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소고 (2)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중보 기도해 주시므로 그 응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적 기도문인 시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그러므로 구질구질하게 이방인과 같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 21:14) 라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주를 찬미하며 (행 16:25) 사는 것이 주님이 불러주신 그리스도인의 바른 기도의 삶입니다. - 날 위하여 날 위하여 예수 간구하시네 - 나의 죄 사하시기를 쉬지 않고 비시네 - 새벽부터 저녁까지 기쁜 찬송 늘 하리 - (찬송 426장)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인구의 25%라는 세계적인 놀라운 양적 발전을 이루고 있기에 전국 방방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기도가 쉬지 않고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불의와 부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음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질적으로 타락하고 있음은 웬 까닭이겠습니까?
한마디로 기도생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의 기도가 아니라, 말씀에 화답하므로 순종하는 삶의 기도가 아니라 사리사욕이 유도하는 기도이기에 응답을 받지 못함은 물론이고 따라서‘믿음’도 마귀의 유혹과 조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의 부귀공명과 무병장수가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부귀공명과 무병장수가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열쇠가 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6:33)는 주님의 말씀은 전혀 실천이 없는 공염불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설령 기도한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도라면 응답 없는 응답이 곧 잘못된 기도임을 발견하는 슬기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 베드로, 바울, 스데반 등이 세상에서 부귀공명과 무병장수를 누리며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면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들을 그렇게도 어려운 삶과 비참한 죽음으로 방치하셨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부귀공명과 무병장수가 아니라 의와 인과 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며 이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를 즐겨 들으시는 하나님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공의롭지 못한, 공평하지 못한, 정직하지 못한 기도입니다. 그것도 철야기도나 새벽기도 또는 금식기도나 입산기도라는 불퇴전의 배수진을 치고 그야말로 억지떼를 쓰는 기도입니다. 이와 같은 불퇴전의 기도는 누가복음 18장의 사람을 무시하는 어떤 도시의 한 재판관과 한 과부의 비유를 성경적 근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진실한 믿음의 기도인가?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눅 18:8)
행함 없는 믿음, 곧 주님과 동행치 않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행함 없는 기도, 곧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전제로 하지 않는 기도도 죽은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위한 소망이나 사랑은 망각하고 그저 장시간 영감으로 엎드려 기도하면 영적인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잘못된 기도관이 기복신앙을 만들고 교회를 타락시키므로 마귀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을 우상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만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환 자신의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오직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을 순종하는, 믿을 수 있는 자녀에게 마음 놓고 용돈을 주듯이 하나님께서도 유창한 언변이나 끈질긴 강청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을 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집단에서 행해지는 기도를 보면 그렇게도 열광적이고 적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던져 흡사 발광에 가까운 행동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악령에 이끌리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인격적이라야 합니다. 흥분과 광기 어린 유치한 행동이 아니라 은밀하고(마 6:6) 땀 흘려 힘쓰고 애쓰는 간절한(눅 22:44) 기도라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기도라야 합니다(벧전 4:7).
주일 예배 시, 거의 공식적인 틀에 박힌 내용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표기도를 보면,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죄목을 나열하고는 그나마도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로 맺는 것이 아니라 주일예배에 참석한 행위를 믿음으로 여기고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지은 죄를 스스로 사하는, 개신교적인 ‘고해성사’를 하고 만족해합니다. 주일성수가 곧 회개의 열매라고 착각합니다.
기도문을 미리 작성하여, 보고 읽는 교인들도 있으나 바람직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문이 막히면 ‘아버지, 아버지’아니면 ‘주여, 주여’를 연발하면서 중복되거나 앞뒤가 뒤바뀌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으나 하나님께 향한 진솔한 느낌이 없고 듣는 사람을 의식해서 작성된 문장을 읽는 것으로 기도라기보다는 일종의 축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와의 대화에서 할 말을 미리 기록하여 그것을 보고 대화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진정이 있다면 기도는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제도교회에서는 진실한 기도다운 기도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회중이 듣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실속 없는 미사여구로 자신의 품위를 자랑하고 가망 없는 헛맹세도 하게 됩니다. 죄를 자복하고 죄 짐을 벗기 위한 기도가 오히려 죄를 더욱 질 수밖에 없는 기도가 되어 버립니다. 한마디로 기도를 위한 기도일 뿐입니다. 선교사 C.T.스터드(Charles Thomas Studd) 는 ‘기도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고르반식 직무유기이며 바리새적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대표기도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단골 메뉴입니다. 한 나라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공적 기도입니다. 그러나 실제적 삶과는 무관한 헛맹세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한 행위가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국제 유가의 폭등이 예상되어 에너지 절약을 위한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고 불필요한 전기 플러그 하나라도 뽑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동조하기는커녕 역행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주일이면 교인들이 타고 오는 승용차로 교회 주변은 매우 혼잡합니다. 주차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인근 도로에 불법 주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교회재정은 주차장 확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형교회의 주차장 봉사는 장로가 되는 필수의 봉사라고도 합니다. 주일 하루 아니 몇 시간도 절제를 못하는 이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TV에서 일본의 어느 지방 의회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자전거를 타고 가서 밤늦게까지 의정을 숙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일부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외유성 해외 연수로 물의를 빚는 우리의 지방 의회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삶이 진정 애국하는 삶이겠습니까? 말과 기도로 하는 애국이라면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철이 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해 집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마다 입시생을 위한 학부모와 함께 하는 기도회가 열립니다. 이름하여 <수험생을 위한 40일 작정 새벽기도회>라는 것입니다. 기도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입시생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희망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입시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학력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평소에 쌓은 실력의 결과로 말미암는 것이지 문제의 답을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행으로 맞추는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합격자의 수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반대로 불합격자의 수도 이미 누구의 몫이든 간에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합격과 불합격은 부정이나 조작이 없는 한,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입시 전에 하나님께 기도할 제목이 될 수 없는 사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이, 우리 교회 학생들이 합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기복신앙의 발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는 신앙으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합격시켜 달라는 기도도 어불성설인데 한 층 더해서 만일 합격시켜 주시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조건부적인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흥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불손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이름있는 대학을 나와서 이름있는 관청이나 기업에 취업해야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정상이며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이름이 없는 대학일지라도 얼마든지 마음만 있으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독학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직업이 무엇이든 하나님과 동행하느냐 아니하느냐의 삶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입니다.
합격을 목적으로 하는 기도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득불 기도의 필요성을 찾는다면 오히려 불합격하는 학생들을 위한 기도가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기독교인의 신앙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여건으로 보아 불합격하는 학생들의 심리적 타격은 실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시 까지는 매우 성실하게 교회에 다니던 학생들이 대학 입시에 떨어지면 그 날부터 자존심에 손상을 입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서 교회 출석을 단념하게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공과 출세와 승리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기도합니다. 심지어 운동 경기에서도 ‘페어플레이’를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편이 꼭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무슨 행사를 위해서도 남의 경우는 헤아림이 없이 비가 오지 않는 좋은 날씨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농민의 애타는 심정도 아랑곳없이 말입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난처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누구를 위하여 응답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기도를 마무리 하셨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3-15)
끝으로 주일예배나 헌신예배 때마다 헌금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는데 교인들이 정성을 드려 바치는 헌금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헌금을 바친 손길들을 축복하시어 사업이 번창하여 차고 넘치는 재물축복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 헌금을 받아 사용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암시하고 있음과 동시에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에게 기복신앙을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 헌금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원한다면 더욱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제하며 살 수 있는 은혜와 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1-2)
교인들의 교역자들이나 제도교회를 위한 아부성 기도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교역자들이 교인들의 육적인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맹목적 순종과 기복적 신앙을 유도하는 기도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가정 심방이나 개업식, 문병, 추도예배 등에서 무속인들이나 우상숭배자들의 기도 내용과 같은 재물과 건강 축복에 큰 비중을 두거나 엉뚱하게 사자(死者)를 위한 기도까지 우회적으로 어물쩍 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닌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하는 입장에서는 적어도 단호하고 분명한 말을 구사해야 합니다. 주위의 인정을 보고, 체면을 보고, 분위기를 보고 제약을 받는 기도라면 이미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할 줄 모른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행 4:19)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공의와 공평과 정직을 외면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눈치를 보면서 그 사람들의 체면이나 권위 또는 빈부귀천에 따라 의도적으로 기도 내용이나 어투를 달리한다면 이는 기도가 아니라 무속인들의 주문(呪文)이나 주술(呪術)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첫댓글 메일로 받았는데...오늘 주신 말씀을 가끔씩 꺼내보려고 스크랩함에 넣었습니다 ^ㅡ^ 내가 한 발 물러 서면 한 발 다가 오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샬롬
감사합니다.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뜻대로 사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않는군요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해아려 보려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의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스러워서 하루가행복해요 어느교회에서 운영하는건가요 운영자님 감사합니다 샬롬
귀한 글을 읽고 간직하려 가져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참으로 감사 합니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통하여 평생동안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하고요~ 동감이 갑니다. 저도 얼마전 고3 여고생 학생자매에게 했던 내용과 동일해서 더욱 은혜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