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판일자 |
상대팀 |
투구이닝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경기결과 |
04월 08일 |
히로시마 |
7 |
4 |
2 |
4 |
3 |
|
04월 14일 |
주니치 |
6 |
6 |
6 |
4 |
1 |
|
04월 25일 |
한신 |
8 |
7 |
2 |
10 |
2 |
|
05월 02일 |
야쿠르트 |
9 |
4 |
4 |
13 |
0 |
|
05월 09일 |
야쿠르트 |
9 |
7 |
2 |
5 |
1 |
|
05월 15일 |
야쿠르트 |
7 |
5 |
0 |
4 |
2 |
|
05월 23일 |
히로시마 |
9 |
9 |
3 |
6 |
1 |
|
05월 30일 |
히로시마 |
3.1 |
10 |
1 |
1 |
8 |
|
06월 06일 |
주니치 |
9 |
3 |
5 |
9 |
0 |
|
06월 13일 |
야쿠르트 |
9 |
7 |
0 |
8 |
0 |
|
06월 20일 |
한신 |
7 |
10 |
2 |
10 |
2 |
|
06월 27일 |
요코하마 |
9 |
6 |
3 |
9 |
3 |
|
07월 04일 |
주니치 |
7 |
4 |
2 |
5 |
2 |
|
07월 14일 |
요코하마 |
2 |
8 |
0 |
0 |
6 |
|
07월 21일 |
야쿠르트 |
3.1 |
6 |
3 |
0 |
5 |
|
'98 |
2.75 |
104.2 |
96 |
31 |
88 |
45 |
7승 6 |
(전반기-다승1위,방어율1위 15경기완봉3경기,완투3경기 최고의 전성기시절였습니다.)
전반기 막판에 난타당한 경기가 있었지만 상대 팀에서 싸인을 훔쳐보는 반칙을 범한걸로 기억합니다.
한창 잘나갈때는 방어율부문과 승률부문도 1위였는데 올스타브레이크가 다가올때
약간 페이스가 떨어져서 타이틀을 내주기도 했죠. 이때 서서히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팔꿈치부상에 관한 이야기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성공시대를 여는 듯 했던,
조성민은 그가 그토록 서고 싶었던 올스타전에서 불운이 시작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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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요미우리 전성기시절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던,98년도 이종범선수도 보입니다.)
*당시 직구 최고구속150km내외 특히나 제구력과 포크볼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악몽의 1998년 올스타전
완봉 3경기에 3번에 완투까지 너무 많은투구로 혹사당한 그의 팔꿈치는 휴식이 필요했지만
그런 조성민선수는 잊혀지지 않는 올스타전에 출장하게 됩니다.
그의 인생이 뒤바뀐 경기가 1998년 올스타전이었다. 97년 후반기 1군에 합류해 마무리로 활약하다
98년 선발로 보직이 바뀐 조성민은 전반기 7승6패로 마감하고 감독추천 선수로 올스타에 출전했다.
당시 7승 중 3승이 완봉·3승이 완투였으며, 평균자책점 2.75는 리그 1위였다.
그러나 무리한 투구는 결국 화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곤도감독은 조성민선수에게 등판을 지시합니다
(이감독도 투수출신이지만 무리한 투구수로 선수생명을 조기에 마감한 그런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전반기 무리수로 팔꿈치에 통증을 느낀 조성민선수는 공을 못던지겠다고 감독에
하소연 하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않았습니다
(전에 KBS에서 조성민선수의 인터뷰에서 그때가 가장아쉽다고 하네요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서 센트럴리그 마지막 투수로
8·9회를 책임지기로 하고 등판했다. 8회를 삼자범퇴로 끝낸 뒤 9회 첫 타자를 3구 삼진으로 잡은 순간
팔꿈치에 뚝 하는 소리가 나며 힘이 모이지 않았다. 포수 후루타가 여러 사인을 번갈아 내도 계속적으로
체인지업을 던진 조성민은 2사 만루의 위기에 몰리자 패전을 하고 싶지 않은 욕심에 직구를 뿌렸다.
그 결과 경기는 3-3 무승부로 끝났지만 조성민은 후반기 단 1경기 등판도 못하고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당시 센트럴리그 올스타 투수진에는 요코하마 마무리 사사키가 남아 있었지만 올스타전
투수 코치였던 요코하마 곤도감독은 조성민의 통증 호소를 외면했다.
올스타의 벤치내에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없는 것도 불운했다.
*당시 그경기를 저도 직접 TV로 시청했는데,참 어이가 없더군요. 올스타전에서
부상이라 정말 황당하기까지 했습니다.몸을 사려도 아까울판에 무리를해서 부상을...
# 조성민 올스타전 성적
1998년 올스타전 2차전
8회말 등판 2탈삼진 무실점
9회말 첫타자 3구삼진, 다음타자에게 초구 던진뒤 팔에 이상을 느껴 강판 자청.
요코하마감독이 곧장 올라온 후 조성민은 일단 덕아웃으로 가서 푸쉬업을 몇차례 한후
다시 등판,이닝을 마무리 지음.(최고 148km)
(2편에계속...)
(출처)김민우의 野生野死,SPORTS2.0 제77호,스포츠조선,스포츠투데이,파울볼,네이버등
최진실과의 첫만남...
팬과 우상… 의남매… 이젠 연인으로
두 사람은 98년 11월28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조성민은 일본의 프로야구 시즌이 끝난 뒤 귀국해 집에서 쉬는 동안 KBS TV ‘행복채널’의 출연
섭외를 받고 스튜디오에서 녹화를 했다. 그때 사회자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냐”고 묻자
조성민은 망설이지 않고 “최진실”이라고 대답했다. 방송이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셈이었다.
조성민은 신일고 재학시절 방안을 온통 최진실의 사진으로 도배했을 정도로 그녀의 열성팬이었다.
그는 최진실을 ‘우상’이라고 표현했다
최진실과 조성민은 1998년 KBS 2TV ‘행복 채널’에 함께 출연한 것이 인연이 돼 의남매를 맺게 됐다.
다음해 봄 최씨가 영화 ‘마요네즈’를 끝내고 괌으로 휴가를 가 조씨를만나고, 올 1월 조성민이 팔 부상
치료를 위해 서울에 와서 최씨를 만나는등 도쿄(東京)와 서울을 오가면서 관계가 진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진실이 조성민 누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조성민 재활 일지
▲1998.7.23 올스타전 중 팔꿈치 부상
▲1998.7.25 등록 말소
▲1999.4.3 팔꿈치 인대 이식 수술
▲1999.8.2 캐치볼 시작
▲1999.11.4 불펜피칭 시작-팔꿈치부상이후 처음
▲1999.11.22 연봉 제계약(2000년)
▲2000.2.1 2군 캠프 합류
▲2000.2.17 1년6개만의 실전등판
▲2000.3.15 2군 경기 등판(2이닝 1피안타 무실점) (최고구속147km)
▲2000.4.9 2군 경기(니혼햄전) (최고구속150km)
▲2000.4.12 2군 경기 첫 세이브 (최고구속148km)
▲2000.5.10 2군 경기(세이부전) (5이닝 노히트 노런)
▲2000.5.20 1군 엔트리 등록
▲2000.5.21 야쿠르트전 등판
2000년 (10경기) 1승2패 방어율3.86
22개월만 '1군 복귀'
연봉5200만엔 작년대비13.3% 삭감(인센티브1700만엔)
1999년도 한해를 팔꿈치수술 재활훈련으로 보낸후,
올초에는 2군에서 조율을 마치고 드디어 5월 21일 1군 경기에 투입됩니다.
2000년도 조성민의 1군 복귀는 98년 7월 25일 오른쪽 팔꿈치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된 지 근 2년, 인대 이식 수술(99년 4월)을 받은 후 15개월만이다.
또 팀내에서 예상했던 복귀 시점인 올 8월보다 3개월 가량 앞당겨진 일정이다.
*당시 요미우리에는 또한명의 한국인 선수 정민철 선수도 활동하게 됩니다.
조성민의 00년 등판일지
5월21일 야쿠르트전 (진구구장) 1.1이닝 2안타 1볼넷 무실점 (최고구속147km)
5월23일 요코하마전 (후쿠오카돔) 1이닝 1볼넷 무실점 (2경기 연속등판 무실점) (최고구속146km)
5월25일 요코하마전 (도쿄돔) 2.3이닝 1실점 (시즌첫패)
5월28일 주니치 전 (도쿄돔) 2.3이닝 1안타 1볼넷 1삼진 무실점 (방어율2.45) (최고구속145km)
6월 1일 히로시마전 (시민구장) 1이닝 무안타 무실점 (방어율2.45->1.93)
(조성민&최진실 1년4개월 몰래데이트 열애설 언론매체 대대적 보도)
6월 2일 주니치 전 (나고야돔) 1.1이닝 2안타 2탈삼진 무실점 (방어율1.93->1.42)
6월 4일 주니치 전 (나고야돔) 2.3이닝 4안타(1홈런) 2실점 (시즌2패,방어율3.42)
6월12일 야쿠르트전 (도쿄돔) 3안타 2실점 (발목부상 2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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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9일 결혼계획 공식발표 12월 5일 ( 오후 9시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기자회견)
8월11일 1군 앤트리 재등록
8월13일 히로시마전 (시민구장) 5이닝 6안타 1실점 (시즌첫승,2년2개월여만에 감격의 승리)
8월18일 주니치 전 (도쿄돔) 1이닝 1안타 1볼넷 무실점 (방어율4.15->3.86)
(조성민&이종범 3번째 맞대결)
8월25일 (코칭스태프 기용법불만,오른쪽어깨통증 자청2군행,00년도 시즌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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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후반기부터 2000년 중반까지 팔꿈치 부상 재활을 했던 조성민은 8월 선발승을 따내며
부활의 조짐을 보였지만 다시 팔꿈치에서 뼈조각들이 발견되면서 시즌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조성민 VS 이종범 조성민 VS 정민철
주니치 ‘바람의 아들’ 이종범(30)과 요미우리 ‘젊은 거인’ 조성민(27) (2000년 당시나이)
총 세차례대결을 했습니다.당시 두사람의 대결은 꽤나 흥미로운 대결이였습니다.
역대전적 11타수 3안타 타율0.272 3안타 3볼넷 2도루(1도루실패) 득점타점없음
센트럴리그 우승팀 요미우리의 동기생 ‘한국 콤비’ 정민철(28)과 조성민(27) (2000년 당시나이)
두 선수는 1군과2군을 오가며,2000년 정민철2승,조성민1승2패 초라한 성적을 냅니다.
2000년 조성민&정민철 1군성적(요미우리)
정민철-(4경기) 2승(선발승)(1완봉승) 방어율4.82 (18.1이닝 10자책점)
조성민-(10경기)1승(1선발승)2패(구원패) 빙어율3.86 (14이닝 3자책점)
1999년 7월19일 결혼발표 기자회견
"세기의결혼식" 12월15일 조성민-최진실 커플 결혼
2001년 요미우리 삼총사
2001년 1월31일 한국삼총사
요미우리 마운드의 ‘한국 삼총사’가 미야자키 스프링캠프에서 뭉쳤다.
올시즌부터 일본무대에 뛰어든 정민태(31),6년째를 맞는 베테랑 조성민(28),
두 시즌째를 시작하는 정민철(29) 등 ‘한국 삼총사’는 스프링캠프 시작에 앞서
지난 31일 2군 숙소인 스이코엔호텔에서 상견례를 갖고 ‘미야자키 결의’를 다졌다.
*2001년도에는 정민태선수 요미우리입단 3명의 한국투수가 요미우리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요미우리 삼총사
요미우리 삼총사 일본프로야구 최종성적(1군경기)
조성민-(4시즌) (58경기) 11승10패 11세이브 방어율2.84
정민철-(2시즌) (12경기) 3승 2패 방어율4.70
정민태-(2시즌) (27경기) 1승 2패 방어율6.28
2001년
3월18일 요미우리 삼총사 1군 탈락(시범경기부진)
4월7일 1군 엔트리등록
4월12일 2군강행(1군경기 출장못함)
5월15일 2군 경기(세이부전) 5이닝 5안타(3홈런) 6실점(패전투수)
(조성민 2군(6경기) 1승 2패 기록)
5월27일 두번째팔꿈치수술 결정-올시즌마감
6월26일 팔꿈치수술 성공적(오른쪽 팔꿈치 연골제거수술)
8월21일 수술2개월만에 피칭훈련
2001년 요미우리는 정민태까지 영입 한국투수 3명이 같은팀(요미우리)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시범경기부터,세 선수 모두 동반부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성민 선수는
또 6월에 두번째 팔꿈치 수술로 올시즌을 마감하게됩니다. 다른 선수들도 물론 성적과 기록은
좋지 않지만,요미우리 코치스태프들과의 마찰로 인해 기회가 너무나도 적게 주어졌습니다.
정민철&정민태 일본진출실패???
두선수는 일본진출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우완투수였습니다.
분명히 일본진출 결과를 놓고 본다면 두선수는(선동열,이상훈,조성민,구대성)비교해보면
단순하게 기록으로 본다면 실패했다고 볼수있습니다.하지만 팀사정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정민철선수는 2군에서도 방어율1위를 차지했는데도,1군 등판 기회를 주지않았습니다.
2시즌동안 고작 12경기를 등판 한것을 봐도 충분히 알수있는 대목입니다.
정민태선수도 처음에는 부상과 역시 코칭스태프의 홀대로 등판기회를 잡지못합니다.
정민철과 정민태선수같은경우는 다른팀에서 뛰어나면,더 좋은성적을 충분히 올릴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개인적인 능력보다는 팀을 잘못 선택한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2002년 (6경기) 2승 방어율2.31
올시즌 연봉 5,200만엔에서 10% 깎인 4,680만엔(약 4억8,000만원)에 2002년 연봉 재계약을 했다.
2002년도 입단 7년째를 맞는 조성민의 성적을 살펴보자.
지난 97년 2승2패11세이브 방어율 2.89(22경기),98년 7승6패 방어율 2.75(15경기),
2000년 1승2패 방어율 3.86(10경기). 99년과 2001년은 팔꿈치 수술로 1군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2년이 흘러 다시 2002년 시즌에 부활의 날개짓을 하던 조성민은 5월15일 무려 1년 9개개월만에
감격적인 승리투수가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다시 팔꿈치에 통증과 무릅통증으로 부상자명단에
등록이 된다. 당시 그의 무릅과 팔꿈치의 진단을 위하여 최첨단 의료기를 동원하였지만 신체적인
이상을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공을 던지지 못할 정도의 통증을 느꼈으니
본인의 심적고통은 더 했을 것이다
이미 대학시절 1번 그리고 일본에서 2번의 팔꿈치 수술을 했던 조성민에게 더 이상의 수술은
선수생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길은 수술없이 재활에 성공하는 것이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마도 수술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과 재활훈련의 어려움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투명으로 “중도 계약 해지”라는 초강수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5월15일 1년9개월만의 감격적인승리 98년 당시 팔꿈치 수술부위
조성민의 02년 등판일지
5월14일 1군 엔트리 등록 (1년9개만에 1군복귀)
5월15일 야쿠르트전 (도쿄돔) 6이닝 4안타(1홈런)4탈삼진 1실점(시즌첫승,21개만의승리)(최고구속143km)
5월23일 한 신전 (고시엔구장) 3이닝 3안타 볼넷 1탈삼진 2실점 (방어율2.00)(최고구속130km중반)
5월28일 야쿠르트전 (진구구장) 2.3이닝 무안타 무실점 (방어율2.00->2.79)
5월30일 야쿠르트전 (진구구장) 1.1이닝 1안타 1볼넷 무실점 (시즌2승,방어율2.45)(최고구속134km)
6월 1일 히로시마전 0.1이닝 강판 (팔꿈치통증재발,왼쪽무릎부상)
6월 3일 (정민태1군행 맞교체선수로 2군행)(팔꿈치 통증 재발 시즌마감)
8월20일 조성민 CEO 변신- 아내 최진실의 성 이니셜을 딴 ‘C&C(CHO&CHOI) 컴퍼니’를 설립
(일본을 비롯,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동남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즉석 파이 슈크림빵
제조업체인 ‘비어드 파파(Beard Papa)’의 한국 내 프랜차이즈를 따냈다.)
8월22일 조성민 요미우리 퇴단요청(구라타 구단 운영부장을 만나 공식적으로 퇴단을 요청)
9월8일 팔꿈치통증 치료차 한국 조기귀국
10월10일 조성민 요미우리 공식퇴단 공식발표-사실상은퇴
일본에서의 성적(1군성적)
연도 | 팀 | 등 판 |
완 투 |
완 봉 |
무 4 구 |
승 | 패 | S | 승 률 |
|
투 구 회 |
안 타 |
4 구 |
3 진 |
실 점 |
자 책 점 |
방 어 률 | |||||
---|---|---|---|---|---|---|---|---|---|---|---|---|---|---|---|---|---|---|---|---|---|---|
1997 | 거인 | 22 | 0 | 0 | 0 | 1 | 2 | 11 | .333 | 28 | - | 16 | 13 | 30 | 10 | 9 | 2.89 | |||||
1998 | 거인 | 15 | 6 | 3 | 0 | 7 | 6 | 0 | .538 | 104 | 2/3 | 96 | 34 | 83 | 36 | 32 | 2.75 | |||||
2000 | 거인 | 10 | 0 | 0 | 0 | 1 | 2 | 0 | .333 | 14 | - | 20 | 5 | 9 | 9 | 6 | 3.86 | |||||
2002 | 거인 | 6 | 0 | 0 | 0 | 2 | 0 | 0 | 1.000 | 11 | 2/3 | 12 | 2 | 5 | 3 | 3 | 2.31 | |||||
통산 성적 | 53 | 6 | 3 | 0 | 11 | 10 | 11 | .524 | 158 | 1/3 | 144 | 54 | 127 | 58 | 50 | 2.84 |
(2군성적)
시즌 | 방어율 | 경기 | 승-패 | 세이브 | 이닝 | 4구 | 삼진 |
96(2군) | 3.19 | 12 | 4-1 | 0 | 62 | 15 | 48 |
97(2군) | 2.08 | 7 | 4-0 | 0 | 39 | 12 | 39 |
98(2군) | 18.00 | 1 | 0-0 | 0 | 1 | 0 | 0 |
합계 | 2.91 | 20 | 8-1 | 0 | 102 | 27 | 87 |
타격에 소질이 있었던 조성민
1군통산 타격성적 0.326타율 46타수 15안타 21삼진 6타점
(일본-센트럴리그는 지명타자가 없어서 투수가 9번타자를 합니다. 타격도 수준급이였습니다.)
조성민선수는 만약 내가 5년만 젊어 한화에 입단한다면 타자로 전향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3편에 계속...)
(출처)김민우의 野生野死,SPORTS2.0 제77호,스포츠조선,스포츠투데이,파울볼,네이버등
꼭 석 달만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3년하고도 3개월이 걸린 먼 길이었다.
더는 상처날 곳도 없는 자존심을 추스르고 지난 5월 조성민은 계약금 없이 5000만원에 한화 이글스에 입단,연습생이나 다름 없는 신고선수로 한국 프로야구 1군 마운드를 향한 기약 없는 도전을 시작했다.
아침 7시30분에 일어나 단체 훈련과 웨이트트레이닝, 별도의 개인 재활훈련까지 2군에서 매일 14시간씩
혹독한 훈련 스케줄을 소화해내며 '자연인' 조성민을 버리고 '선수' 조성민을 만들어왔다.
한화 유니폼을 입고 현역 복귀를 선언한 조성민이 대전 구장에서 가진 재활군 체력 훈련을
마친 뒤 최동원 재활군 투수코치(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 힘든 표정을 짓고 있다.
7월 24일 대전구장에서 가진 첫 연습 피칭에선 최고 구속 137km를 찍었지만
닷새 뒤인 7월 29일엔 132km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지난 5일 롯데와 2군 경기 첫 등판에선 142km까지 끌어올리며
공 8개로 세 명의 타자를 범타 처리했다.
이틀 뒤인 7일엔 역시 롯데와 2군 경기에서 5타자를 상대로 삼진 3개 볼넷 1개로
또 한번 무실점 투구를 했다.
두 차례의 2군 등판을 성공적으로 마친 조성민은 지난 10일 1군에 합류했고
닷새만인 15일 1군 엔트리에 등록했다.
2002년 6월 2일 히로시마전에서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던진 뒤 3년 2개월 13일만이다
(하도 오래전이라 조성민도 "2002년 6월인지 7월인지 정확히 기억 안난다"고 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지 불과 석 달만이지만 따지고 보면 서울 둔촌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글러브를 손에 낀 뒤로 20여년을 돌고 돌아온 먼 길이다.
조성민 국내 데뷔전 감격 첫승
15일 수원야구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한화와 현대의 경기에서 풍운아 한화 조성민
7회말 무사 1루에서 등판, 현대 타자 정성훈에게 볼을 던지고 있다
2005년 (16경기) 2승 2패 4홀드 6.52방어율
'절반의 성공'
복귀 첫 무대에서 첫 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한국 무대에 섰던 조성민은
시즌 초반에는 뛰어난 위기관리와 투구운영으로 절반의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시즌 막판 체력저하와 준비 부족의 3년만의 복귀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조성민의 05년 등판일지
8월15일 1군 엔트리 등록
8월15일 현대전 (1.1이닝 무피안타 3사사구 무실점) (시즌 첫승)
8월20일 LG전 (1이닝 1피안타 무실점)
8월21일 LG전 (0.1이닝 무피안타 무실점) (시즌첫홀드)
8월26일 LG전 (2이닝 2피안타 1볼넷 1탈삼진 무실점) (4경기 4⅔이닝 무실점)
8월27일 LG전 (1.1이닝 4피안타 1볼넷 1탈삼진 3실점) (시즌 첫패)
8월30일 기아전 (2.1이닝 무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 (시즌2승 7경기 방어율3.24)
8월31일 기아전 (1.2이닝 1피안타 2탈삼진 무실점) (시즌2홀드)
9월 2일 LG전 (1.1이닝 2피안타 1볼넷 무실점 방어율2.70) (시즌3홀드)
(직구 데뷔이래 최고구속142km,3경기연속무실점 방어율2.39)
9월 4일 두산전 (1.1이닝 5피안타 볼넷 3실점)
9월14일 기아전 (시즌4홀드)
9월20일 기아전 (0이닝 2피안타 2사사구) (최악의투구)
9월24일 SK전 (1.2이닝 2피안타(1홈런) 1볼넷 1사구3실점)
(시즌2패,국내무대 첫 피홈런-이진영 방어율5.40)
9월27일 롯데전 (1이닝 5피안타 1볼넷 3실점)
(16경기) 2승 2패 4홀드 6.52방어율
준플레이오프
10월2일(2차전) SK전 (⅓이닝 2피안타(1홈런) 1볼넷 3실점)
미국 하와이 전지훈련(하와이 키히라군 구장) 조성민 “난 죽어도 1번 체질”
지난 시즌 99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조성민은 올시즌 1번으로 번호를 바꿨다.
마지막 두자리 숫자인 99번은 지난해 야구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의미했고
올해 1번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상징적인 번호다.
2006년 (7경기) 승패없이 6.75방어율
5천만원->1억1천만원에 제계약...최단기간 1억돌파 신기록
풍운아’ 조성민(33·한화)이 한국프로야구 2년차에 억대 연봉에 진입했다.
연봉 5,000만원에서 102% 오른 1억110만원에 올해 연봉을 계약했다
(재기가능성을 확인한 한화는 계약금보존과 지난해 연봉에 대한 고과가 반영돼 110만원이 추가)
조성민은 계약을 한 뒤 "지난해 내게 야구 선수로 길을 열어준 구단에 감사하고 올 시즌 나에 대한
기대치를 연봉에 반영해준 것에도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6시즌을 맞아 조성민은 등번호를 1번으로 바꾸며 그 누구보다 동계훈련을 충실히 소화했다.
그러나 2월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오른쪽 어깨 부상이 발견됐고 결국 4월에 요코하마 미나미 공제병원
에서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뒤늦게 훈련을 시작해 피치를 올리며 후반기에 맞춰 팀에 합류했지만
이미 투구 밸런스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완벽한 재기를 다짐하며 맹훈련하던 도중 찾아온 어깨 통증,
그리고 갑작스레 잃어버린 밸런스는 조성민에게 찾아온 또 다른 불운들이었다.
조성민의 06년 등판일지
4월18일 어깨수술 (일본 미나미 공제병원오른쪽 어깨 관절순 부분손상)
7월15일 올시즌 첫 실전 등판 (삼성2군 3이닝 2피안타 무실점)
7월24일 1군엔트리 등록 (2군경기 8경기(8이닝) 1패 방어율1.13)
7월25일 롯데전 (1.1이닝 1피안타 무실점) (올시즌첫등판)
7월30일 두산전 (0.1이닝 1피안타 1볼넷 무실점)
8월15일 1군엔트리 말소 (2군행)
(7경기 6⅔이닝 평균자책점 6.75)
2007년 야구인생에 ‘마지막’이라는 배수진
조성민(오른쪽)의 몸매가 나란히 불펜 피칭 중인 정민철에 비해 날씬해 보인다.
조성민은 지난 2년 동안 살과의 전쟁을 벌였다. 지난 2005년 5월 전격 복귀할 당시 몸무게는
108kg였다. 이후 112kg까지 몸이 불어났다. 살인적인 러닝을 통해 살을 빼기 시작해
2006년에는 93~94kg로 줄어들었다.그리고 2007년 완벽한 근육질로 변한다.
2월14일 '약속의 땅'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스프링캠프
김 감독은 4일 훈련 도중 조성민과 함께 전력분석팀이 촬영한 투구폼을
컴퓨터 화면을 통해 관찰하면서 교정 작업에 나섰다
2007시즌 '마지막 기회'
2007년 (12경기) 1승 2패 방어율4.19
조성민은 지난해 1억 110만 원에서 25% 삭감된 7600만원에 2007시즌 연봉 재계약을 체결
조성민의 부활은 눈부실 정도였다. 조성민은 4월 26일 시즌 첫 선발등판을 5이닝 3실점으로
마친 후 본격적으로 선발로테이션에 합류한 5월 22일부터 6월 2일까지의 세 차례 등판에서
17⅓이닝 동안 단 5실점만을 내주며 평균자책점 2.60을 기록했다.
이후 4차례 선발등판에서 5이닝을 넘긴 것은 단 한 차례뿐.
그 기간 동안 성적은 1패 평균자책점 6.78이었다.
조성민은 전반기에만 43이닝(8선발)을 던지며 어느해보다 가능성을 확인한 터.
43이닝은 2005년 입단 이후 가장 많이 던진 것이었고, 평균자책점 4.19도 가장 뛰어났다.
올시즌 제5선발로 05년,06년 보다 더 좋은 성적을 냅니다.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였으며,
선발로 등판하여 호투하는 경기도 많았습니다. 올해는 정말 아쉬운 한해였습니다.
3년의 공백 그리고 부상후유증은 투수에게는 정말 큰것 같습니다.
조성민의 07년 등판일지
4월 8일 SK전 (2.3이닝 무피안타 2볼넷 무실점) (올시즌 첫등판)
4월14일 롯데전 (1.1이닝 5피안타 1탈삼진 1실점)
4월26일 LG전 (5이닝 7피안타(1홈런) 1사구 2탈삼진 3실점) (시즌첫패)
(2002년 5월22일 야크루트전 이후 5년만에 선발등판)
5월11일 두산전 (1.2이닝 무피안타 무실점)
5월15일 삼성전 (2.1이닝 무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
5월22일 현대전 (5이닝 4피안타 4사구 2탈삼진 2실점) (시즌첫승)
(국내 프로야구 진출 후 2번째 선발등판에서 값진 선발승)
(2005년 8월 30일 구원승을 따낸 이후 1년 9개월여만이다.)
5월27일 두산전 (6.1이닝 3피안타 3실점) 6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
6월 2일 삼성전 (6이닝 4피안타 3볼넷 1탈삼진 무실점)
6월 8일 LG전 (3.1이닝 4피안타(1홈런) 4볼넷 2탈삼진 2실점)
6월14일 SK전 (5.1이닝 5피안타 2사구 2탈삼진 3실점) (시즌2패)
6월20일 기아전 (2.2이닝 5피안타(1홈런) 2볼넷 3탈삼진 2실점)
6월29일 두산전 (3.1이닝 6피안타 3볼넷 3실점)
6월30일 1군 엔트리 제외
(12경기(선발8경기)1승2패 평균자책점4.19)
8월14일 어깨통증으로 2군행
10월22일 한화서방출 통보
조성민 선수의 국내프로야구 기록
연도 | 소속 | 평균자책점 | 승 | 패 | 세이브 | 이닝 | 피안타 | 탈삼진 | 4사구 | 실점 | 자책점 | ||
2005 | 한화 | 6.52 | 2 | 2 | 0 | 19 1/3 | 30 | 8 | 15 | 15 | 14 | ||
2006 | 한화 | 6.75 | 0 | 0 | 0 | 6 2/3 | 12 | 4 | 6 | 6 | 5 | ||
2007 | 한화 | 4.19 | 1 | 2 | 0 | 43 | 41 | 18 | 24 | 23 | 20 | ||
통산 | 5.09 | 3 | 4 | 0 | 69 | 83 | 30 | 45 | 44 | 39 | |||
체력71 제구62 직구60 커브56 슬라이더60
07조성민(체인져블카드)
(3시즌) (39경기) 3승 4패 4홀드 방어율5.09 69이닝 30탈삼진
마구게임에는 조성민선수 카드가 단 한장도 없습니다.
어떻게보면,그는 우리에게 야구선수 조성민보다는 최진실과 결혼&이혼이라는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더 많이 기억되는 선수로 남을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비운의 투수 조성민 선수는 은퇴를 하게 됩니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해외연수후 지도자로 새출발을 모색하고 있는중이라고 합니다.
일반인으로 완전히 돌아간 조성민은 내년 개업을 목표로 개인사업을 구상하며,
일본을 오가며 요식업·의류사업 등을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에서 조성민선수는...
"조성민은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열심히 했던 선수,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선수.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놀고 먹다가 이렇게 된 줄 안다. 걔가 뭐 한 게 있는데 일본에서 뭐!
그러는 분들이 있는데 난 노력 많이 했다. 나를 아끼는 팬들은 내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기억속에 남아있는 선수가 몇명이 되시는지 궁금하군요...
(출처)김민우의 野生野死,SPORTS2.0 제77호,스포츠조선,스포츠투데이,파울볼등
- 작성자 :삼손노 (samson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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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모님때문에 피본 천재들이 한국에 많죠..;;최동원 선수가 대표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경기중에 싸인지시를 아버지가 해줬다는 후문까지.ㄷㄷㄷ
조성민 선수 신일고 시절... 그리고 요미우리 시절 올스타전 전까지 정말 최고였습니다. 솔직히 박찬호 보다 훨씬 좋은 공을 던졌습니다. 뛰어난 컨트롤에 빠른 공, 140km로 떨어지던 포크볼... 정말 일본 선수들이 건드리지도 못하던 모습이 그립습니다. 3완봉승 할 때 정말 최고였는데...
전 조성민 lg로 오길 그리 바랬었는데 일본으로 가서 무지 섭섭했어요
원래 조성민이 고교 때 LG팬이었죠. 주간야구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LG가 임선동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손경수 문제로 두산과 경쟁이 없었다면... 조성민 선수 아버지와 고최남수 감독(고려대)과의 친분이 없었다면... LG로 올 수도 있었죠... 사실 아쉬웠습니다. 고2때까진 임선동 선수가 한수 위였지만 고3 땐 분명 조성민 선수가 더 위력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요즘 헛소리하는거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복귀하고 안잡은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_-;;;; 만약에 잡았더라면 우리 이미지는 완전 나빠졌을겁니다.
조성민 실은 요미우리 가기 이전에 두산이 낼름 잡았으면 막장크리 안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