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 수도산(修道山) 수도암(修道庵)을 찾아서 ①
- 대적광전(大寂光殿)과 약광전(藥光殿) 그리고 삼층석탑 -
지난 8월 29일 이 시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 중의 한 분인 고우(古愚) 스님께서 입적하시어 9월 2일에 봉암사에서 다비식을 봉행하던 그날, 우리는 산청의 처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내려가면서 우리 상경길에 김천 수도암을 찾아보면 어떨까 넌지시 이야기하니 좋다고 하여 수도암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적하신 고우 스님의 출가지가 바로 수도암이고, 전 종정이시었던 법전(法傳) 스님의 주석처이며, 평소 존경하는 원인(圓印) 스님께서 수도암 선원장과 회주 소임을 보신 곳이기에 더욱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처가의 일을 모두 마치고 9월 5일, 10시에 상경하고자 집을 나서서 김천으로 가는 국도로 길을 잡았습니다. 예전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없었을 때는 김천을 통하여 상경하곤 했는데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랜만에 김천쪽으로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날씨는 잔뜩 찌푸려 있고 급기야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비가 오는데 그냥 다음으로 미룰까요?" 하니 "이왕 마음을 낸 것이니 비가 오던 말던 가요." 그래서 느긋하게 마음먹고 달렸습니다. 산청, 생초, 함양, 거창을 지나 김천 대덕에서 방향을 틀어 네비가 안내하는 대로 수도암을 향해 가는데 예전에 갔던 청암사쪽으로 갔습니다. 하기사 청암사에 갔을 때 저쪽이 수도암이라 해서 일찍이 수도암이 유서 깊은 절임은 알고 있었습니다.
청암사와 수도암이 갈리는 길에서 왼쪽으로 향하니 경관이 수려하고 달리는 차도 별로 없어 풍광을감상하며 지나갔습니다.
수도암 가는 길입니다.
마을을 지납니다. 이곳은 인현왕후길이라고 해서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인가 봅니다.
코로나 시대라 한산한 편입니다. 식당이 많이 보입니다.
인현왕후길을 지납니다.
수도암 가는 길에 인현왕후 길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길>은 김천에서 3년을 보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역사적 현장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길이라고 합니다.
인현왕후길 통해 수도암에 갑니다.
조선의 숙종(肅宗 15년. 1689)에 있었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란 사화(士禍)가 있었습니다.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한 가운데 1688년 소의(昭儀) 장씨(張氏. 張禧嬪)가 아들[昀]을 낳자, 숙종은 그을 원자로 삼고, 소의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봉했습니다.
이에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중심으로 아직 왕후께서 젊으시니 후사를 보실 수 있다며 시기상조라고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인들을 대거 숙청하고 남인들을 등용하게 됩니다. 사화(士禍)가 생긴 것이지요.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합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송시열은 유배 되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고, 서인에 속한 인현왕후도 폐서인 되어 궁에서 사가로 쫒겨나고, 부모도 봉작을 빼앗기는 등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때 외가와 가까운 청암사에서 3년을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서인의 신분이었지만 청암사에선 국모였던 인현왕후를 예우하고 모시기 위해 새로 한옥을 지어 모셨다고 합니다.
이 길을 걸어 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수도암 가는 길이라 접어 두고 갑니다. 인현왕후길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은 편도 1차선인데 군데군데 교행할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수도암 주차장 모습
12시 46분, 수도암 주자장에 도착했습니다. 인현왕후길이 끝나고 수도암 가는 길은 편도 1차선 길인데 중간 중간 교행할 수 있는 대기지가 있었습니다. 다행이 두 번 정도로 무난하게 수도암에 도착했습니다. 아, 드디어 수도암에 도착했습니다.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여전히 무심한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편액이 보입니다.
수도암은 수도산(修道山. 해발 1317m) 상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절로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 1438(수도리513-6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본사 직시사 말사인 청암사(靑巖寺) 산내 암자입니다. 절 위치도 1000m의 고지대이므로 여름에도 모기가 없고 그 아래 마을과는 한 달 가까운 계절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수행하기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수도암 안내판
수도암(修道庵)
「연대 : 신라시대(859년 헌안왕 3년) 위치 :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513번지
수도암은 청암사와 함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쌍계사의 소속 암자로 창건한 이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1900년에 포응화상(抱應和尙)이 건물을 증수하였다.
근래에 많이 퇴락하였으나 1969년 법전화상(法傳和尙)이 건물을 중수하고 선원(禪院)을 개설하는 등 많은 불사를 이룩하였다.
현재 본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 약광전(藥光殿), 나한전(羅漢殿), 관음전(觀音殿), 선원(禪院) 등이 있다. 선원은 1975년에 창건되었는데 85평에 이르고 창건 직후 외국인 수도자도 많았다.
나한전은 나한님의 신통력으로 여러 가지 영험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동ㆍ하안거를 실시하는데 수도를 하려는 스님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지정문화재로는 수도암약광전석불좌상(보물 제296호), 수도암삼층석탑(보물 제297호), 수도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07호)이 있다.」
수도암 편액. 戊辰 伽倻山人 淞月(1988년 가야산인 송월, 1926년~2008?) 스님 글씨
입구에는 수도암 편액을 걸고 안에는 봉황루(鳳凰樓)라는 편액을 걸고 있습니다.
수도산(修道山) 수도암(修道庵)의 내력(內歷)
「수도산은 언제부터인가 불령산(佛靈山)이라고 불려져 왔는데 100여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가호가 많다 하여 불령산이라고 하였다. 또 이곳 석불 이마에서부터 자주 방광(放光)이 있었으므로 불령산이라 불리기도 하며 수행자가 모여 수도하고 마음 밝히는 곳이라 하여 수도암(修道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암 창건 연대는 따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청암사 사적비에 쌍계사(현 증산면 소재지), 청암사, 수도암은 같이 창건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헌안왕(憲安王) 3년(서기 859) 통일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이때 국사 31세 때) 창건하시었고, 그 후 조선시대 제11대 중종 을사년(1545) 상거선사께서 중창하셨다.
다시 조선시대 제 16대 인조 27년(1649) 벽암(碧巖) 선사께서 중흥하셨으며 고종 31년 동학혁명 운동이 일어나 암자의 일부가 소실된 것을 6년 후 광무 4년(1893) 포응(抱應) 선사께서 다시 이룩하고, 그 이후 경허(鏡虛) 선사가 잠시 주석하셨으며, 그때 오대산에 계셨던 한암(寒岩)선사도 계셨고, 해방 전에 효봉(曉峰) 선사와 구산(九山) 선사가 계셨으며 6.25사변 전에 우봉 스님이 오시면서 상좌인 상호스님을 원주 보게 하다가 1961년까지 주지를 맡으셨다.
다음 법희 스님(61~62) 이어서 우룡 스님(62~64) 등각 스님(65~67) 법전 스님(69~87). 이후 2010년 3월 원인 스님이 선원장 겸 주지로 주석하고 있다.
특히 6.25 이후 큰 절이었던 쌍계사(현 증산면 소재지)가 전쟁 중에 불타고 난 뒤 수도암도 함께 퇴락하여 한동안 스님 없이 비어 있을 때도 있었으나 수도하기에는 도량이 너무 좋은 탓에 꾸준히 도력 있는 선승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근래 고승들이 모두 다녀간 곳이다. 1960년대에는 법당, 약사전, 정각, 선방 겸 요사 이렇게 4동만으로 점차 퇴락되어서 겨우 3,4명 스님이 수도하고 있었으나 1969년 해인사에 주석하시던 법전(法傳) 선사께서 이곳에 오시고 난 뒤 점차 불사가 이루어져 오늘날 같은 20동 가까운 대가람을 만드셨다. 또 20리가 넘는 오솔길을 지세를 이용하여 진입로를 닦아 차가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이 절은 도선국사가 창건 이후 꾸준히 선원으로 발심한 수행자가 자취를 숨기고 수도하던 곳이다. 현재에도 결재기간에는 절 안에 대중이 약 30명 그중 수도승이 20명 가까이 언제나 정진하고 있으며 원근 각지에서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수도암 카페에서 옮김-
봉황루 밑을 지나갑니다.
두 발을 다소곳이 모으고 무심삼매에 든 듯... 눈길을 끕니다.
마당 좌측으로 대적광전을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봉황루 통해 경내로 들어서서 전후좌우를 일관해 보니 봉황루의 규모가 꽤 큼을 알 수 있습니다. 봉황루 좌우로 종무소 등 여러 용도의 방이 많음을 봅니다. 앞에는 높은 곳에 대적광전이 있고, 마당 오른쪽엔 관음전이 위치해 있고, 왼쪽엔 대적광전을 오르는 계단이 있는가 하면 옆에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있고, 그 길 옆 위쪽으로 선원(禪院)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는 텃밭이 있습니다.
돌계단은 2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단 아래는 사자로 보이는 범상치 않은 세 마리의 동물이 여의주를 물고 있고, 계단 위에는 세 마리의 용이 역시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사자가 여의주를 문 것을 보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의 강우방 교수의 <한국미술의 틀린 용어 바로잡기> 중 중국의 용생구자(龍生九子) 설을 소개한 대목이 나오는데 그 중에 사자의 모습을 한 산예(狻猊)란 용이 생각났습니다. 이 산예는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긴다고 합니다. 용생구자(龍生九子)란 용이 낳았다는 아홉 자식을 가리키는데 모두 용을 닮지 않은 아홉 가지의 기이한 용을 말합니다.
용의 구자(九子)는 거북이를 닮았고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한다는 비희(贔屓), 짐승을 닮았고 먼 데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치문(鴟吻), 모양은 용을 닮았는데, 소리 지르기를 좋아한다는 포뢰(蒲牢), 호랑이를 닮았고 위력이 있어서 옥문(獄門)에 세운다는 폐안((狴犴), 탐욕이 많아 마시고 먹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도 잡아먹는다는 도철(饕餮), 물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공복(蚣蝮), 죽이기를 좋아하여 칼 자루에 새기는 신수인 애자(睚眦), 사자와 닮았고 연기와 불을 좋아한다는 산예(狻猊), 입을 닫아 있는 것을 좋아하며, 남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문을 지키는 신수로 사용된다는 초도(椒圖) 등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의주를 문 사자는 산예라는 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에는 여의주를 문 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입니다.
삼층석탑과 대적광전의 모습입니다.
옆에서 본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수도암의 중심 전각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입니다. 안에는 창건 당시 조성되어 보물 제307호로 지정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편액
대적광전의 본존은 석조비로자나불(石造毘盧遮那佛)을 모셨습니다.
석조비로자나불에 대한 설명은 <수도암 카페>에서 인용해 봅니다.
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遮那佛像)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2.5m 의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네모나며 풍만하고, 긴 눈, 작은 입, 평평한 콧잔등에서 위엄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단정하고 강인한 느낌을 준다.」
지권인(智拳印)을 하신 비로자나불(盧遮那佛) -보물 제307호-
「거구의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쪽은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다. 맨 위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연꽃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균형잡힌 모습을 나타내는데, 위축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며 탄력이 줄어든 점으로 볼 때 신라말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의 옆 모습
석불상의 봉안 내력
「도선국사가 이 부처님을 조성할 때, 수도암 터에 어울리는 탑과 모든 것을 조성했으나 석불을 만들 만한 석재가 없었다. 산 너머 거창 땅 부처골에서 큰 돌을 발견하고 다듬기 시작해서 드디어 칠 척이 넘는 거대한 부처님을 조성했으나 수도암까지 옮길 일이 막막했다.
이에 모든 대중들이 지극정성으로 7일 기도를 올리는데 마지막 날 수염이 하얀 노스님이 나타나 부처님을 옮겨 준다며 큰 석불을 등에 업고 나는 듯이 산을 오르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수도암 근처 지금의 아홉 살이에 이르렀는데 그만 칡덩굴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다.
이에 노스님은 수도산 산신을 불러 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데 칡덩굴에 걸려 그만 부처님께 큰죄를 지을 뻔하였다. 앞으로 다시는 이 절 주위에는 칡이 자라지 못하게 하라."고 호통을 치고는 부처님을 수도암에 모셔 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인지 이곳 수도암 주위에서는 지금까지 칡덩굴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선원장 원인 스님은 "노스님은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표적을 그와 같이 남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6.25전쟁 당시 이곳까지 북한군이 들어왔는데 부처님을 향해 총을 쏜 북한 병사가 그 자리에서 죽은 이야기도 있다. 큰 법당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얼굴에 총알이 스쳐 지나간 자리가, 지금도 자세히 보면 왼쪽 뺨에는 눈물자국처럼 흉터가 있다.」 -수도암 카페에서 옮김-
대적광전 옆모습
약광전(藥光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약광전 안에는 도선국사가 사찰의 창건당시에 조성했다고 전하는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보물 제296호)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약광전(藥光殿)이란 약사전(藥師殿)을 말합니다. 약사전은 약광전 외에도 만월전(滿月殿)ㆍ유리광전(琉璃光殿)ㆍ유리보전(琉璃寶殿) 등으로도 불립니다.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원래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의 약칭이며, 약사여래께서는 동방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의 본존이십니다. 이 동방 정유리세계를 동방 만월세계(滿月世界)라고도 합니다. 약사여래께서는 과거세에 보살도를 닦으실 때, 중생을 질병의 고통에서 구제하고 감각기관을 갖추게 하고 열반에 이르게 하고자 12대원을 세운 본원의 공덕으로 동방 정유리(淨琉璃) 세계의 주존으로 머물며 중생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약광전(藥光殿)이란 말도 약사유리광불(藥師琉璃光佛)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약광전(藥光殿) 편액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이 모셔져 있습니다.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 -보물 제보물 제296호-
「이 불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고 좁은 이마의 중앙에 커다란 백호(白毫)가 박혀 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풍만한 모습으로 온화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며 목에는 세 줄의 삼도(三道)가 나타나 있다.
몸에는 선으로 표현된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좁은 어깨는 굴곡이 없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다소 경직된 느낌을 준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어 보살(菩薩)처럼 보이지만, 전반적인 형태나 손가짐으로 볼 때 여래상에 가깝다. 약사여래(藥師如來)로 모시고 있다.」 -수도암 카페-
옆모습
전해오는 이야기
「수도암 약사여래는 직지사 삼성암 약사여래, 금오산 약사암 약사여래와 함께 '삼형제'로 불린다. 모두 한 석공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불상도 따라서 하품을 한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특히, 수도암 약사전에서 기도한 후 법당이나 주위 마당에서 한약냄새를 맡으면 어떤 불치병도 낫는다는 말이 있다.」 -수도암 카페-
약광전 옆모습
대적광전의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는 모습입니다.
석등(石燈)
사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석(下臺石)은 복련(覆蓮)을 새겼고, 그위에 간주석(竿柱石)을 세우고 상대석(上臺石)을 올렸습니다. 상대석은 앙련(仰蓮)을 새겼고 그 위에 등불을 넣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다음 옥개석(屋蓋石)을 덮고 상륜부(相輪部) 보주(寶珠)를 한 일반적인 석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간주석과 화사석은 최근에 보수하면서 새로 갈아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적광전 앞 서탑의 삼층석탑 1 -보물 제297호-
대적광전 앞에 있는 탑이 서탑(西塔)이고 약광전 앞에 있는 탑이 동탑(東塔)입니다.
대적광전 앞 서탑의 삼층석탑 2
수도암 삼층석탑 -보물 제297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ㆍ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안왕(憲安王)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1963년 보물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까운데,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탑신(塔身.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 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ㆍ3층의 탑신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를 새겨 놓았다.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376cm이다.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초층(1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석이 크게 줄었으나 3층은 2층과 비슷하다. 초층 탑신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신장상(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이다. 높이425cm이다.」
-전통사찰 총서 청암사편-
※ 전통사찰 총서에는 신라 헌안왕(憲安王) 3년(859)이 헌강왕 3년으로 오기 되어 있고, 신장상(사천왕상)이 여래좌상으로 되어 있어 옮길 때 바로잡았습니다.
대적광전 앞에는 서탑이 있고, 약광전 앞에 동탑이 서 있어 쌍탑으로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고, 조성기법도 차이가 있어 단탑으로 오해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곳곳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 주고 있는데,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배례석(拜禮石). 가운데 연꽃이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신장상(사천왕상) 1
동탑에는 감실을 조성해 사면불을 새기는 것에 반해 서탑에는 감실이 아닌 윤곽을 만들어 흐릿해서 잘 알 수 없으나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성중인 신장상(사천왕상)을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신장상(사천왕상) 2
신장상(사천왕상) 3
신장상(사천왕상) 4
약광전 앞의 석주와 동탑이 있는 모습입니다.
동탑과 서탑 사이에 세워진 창주도선국사비(刱主道詵國師碑)
화강암으로 조성 된 이 비석은, 높이 177㎝, 너비 60∼61㎝, 두께 42∼44㎝ 크기이며, <창주도선국사(刱主道詵國師)> 각자가 보입니다. 여기서 창(刱)은 = 창(創)입니다. "수도암 창건주는 도선국사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새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검색하다 알게 되었는데 세계일보에 소개된 다음의 글을 인용해 봅니다.
「"김천 수도암비는 신라 명필 김생 글씨"
세계일보 강구열 기자 일자 : 2019-06-04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판독 / 작게 새긴 이름ㆍ제작연호 찾아
경북 김천 수도암의 '도선국사비'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이 808년에 쓴 글씨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비석에서 '金生書(김생서), 元和三年(원화삼년), 毘盧遮那佛(비로자나불) 등 21자를 판독했다'고 4일 밝혔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비석은 청암사 부속 암자인 수도암 약광전 앞에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판 것으로 짐작되는 '창주도선국사刱主道詵國師'라는 커다란 글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글자를 8행에 26자씩 새겼다.
박 관장은 "비석 끝부분 8행에서 흐릿하지만 다른 글자보다 조금 작게 새긴 '김생서(金生書)' 세 자를 찾았다"며 "'원화삼년(元和三年)'이라는 연호는 6행 중간에 있는데, 원(元)자가 가로로 절단됐으나 일부 획이 남아 판독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원화(元和)'는 당나라 헌종(805∼820)이 즉위한 이듬해부터 사용한 연호로, 元和三年은 808년을 의미한다. 그는 "'비로자나불'을 통해 비석을 세운 목적을 밝히는 가닥을 잡았다. 이 비석은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호)의 정확한 제작 연도를 알려 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이 수도암비에 해동서성(海東書聖)이요, 신품사현(神品四賢),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일컬어지는 신라의 김생(金生. 711~?)의 각자가 서기 808년(신라 哀莊王 9년) 경에 새겨졌다면 수도암 창건 이전에 이 석비가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수도암은 도선국사(827~898)께서 헌안왕 3년(859)에 창건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려 51년 후에 수도암이 창건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이곳이 절터였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약광전 앞의 동탑의 모습 -보물 제297호-
삼층석탑 -동탑-
앞에서 설명을 올렸지만 다시 한번 인용합니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탑신(塔身.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 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ㆍ3층의 탑신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를 새겨 놓았다.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376cm이다.」
감실 속에 사면불(四面佛) 조성하였는데 불명확합니다. 약사여래불이 아니실까?
지권인(智拳印)을 하신 비로자나불로 생각됩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신 석가모니불로 보입니다.
설법인(說法印. 九品印)을 하신 아미타불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명확함.
이 석탑에 조성된 불상이 오랜 세월 풍상에 마모가 많아 정확하게 아는 것은 힘듭니다. 보통 사면불(四面佛 일명 사방불)을 조성할 때는 일반적으로 동쪽엔 약사여래불, 서쪽엔 아미타불,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엔 미륵불을 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라인들은 석탑 부조의 사방불의 가장 일반적인형태는 북방 미륵불 대신에 비로자나불을 조성한다고 합니다.
이 탑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므로 이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 이 절에 특기할 만한 것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주문 사천왕문 등도 없습니다. 다음은 관음전, 나한전, 봉황루 등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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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7. 5/28.
@청송
수도암에 잘 다녀오셨군요.
사중진미(寺中眞味), 사중진미(寺中珍味)도 깊이 느끼셨네요.
감사합니다. _()_ _(())_
@백우 그때 23찬(饌)이어서 공양주 보살님께 물었더니, 신도분들이 절에 오실 때 반찬 한두 가지씩 가져 오신다네요.
@청송 원인 스님께서 주석하시는 영주 대승사에서 점심공양을 한 적이 있는데
완전 사찰음식으로 공양을 잘 한 기억이 있는데,
그렇다면 신도분들이 가져오는 반찬은 오신채를 쓰지 않는 음식이겠지요? _()_ _(())_
@청송 제 생각으로는 젓깔은 넣은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
백우님!
넘 넘 수고하셨습니다.
약 이십 년 전 불자 모임 회원들 몇 명과 함께 수도암에 처음 갔을 때
회원중 누가 큰소리로 경전 하나를 독송하자고 하여서 하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때가 아마 하안거 때였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그런 생각이 났을 때는 제 얼굴이 순간 화끈하면서 넘 부끄러웠습니다.
청정수행 도량인 하안거 철인 한국 최고의 선방이 있는 조용히 해야 할 수도암에서
여럿이서 큰 소리로 경전을 읽었으니...ㅠ.ㅠ
그 때 어느 스님이라도 호통을 치셨다면 고스란히 호통을 당해도 당연한 일들을 저지른 그런 추억이 있는 수도암...ㅎㅎ
이제는 사찰을 가더라도 잘 가려서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현왕후길 두 번 다녀왔습니다.
길이 아주 이쁩니다. 범위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자작나무 숲도 있습니다.
누가 인현왕후길 가자고 하면 시간이 맞으면 언제든지 오케이 입니다...^^
고맙습니다_()()()_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어떤 불교산악회를 따라 성지순례를 갔을 때 일입니다.
일행이 많았습니다.
독성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운문사 비구니 도량...
독성각 앞에는 많은 기도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불교산악회 대장이 의식을 저더러 집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아무나 와서 목탁을 들어 의식을 하는 곳이 아닐 텐데 하고
우려를 표하니 이미 허락을 득했으니 잘 좀 부탁한다고 해서 마음놓고
목탁을 치며 의식을 거행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고 있는데,
비구니 스님들이 우르르 몰려 와서 "여기서 목탁을 치시면 안 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머쓱하던지...
대장이 잘 수습해서 잘 끝나기는 했지만 잊을 수없는 추억이 되었네요.^^
인현왕후길은 수도암과 연결되어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