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미의 해방 전후사]
좌우 갈등 속에서,
이승만 "총선거로 심판받자"
승부수 던졌다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
반탁과 좌우합작 운동을 둘러싸고
미군정과 극한 갈등 치달은 이승만
입법의원을 선거로 구성할 것 요구
"신탁통치와 소련에 협력 강요하면
미군 철수 후 운명 정하겠다" 주장
그 '한국민 자결주의' 대중이 수용
해방 전후사를 둘러싼 해석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돼 왔으나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일제가 1940년대 들어 조선어
신문들을 폐간하고 출판 활동을
탄압하면서 조선인의 시각이 담긴
당대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한 원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종전,
미군정과 정부 수립 등을 더 깊이
연구하지 않고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편향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재미 학자 문유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
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46년 5월 인천에서 열린 독립전취
국민대회에 참석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 후버 연구소 >
해방 공간에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세 가지 노선이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
이승만의 길,
그리고 공산당 계열의 인민공화국
고수와 무력 투쟁 노선이었다.
삼상회의 결정은 미소 합의에
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5년간
신탁통치를 하자는 것으로,
좌우합작운동과 연결된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임시정부 구성은 소련과의 합의가
아니라 한국민의 뜻이 반영된
선거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공산당 계열의 무력 도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승만은 선거를 통 좌우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 시기의 복잡한 정치사 속에서
그의 노선은
‘자결주의’
와
‘보통선거를 통한 국민의 주권 실현’
이라는 두 축으로 선명하고
일관성이 있었다.
‘미국의 앞잡이’라는 악선전
어떤 왜곡된 주장도 반복적으로
오래 계속하면 그 주장이 진실이
되는가?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
라는 좌익의 선전은 1945년 12월
중순 이승만이 라디오 연설에서
소련이 북한을 포함, 주변 약소국을
위성국가화하고 공산주의를
강요한다고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그간 미군정의 정책이 우익
일변도는 아니었음을 밝히는
연구들이 발표됐지만, 미국이
해방 직후부터 소련 봉쇄를 위해
이승만을 지원했다는 시각은
교정되지 않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승만과 미군정의 밀월
관계는 1945년 10월 중순 그의
귀국에서 1945년 12월 말
삼상회의 결정, 늦어도 미군정의
좌우합작정책이 시작되는 1946년
3월 초반을 기점으로 끝났다.
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은 진주 이후
한국민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보며
신탁통치 추진이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에 미 정부에
“즉시 독립”
을 제안했으나, 국무부는 소련과의
합의를 우선해 이를 무산시켰다.
삼상회의 협상에서 미국은 소련
점령지에서 자유주의적 정치 단체
활동 보장을 담보하지 않은 채,
임시정부에 참여할 남측 단체의
선택을 소련과의 합의에 맡기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연재 5회 ‘하지와 신탁통치’ 참조).
이후 반탁과 좌우합작운동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갈등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는 이승만을 견제하려 했지만
그들의 대립은 심화됐고 이승만은
독자 노선을 발전시켰다.
----1945년 11월 이승만(왼쪽)은 막 귀국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운데)와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만나는 자리에 동행했다----
< 후버 연구소 >
군정 주도의 좌우 합작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모색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1차 미소공동위원회
(공위)가 실패로 끝난 1946년 5월쯤
시작된 것으로 봤지만, 실상은 3월
초 공위의 착수와 동시에 본격화됐다.
군정에서 합작 실무를 담당한
레너드 버치 중위는 1946년 3월 3일
여운형을 방문한 데 이어,
3월 9일과 15일 김규식과 만나
방향을 논의했다.
미군정은
“한국인의 의사를 반영한다”
는 명분으로 민주의원을 구성했으며,
이승만이 의장직을 맡았다.
이를 주도한 프레스턴 굿펠로우는
이승만 추천으로 하지의 고문이 된
사람이다.
김규식은 버치에게 민주의원은
합작을 위한 조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운형의 의사도 반영됐을 것이다.
이후 합작위원회는 민주의원과
별개로 조직됐다.
굿펠로우는 1946년 5월 미국으로
출국했고, 거듭된 요청에도 하지는
그의 한국 귀환을 불허했다.
군정이 주요 파트너를 여운형과
김규식으로 바꾼 것이다.
1946년 6월 29일,
군정 장관 러취는 과도입법의원
구성을 제안했다.
군정은 입법의원 구성과 좌우합작을
긴밀하게 연계했다.
버치 문서철에는
‘합작 협상 대표자들에게 제시할
발언 초안’
이라는 문서에 하지 장군이 입법의원
구성의 원칙 등 합작 참여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군정은 온건파
정당을 중심으로 합작을 추진하되
공산주의자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박헌영과 김원봉의 추종 세력 및
홍명희 등 좌파적 지식인들까지
참여시킨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합작 기구가 공위의 재개와 함께
“남북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임시정부
후보자 명단을 제안하는 역할을 할 것”
을 분명히 인지하도록 했다.
----이승만이 1948년 5월 제헌 국회
개회식을 주재하고 있다----
< 미 국립문서보관소 >
입법의원 선거와
이승만의 신노선
군정은 입법의원의 정치적 구성을
통제하기 위해 절반은 선거제로,
절반은 임명제로 충원했다.
1946년 10월 실시된 선거에서
민선의원 45명이 선출됐고,
관선의원 45명은 하지가 임명했다.
민선 의원 선거 결과 우익이
약 75% 비율로 압승했는데, 하지는
좌익계를 다수 임명해 균형을 맞췄다.
그동안 김규식과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관망하던 이승만은
입법의원 선거를 계기로 군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과의 합의를 우선하는
미국의 입장이 한국민의 자결주의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1946년 11월 4일 이승만은 하지에게
서신을 보내 임명제의 비민주성을
지적하며 입법 의원 전원을 선거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 대립을 통해 이승만은 좌우
갈등을 위로부터의 합작이 아니라
보통 선거로 해결하려는 노선을
발전시켰다.
이런 방향은 그의 자문역이던
굿펠로우도 공유했다.
굿펠로우는 입법 선거의 결과를 보고
남한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이
제한적이라고 판단했다.
선거라는 정당한 경쟁을 통해
좌우 갈등을 관리할 수 있다면,
선거는 이념적 선택을 넘어선
실용적인 결정일 수 있다.
또한 선거를 방해하거나 게릴라
투쟁에 의존하는 방식은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인 행위가 된다.
굿펠로우는 총선거 추진을 현실적이고
전향적인 노선으로 평가했다.
----1946년 11월 이승만이 구미위원회를
통해 유엔에 보내려 한 문서. 그는 “삼상회의
결정이 한국민의 자결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유엔은 이를 중단시키고 한국의 자율정부를
승인하라”고 요청했다----
< 후버 연구소 >
자율 정부와 유엔 이관
이승만은 1946년 12월 미국 방문을
전후해 합작 문제와 국민의 자결권
침해를 워싱턴 캠페인으로 전환했다.
그는 자신의 조직인 구미위원회를
통해 입법의원 선거로 구성될 한국
정부 승인과 군정의 권력 이양을
국무부에 요청했다.
국무부가 이를 거부할 경우 유엔
(UN)에 한국 문제를 이관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굿펠로우는 우선 국무부와의 협력을
모색하고, 유엔 제소는 보류할 것을
권고했다.
후버 도서관의 굿펠로우 문서철에는
1946년 11월 22일 서울에서
구미위원회로 전송된 공식 전문이
포함돼 있다.
이승만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유엔을 수신처로 하고 있다
(사진 참조).
이승만은
“미국이 신탁통치와 소련과의 협력을
강요한다면, 차라리 미군이 철수해
남과 북이 통일하고, 그 결과가
자유이든 노예 상태이든 한국인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북을 공산주의 지배 아래 둔 채
남한에서 인위적인 합작 정부를
추진하는 것은 한반도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그는 경고했다.
결국 여운형이 암살되고 제2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갈 무렵,
상당수 대중은 삼상회의 결정을
보통선거제의 대립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독립 국가의 건설을 좌우합작
대 총선거, 미소 협상 대 한국민의
자결주의라는 선명한 대결 구도로
치환해온 이승만의 캠페인이
대중에 수용된 것이다.
극심한 좌우 갈등 속에서 엘리트의
협상이나 폭력 충돌 대신 총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자는 주장은
합리적이었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가 정치적으로 승리한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미소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결주의와 선거에 의한 주권
실현이라는 선명한 노선을 제시하며
대중을 자기편으로 이끌었다.
문유미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상림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 탁?옳?지도력과
애국심에 경탄을 금할 수 없으며 존경스럽다.
frekor
이승만이 무능하다고? 해방 후 좌익의 준동으로
인한 정국의 혼란과 북의 6.25 남침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승만의 최대 업적. 이승만 정부 시절
연 5~6% 경제성장.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아니라, 이기붕이 주도한 것.
4.19 이후 이승만의 하와이 생활을 보면,
이승만이 부정부패를 하지 않았음이 확인됨.
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가에서
이런 국가지도자는 없었다.
웜홀
자유민주체제는 이대통령이, 밥은 박대통령이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 외는 시대 소음일 뿐!....
애국보수1
이승만의 부정선거는 역사적 사실이고
부정부패에 무능하다고 박정희도 평가했습니다.
4.19 혁명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필리핀이나
베네수엘라가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