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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철학의 인간학적 이해1)
- 퇴계 리기론 중에 리의 능동성 문제를 중심으로(上) -
이 강 대(경산대 동양철학과)
[한글 요약]
본 논문은 조선 중기에 성리학을 심화시킨 퇴계의 철학을 리의 능동성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학적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이것은 퇴계의 리기론을 그 실천적 전개와 관련하여 이해한 것을 의미한다.
퇴계의 철학사상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은 정지운의 천명도와 도설을 수정하면서부터인데, 이러한 수정을 통하여 퇴계는 자신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주자의 초월적인 리 중심의 사유틀로부터 인간의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리를 위주로 하는 철학적 단초를 마련하여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그의 철학적 사유는 기대승과 8년동안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변과정을 통하여 더욱 발전되어 나갔다.
퇴계는 리가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원리로서 사회적 관계에서 물아(物我)에 동시에 내재된 것으로 이해하여, 자아를 버리고 사물에 있어서의 리를 쫓는다든가 사물의 리를 자아 속으로 끌어들이는 양극단을 피한다. 그는 '리도설'에 이르기 전까지는 사물의 리를 법칙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심리(心理)와 물리(物理)를 구분하면, 특히 물리를 기에 의해 제약된 분수리(分殊)의 특성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였지만, '리도설'에서는 물아(物我)의 리가 하나로 융합됨으로써 기의 제약을 벗어나 윤리적 최고 원리로서 절대성을 확보한다. 이 때 리는 태극의 능동성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말해, 퇴계의 리는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이념으로 현실세계에서 구현해야할 이상적 차원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말한 리발과 리동은 이상과 현실을 소통시킬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주제분야: 동양철학, 한국철학, 영남유학
주제어: 퇴계, 리발, 리동, 리자도, 고봉, 체용
1. 들어가는 말
내가 스승으로 섬기는 이는 주자(朱子)라고 한 퇴계(退溪, 李滉, 1501∼1570)의 말과2) 학봉(鶴峯, 金誠一, 1538-1593)이 퇴계를 평가한 "선생은 책에 있어 읽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히 성리학에 마음을 써서 장(章)마다 충분히 익히고 구(句)마다 깊이 이해하여, 강론할 때에는 친절하고 적당하여, 마치 자신의 말을 외는 듯 하였다. 만년에는 오로지 주자서(朱子書)에 뜻하였으니, 평생의 득력처(得力處)는 대개 이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3)고 한 말에서, 퇴계가 주자의 학문적 입장을 창구로 하여 유학적 이상과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을 해명하기 위한 퇴계철학의 기본적인 이론들은 리(理)와 기(氣)로 이루어졌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윤리.도덕적 인간관을 제시하는 주자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주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리와 기로 이루어져 있다"4)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천지의 기를 얻어 체가 되고, 천지의 리를 얻어 성이 된다고 한다"5)고 하여, 리를 만물의 본성을 결정하는 원인으로, 기를 만물의 형체를 부여하는 원인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천하에 리 없는 기가 없고, 기 없는 리가 없다"6)라고 하여 그 어느 하나도 결핍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퇴계철학이 주자학설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은 퇴계의 학설이 주자와 완전히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퇴계가 주자학을 어떻게 이해하여 수용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데서 그의 철학적 특징과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계철학의 중요한 특징은 주자의 리기이원적인 체계를 수용하면서 리를 강조하는 가치지향성을 강하게 나타낸 것, 즉 리를 기보다 더 높이는 리우위관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가 "사람의 일신은 리와 기를 겸비하는데 리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7)라고 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데, 이러한 퇴계의 주리적 사고경향은 리가 능동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리발설(理發說), 리동설(理動說),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주장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본 글의 목적은 형이상자인 리가 능동성을 가질 수 있는고 하는 퇴계의 그러한 주장이 어떠한 배경 아래에서 나왔는가를 살펴 본 후, 그 이론의 정합성 여부를 밝혀보고자 하는데 있다.
2. 리발설
퇴계는 리를 사물(死物)이 아닌 활물(活物)로 보아 리발(理發)을 주장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퇴계의 리발설이 나오게 된 발단은 1553년에 퇴계가 추만(秋巒, 鄭之雲, 1509∼1561)으로부터 그의 『천명도』(天命圖)에 관한 수정의 부탁을 받고 그곳에 나오는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표현을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8)라고 고친 것에 있다. 이렇게 수정된 내용이 사우(士友)들간에 문제가 되자 퇴계는 그것을 다시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리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현은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9)라고 고친 후, 그 타당성 여부를 고봉(高峯, 奇大升, 1527-1572)에게 묻자 그가 이의를 제기하였다.
고봉의 반론의 요점은 리와 기의 구분은 가능하지만 실제 사물에 있어 서로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은 일원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10) 사단과 칠정은 인간의 정(情)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단은 전체 정 중에서 선한 것[즉 發하여 理에 中節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 고봉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고봉의 의견을 듣고서도 퇴계는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갈라서 말하는 이상 사단과 칠정의 내력을 달리 볼 수 있게되므로 사단과 칠정을 이원적으로 보는 것에 잘못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이 모두 하나의 정임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바가 다르다고 하면서 "정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성에 본연과 기질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11)라고 말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기를 겸한 것이 사실이지만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로 보아 이것을 갈라놓지 않고 단지 일원론적으로 보게 되면 '겸리기유선악'(兼理氣有善惡)한 결과를 낳게 되므로 "인욕(人欲)이 바로 천리(天理)이다"는 등식이 성립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고봉에게 칠정이 만일 참으로 기만을 가리킴이 아니고 리를 겸하여 가리켰다면 주자는 어찌 리지발(理之發)이란 문구와 대치시켜 거듭 중첩하여 말하였겠느냐고 반문하였고, 고봉과 서신교환 끝에 퇴계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칠정을 사단에 대립시켜 각각 그 구분에 따라 말하자면, 칠정의 기에 대한 관계는 사단의 리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 발현함에 각각 혈맥이 있고 그 이름에 모두 가리키는 바가 있다 따라서 그 주된 바에 따라 그것들을 분속시킬 수 있었을 따름이다. 나 역시 칠정이 리에 간섭받지 않고 바깥 사물이 우연히 서로 진저(溱著)해서 감동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한 사단이 사물에 감(感)해서 움직이는 것은 확실히 칠정과 다르지 않다. 다만 사단은 리가 발하고 기가 그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12)
대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 있음은 리를 주로 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니 리가 기 바깥에 있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사단이 이것이다. 기가 발해서 리가 타는 것이 있음은 기를 주로 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니 기가 바깥에 있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칠정이 이것이다.13)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에 각각 '氣隨之'와 '理乘之'를 덧붙여 수정함으로써 퇴계는 사단과 칠정의 차이는 발(發)해서 중절했느냐 하지 못 했느냐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고봉의 '겸리기혼륜설'(兼理氣渾淪說)을 승인하면서도 리발(理發)과 기발(氣發)을 각각 전지(專指)하는 것으로 보아 리기의 내력이 다르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려 하였다. 다시 말해, 사람의 한 몸은 리와 기가 합하여 이루어진 까닭으로 이 둘은 호발(互發)과 상수(相須)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호발할 때에 각각 주되는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상수할 때에 서로 그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기 그 소종래(所從來)에 따라서 각각 그 소주(所主)와 소주이언(所主而言)이 다르다는 결론이다. 인성론에서 쓰이는 리는 인간의 이성을, 기는 인간의 감성을 나타낸다고 본다면 퇴계가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하면서 리발을 주장한 것은 인간 이성의 힘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14)
"대개 리가 발하여 사단이 되나 발을 돕는 자는 기일뿐이다"15)고 하고, 또 "사단도 기가 없지 아니하나 다만 리의 발이라 하고, 칠정에 리가 없지 아니하나 다만 기의 발이라 한다"16)고 하였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기를 겸한 것이 사실이지만 본래 스스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차이가 있다.17) 그래서 사단은 리가 발하고 기가 그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퇴계의 사단과 칠정의 호발설(互發說)이라 한다. 퇴계가 리기는 "그것이 발함에 또 상수하며, 호발한 즉 각각 주(主)한 바를 알 수 있고, 상수인 즉 심(心)가운데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다"18)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주리냐 주기냐에 따라서 말한 것일 뿐 리만 오로지 발한다든지 기만 오로지 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도심(道心)을 사단으로, 인심(人心)을 칠정으로 보아 "인심은 칠정이 그것이고, 사단은 도심이 그것이다. (두 가지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19)라고 말한 곳에 잘 나타나 있다.
3. 리동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에 각각 분속시키면서 그것들을 구분한 것은 관념적으로 가능할 뿐이다.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는 근거로 제시한 리와 기에 대해 그 자신도 "리와 기는 본래 상수(相須)하여 체(體)가 되고 상대(相待)하여 용(用)이 되며 진실로 아직까지 리없는 기없고 기없는 이가 없다"20)고 하여 실제 사물에서 리와 기는 분리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논하면서 주장한 호발설은 리의 자발을 전제로 한 것이며, 이것은 리동설과 같은 맥락의 견해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리의 자발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리의 자발성에 대한 인정은 결국 능동적 근원자로서의 리를 상정했을 뿐만 아니라 리동(理動)을 주장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퇴계는 "(급기야 기가 움직여 악으로 흘러 들어감에 있어서) 리가 어찌 한 순간인들 고요히 정지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리가 가리우기 때문에 리가 밝게 드러나지 못할 따름이다"21)고 하면서 리의 작용이 부단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리동설은 퇴계에 있어서 리는 운동의 조리나 형식 만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성을 가진 것임을 명시한 리의 실체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리의 실체화는 더 나아가 리를 절대시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리는 원래 극존무대하여 물을 명하되 물에 명을 받지 않는 것으로 기가 이길 수 없다.22)
여기에서 정의도 없고 조작도 없는 것은 이 리의 본연의 체이고, 깃들인 곳에 따라 발현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은 이 리의 지극히 신묘한 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는 단지 본체의 무위한 측면만 보고 오묘한 작용이 드러나게 행해질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해서 거의 리를 죽은 물건으로 인식하듯이 했으니, 도(道)와의 거리가 어찌 매우 멀지 않았겠습니까?23)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볼 때, 퇴계는 "리에는 정도 없고 뜻도 없고, 어떤 계획이나 헤아림도 없으며 어떤 조작도 없다"[理無情意, 無計度, 無造作]는 주자의 입장에 서서 리를 정태적이거나 작위성이 없는 무위의 사물로 보지 않고, 능동의 활물(活物)로 이해하여 리에는 지극히 신묘한 작용과 유행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리기선후의 문제에 있어서도 재리상간(在理上看)의 리선기후(理先氣後)를 강조하는 입장에 선다.
퇴계는 "주자가 유숙문(劉叔文)에게 답한 편지에 '리와 기는 분명 두 가지 사물이다. 다만 사물에서 보면 리와 기 두 사물이 혼합되어 있어서 각각 나누어 한 곳에 있을 수 없다. 그런 두 가지 사물이 각기 하나의 사물로 됨은 무방하다. 그리고 만일 이치에서 본다면 비록 사물이 있기 전이라도 이미 사물의 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단지 그 리가 있을 뿐이요, 일찍이 실제로 이 사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모름지기 이 기가 있기 전에 먼저 이 성(性)이 있었으며, 기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성은 항상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비록 리가 기 가운데에 있더라도 기는 기이고, 성은 성이어서, 또한 스스로 협잡하지 않는다. 그리고 리가 두루 사물의 본체가 되어서 있지 않은 곳이 없음을 논함에 있어서는 또 기의 정하고 거침을 막론하고 모두 이 리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4) 이와 같이 리선기후(理先氣後)를 실제에 있어서도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리생기(理生氣)의 논리로까지 발전시켜 나갔었다. 즉 그는 주렴계의 태극동이생양(太極動而生陽)을 그대로 리동이기생(理動而氣生)으로 해석한다.25) 이는 태극동이생양(太極動而生陽)의 생(生)을 논리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견해와는 다른 것으로, 퇴계는 태극을 곧 리로 보기 때문에 리가 동(動)해서 기를 생(生)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따라서 음양은 태극이 생한 것이며, 기는 리가 생한 것이 된다.
퇴계는 태극이 음양의 생성론적 근거가 되듯이 리가 기의 생성론적 근거가 된다고 보아, "태극에 동정이 있음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며, 천명이 유행함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이지 어찌 다시 시키는 자가 있겠는가. 다만 무극과 음양[二氣]과 오행이 묘하게 합하고 엉키어 만물을 화생한데서 보면 주재가 있어 운용하여 이렇게 되도록 하는 이가 있는 것 같으니, 즉 『서경』의 이른바 '상제께서 충(衷)을 백성에게 내리셨다'고 한 것이라든지. 정자의 이른바 '주재하는 편으로 말하면 재(宰)라고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대개 리와 기가 합하여 사물을 명하니 신묘한 운용이 스스로 이와 같을 뿐이요, 천명이 유행되는 곳에 또한 따로 시키는 자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리는 지극히 높아서 상대가 없으니, 사물을 명할 뿐이요 사물에서 명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26)고 하여 리는 능동성을 가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리가 능동성과 작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기의 움직임을 통하여 리가 발할 필요 없이 리 스스로 발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기의 매개는 필요치 않게 된다. 리는 그 자체의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의 리자도설(理自到說)27)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4. 리 능동성의 모순 해명
퇴계의 리발설과 리동설을 검토할 적에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그가 그러한 주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퇴계철학의 특질을 파악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할 작업은 인간학적 측면에서 주자의 리기론 체계를 대해 고찰 해보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퇴계 사상의 이론적 형성을 가져오게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가 주자였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퇴계가 리동을 주장하면서 주자가 말한 '理有動靜, 故氣有動靜'28)을 중요한 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의 리기문제를 논할 때, 가장 논란이 심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리는 기를 낳는다"[理生氣]는 문제이다. 주자는 "태극이 음양을 낳으며, 리가 기를 낳는다. 음양이 이미 생하였다면, 태극이 그 중에 있게 되고, 리도 기 속에 있게 된다"29)고 하면서, 리가 기를 파생시킨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리에는 '형태가 없으나 운동 능력과 작용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리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기 운동 능력에 의하여 기를 생기도록 하는 것'으로 보아 리생기(理生氣)를 주장하는 단서를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찾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리의 행위성을 배제시키기 위해 리를 말을 탄 사람에 비유하여 리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작용인(作用因)이 없다고 하였다.
'양은 움직이고, 음은 고요하다'고 함은 태극이 동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태극이 이치상으로> 동(動)하고 정(靜)한다는 말이다. 리(理)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음양이 있은 다음에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리는 마치 인간이 말을 타는 것과 같이 음양 위에 타고 있다.30)
태극은 리이고, 동정은 기이다. 기가 다니면 리도 다니게 된다. 이 둘은 늘 서로 의지하기에 서로 떨어진 적이 없다. 태극이 사람과 같다면, 동정은 말과 같다. 말은 사람을 싣고 사람은 말을 탄다. 말이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사람도 함께 들어오고 나간다. 움직이든지 고요하든지 간에 태극의 미묘함이 없었던 적은 없다.31)
이처럼 주자는 결코 리의 자기 운동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분명 '형상도 없고 행위도 없다'[無形無爲]고 주장하는 주자의 말에서는 리가 직접적으로 기를 생성한다는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리가 기의 존재 및 운동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리가 기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기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기는 본래부터 저절로 생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게된다.
주자는 자신의 정론(定論)에 도달하기 전에 '태극과 동정(動靜)'을 각각 체(體)와 용(用), 즉 태극을 기의 본체로서의 원기(元氣)로, 동정을 그 체(體)의 용(用)으로 설명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전에 태극을 체라 하고, 동정을 용이라고 한 말에는 참으로 잘못된 점이 있다. 뒤에 이미 고쳐서 말하기를 태극은 본연의 오묘한 것이요, 동정은 <리의> 타는 바 기(機)라고 하였으니 이는 원래의 뜻에 거의 가깝다. 생각건대 태극이 동(動)과 정(靜)을 함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는 본체로서 말한 것이다. ...만일 태극이 곧 동정이라고 한다면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를 가를 수 없을 것이다.32)
여기서 '태극은 본연의 오묘한 것이요 동정은 리의 타는 바 기(機)'라는 말은 태극 자체가 동정(動靜)하는 것이 아니고 태극은 동정하는 소이(所以)로서의 리의 극치를 의미하는 것이며, 음양동정은 어디까지나 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극이 동정을 함유하고 있다는 말은 태극이 동정의 리를 함유했다는 것이며 태극에 동정이 있다는 것은 기화유행(氣化流行)33) 또는 태극이 기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리를 사람에 비유하고 동정하는 기를 말에 비유하여 타는 것으로 설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동정하는 기에 리가 부속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의 리기론은 명백성이 결여될 수 있을 것이다. 주자의 '리가 기를 낳는다'[理生氣]는 견해는 '죽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다'는 월천(月川, 曹端 1372-1434)의 말과 같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리생기(理生氣)를 주장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은 형체는 없으나 리는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35)는 구절을 볼 때, 리는 결코 어떤 실재가 아니고 다만 원리로서의 관념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情意)도 없고, 계탁(計度)도 없고, 조작하고 작용함이 없는 "리가 기를 낳는다"는 명제는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왜냐하면 원리 또는 법칙인 리가 동정(動靜)하여 기를 생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범수강(范壽康)은 "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본체이고 기는 시공간에 있어 변화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론상에서나 논리상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모름지기 먼저 리가 있고 기는 리로 말미암아 생산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론상 또는 논리상에서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에 앞서서 존재하는 그와 같은 본체개념은 다만 우리의 사상 가운데 있는 하나의 추상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상에서 보면 우주의 기본은 리기이원(理氣二元)의 종합물이다"36)고 하였다. 또한 '태극은 본연의 오묘한 것이요, 동정은 태극[理]의 타는 바 기(機)이다'라고 한 표현은 리와 기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해서 음양동정(陰陽動靜)하는 기에 리가 부속되는 것이 아니라, 리가 기에 선재하며 주재한다는 것, 즉 기는 태극동정의 리에 따라서 동정하는 기(機)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주자가 리생기(理生氣)를 말한 이유는 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도 소리도 냄새도 모양도 없는 물질적 속성을 전혀 갖지 않는 초월적 실재로서 물질의 존재나 그 운동의 진정한 근거 또는 원리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리가 어떤 유형으로든지 기에 대한 작용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론을 설명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주자가 리생기를 주장한 또 다른 이유는 리의 절대성을 확보함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악이 선험적인 실재성을 갖지 않는 우연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소멸될 수 있다는 존재론적 신념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주자는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과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개인을 선하게 하는 동시에 악이 없는 순선(純善)한 사회를 건설할 것을 지향하였는데, 이러한 정신을 퇴계가 계승하는 가운데 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37)
퇴계가 리발, 리동을 언급했다는 것은 그에 있어서는 리가 능동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그의 문인 이공호(李公浩)도 이의를 제기하였듯이,38) 퇴계의 이러한 주장은 분명 "리에 정의와 조작이 없다"는 주자의 만년 정론과 모순된다. 퇴계가 자신이 내린 "리는 발(發)하고 동(動)한다"는 정의와 주자가 내린 리에 대한 정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시한 것이 그의 체용론(體用論)이다. 다시 말해, 퇴계는 리개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지니는 문제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리에는 체용(體用)이 있다는 논지를 세워 리가 무위하다는 것은 리의 본체[體]를 말한 것이고, 리의 작용[用]을 말하면 리는 능히 발하고 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39) 이와 같은 체용론을 그의 '리자도설'에 적용시키면 무위한 리를 작위적 개념인 도(到)로서 서술하는 데에서 오는 논리적인 부정합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의 주장에 따라, "리에 정의와 조작이 없다"라고 한 것은 체(體)에 속하고 "리는 능히 발하고 생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용(用)에 속한다고 할 때, 양자는 그 류(class)의 위계가 다르므로 모순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리와 기를 존재구성의 근본실체로 파악하는 성리학의 전통적 입장에서 볼 때, 기(氣)와의 혼동을 어찌할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혹자는 철학적 논리의 정합성이라는 측면에서 퇴계철학의 문제점은 지적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혹자는 퇴계철학의 근본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하더라도 우주론적 리개념과 인성론적 리개념과의 혼동으로 인해 퇴계는 일관된 논리전개를 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퇴계 리기론에 대해 내린 이와 같은 평가, 즉 그의 리기론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우주론에서 일반적으로 규정된 리개념이 그의 인성론에서 취급되는 리개념과 다를 뿐만 아니라 상반된다는 것과 그가 정의한 리개념과 주자가 내린 리개념 사이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수긍하지 않을 방법은 없겠는가. 만약 퇴계가 리발(理發)을 말할 때의 발(發)과 기발(氣發)을 말할 때의 발(發)의 의미가 동일한 것이 아니고, 우주론에 있어서의 발(發)과 인성론에 있어서의 발(發)이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 본다면 발(發)이라는 표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퇴계는 자신이 체용의 관점을 통해 "리는 발(發)하고 동(動)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각과 동작이 없는 것, 이것이 리 본래의 모습[體]이고, 그때그때 발현되어 어디에나 나타나는 것, 이것은 리의 지극히 신묘한 작용[用]임을 알았다. 전에는 <나는> 단지 본체의 무위함만을 알고 오묘한 작용이 능히 드러나 행할 수 있음은 알지 못했으며, 거의 리을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도를 떠남이 또한 멀고 심하지 않았는가!"40)가 있다.
위의 인용문을 통하여 퇴계가 말하는 리의 용(用)은 능동성을 지닌 활물(活物)의 용(用)이다. 리가 능동성을 지닌는 이상 "리는 발(發)하고 동(動)한다"할 수 있다. 그런데 리가 동정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형이상자로서의 리가 아니다. 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리는 발(發)하고 동(動)한다"는 것은 "기는 발(發)하고 동(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퇴계가 "리는 발(發)하고 동(動)한다"는 것의 논리적 근거로 제시한 리의 용(用)은 지묘지용(至妙之用)과 지신지용(至神之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리는 발(發)하고 동(動)한다"는 것은 "기는 발(發)하고 동(動)한다"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게 된다. 즉, 리가 발(發)하는 것은 신묘(神妙)한 발(發)이고 리가 동(動)하는 것은 신묘(神妙)한 동(動)인 것이다.41) 이 같이 보게 되면 퇴계가 발(發)을 능동적 의미로 해석하고 그것을 리에 적용함으로써 주자학의 주요 명제를 재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發)이라고 한 표현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묘(妙)자는 언어나 문자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형용하는 글자인데, 퇴계는 리의 동정(動靜)을 리의 묘용(妙用)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되면, 퇴계가 말하는 동정은 동(動)이면서 동이 아니고 정(靜)이면서 정이 아닌 리의 동정 곧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리의 작용이 되므로, 현상의 세계에 관계하는 형식논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 나가는 말
주자와 퇴계의 리기론의 공통점은 전통적 유가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우주론 내지 본체론적으로 해명하는 데 적용한 것이라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들은 선진 유가들에 의해 미해결로 남겨진 문제, 즉 모든 인간은 착한 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항상 윤리적일 수는 없는가, 왜 현실 사회는 도덕 사회이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명에 초점을 맞추어 선과 악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리와 기의 관계를 갈라서 말하기도 하고 합쳐서 말하기 하는 리기이합(理氣離合)의 사유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가 정의한 리개념은 주자가 정의한 리개념보다 더 윤리적 측면을 직접적으로 고양시시키고 있다.
퇴계철학의 중요한 특징은 주자의 리기이원적인 체계를 수용하면서도 주자에 비해 리를 보다 절대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리를 기보다 더 높이는 리우위관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를 중시하는 퇴계의 사고방식은 '리기론[本體論]에서의 리동설', '사칠론[心性論]에서의 리발설', '격물론[修養論]에서의 리도설'을 말하면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퇴계의 인간본질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다"는 전제아래에서 인간의 천부적 도덕성을 찾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퇴계에 있어서 철학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단초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도덕성 회복을 통한 이상 사회 구현'을 주창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주체인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규정해야만 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는 도덕철학의 방면에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인(仁)을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덕이라고 하여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본래성은 선하다고 하는 도덕적 심성론과 리기론을 주창하게 되었다. 그 결과, 퇴계는 리발과 리동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될 때만이 리는 기에 대한 규정자.제약자가 되며, 반면 기는 리에 의해서 규정되고 제약되어지는 피규정자.피주재자가 되는 리기 관계가 확실하게 성립되어진다고 퇴계는 생각한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리는 기를 주재하는 장수(將帥)로, 기는 리의 주재를 받는 병졸로, 또는 리를 왕으로, 기를 신하로 비유한 것이다. 퇴계가 이같이 생각한 까닭은 본질세계를 강조하여 질서를 확립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퇴계는 리발과 리동을 말함으로써 윤리적 행위가 가능한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권위, 즉 인간의 객관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인간의 윤리 행위를 필연적으로 간주하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리는 발(發)하고 동(動)한다"고 말한 것은 '인욕으로부터의 천리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양심의 발동과 이성의 자율적 능동성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기에 리가 타는 바가 없으면 사욕에 떨어져 금수가 된다"42)고 말한 곳에 잘 나타나 있다. 악의 가능성을 지닌 기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리의 직접적인 작용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퇴계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사고 방식은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타고난 본성의 실현에 불과한 것으로 믿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퇴계의 리기론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의도를 이해하고 나면 그가 남긴 저술 속에 나오는 리기론에 관한 수많은 기술상의 모순된 표현은 단점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퇴계가 주장한 리발과 리동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리가 퇴계에 있어서 처음부터 도덕을 기초 지우는 근거로서 요청되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것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출처] 퇴계철학의 인간학적 이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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