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사인 송사(宋史)를 편찬한 원나라의 탁극탁이 편찬한 중국 정사인 요사에 나오는 기록으로 본문에는 경주 대안군(軍)이라 되어 있지만 송사를 살펴보면 당시 중국에는 경주 대안군(軍)은 없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경주 대안군을 흥평이라 고치고 대안이라는 이름을 황제의 년호로 사용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중국에 경주가 있었긴 하지만 송사를 살펴보면 경주에는 대안군(軍)이라는 것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경주 대안군은 한반도 경주로 보아야 하며 또한 대안군(軍)은 대안군(君)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즉, 요나라 황제 도종(道宗)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경주김씨의 대안군에 대한 내용을 알고 대안군에게 시호를 내리고 대안군의 대안을 자신의 년호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1080년대의 기록으로 이미 이 당시에 경주김씨 대안군파가 있었음과 동시에 대안군파가 경주를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일부 영분공파에서 주장하듯이 경주를 본관으로 먼저 사용한 가문이 영분공파가 아니라 대안군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미 대안군파가 경주를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후에 고려왕중 누군가 영분공에게 경주군이라는 호칭을 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내용을 반박하려면 영분공파에서 고려왕에게 경주군으로 책봉받은 문서내지는 그런 기록을 보여야만이 될 것이다. 아래 본문에서 알수 있듯이 이미 경주김씨 대안군파는 한반도는 물론 중국 요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진 가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1080년 이전 부터 이미 경주김씨 대안군파로써 살아왔음을 상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발견된 대안군과 그의 형의 묘비에 기록된 고려평장사보국대안군김공은열지묘(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之墓)라는 것은 사실로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대안군의 정식 명칭은 보국대안군(補國大安君)으로 보아야 하며 묘지명의 평장사는 격을 낮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문의는 본인에게 해주길 바랍니다. 위에서 언급한 자료들은 모두 본인이 소장하고 있으니 언제든 제시할 수 있읍니다.
<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