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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로마인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SVLLA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에 라틴어는 세련미의 극치에 달하였다. 이후 성서 라틴어 번역의 보급 및 중세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이 널리 퍼지는 가운데 라틴어도 변천하였다. 오랫동안 국제공용어의 지위를 점해온 라틴어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1. 두개의 라틴어
라틴어는 어려운 언어이다. 이는 주요 문법사항을 마스터하고 나서 실제로 텍스트를 읽어 보려 할 때에 절실히 알 수 있다.
The Duenos inscription, from the 6th century BC, is one of the earliest known Old Latin texts, probably comes from the the tribe of Latins.
많은 이들이 프랑스어나 독일어 등 제2 외국어를 습득한 후에 라틴어를 학습하게 될 것이다. 격변화라면 이미 독일어에서 고생을 했을 것이다. 동사변화의 수로 말하자면 프랑스어도 결코 지지 않는다. 라틴어 문법이라고 해서 이들 언어에 비해 유별나게 까다로울 리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강독을 시작하고 보면 문법사항을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 보아도 해결이 안 되는 곤혹스러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수고스럽지만 외워두자는 식으로 해서는 한도 끝도 없는, 또는 우리의 근면한 학습노력을 비웃는 듯한 악의마저 품고 있는 곤혹스러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강독의 시작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이다. 혹은 키케로의 ‘친애하는 자에게 보내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위하여 역사를 쉽게 이야기해 주는 역사이야기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통신문을 독해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일은 덧없는 기쁨으로, 드디어 다음 단계 - 즉, 키케로의 연설과 철학적 논고,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여기다 타키투스의 갈고 닦은 문체에 접하게 되었을 때 라틴어 본래의 어려움이 선명히 드러나게 되리라. 위의 글들은 모두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정확히 로마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에 타고난 문장력에 최고의 심혈을 기울여 이룩된 문학작품들인 것이다.
Agrippina and Nero
예를 들어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 아그리피나가 남편을 독살하고 전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이 네로를 황제에 즉위시키는 대목인데 우선 ‘선제(先帝)의 유언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말한 후 ne antepositus fillio privignus injuria et invidia animos vulgi turbaret 라는 이유가 나온다. 직역(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직역을 重譯하면’ : 역자)하면 ‘아들 앞에 있는 후계자(後繼子)가 부정과 반감으로 민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이 되는데, 이 하나의 문장에서 황제의 친아들(브리타니쿠스 : 역자)을 제치고 네로가 즉위하고 그 부정함으로 반감이 생겨 그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소요가 발생하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읽어내야 한다.
또한 키케로의 논고 가운데 한 문장. Iidem abeunt qui venerant 라는 문장은 직역하면 (물론 ‘직역을 重譯하면’ : 역자) ‘왔을 때와 똑같은 사람이 떠난다’가 되는데 이는 실은 변론의 덧없는 효과에 대한 서술로서 전혀 설득됨 없이 변론을 들으러 왔을 때와 똑같은 상태인 채로 돌아간다고 하는 사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표현은 과도할 정도로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과도하다 할 만큼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독하는 일은 프랑스어 기초문법을 막 끝낸 학생에게 말라르메 상징시의 해독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라틴어 학습자에게는 문법학습을 마치고 강독단계로 넘어감과 동시에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라는 세계사 안에서 가장 번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제국의 최고 전성기에 로마에 모여드는 부(富)를 독점한 한주먹거리 소수의 부유층 사이에서 소비된, 거르고 걸러서 나온 문장의 달인들의 세련이 극에 달한 텍스트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Marcus Tullius Cicero - Political Science Series
이 라틴어의 문법을 고전라틴어라고 부르는데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한정되어 있었다. 키케로는 ‘올바른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부인을 대여섯명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퀸틸리아누스는 ‘보통 로마사람들은 문법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는 한마디조차 할 수 없다’라는 의미의 문장을 적고 있다. 두 경우 모두 고전 라틴어에 대한 말이다. 이 언어는 당시의 로마인들에게조차도 고생스럽게 습득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키케로는 도읍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원(田園)에서 성장하였지만 로마로 상경하여 상류계급과의 교류가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의 순화되지 못한 어법을 지적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한 배타적인 계급이 스스로를 시정의 백성들과 구분하는 표지(標識)로서의 언어이며 따라서 이 고전 라틴어가 학습자에게 서두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악의조차 숨기고 있는 곤혹스러움’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그렇다면 일반 로마인들은 어떠한 라틴어를 쓰고 있었냐면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극단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직 로마가 조야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기원전 2세기의 엔니우스의 작품이라든지 폼페이 발굴로 세상빛을 본 벽위에 씌어진 낙서 등. 여기에 순문학작품 이외의 텍스트군에서 볼 수 있는 구어적 요소가 첨가된다. 이들 자료로부터 미루어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극히 평범한, 즉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뜻을 가지며 시간축에 따라 무리없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전달을 주목적으로 한 언어이다. 이 구어 레벨의 라틴어가 병사, 상인, 그리고 식민자와 그 가족들, 나아가서는 행정관들에 의하여 각지로 옮겨지고 로마제국(정확히는 서로마제국 : 역자)이 붕괴한 이후 각 지역별로 발생한 음운변화를 거치고 그것이 문법구조의 변화를 야기하여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등 근대어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로망스 어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는다. 본고(本稿)에서 추적해 가고자 하는 바는 고전 라틴어의 뒤를 계승하게 되는 문어 라틴어의 궤적이다.
Pompeian graffiti, including two quotations from the poets (C. I. L. iv 1891-93-94), more than 1/3 (from J.E. Sandys, A Companion to Latin Stud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 pp. 738f.).
2. 기독교와 라틴어
고전 라틴어란 이를테면 로마제국 상류계급에서 성장한 인공적인 언어이므로 제국의 쇠망과 함께 시들어 버렸다 하더라도 이상할 일은 없다. 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문장어의 미학이라고 할까 또는 별종의 규범이 등장하는 것은 4-5세기 즉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에 따라 성경을 필두로 기독교의 텍스트가 다량 제국내로 유입되는 시기이다.
기독교는 구전에 의존하는 타종교와 달리 씌어진 텍스트를 중시하는 종교이다. 즉 성경의 문장이 이후 라틴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성서는 라틴어로 쓰여진 것이 아니었고, 헤브라이어와 고전 그리스어로부터의 번역작업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St Jerome in his Study, 1480, Fresco, 184 x 119 cm, Ognissanti, Florence
여기서 기독교가 민족종교로부터 탈피한 최초의 세계종교였다는 사정을 기억해 두자. 기독교는 성스러운 교전(敎典)의 번역이라는 미지의 작업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해결책을 강구하여야만 했다. 이 때 취해진 방책이라는 것이 직역이었다. 즉 헤브라이어와 고전 그리스어의 어법에 충실하게, 텍스트의 성스러움을 훼손하지 않도록 낱말 하나 하나를 라틴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는 virgam in qua percussisti flumen (그대가 그것으로 강물을 두드린 지팡이를) 이라는 표현조차 나타난다. ‘그것으로’ 라는 부분에 전치사 in을 쓰고 있는데, 이는 헤브라이어의 어법을 그대로 채용한 것으로서 이 영향으로 초기 교부들의 저작에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 in이 자주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문장 라틴어를 근본부터 뒤흔든 것은 어법 이상으로 구문의 문제였다. 특히 라틴어의 기준에서 이질적인 언어였던 헤브라이어를 어떻게 라틴어로 번역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기존에 유포되어 있던 각종 라틴어 번역판을 편집하고 스스로도 새로이 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번역하여 이들을 한데 합쳐 ‘불가타 성서’를 완성한 히에로니무스의 방침은 직역이었다. 예를들어 헤브라이어에서는 등위접속사 waw를 써서 다양한 상황보어절(狀況補語節)을 만드는데 이것이 그대로 라틴어의 등위접속사 et로 번역되어 ‘창세기’에서는 sol egressus est super terram et Lot ingressus est Segor 가 된다. 이는 ‘태양이 대지위에 떴다. 그리고 로트는 세고르에 도착하였다.’라는 병렬문이 아니라 ‘로트가 세고르에 도착하였을 때, 태양은 대지 위에 떴다.’라는 복문인 것이다.
Unknown Flemish painter, St. Hieronymus in cell, XVI th century, wood, oil, 32x25,1 cm.
이런 정도라면 오해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의 ‘사사기’의 문장은 어떨까. ego non gentes, quas diminisit Iosue et mortuus est 이 문장을 처음부터 읽어가며 ‘나는 내쫒지 않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남겨 놓은 백성을’이라는 부분까지는 이해 가능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et mortuus est’에서 꽉 막히고 말 것이다. 의미는 좀 모호해 지지만 여호수아의 다음에서 문장을 끊고 ‘그리고 그는 죽었다’라는 문장을 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et는 시간의 상황보어절 ‘그가 죽었을 때’를 끌고 있는 것이며 이 문장은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놓은 백성을 나는 내쫒지 않는다’가 된다.
성서의 번역에 몰두하고 있자니 하루는 이러한 꿈도 꾸었다고 히에로니무스는 편지 속에 적고 있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하느님 앞에 불려나가는 꿈이다. 자신은 충실한 기독교도였다고 변론하자 그에게 하느님은 ‘이 거짓말쟁이 같으니. 너는 키케로파지 기독교도가 아니다. 네 마음은 네 놈이 보물로 여기는 키케로 속에 있느니라’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 꿈 속에는 고전 라틴어에 능통했던 히에로니무스가 헤브라이어 원전을 앞에 두고 느낀 당혹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직역함으로써 규범에 어긋난 라틴어를 적을 수 밖에 없는 고뇌가 반영되어 있다.
Büste des Isokrates, Rom, Villa Albani
키케로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그가 고전 라틴어의 한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페리오두스(periodūs)문의 다용을 가리키는 데, 그리스어로 ‘우회로’를 의미하는 이 말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단문이 아닌 가정절, 양보절, 원인절, 결과절 등을 나열하며 한걸음 한걸음씩 사고를 진전시켜 우여곡절 끝에 겨우 겨우 결론에 다다르는 장대한 복문구성의 문장을 말한다. 그리스의 이소크라테스 이래로 연설의 미학과 수사학 교양의 근간을 이루어 온 구문이다. 라틴어 산문에서는 키케로가 일인자로서 아마도 고전 라틴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이라면 이 페리오두스의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헤브라이어 성서는 대부분이 단문 내지는 waw에 의한 병렬문으로 되어 있었다. 이 ‘유치한’ 원전을 넘쳐날 정도의 복문구성력에 함구령을 내리고 그대로 라틴어로 직역하는 일. 이것이 히에로니무스에게 주어진 괴로운 사명이었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단문과 병렬문이 계속된다. 주어대명사와 목적어 또한 고지식할 정도로 되풀이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성서의 문장에서 장엄한 미를 보기 위해서는 이후 고전 라틴어의 훈련을 받지 말고 갑자기 성서를 읽는 젊은이들이 수세대에 걸쳐서 필요할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극히 간단히 이루어졌다. 우선 야만족의 침입 이후 각지의 라틴어 학교들은 차례차례 소멸했으며 소수 남아 있는 라틴어 교육시설은 교회였으나 이곳에서는 성서와 전례서의 라틴어가 교육의 주안이었다.
Stuttgarter Vulgata - Lyon 1519
이 새로운 라틴어와 함께 유럽의 중세가 시작된다. 단,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현상이 강조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일종의 고전 라틴어 붐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붐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는 제한적이었다. 또한 예를 들어 아르퀴누스 등의 문장을 보자. 그들 교양의 기반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문헌들이며 드물게 키케로의 것을 생각나게 하는 페리오두스문이 보인다고는 하나, 또한 베르길리우스 등에서 가져온 재치있는 표현이 간간이 섞여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식에 지나지 않으며 기조는 엄연히 ‘불가타 성서’ 이래로 이어져 온 단조롭기 그지없는 구문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어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다.
3. 스콜라학의 라틴어
이 기독교 라틴어 외에 십이세기 후반이후 새로운 규범에 의한 문장 라틴어가 나타난다. 스콜라학의 라틴어가 그것이다.
오해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여기서 양해를 구해두지만 스콜라학이란 학문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논술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12세기 들어 아랍어를 경유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라틴어 번역이 나도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입역자의 한사람은 아벨라르로서 당시는 ‘오르가논’을 가르치는 논리학 교사였으나 삼단논법을 구사하여 기독교 교의의 세계로 뛰어든 이이다.
Abelard, with Heloise, miniature portrait by Jean de Meun, 14th century; in the Musee Conde, Chantilly, Fr.
그는 우선 문제가 되는 교의를 명제로 정립한다. 이어서 이 명제가 올바르다고 하는 증명과 올바르지 않다고 하는 증명을 각각 몇가지씩 나열하는데 그 각각의 증명들은 삼단논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단논법의 대명제와 소명제를 구성하는 것은 모두 성서와 교부의 저작으로부터의 인용이다. 이 위에 정(正)이나 부(否) 어느 한쪽의 결과를 서술한 뒤 마지막으로 결론에 반하는 쪽의 증명을 모두 역시 삼단논법으로 반박하여 교의가 올바르다는 사실, 또는 그르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벨라르의 성공은 많은 학생들을 끌어모았고 이는 대학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13세기초에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부터 명제들을 정립하고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코퍼스(corpus)로 하는 삼단논법에 의하여 그 명제의 정부(正否)를 논하는 학예학부, 아벨라르처럼 코퍼스를 성서와 교부들의 저작에서 찾는 신학부, 그리고 코퍼스를 로마법과 교회법에서 찾는 법학부, 그리고 갈레노스 등의 의학서에 대하여 논증법을 시도하는 의학부가 생겨났다.
이 스콜라학의 라틴어를 가리키는데 실제 예문을 제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는 14세기 파리대학 학예학부의 대표적인 교사 장 뷔리댕(가나표기에서 유추하여 적당히 적은 인명이므로 주의 요 : 역자)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강의의 서두 부분이다. 그는 우선 ‘형이상학은 최상의 학문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 후, 이에 대하여 부(否)의 입장에 선 증명을 더한다.
Aristoteles, Wien, Kunsthistorisches Museum
Arguo primo quod non. Quare scientiae legales sive politicae videntur esse meliores et nobiliores. Quoniam ipsae sunt ad ordinandum in bono omnem populi comunitatem, unde dicitur 5 Ethic. quod leges jubent vivere secundum omnes virtutes et prohibent omnes malitias. Sed metaphisica non est sic ordinanta ad bonum comunitatis, immo solum ad speculationem propriam. Modo dicitur primo Ethic. quod bonum quanto est melius et divinius. Ergo scientia legalis sive politica est melior et dignior et honorabilior quam mataphysica.
(나는 우선 부(否)라 답한다. 왜냐하면 법 또는 정치의 지식이 훨씬 좋고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식들은 민중의 모든 집단을 선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제오권에서 법은 모든 덕에 따라 살 것을 명함과 동시에 모든 악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이렇게 집단의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개인의 명상을 위하여 만들어 진다. 한편 ‘윤리학’ 제일권에서는 선은 더욱 좋고 더욱 존엄으로 가득 차 있으면 있을수록 집단적인 것이 된다고 쓰여 있다. 그러므로 법 또는 정치의 지식은 형이상학보다 더욱 좋고 더욱 존엄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문장은 접속사로 이어져 있다. 순서대로 보면 ‘따라서’(quoniam) 이후에 제일증명의 대전제가 시작하고 ‘한편’(modo) 이후에서 소전제로 옮겨간 후 ‘그러므로’(ergo) 이후에서 결론이 도출된다. 게다가 어휘가 앞에서 서술한 기독교의 라틴어보다도 더 빈약해진 것은 사용되고 있는 동사의 거의 모두가 ‘~이다’(esse)인 것을 보아도 명백하다. 여기서 라틴어가 수행하고 있는 것은 어떤 주어에 esse를 사용하여 술어와 결부시키는 일이며, 접속사로 문장과 문장의 논리적 연결을 확인하는 일이자, 마지막에 소기의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일이다. 여기에는 명확하게 드러난 사유가 있을 뿐이며 논리의 관계를 현혹시키는 색채감 풍부한 명사나 정감과 운동감 넘치는 형용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수학 증명문제 해답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그르지 않다.
Petrus Lombardus
신학부의 스콜라학 또한 사정은 같다. 15세기~ 16세기에 걸친 소르본느 대학 학생기숙사의 도서대여장부가 남아 있으며 책이 귀중품이라 개인장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신학부 학생들의 독서 모습을 거의 남김없이 전해주고 있다.이에 따르면 십년에 걸친 재학기간중에 읽는 서적이란 우선 성서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그리고 이들에 대한 주석서 뿐이었으며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이 서적들에서 나온 어휘를 논리적인 맥락을 나타내는 접속사 사이에 끼원넣은 라틴어를 구사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스콜라학의 라틴어에도 이점이 하나 있었다. 이 언어는 대략 잘하고 못하고라는 평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단어와 접속사만 내것으로 만들면 다소 논리적 두뇌의 좋고나쁨이라는 문제가 있다고는 하나 누구든지 적절히 활용가능하였던 것이다. 중세의 파리야말로 포르투갈에서 헝가리까지, 또는 리투아니아의 리가같은 변경지역까지 포함한 전유럽으로부터 학생들이 모여든 대학도시였다. 그들이 사용한 스콜라학의 라틴어는 그 누구도 모어로 하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언어였으므로 그들 사이의 경쟁은 지극히 평등하였다. 소르본느의 신학부 교수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The language of Rome has had a profound impact on later cultures, as demonstrated by this Latin Bible from 1407
4. 라틴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언어
이후 르네상스를 거치며 고전 라틴어가 부활하여 키케로와 같은 라틴어로 글을 쓰는 것이 중등교육의 목적이 되었다. 한정된 계층의 일이라고는 하나 17~ 18세기 유럽에서 공전의 고전 라틴어 붐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유감이지만 다룰 여유는 없다. 그 누구의 모어도 아니라고는 하나 라틴어는 살이있고 싶어한다. 아니 그 누구의 모어이지도 않기 때문에 도리어 그 중립적인 가치가 중용되어 때때로 국제조약의 정식문서에 채용되었다. 나폴레옹이 민법전을 공포할 때에도 독일의 여러나라들을 대상으로 한 판에서는 프랑스어의 명확한 이해를 위하여 라틴어역이 첨부되었다.
이후로도 계속 살아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라틴어 학자 키쉴라는 임종 때 프랑스어를 잊어버려 그의 수제자가 불려와 그와 가족들 간의 의사소통을 도왔다고 한다. 현대에도 프랑스에서는 리세(lycée)에서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며, ‘곰돌이 푸’, ‘어린왕자’의 라틴어 번역도 있다.
생각건대 르네상스가 고전라틴어 부흥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현재 공부하는 것은 좀 더 다루기 쉬운 기독교 라틴어와 스콜라학 라틴어의 연장선상에 있는 언어였을 것이고 그랬다면 라틴어는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콧대 높은 네이티브 스피커가 없는 유일의 언어로서 국제적인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을까.
월간 언어 2002년 9월호 특집, 「라틴어의 세계」, 츠키무라 다츠오(月村辰雄)
번역: http://www.mediamob.co.kr/cingcong/blog.aspx?id=7817#
그림: 로마인 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