니파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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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용기를 내거라! 내가 고쳐주겠다! 내가 모든 것을 원상복귀시켜주겠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한 인간 존재의 비참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루카 복음 1장 12절) 율법까지 어겨가며 목숨을 내걸고 예수님께로 다가온 나병환자의 모습과 행동을 떠올려 보니, 그 가련함과 절박함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나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온몸이 그야말로 만신창이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깊은 심연의 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 비참한 몰골에 멀리 비켜가며 혀를 쯧쯧 찼습니다. 가족들도 포기한 지 오래 전입니다. 언제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생각 하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나를 빨리 데려가지 않으시나?’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우리들 처지가 꼭 나병환자인 듯 합니다. 겉으로는 호탕하게 큰 웃음치지만, 뒤돌아서서는 사무친 외로움과 괴로움에 소리없는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떨어트립니다. 틈만 나면 나 이런 사람이라며, 금박 장식된 화려한 명함을 돌리지만, 홀로 남겨져 거울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민낯, 내 부끄러운 모습에 가슴을 칩니다.
끈질긴 악습, 무한 반복되는 죄, 여기서 상처받고 저기서 상처받고 만신창이가 된 영혼, 그러나 그 어디에도 마음 편히 하소연할 데 없는 우리 역시 한 가련한 나병환자입니다. 따지고 보니 나병환자나 나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다행히 자상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우리 뒤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며, ‘그간 고생했다’며 위로해 주십니다.
‘용기를 내거라.’‘내가 고쳐주겠다.’ ‘내가 모든 것을 원상복귀시켜주겠다.’며 속삭이십니다. ‘갓 태어났을 때의 보송보송한 피부를 되찾아주시겠다.’며 격려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복음 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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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6i0vL1m4y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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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왜 엎드려 청할 때까지 들어주시지 않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말은 “하고자 하면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던 겁니까?”라는 원망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적을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청할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알아서 다 해주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나병 환자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해주셨을까요? 아마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 겸손을 위해 더 좋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목적을 명확히 알아야 우리도 그분께 좋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겸손’은 관계의 기본입니다. 교만하면 판단하게 되고 판단하면 관계는 끝납니다. 판단을 안 하는 습관을 기르려면 자기 판단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겸손한 아이로 자라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영화 ‘오만과 편견’(2005)은 오만과 편견이 관계의 적이고 그 오만과 편견은 진정한 사랑으로만 녹아내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엘리사벳은 매우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첫인상, 사교성, 가치관, 사용하는 언어와 제스처 등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런 엘리사벳에게 가장 안 좋게 판단을 받는 남자가 재벌이자 미남인 다아시입니다. 다아시는 돈 많고 무표정하고 사교성 없고 거만하게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만한 인물입니다.
엘리사벳에게 극도로 오만하다고 판단 받은 다아시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닷없이 청혼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집안을 부잣집 남자들을 꾀는 여자들이라고 여기는 듯한 다아시의 청혼을 받아들일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남들보다 두 배나 빠르게 글을 쓸 줄 아는 다아시가 온종일 정성 들여 쓴 두 장의 편지를 읽으며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닫습니다.
영화 내내 엘리사벳의 눈으로 다아시를 보아서 그가 오만하게 보였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따듯하고 배려심 있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오만하다는 편견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었던 자신이 진짜 오만한 사람임을 깨닫고 겸손해져서 항상 솔직해서 문제였던 다아시를 받아들입니다.
자녀를 교만하게 만들어 하느님과 이웃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 80회’에서 “엄마 꺼져!”라고 외치는 게임에 중독돼 난폭해진 쌍둥이 형제들이 나옵니다. 아이들이 게임에 중독되었다는 뜻은 현실이 행복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아이들을 너무 ‘통제’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매를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여서 그렇다고 하지만 잔소리와 체벌이 난무합니다. 아이를 겸손하게 하는 법은 부모가 알아서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자존감을 잃습니다. 자존감을 잃으면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지 부모 자랑을 하게 되지 않습니다. 부모를 바보로 여깁니다. 부모는 아이를 겸손하게 하려고 최대한 스스로 하게 하고 청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주거나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키우려고 하다 보면 아이는 통제받고 자존감을 잃고 교만해집니다.
어느 만둣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자랑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해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알아서 다해주면 인간이 하느님을 바보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주다 안 해주면 오히려 짜증을 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해주시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당신을 신뢰하여 겸손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조건 해주면 저절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해주거나 혹은 아무것도 안 해주거나 다 문제입니다. 항상 기다리며 청할 때 해주려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당신께 청할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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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2-16 :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지엄한 권능과 나병 환자의 굳은 믿음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 환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겸손의 표시이다. 그는 자기 상처를 내보이며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이 간청 속에 이미 믿음이 충만하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2절) 주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결함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나병 환자 치유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선포의 일부로서, 그분은 신성으로는 능히 병을 다스리고 당신의 인성으로는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뻗으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환자의 간청을 받아 주시고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감추지 않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3절) 또한 당신의 전능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신다. 그러자 곧 나병이 사라지고 환자의 괴로움도 끝났다.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해진 데 대한 예물을 바치라는 분부를 듣는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의 법규에 따라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또한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보여 주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또 쓰라린 수치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해 주시고자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나병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자에게까지 손을 대시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아야 하며, 내 자신이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도 또한 다른 이를 그러한 사랑과 용서로써 대하여야 함을 나병환자의 치유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 많은 경우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치유를 청하며, 용서받은 우리 자신이 이제 우리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언제나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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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루카 5,12-13)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는 중풍(루카 5,18), 여러 가지 신체장애(루카 6,6), 하혈증(루카 8,43), 나병(루카 5,12) 등은 당시에는 불치병이었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병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어떤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예수님의 권능보다는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병고’는 인간을 괴롭히는 많은 고통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총’은 그 고통을 없애 주시는 자비입니다.
여기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라는 말은, 그 병자가 하느님께 경배하듯이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것도 그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주님께서 저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입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처럼 ‘권능’에 대한 믿음만 있고, ‘자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주님께 간청하면서도,주님께서 간청을 들어주실 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반신반의하게 되고, 결국 의심하게 되고, 기다리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만 있고 ‘권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께 간청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이신 분께 간청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자비로운 ‘사람’에게 의지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를 모두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나를 가엾게 여기셔서 나의 청을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나의 고통을 없애 줄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서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청을 무조건 들어 주시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되는 일을 경험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을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일이 있습니다. 거절당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어떤 고질적인 만성 질병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고 전해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병을 고쳐 달라는 바오로 사도의 간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힘을 드러내시려고 일부러 그를 약한 상태로 지내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뜻이 아니라, ‘약한’ 바오로 사도가 ‘강한’ 주님의 힘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곧 그에게 내린 큰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런 몸으로 그렇게 놀라운 선교활동을 한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일입니다.(마태 7,11)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병의 치유보다 주님의 힘을 드러내는 임무를 맡은 것이 그가 받은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예수님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가 청하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 먼저 고쳐 주셨을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예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병자입니다.(요한 5,1-9)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그래서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순전히 그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써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는 율법을 폐지하셨고,인간 세상과 나병 환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깨끗하게 되어라.”는 치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고, 그 말씀은 언제나 항상 즉시 효력이 발생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곧바로 나병이 치유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루카 5,14), ‘몸의 치유’에 관해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병자는 예수님의 지시를 어기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널리 알리고 퍼뜨렸습니다.(마르 1,45) 좋은 의도로 그랬더라도 예수님의 지시를 어긴 것은 잘못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몸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입니다. (물론 몸의 건강은 분명히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될 수는 없고, 인생의 목적이 될 수도 없습니다. ‘건강’은 목적지에 잘 도달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물러가서 기도하신 것은(루카 5,16), 당신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우리가 예수님께 정말로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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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화장실과 세면대에 누수가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물을 내리는 부속이 낡았습니다. 세면대도 손잡이 부분이 낡았습니다. 고치려면 공구가 있어야 하지만, 공구도 없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신문사의 창고를 이용하는 형제님이 부속을 사왔고, 화장실과 세면대의 누수를 말끔하게 고쳐 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형제님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하수구를 시원하게 뚫어 주었습니다. 그때 하수구를 뚫지 않았으면 비가 역류해서 낭패를 볼 뻔 했습니다. l 지붕의 누수가 있었는데 그것도 말끔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산 차고도 튼튼하게 고정해 주었습니다. 손재주가 없기도 하지만 제게는 형제님의 손은 마술사의 손 같이 보였습니다. 막힌 것은 뚫어 주는 손이고, 누수가 있는 것은 막아 주는 손이고, 어둠을 환하게 밝혀 주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마술사의 손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같이 있는 신부님은 손가락 몇 번으로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도 합니다. 여행가서 머물 숙소도 예약합니다. 손놀림 몇 번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수녀님은 예쁜 말씀 카드를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저도 따라하려고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그분들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여행가면 설거지를 하는 겁니다. 다행히 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요즘 캠핑장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손의 소중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병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것은 저의 손입니다. 봉성체를 통해서 주님의 성체를 모셔 드리는 것도 저의 손입니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안수해 주는 것도 저의 손입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성서를 보면 아름다워야 할 손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데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와의 손은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따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카인의 손은 사랑해야 할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손이 범죄의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손은 욕망과 탐욕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손은 주님을 팔아넘기는 표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손은 노예를 팔아넘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식민지를 나누는 서명에 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손은 마음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따라가는 손은 축복과 나눔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욕망과 탐욕의 마음을 따라가는 손은 폭력과 전쟁을 만들어 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서도 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의 눈에 손을 대니 볼 수 있었습니다. 귀가 막힌 사람의 귀에 손을 대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소녀에게도 손을 대시며 ‘탈리타쿰’ 하시니 일어났습니다. 오늘 나병환자에게도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예전에 할머니의 손은 ‘약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배가 아프면 할머니께서 배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배 아픈 것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손에는 손자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해 내미는 아기의 작은 손을 봅니다. 그 아이의 손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잡아주는 엄마의 손을 봅니다. 바티칸에서 보았던 손이 기억납니다. 천지창조를 하시는 하느님의 손과, 인간 아담의 손입니다. 하느님의 손을 통해서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내미는 손이 축복의 손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잡은 손이 사랑의 손이면 좋겠습니다. 손과 손이 만나서 희망의 열매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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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예수님께서 어제 복음에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오늘 한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피부병으로 생긴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일상과 인간관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정신적 고통도 함께 겪어야 하였습니다.(레위 13―14장 참조)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는 메시아시라면,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병의 치유’와 정신적 ‘관계의 회복’이 모두 가능하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를 끄는 예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어 대셨습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병자를 치유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오랫동안 어떠한 접촉도 없이 살았을 그 나병 환자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율법에 따르면 정(淨)한 사람도 이러한 접촉을 통하여 부정(不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율법의 준수보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더 중요합니다. 율법의 본디 정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치유와 더불어 정신의 치유, 곧 관계의 회복을 선사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선포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증언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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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1요한 5,10)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친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4장에서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관한 주제와 결합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 두 번째 주제에 대해 덧붙인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세상을 이기는 신앙’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해주신 증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1요한 5,11)
닷, 홀던, 마샬, 슈트렉커 등은 ‘하느님의 증언’이 성령과 물과 피의 증언들을 합친 것이라고 본다. 요한은 하느님의 삶이요 종말론적 구원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파견되어 나타나셨으며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아들 안에 있다고 선포한다.(5,11-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기에(5,12)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한다. 나병은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하다고 여겼으므로, 나환자들은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결, 불결” 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고,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곳에서는 따로 살아야 했다. 나아가 종교의식이나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환자들은 '산 송장' 취급을 받았다.
율법교사들의 눈에 그들은 나병이라는 형태로 자기 몸에 죄를 짊어진 이들로 보였다. 그들이 만지는 것은 즉시 불결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계의 대상이었고 배척받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한 나환자가 자신의 처참한 처지를 알고 인정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5,12) 겸손하게 예수님께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치유 여부는 온전히 예수께 달려있음을 알고, 나병환자는 선입견이나 자기주장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을 그분의 뜻에 온전히 내맡겼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곧 그에게서 나병이 떠나갔다.(5,13) 나병이 떠나감은 단순한 몸 안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고통과 영혼의 어둠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토록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한 것"(성 프란치스코 유언 3)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결과였다. 한없이 낮추는 자세가 소통과 치유와 해방을 가져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참된 믿음을 지니려면 무엇보다도 신앙의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한다. 참 신앙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자세로" 믿는 분께 모든 것을 기꺼이 맡겨야 한다.
참 신앙에는 사랑의 동기 외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순수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항구해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을 한다면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을 지닌 사람은 겸손하며 차별을 없애려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삶으로써 실천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나환자를 해방시켜주셨다. 그분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거나, 율법을 어겼다고 적대자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분께서 접촉이 금지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것은 승리자의 위엄 있는 동작이다.
그분의 이런 행동으로 “버림받았던” 한 병자가 다시 생명을 회복하고 공동체에 되돌아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모두가 멀리하고 싫어하는 '좋지 않음'의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시는' 그분은 몸소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가엾게 여기시는 연민의 정을 드러내 보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탁월한 치유자로 여기고 필요할 때만 당신께 낯을 돌리는 것을 원치 않고 당신 안에 머물길 바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1요한 5,12)
우리 모두 사랑으로 오신 그분을 믿어 영원한 생명의 길, 해방의 길로 나아가자! 영원히 살기 위해 생명이신 그분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개방하고 내맡기도록 하자!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의 나병이 나에게서 떠나가게 해주시라고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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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창환 다니엘 신부님]
<나병환자 치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을 치유해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병은 의학용어로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치유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이병을 하늘에서 내린 벌이라고 하여 ‘천형병(天刑病)’ 이라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멀리하고 그들을 격리시켰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나병환자를 죄악시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고, 사회적인 권리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즉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그를 만지는 사람도 불결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외딴 곳,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죽음과 함께하는 사람으로써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평생을 죄인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치유 해주실 것을 믿고 간절히 바라면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직접 손을 그 나병환자에게 대시며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나병이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나병환자 근처에 가는 일을 불결하게 여겼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들과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이 불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그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치유를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를 직접 만지시며 치유를 해 주셨겠습니까? 예수님이라면 손을 대시지 않으시고 말씀만으로도 그 병을 치유해 주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시며, 즉 나병환자를 만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이 사회적 이목 때문에 꺼려하고, 회피하는 일들을 그분의 참된 사랑을 본받아 실천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소외된 사람들을 치유하고, 생명을 주시며, 인권을 세워주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도 참된 신앙인으로써 그분의 실천적인 사랑을 본받아 남들이 꺼려하고 회피하는 일도 스스럼없이 실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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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정용 크리스토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옵니다. 나병은 병의 증후가 흉측하고 또 잘 낫기도 않기에,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 곧 천형(天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레위기 13장에는 악성 피부병에 대해 말하는데, 나병을 포함한 악성 피부병을 가진 환자는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치야 했고, 병이 나을 때까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고 나옵니다.
율법이 이렇게 한 것은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나병환자에게 접촉하여 똑같이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병환자가 사람들 사는 마을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여겼던 그에게 더한 벌을 주고, 또 자신이 그에게 접촉하여 부정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 돌팔매질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도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고을에 계시는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에 맞을 각오, 곧 죽을 각오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에 맞을 각오를 하고 당신께 다가온 그를 보시고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십니다.
율법대로 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순간 예수님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을 댄 것이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병환자를 낫게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실질적으로 병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영혼의 병이라 할 수 있는 죄를 지었다고 그것이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넘어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주셨듯이,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고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해야 합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다가가자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낫게 해 주셨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면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용서해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좌절하여 예수님께 다가가지 않는 것, 그것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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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
<믿음으로!>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공생활은 아주 구체적으로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기쁨)을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이 오늘 복음인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루카5,12-16)입니다.
나병인 한센병이라는 것이 지금은 전염병도 아니고 사회적 인식도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전염병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회적 인식도 매우 안 좋아서 격리된 특정 지역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병은 나병만이 아니라,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소외라는 또 하나의 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나병을 치유해 주시고, 소외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어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그에게 주어진 큰 기적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회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너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향해 있는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말씀이며, 동시에 우리도 '몸과 마음의 나병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나의 관심과 사랑을 전해 주어서,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5,5)
지금 우리 주위에는 몸이 문드러진 나병 환자들도 있지만, 마음이 문드러진 마음의 나병 환자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그들에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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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루카 5,12-16 (나병환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슬퍼하는 이에게는 기쁨이요
슬프게 하는 이에게는 슬픔이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에 주린 이에게는 사랑이요
미움에 부른 이에게는 미움이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짓눌린 이에게는 해방이요
짓누르는 이에게는 속박이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빼앗긴 이에게는 희망이요
빼앗은 이에게는 절망이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버려진 이에게는 품음이요
버리는 이에게는 내침이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끊어진 이에게는 이음이요
끊는 이에게는 끊음이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쓰러진 이에게는 디딤돌이요
쓰러뜨린 이에게는 걸림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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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이 많을까요? 아니면 가능한 일이 많을까요? 불가능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 더 많고, 가능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일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뇌는 자동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를, 그 반대면 가능한 이유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요? 불가능이 많은 삶일까요? 아니면 가능성이 더 많은 삶일까요? 아마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가능성이 더 많은 삶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늘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앞서 말씀드렸던 뇌의 작용을 이용해서 “가능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식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곧바로 가능의 답이 스르륵 나올 것입니다.
가능의 이유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능한 일들이 너무나 많음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당시에 도저히 구원이 없다고 했던 이들과도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받는데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한 나병환자가 다가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컸고 또 고치기가 어려워서 예수님 시대에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전염되지 않도록 따로 그들을 수용해서 간호하는 것도 아니었지요.
율법은 이들을 향해 두 가지 법적 규제를 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런 사람이 사람들 있는 곳에 갈 때 스스로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음에 우리는 주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간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가 아니었을까요? 이 용기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그의 믿음을 보시고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의 나병은 사라졌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가능’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며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며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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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복수>
어떤 형제님이 자신의 고민을 말합니다. 회사 동료로 인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잠도 오지 않고 그래서 매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으로 인해 분노와 후회로 망가지고 있다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상처를 주고 있는 사람이 형제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잘 안 되기를 바라니까 그런 행동을 하고 있겠지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작전은 100% 성공이군요. 형제님은 지금 점점 망가지며 잘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그래서 미운 그 사람의 작전대로 끌려가겠습니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복수는 그 사람의 바람과 정반대인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복수가 어디에 있을까요? 굳이 그 사람을 미워하며 망가지지 마십시오. 사랑하면서, 그 사람의 바람과 정반대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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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딴곳으로 물러가>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6) 기도를 통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킹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바램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기도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을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 하시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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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믿음>
-믿음의 치유와 구원-
이번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주간 낮기도후 계속 반복되는 후렴과 계응송이 은혜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과거 모든 세대에 감추어진 이 신비는 오늘 드러났도다.”
“그는 이 땅에 나타나셨고, 우리와 함께 지내셨도다.”
한주간 똑같이 반복되는 그대로 성탄시기 복음의 요약같습니다. 역시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구원의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 성무일도시 시편 125장 1절 말씀도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이 시온 산 같으니 흔들림이 없어라. 항상 꿋꿋하여라.”
마침 이 말씀과 연상되어 언뜻 스치듯 들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 그분은 태산같은 분입니다. 태산은 흔들릴지라도 그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대로 태산같은 믿음의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결국은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을 통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의 치유이야기가 이를 입증합니다. 마치 한폭의 살아있는 그림같은 장면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니 그대로 간절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에 대한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치유의 구원에 앞서 반드시 우리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우리의 믿음에 따른 주님의 응답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합니다. 주님의 삼박자 치유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1.측은히 여기는 마음, 2.사랑의 스킨쉽, 그리고 결정적 3.권능의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후속 조치가 참 완벽합니다.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기존의 사제와 율법을 존중하시며 율법관례에 따를 것을 명령하시니 이 또한 예수님의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바 갖가지 형태로 영육靈肉으로 병든 우리들 모습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분명 나병환자는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도 치유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요한 1서가 이 진리를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병환자는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온전한 치유에 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 하여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실 때 영원한 생명의 참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에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모시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흡사 오늘 복음 장면은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의 만남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나병환자의 작은 믿음과 예수님의 큰 믿음의 만남이요 믿음과 믿음의 만남을 통한 구원의 치유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의 묘사가 참 귀한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역시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점점 퍼지고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오자 주님은 즉시 이들을 떠납니다. 군중들의 요구는 끝이 없고 떠나야 할 때 즉시 떠나 기도하는 주님에게서 분별의 지혜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외딴곳에서의 기도가 예수님의 날마다의 삶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음을 봅니다. 기도와 일이, 관상과 활동이 균형잡힌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 삶임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비결은 바로 이런 기도를 통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믿음과 사랑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육의 상처와 병을 치유해주시고 필요한 믿음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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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rBl9vAa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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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곧 나병이 가셨다."(루카 5, 13)
가혹과
가난 사이에
깨끗한 치유가
있다.
치유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이다.
가혹한 인생을
치유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도
최선을
다하신다.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믿음이다.
다시 태어나는
치유의
시간이다.
떨어져나간
자리에
기쁨의 새살이
돋아난다.
주님께서는
저마다에게
필요한 치유를
주신다.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기적과 치유의
시간이었다.
치유와 기적은
이기적이지 않다.
우리모두를
살게 한다.
간절과
절박 사이에
치유가 있다.
치유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치유한다.
건강한 삶을
바라시는
주님이시다.
버려야 할 것과
다시 돋아나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치유이다.
치유를
치유하시는
믿음의
주님이시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무감각한
인생의
치유이다.
삶의 치유를
청하는
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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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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