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국침탈' 눈감은 미.영...한국 외교관의 분노
5월 12일은 이한응 열사의 순국일입니다.
118년 전 그날 런던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외교적 고립 책략과 일제의 병탄 움직임을 먼저 읽어내고 죽음으로 항거한
영국주재 외교관.
그는 1905년 을사년 최초의 순국자로, 독립운동의 물꼬를 튼 선구적 투사였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고향인 용인에 묻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고종 황제가 그의 묘소 위치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목숨 걸고 지키려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위대한 용인인을 꼭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요.
'용인소식' 5월호는 이동읍 덕성리 용인테크노밸리 한복판에 모셔진 그를 집중 취재했습니다.
묘소 부근 우람한 팽나무와 붉은 철쭉 앞에서 먹먹한 심정으로 고개 숙여 용인의 충혼을 새겼습니다.
을사년 첫 순국열사 31세 이한응의 그날
대기획 민족항쟁 불지핀 첫 순국...용인 이한응 열사를 기억하라
1993년 8월 15일 주영국 한국대사관 입구에 동상 하나가 세워졌다.
영국에 사는 교민들이 1980년대에 결성한 '이한응 공사 추모사업추진회'에서 오랜 모금 운동 끝에 이뤄낸 일이었다.
해마다 주영 대사관에서는 광복절과 이한응 순국일(5월 12일)에 이 충절의 동상 앞에서 국가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분투
위에서 여기에 서 있게 되었는가를 되새긴다.
영국 런던, 31세 외교관의 죽음
1905년 5월 12일 영국 런던시 얼스코트(Earl's Court) 트레보비르 로드(Trebovir Road) 4번가에서 31세의 젊은 한국인 외교관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주영국 대한제국 공사관 3층 침실에서 교수 순국한 그는 대한제국 공사를 대행하던 서리공사 이한응(1874~1905)이었다.
주영공사를 지낸 민영돈이 전해인 1904년 귀국한 뒤 혼자 남아 초유의 국가 위기에 맞서 고군분투하던 중이었다.
당시 본국으로부터 전문 한통을 받은 뒤 죽음을 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공관 폐쇄를 명령하는 전문이었을까.
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해 5월 15일자 영국 일간지 던디 이브닝포스트 5면에는 '창가의 얼굴-한 외교관의 비극적이고 명예로운 고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 리드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매일같이 공관 위층의 창가 커튼 뒤에 서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조국을 생각하며 몇 시간씩 그 자리를 지켰다'
창가의 얼굴, 명예로운 고독
5월 4일 경 이한응은 런던 하이드파크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한응에게 협박을 했다.
일본의 끄나풀이라고 여긴 그는 영국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경찰이 공사관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이한응은 출타 중이었다.
공관을 지키던 영국인으로부터 '런던 남부의 도킹 근처 마을 리스힐로 누군가를 만나려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때 이한응이 리스힐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영국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롤랜드 본 윌리엄스였다.
그는 대한제국 공사관 바로 옆에 살던 이웃으로 이한응과 교분이 깊었다.
윌리엄스 가족과의 피크닉
윌리엄스 가족들은 부쩍 우울해하는 이한응과 자주 자리를 같이 했다.
그들은 기분 전환도 할 겸, 조만간 함께 피크닉을 가자고 그에게 권했다.
영국 경찰이 그를 찾아 갔을 때 외출한 곳은 바로 윌리엄스 가족의 별장이었다.
이들의 친분은 순종의 영어교사였던 릴리 졸리라는 외교관 부인이 모국인 영국으로 부임하는 대한제국 외교관을 윌리엄스에게
소개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본국의 지원이 끊겨 거의 방치된 대한제국 공사관을 이웃 건물에 입주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5월 12일 무슨 일이
그런 상황에서 순국을 결행한 것이다.
5월 12일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한응은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자신의 자결 이유를 밝히는 글과, 부인과 형님에게 전하는 편지였다.
아내에게는 '아들도 못 낳고 이렇게 가게 되서 미안하다'고 밝혔다.
죽는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적어놓았다.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육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 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죽는 이유를 뚜렷이 밝힌 이 유서는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렸고, 향후 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된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 저 글을 실어, 외세 저항의 기점을 뚜렷이 찍어놓았다.
을사늑약 6개월 전에, 왜?
일본이 을사늑약을 맺은 날은 1905년 11월 17일이다.
이 조약의 부당함과 참담함을 통탄하며 민영환이 44세고 자결한 날은 13일 뒤인 11월 30일이다.
이한응은 왜 저 늑약이 맺어지기 6개월 전에, 그것도 영국에서 '종묘 시직을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라는 참담한 예언을
남기고 순국을 했을까.
이한응은 1874년 10월 30일(음력 9월 21일)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에서 이명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중에 숙부인 이경호가 사천군수 시절 동학농민군을 상대하다가 황초현에서 목숨을 잃은 뒤 숙부 밑으로 출계를 했다.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한다.
1899년엔 한성관립영어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2년간 국내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그는 1901년 3월 영국 및 벨기에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외교관으로 부임했다.
1903년 10월 정3품 통정대부로 승진한다.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 당사관이 된 것이다.
1904년 주영공사로 발령받아 함께 왔던 민영돈이 귀국했다.
이후 이한응은 서리(업무대행) 공사가 되었다.
1901년부터 영국에 주재하면서 국제 정세를 정밀하게 파악하기 시작한 이한응은 대한제국이 처한 위기를
당시 외교의 최일선에서 읽어내고 있었다.
이한응이 영국외무성에 보낸 '글로벌 구조와 대한제국'
1904년 1월 13일 이한응은 영국 외무성을 방문해 한반도 정세분담을 담은 10쪽의 편지와 메모를 건넸다.
그는 영국에 한반도 문제에 진정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하며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 영토보장을 영국정부에 요구했다.
영국 외무성에 보관돼 있는 '이한응 메모'는 놀라운 문서다.
이한응은 당시의 세계를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 4국을 꼭짓점으로 하는 사각형 형세로 표현했다.
그는 영불이 연합해 러-일을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3각 구도를 만들어야 세계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열쇠를 쥐고 있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보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은 이미 1902년 1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러시아의 아시아 팽창을 저지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영국은 일본의 손을 잡았다.
중국에서의 입지 축소 우려와 인도 지배 문제도 작용했다.
다름 아닌, 영국식 이이제이(일본을 풀어서 러시아를 견제함)였다.
영국은 일본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한응이 메모를 건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일본이 러시아를 주저앉혔다.
이 결과가 무슨 의미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한응은 영국 외무성에 지속적으로 먄담을 청했지만 서면으로 이야기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당시 외무성의 담당자는 이한응이 보낸 메모 한 귀퉁이에 '세상 물정 참 모른다'라고 써놓았다.
영국 외무성 '이한응이 세상 물정 모른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다.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및 외교고문을 두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국가운영과 외교권한을 일본이 장악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태에 이르자 이한응은 대한제국의 해외 외교관들이 공동대책을 논의하자고 연락을 취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1904년 말 일본은 대한제국 외교관 인원을 줄이기 시작했고 이한응은 런던 전권공사를 임명해달라는 전문을 고종황제에게
보내줄 것을 영국 측에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 작은 음모는 한국공사관을 강화하려는 기도'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1905년 3월 러일전쟁이 길어지자 영국과 미국이 대일 지원을 줄이기 시작했고, 일본은 전쟁을 완결 짓기 위해
러일조약 체결을 서두른다.
이 사태에 이한응은 '러시아가 조약에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하는 덧을 막아달라'고 영국에 각서를 전달했다.
영국 외무상은 '전쟁 당사국간의 교섭에 영국이 관여할 수 없다'는 취지로 거절한다.
을사늑약 몇 개월전, 미-영은 일본의 한국 침탈 눈감기로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전면 박탈하는 조약을 강제로 맺는다.
고종황제는 이 조약에 대해 확인서명을 하지 않았기에, 원인무효의 조약이었다.
이 제2차 한일협약을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늑약은 무슨 뜻인가.
사람을 짐승 다루듯 하여 강제로 굴레를 씌우고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는 조약을 뜻한다.
이 조약이 맺어지기 넉달 전인 7월 27일, 일본은 미국이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해주는 밀약을 맺었다
(미국에 게 필리핀 지배를 눈감아주는 조건이었다. 가쓰리-태프트 밀약으로 불린다).
그리고 석 잘 전인 8월 12일 영국은 영일협약에서 명시한 '대한제국 독립보장 조항'을 삭제해주기로 했다
(영국이 조산을 차지한 일본을 공격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제2차 영일동맹협약으로 불린다).
일본은 이렇게 전지 작업을 끝내놓고, 러시아와 조약을 맺어 한반도에서 완전철수토록 했다.
을사늑약은, 이미 정해진 게임의 현실화
대한제국을 삼킨 일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의 힘겨루기의 결과가 아니었다.
철저히 당시 강대국 사이의 게임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다.
이런 음모와 비극을, 외교현장에서 몸서리치도록 생생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이, 재영 공사서리 이한응이었다.
그의 죽음은, 이 지독한 제국주의의 탐욕과 폭압에 맞서, 이미 경련하고 있는 조국을 일깨우려는 마지막 몸짓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한응의 죽음은, 제국주의 식민지 탐욕의 결과물인 을사늑약에 통탄한 민영환의 뒤늦은 비명보다 훨씬 예민했던 몸짓이었다.
대한제국의 임박한 침몰을 경고하며 긴급한 각성을 촉구한, 이 땅의 지식인이 뿜어낸 가장 절절한 경고음이었다.
서른 한살에 그는, 조국이 세계의 탐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죽음으로 부르짖은 것이다.
나라가 힘이없고ㅡ 세상에 어두우면 어떻게 된느지를 똑똑히 말해준 사람이다.
우리는 그 시절에 이토록 깨어있었던 지성과 행동하는 외교관을 제대로 얼고 있는가.
역사는 대체 무엇인가.
그 뜨거운 충혼이 고향 용인애 묻한 까닭
그는 유서에서 '용인 선산 밑 양지에 깊이 묻어달라'고 요청했다.
그곳이 용인특례사 처인구 이동읍 덕성리 산 70-1번지 묘소(용인시 향토유적 제49호)다.
1965년 상석과 촛대석, 묘비가 만들어졌다.
이곳엔 용인테크노밸리가 들어섰다.
시는 공단 한복판에 위치한 그의 묘소를 조심스럽게 지켜 그의 호 '국은'을 딴 이름의 소공원을 조성했다.
그가 순국을 다짐한 이후, 용인에 묻히고자 한 것은 우연한 결심이 아닐 것이다.
못다한 충혼을 그가 태어난 이 자리에 새겨, 이후 이 굴욕을 청산하고 나라를 다시 세워 빛낼 날들을 지하에서나마 보고자
했으리라.
이한응 묘소 앞에서 문득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느꼈다.
뒤늦은 감읍인가.
쑥스러웠다.
118년 뒤인 2023년, 저 태크노밸리가 의미하고 있는 이 나라 경제의 번창과 국력의 글로벌 대약진은 그 날의 한맺힌 굴욕과
좌절을 갚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이한응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2016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그를 선정했다. 용인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