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주와 홍성
지금의 홍성군은 조선 시대의 홍주목과 결성현이 합해져 이루어진 군이다. 홍주목의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 초인 태조
대에 이곳에 운주(運州)를 설치하고, 현종 3년인 1012년경에 홍주(洪州)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홍주는 충청도의 4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
가운데 하나로 1413년(태종 13년)에는 결성현을 설치했다.
따라서 홍주목은 내포 지역 통치의 중심으로 관할 영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세조 즉위 직후 충청도의 4개 진관 중 하나로 홍주 진관을 설치하고
목사가 겸임하는 첨절제사를 두어 19개의 고을을 관할하였다.
일제는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에 민족정기를 끊는다는 속심으로 ‘홍주군’과 ‘결성군’의 각 한 글자씩 따서 ‘홍성군’으로 개칭하고 11면을 관할하게
하여 현재(2읍 9면)에 이르고 있다.
충청도의 4목 가운데 ‘홍주’만이 유일하게 일제에 의해 본래의 ‘홍주’라는 이름을 빼앗겨 버린 채 ‘홍성’이란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는 2012년 충남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해 업무를 시작하게 될 ‘충청남도청 홍성 개청 ’연도인 2012년은 ‘홍주’라는 지명 역사가 ‘1000년을 맞는 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 전영장의 동헌(경사당)
[홍주 진영(즉 충청도 前營)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즉 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KT 홍성지사 건물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와 중기 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목사와 영장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병인박해기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포
교들에 의해 영장 앞으로 끌려가 경사당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 홍주 조양문과 저잣거리
(홍주 조양문과 구 장터인 저자거리도 순교자들이 수난을 겪은 곳)
홍성 지역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신앙이 빠른 속도로 전파된 내포 지역의 일부로, 충청도 지역에서는 공주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할 정도로 교세가 성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주 순교자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다양하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읍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군청, 객사, 동헌 등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곳이며, 조양문, 저잣거리도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장소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 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홍성읍 시가지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 고을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홍주의 저잣거리는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혹은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저잣거리는 본래 홍주성의 동문 즉 조양문에서 북서쪽의 북문 방향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군청 앞으로
이전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더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옛 저잣거리도 순교자들이 수난을 겪으면서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저잣거리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던 그 길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서 관아로 가는 중이나, 사형을 집행하러 가는 도중에 백성들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무수한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저잣거리를 돌며 갖은 조롱과 수모를 당하였을 것이다.
홍주 구 장터인 저잣거리는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혹은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양문과 저잣거리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던 그 길과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이 수난을 겪으면서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 홍주 형장터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은 참수 터인 형장)
홍주의 순교터인 처형장, 즉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즉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소향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지점에서 죄인들을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주 성지는 기록상으로 211명(또는 212명)의 순교자와 7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홍주(홍성) 순교 성지의 특징은
첫째 예비자들의 모범 성지이며,
둘째 박해 초기부터 말기까지 순교자가 나온 곳이며,
셋째 한국 천주교회의 핵심 성지라는 것이다.
첫째, 천주교에 입교하여 2년간 예비자로써 수계를 지키며 선교한 원시장(1732~1793, 베드로)은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凍死)로 순교했고, 장장 22년 동안 예비신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기 직전 자기가 자기에게 세례를 주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1770~1812, 바오로)은 바로 ‘예비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둘째, 1791년 전라도 진산 사건 때 내린 전국 천주교 신자 검거령으로 홍주에서 원시장 베드로가 충청도에서 첫 순교자가 되면서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까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셋째, 홍주는 내포의 중심지로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세례를 받고 여사울에서 첫 선교를 시작한 후
내포 지역의 수많은 신자들이 홍주목에서 순교하게 됨으로써 핵심 성지로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홍주의 또 다른 순교터인 처형장, 즉 1801년의 황일광(黃日光, 1757~1801, 알렉시오)과 1868년의 유 마르타(1803~1868, 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즉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일명 덕산통)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합수머리 지점은 본래 북문교 아래쪽이었는데, 훗날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문교 위쪽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홍주 관리가 읍성 북문(북문교 남쪽 60~70m 지점) 옆의 치(雉)에 올라가 신호를 하면 그 신호에 따라 월계천변으로 끌고 간 죄인을 참수형에 처했는데, 그 치가 있던 곳은 지금의 북문 밖
월계천변에서 가까운 북문교 하류 200m 지점이었다. 또 원래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해 오던 곳으로, 갑오 동학란 때에는 동학군들을 여기에서 처형하였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곳은 일반적인 참수(斬首)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이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 형장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866년과 그 후 2년 동안 이곳에서 많은 교우들이 잡혀 순교했는데, 《치명일기》에만도 83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교우들은 관청 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고, 옥에서 굶어 죽기도 하였다. 이렇게 죽은 시체는 성 밖으로 내다 버렸다.
● 홍주 생매장 터와 안장 터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주변은 순교자들의 생매장 터)
[홍성 시내의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주변은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로 추정된다. 생매장 된 순교자들은 물론 옥사나 교수형으로
죽은 순교자들이 안장된 장소로 전통적인 매장지인 숲거리와 그 인근, 즉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인근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홍성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오직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데, 여기에 생매장 4명, 참수 2형, 미상 8명 등으로 나타난다. 1868년에 이루어진 유 마르타의 순교는
참수형인지 혹은 교수형인지 불확실하다. 1868년 5월에는 홍주 원머리 출신의 신자들 4명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동시에 생매장되었다. 최대 생매장 순교자는 9명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홍성 순교자들은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으로 순교하였다.
1868년 5월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를 비롯한 생매장 추정자 최대 9명이 순교한 생매장터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교회 증언록에는
당시 생매장을 했던 이유를 “많은 교우들을 죽이기 어려우매”라는 데 있었다고 한다. 물론 순교자들은 성안이 아니라 성 밖 어느 장소에서 한 구덩이에 생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사하거나 교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된 장소도 이 생매장터와 거의 같았을 것이다. 최근 증언에 따르면 ‘홍성의 옛 숲거리는 홍주에서 희생된 동학군과 의병들의 시신을
안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천주교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도 이 부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진 홍성의 숲거리는 1871년의 《홍주목 지도》에도 홍주성의 동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 동쪽 건너편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바로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왼쪽 지역이다. 이 숲거리가 홍주성 밖의 전통적인 매장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홍주의 천주교 순교자들은 동학 농민군(1894년)이나 의병(1906년)들보다 적어도 25년 이전에 처형되었으며, 한 번에 순교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순교하였다.
그렇다고 이들의 시신을 성 밖 여기저기에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868년의 생매장 순교자들은 물론 옥사나 교수형으로 죽은 순교자들이 안장된 장소를 전통적인 매장지인
숲거리와 그 인근, 즉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인근으로 보는 견해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교우들은 관청 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고, 옥에서 굶어 죽기도 하였다.
이렇게 죽은 시체는 성 밖으로 내다 버리기도 하였다. 홍주 원정리에 사는 원시장(1732~1793, 베드로)은 이곳 관아에서 모진 혹형을 받고 성 밖에 버려져 얼어 죽었다.
대전교구는 2008년 3월 15일 충남 홍성군 의사총 하천변, 생매장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사제단, 신자 1,000여 명이 참석한가운데 순교자 현양 미사 및
홍주 순교 성지비 제막식을 갖고 홍주 순교 성지를 부활시켜 순교자 삶을 본받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