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산 삼동석 탐사기
“내영산(內迎山), 현의 북쪽 11리에 있다. 산에는 대(大)ㆍ중(中)ㆍ소(小) 세 개의 돌이 바위 위에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三動石)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중략) 신귀산(神龜山),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산에는 삼용추(三龍湫)가 있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응함이 있다.(內迎山, 在縣北十一里, 山有大中小三石鼎列於巖上, 人稱三動石, 以手指觸之則微動, 兩手據撼則不動. (중략) 神龜山, 在縣北十里, 有三龍湫, 旱禱在應.)”
-<<신증동국여지승람>>
포항에는 내연산이 있다. 내연산의 상징경관은 삼동석이고, 대표경관은 삼용추이다. 내연산은 기본적으로 응봉(鷹峰)에서 갈라진 내연산과 신귀산(神龜山, 천령산)을 포함한다. 응봉에서 발원하는 내연계곡의 북쪽에 내연산이, 그 남쪽에 신귀산이 있다. 1432년에 간행하고, 증보를 거쳐 1530년에 완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지리지에서 삼동석은 내연산의, 삼용추는 신귀산의 랜드마크로 각기 인식되었다. 18세기에 간행한 지도, <<동여비고(東輿備攷)>>에는 삼동석을 3개의 직사각형 바위로 그렸다. 19세기에 국가가 편찬한 지리지의 청하현 고지도들과 <대동여지도>(1861)에도 삼동석과 삼용추를 나타냈다. 심지어 <청구도>(1834)에서는 내연산 대신에 삼동산이, 신귀산 대신에 청하현의 진산인 호학산(呼鶴山)을 나타냈다.
사진1: <대동여지도>(1861) 청하현 부분(개포는 월포, 허혈포는 화진포, 내영산은 내연산, 신귀산은 천령산).
그러나, 삼용추와 달리 삼동석은 거의 4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였고, 오늘날에는 그 존재가 잊히어지기에 이르렀다. 내연산을 유산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연산, 관음, 잠룡 3개 폭포, 삼용추는 모두가 보고 완상하였다. 그렇지만, 내원암 아래의 은폭 위로는 길이 험하여 그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았다. 더구나, 내연계곡 최상류에 있는 삼동석은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탐방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대산(大山) 이상정의 문인인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은 내연산을 유산하고, 삼동석의 존재에 의문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박일천이 편찬한 <<일월향지>>(1967)에는 내연산의 명소 중에 삼동석 대신에 ‘일동암’이 있다고 하였고, 이종익의 <<보경사의 사적과 사화>>(1983)에는 ‘‘일동석’이 ‘상생폭(사자폭) 동쪽 20미터 지점에 우뚝 솟은 바위인데, 그 위에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바위가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 이동석, 삼동석은 그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삼우 노거수회 명예회장은 <<영일군사>>(1990) 편찬위원장을 맡으며 문헌에 나오는 삼동석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찾지 못하였다. 필자도 내연산의 명소들을 정리하는 글, <내연산 명소와 보경사 암자의 연혁>(<<동대해문화연구>>13, 2013)을 쓰면서, 삼동석은 문헌에만 있지, 실제로는 없는 허구의 경관이라고 생각하였다.
보경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내연산 안내 그림 지도에는 내연계곡 최상류에 선바위가 그려져 있다. 경북 도립 내연산수목원의 ‘삼거리’ 아래쪽에 쌍둥이 절벽이 솟아있고, 선바위는 그 아래쪽의 내연계곡 물가에 있다. 지리지나 고지도와 다르게, 실제로 선바위는 신귀산에 있다. 그 높이가 약 20미터이다. 박리현상이 심한 내연산의 여느 바위처럼 선바위는 상중하 삼단으로 금이 가 있다. 맨 위층의 바위는 숲과 능선 위로 솟아 있어서 사람의 눈에 잘 띈다. 바위의 위층은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모양이 성덕대왕신종 같은 큰 종을 닮았다. 바위 곳곳에 파란 이끼가 자라고 있고, 위태로이 올려져 있어서 보기에는 손가락 하나로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올라가서 밀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뒷면은 아래층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바위와 그 위쪽의 두 바위들은 솥발처럼 상중하에 삼각형으로 벌려 있다. 주변에 오래전부터 살아왔던 산중 사람들은 이 바위를 선바위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선바위가 바로 문헌에서 묘사하는 삼동석임을 필자는 문헌과 현장 조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류숙의 시에 등장하는 쌍둥이 절벽(삼거리 아래쪽에 있다.)
성덕대왕신종 같은 큰 종 모양의 삼동석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이 숙부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1587년 8월 1일부터 10일까지 울진 사동 해월헌에서 출발하여, 청하현 해월루, 월포 조경대(釣鯨臺)를 거쳐 내연산에서 이틀을 자며 유산한 기록,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을 필자는 역주하였다. 여기에 ‘듣자니 그(상용추) 20리 상류에 주연(舟淵)이 있는데 깊이를 잴 수가 없을 만큼 깊고, 주연의 10리 상류에 삼동석이 있다. 삼동석의 아래에 두 암자가 있는데, 잎에 물을 뿜는(신선술을 수련하는) 자들이 산다. 그러나 길이 험난하여 찾아가기에는 어려웠다.’고 하였다. 류도원은 <동유기행(東遊紀行)>(1773)에서 ‘계조암(繼祖庵)의 상류 수십 리 지점에 삼동석이 있다.’고 하였고, 흥해군수로 왔던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은 <유내연산기(遊內延山記)>(1873)에서 ‘(은폭) 상류로 올라가면 삼동석이 우뚝 솟아 있는데 볼만하다.’고 하였다. 보경사 승려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 해월의 기록은 삼동석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정확한 거리와 주연, 2 암자라고 하는 구체적인 장소를 알려준다. 필자는 해월의 기록을 읽고서 삼동석의 존재를 확신하고, 삼동석 관련 문헌을 다시 조사하였다.
내연산 주연
조선시대 내연산을 찾은 사대부들 가운데에 오직 취흘(醉吃) 류숙(柳潚, 1564-1636) 한 사람만이 삼동석에 두 차례 왔다 가고 시를 남겨 놓았다. 류숙은 내연산을 함께 유산한 영해 태수 청사(晴沙) 고용후(高用厚)에게 준 시에서 내연산 절정의 삼동석을 만져본 사람이 고금에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고 물으며, 청하현의 상징경관인 삼동석을 자신이 찾은 일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국왕, 광해군이 쫓겨나고, <<어우야담>>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숙부 류몽인마저 아들의 광해군 복위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홍문관 부제학 취흘은 60세에 변방인 청하현에서 1623년에서 1636년까지 14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여야 하였다. 청하에서 환갑을 맞이할 만큼 쓸쓸하고 오랜 노년의 유배살이에서 그에게 위안을 주었던 공간은 내연산이었고, 벗이 되었던 사람은 보경사 고문수암(古文殊庵)의 설희(雪熙), 계조암의 덕경(德瓊) 스님이었다.
류숙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읽어보고 처음으로 삼동석을 찾은 때는 1625년 단풍철이었다. 이 때 그는 청하현의 진산인 호학산 고갯길을 넘고 내연계곡 시냇물을 따라 내려와 삼동석 곁에 있던 동석암에서 하룻밤 묵었다.
동석암에 묵으며 宿動石庵
높고 낮은 나무꾼들의 길이 맑은 계곡물을 둘러싸고, 高低樵路繞淸泉
절은 단풍 비단 수놓은 숲가에 있다. 寺在丹楓錦繡邊
스님과 뜬 구름은 지는 해로 돌아가고, 僧與浮雲歸落日
객은 호학산을 따라서 제천으로 들어간다. 客從呼鶴入諸天
천년의 동석이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千年動石逢新面
하룻밤의 등잔불에 숙세의 인연을 안다. 一夜懸燈認夙緣
종소리 몇 번이나 어디서 일어나는가, 鐘磬數聲何處起
앞 봉우리가 지척인데 진선이 있다. 前峯咫尺有眞仙
류숙이 1636년 봄에 청하현감 청봉(晴峯) 심동귀(沈東龜)와 다시 삼동석을 찾았을 때, 두 암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호학산 입구에는 국가에서 산림을 보호하는 덕성(德城, 청하의 옛 지명) 봉산표석(封山標石)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삼동석이 큰 종 모양이며, 삼동석 곁에 쌍둥이 절벽이 높이 솟아 있다고 하였다.
내연산 삼동석(3개 바위가 솥발모양으로 상중하에 배치되어 있다.
2013년 3월 10일, 필자는 문헌에 나오는 삼동석을 찾으러 내연산으로 들어갔다. 주연을 찾고, 그 상류의 선바위 곁에서 화전민의 숯가마터와 집터가 된 암자터 두 곳에서 백자 파편을 찾았다. 산에서 돌아내려와 보경사 산문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노송 가지 사이로 별들이 치렁치렁하였다. 3월 17일에 다시 삼동석을 찾아가서 동석암터 아래의 등산로에서 극미량의 기와조각 2점을 겨우 찾아내었다. 선바위가 삼동석임을 확신할 수 있는 감격적인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노거수>>(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