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전구속영장 발부 (3일 구속수감)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는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에 불응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이날 오후 전씨에 대해 군형법상의 반란수괴 등 혐의로 법원에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
전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서울지법 형사3부 신흥철 판사에 의해 이날 밤 11시23분에 발 부됐다. 검찰은 영장발부 직후 영장집행을 위해 서울지검 수사1과장 지휘로 9명의 수사관을 경남 합천으로 내려보냈다. 이에 따라 전씨는 이날 새벽 합천에서 구속이 집행돼 구 치장소인 안양교도소로 압송돼 수감됐다. 전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이밖에도 불법진퇴,지휘관 계엄지역 수소 이탈,상관살해,상관 살해 미수,초병살해 등 모두 6가지다.검찰은 "전씨가 공개적으로 소환 불응 의사를 밝힌 만큼 더이상 소환 통보를 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신병을 확보해 조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Google
[1989년]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몰타회담 ←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왼쪽 가운데)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1989년 12월 2일 몰타에서 만나 회담을 가진 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우리는 미국을 더이상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반세기 가까이 인류를 짓눌러 온 냉전체제 붕괴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역사적 순간을 연출한 주인공은 부시 미국 대통령이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공산권에 자유화 바람이 불어 닥치는 시대 상황을 지켜보던 부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군축협상이 1990년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부시는 고르파초프에게 여러차례 친서를 보내 회담을 재촉했다. 부시의 노력은 몰타섬에서의 함상 비공식 회담을 이끌어냈다.
부시는 유럽에 배치된 재래식무기와 화학무기의 대폭 감축과 대소 경제제재 완화를 약속했다. 몰타 회담으로 부시는 냉전 종식을 몇 단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조선
[1975년]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수립, 왕제 폐지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오스가 프랑스공동체 소속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자 참파사크 왕가(王家)의 붕 움공(公)과 그 뒤를 이은 장군 푸미 노사반 및 비엔티안 왕가의 이복형제인 수반나 푸마공과 수파누봉공이 대립·항쟁하는 사태가 지속되었다. 붕 움은 우파 세력을 대표하고, 수파누봉은 좌파 세력인 파테트라오를 이끌었으며, 수반나 푸마는 중립세력을 대표하였다.
푸마공은 1957년 중립파와 파테트라오가 합의한 연립정부 및 1962년에 3파가 합의한 연립정부 등에서 총리가 되어 혼란한 국내정세의 안정을 위해 진력하였고, 국제적으로도 동·서 양 진영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정치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여세를 탄 파테트라오는 내전을 가열화하는 한편, 1975년 8월에 대규모의 시위를 벌여 지배권을 장악하고 행정권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같은 해 12월 2일 국왕을 폐위시키고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Laos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을 수립하였다. /naver
[1971년]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영국으로부터 독립
19세기 말 서유럽 열강이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찾으려 하자 영국은 여러 외국과의 자유로운 교섭을 금지하는 독점협정을 각 수장과 맺고 영국의 보호 아래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하고 영국이 식민지로부터 철수하는 한편 이곳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페르시아만 연안지역은 정치적 격동시대로 접어들었다. 영국은 두바이 주재 정치고문을 의장으로 삼고, 해마다 2회 정도 9개국 수장이 모이는 휴전수장평의회를 조직해 미래의 연방화를 꾀했다.
그러나 1962년에는 아부다비에서, 그 뒤에는 두바이에서 석유 생산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각 수장 사이의 이해대립이 표면화되었고, 연방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카타르와 바레인은 분리 독립했으며, 1971년 12월 영국군이 철수한 뒤 라스알카이마(72년 3월 연방 가맹)를 제외한 6개 에미리트(토후국)에 의해 아랍에미리트연방이 구성되었다. 연방 구성 뒤에도 각 에미리트의 독자성이 뚜렷했으나, 걸프전을 계기로 국가안보의 결속을 위해 에미리트간 권력안배의 기본틀 위에서 차츰 연방으로서 안정되어갔다. /yahoo
[1965년] 미국의 물리학자 드라이든(Dryden, Hugh L.) 사망
1898. 7. 2 Pocomoke City, Md., U.S. ~ 1965. 12. 2 Washington, D.C.
7년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부국장을 지냈다. 1920년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대학을 졸업한 뒤 워싱턴에 있는 국립표준국의 공기역학과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고속 공기역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음속에서 날개 표면 부근의 공기 흐름에 대한 연구를 처음으로 수행했다. 1934년 역학부 및 음향부의 부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국립국방 연구위원회(NDRC)의 '워싱턴 계획'을 맡아 미국 최초의 성공적인 유도 미사일인 배트 레이더 유도 미사일(Bat radar-homing missile)을 개발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미해군이 대일본전에 사용했다. 1948년 대통령 유공증(有功證)을 받았다. 1947년 국립표준국에서 물러나 미국항공자문위원회(NACA)의 항공학 연구부 책임자가 되었다. 2년 뒤에는 NACA 회장이 되었으며 그의 재임기간 동안 이 기구는 진보한 항공학 연구와 개발로 명성을 얻었다. 1958년 NASA의 부국장이 되었고, 1962년에는 미·소 공동 우주계획을 위한 협상을 이끌었다. 기상위성의 자료교환과 협동통신위성의 시험가동을 이루어내는 데 기여했다. /브리태니커
[1961년] 서기연호 사용 법령공포
정부가 1961년 12월 2일 ‘연호(年號)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고 이듬해 1월 1일부터 단기(檀紀) 연호대신 서기(西紀)를 공용연호(公用年號)로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밝힌 변경이유는 국내문서와 외교문서가 연호를 달리 쓰는 데서 오는 불편,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연대개념의 혼란 등이다.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자신의 통치 연차(年次)를 표시하는 연호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용된 ‘건원(建元)’이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도입됐는데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돼 있는 ‘영락(永樂)’이 첫 사례다. 마지막 연호는 대한제국 때 순종이 사용한 ‘융희(隆熙)’.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연호 ‘다이쇼(大正)’과 ‘쇼와(昭和)’를 사용하다가 1945년 美군정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서기가 처음 도입됐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단기가 공용연호로 채택됐으나 국제조류에 맞춰 다시 서기로 돌아와 현재에 이른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54.5%가 단기ㆍ서기 병용을 희망한 반면, 서기만의 사용을 원하는 사람은 23.4%에 그쳤다. /조선
[1961년] MBC 문화방송 개국
MBC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문화방송이라고도 한다. 전국을 대상으로 라디오(AM·FM),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한다. 1961년 12월 2일 라디오 방송국으로 개국했으며 MBC TV는 1969년 8월 8일에 개국했다. 호출부호는 HLKV-TV, 채널은 11이며 19개 지방국이 있다. MBC 라디오는 음악 FM과 표준 FM으로 나뉘며 하루 24시간 방송한다. MBC 라디오 FM은 1971년 9월 19일에 호출부호 HLKV-FM, 출력 1kW로 개국했으며, 1983년 여의도 스튜디오를 준공하면서 출력을 10kWh로 증강했다.
1974년에 경향신문사를 통합하여 문화방송·경향신문(주)가 되었다가 1980년 초 언론기본법의 시행으로 경향신문사와 분리되었다. 같은 해 12월 22일 컬러 방송을 개시했다. 1986년 4월 29일 여의도 사옥으로 통합 이전하고 1987년 12월 28일 표준 FM을 개국했으며, 1997년 MBC DSNG 네트워크(M-SAt)를 완전 개통했다. 2000년 7월부터 인터넷을 이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터넷 MBC를 운영한다.
자본금은 10억 원이며 방송시설로 69개 방송국과 184개 방송중계소가 있다. 조직은 5본부 22국 70부로 구성되어 있다. 운영은 전적으로 광고료에 의존하기 때문에 업무면에서는 상업방송이나, 주식의 70%를 공영기관인 방송문화진흥회에서 소유하고 나머지 30%는 정수장학회에서 소유하고 있으므로 법적 측면에서는 공영방송에 속한다.
MBC는 지방사의 주식 51% 이상을 소유하며, 관계회사에 (주)MBC미술센터, (주)MBC프로덕션, (주)MBC미디어텍, (주)MBC아카데미, (주)MBC애드컴, (주)인터넷MBC 등이 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31번지에 있다. /naver
[1961년] 아즈텍(Aztec) 피라미드 발견
1961년 오늘!
멕시코 인류학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아즈텍 피라미드를 발견한다.
15세기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멕시코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했던 아즈텍족!
아즈텍족이 8백여년전 세운 피라미드가 거의 원래 모습 그대로 발견돼 전세계의 고고학계를 크게 흥분시켰다.
이 피라미드는 아즈텍족이 비의 신으로 섬기던 트랄록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밝혀졌다. /YTN
[1956년] 카스트로 등 혁명파 쿠바에 상륙, 쿠바혁명 시작 ← 카스트로(1964)
1956년 12월 2일, 멕시코의 베라크루스에서 비밀리에 출항한 작은 요트 그린마호에 승선한 82명의 게릴라들은 어둠 속에서 쿠바 상륙을 시도하였으나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겨우 12명의 게릴라만이 목숨을 구하여 산으로 탈출하였다. 그 게릴라들 중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체 게바라가 끼어 있었다.
그로부터 만 2년이 지난 1959년 1월 1일 쿠바혁명군의 선발대가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였으며, 그로부터 또 일주일 후 쿠바 혁명의 최고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실질적인 쿠바의 실세로 군림하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계 최장수 집권기간인 45년간의 기나긴 독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세계 혁명 역사상 그렇게 적은 인원으로 그렇게 단기간에 혁명을 성공하고, 또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집권을 이룬 집단은 없었다. 더구나 바로 옆의 초강대국 미국의 속을 그토록 오래 썩힌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9세기에 제국주의를 추종했던 미국이 강점한 땅 중, 속을 안썩힌 곳은 하와이, 괌 정도이고 나머지 필리핀이나 쿠바 그리고 푸에르토리코는 오랜 기간동안 미국의 속을 엄청 썩혔다.(마르띤의 Hola Amigo) /Google
[1952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 방한
1952년 12월 2일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선거운동 기간 중 발표한 자신의 공약사항을 지키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당선되면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으며 한국전선을 직접 시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부터 5일까지 4일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방부대를 두루 시찰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도 두차례나 면담, 한국전쟁의 종결방안 등을 긴밀히 협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방문에는 윌슨 국방장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밴프리트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수행했다. 이한 직전에 기자회견을 갖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계략도 없고 만병통치약도 없다. 그러나 UN의 위치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며 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방한은 휴전협상의 지지부진, 전선의 소강상태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조선
[1951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개시
육군본부는 1951년 11월 25일 공비토벌부대로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투사령부(백야사)를 창설하고, 공비토벌작전을 위한 1단계 조치로 12월 1일 서남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지역 민간인의 이동을 통제하고 마을 간의 전화교신도 차단했다.
백야사는 1951년 12월 2일부터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면 개시했다. 이 작전은 4단계로 구분하여 실시됐으며, 각 단계별 작전은 엄격한 통제하에 기동타격부대와 저지부대 그리고 거점 수비대로 운용했다. 기동타격부대는 공비의 주력을 포착섬멸하고, 저지부대는 충분한 종심을 두고 배치하여 공비의 퇴로를 차단 저지하면서 기동타격부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작전명 쥐잡기(Rat Killer) 작전은 제1기작전(1951.12. 2 ~ 12.14), 제2기작전(1951.12.16 ~ 1952. 1. 4), 제3기작전(1952. 1. 4 ~ 1.31), 제4기작전(1952. 2. 4 ~ 3.14)으로 구분하여 실시했다. /Google
[1947년] 장덕수 전 동아일보 부사장 피살 ← 젊은 시절의 장덕수
1947년 12월 2일 오후 6시 50분경, 우익 민족진영의 최고이론가 설산(雪山)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박광옥과 공범 배희범이 쏜 총탄을 맞고 자택에서 숨졌다.
그는 1918년 여운형·조동우·김규식·선우혁·김철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청원을 제출하는 한편, 국내와 일본·노령 등지에 동맹원을 파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2월 귀국했으나 곧 일본경찰에 체포돼 전라도 하의도에서 거주제한을 당하다 여운형의 ‘도쿄회담’에 통역으로 선정돼 거주제한에서 풀려나기도 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로 활동했고, 이듬해 6월에는 상하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재무위원 및 국내부 간부로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외교부장·정치부장 등으로 활약하다 1946년 신탁통치문제로 좌우 세력간에 의견이 상충되자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웨드마이어 특사에게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함을 강조하다 이날 피살됐다./조선
[1944년] 이탈리아의 소설가, 시인 마리네티(Marinetti, Filippo Tommaso) 사망
(12. 22, 1876 – 12. 2, 1944)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 이집트에서 초등교육, 파리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스위스 제네바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피가로》지(紙)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 미래주의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이 운동의 취지는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모든 해방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그 창시자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소설 작품으로 《미래파의 사람 마파르카 Mafarka le Futuriste》(1910), 스피드와 전투를 예찬한 《트리폴리 전쟁》(1911) 등이 있다.
그가 제창한 미래파운동은 문단에서보다 미술계, 특히 회화나 조각 분야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910년 2월 밀라노에서의 ‘미래파 화가 선언’, 동년 4월 ‘미래파 회화의 테크닉 선언’ 등이 그것이다. /naver
[1942년] 시카고대 페르미,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실험 성공
미국 시카고대 실험원자로에서 우라늄 핵분열의 연쇄반응 실험이 성공했다.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페르미(Fermi, Enrico, 1901~1954)의 지도로 행해진 이 지속적 연쇄반응장치의 최대출력은 0.5w에 불과했지만 이 성공은 원자력 이용의 개막을 의미했다.
11월 중순 시카고대 운동장에 실험원자로가 완성되자 천연우라늄과 흑연이 격자모양으로 쌓아올려졌다. 1942년 12월 2일 오후 2시20분 우라늄과 흑연더미는 57층 높이가 됐고 원자로가 마침내 임계(臨界)에 달하자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실현됐다.
실험을 지휘한 페르미는 193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계기로 미국으로 이주했고 제2차대전이 발발하자 원폭개발계획(맨해튼계획)에 참여, 원폭제조 연구에 몰두했다. /조선
[1927년]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출생
양력 1926년 12월 2일/음력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 ~ 2008년 5월 5일 서울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있게 그려낸 문제작을 발표했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으나,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생활했다. 시인 김지하는 그녀의 사위이다. 1970년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1994년 8월 대표작 대하소설 〈토지〉를 완결지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1956년 《계산(計算)》 《흑흑백백(黑黑白白》이 《현대문학》에 추천, 등단하였다. 57년부터 문학활동에 들어가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장편 《표류도(漂流島)》 등 문제작을 발표하였고, 장편 《김약국(金藥局)의 딸들(1962)》 이후,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확대해 나갔다. 64년 《시장(市場)과 전장(戰場)》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 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69년부터 94년까지 25년 동안 한국근대사를 겪어나가는 각개 인물들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부각시킨 대하소설 《토지(土地, 전16년)》를 써서 한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72년 《토지》로 월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밖에 단편 《흑백 콤비의 구두》 《하루》 《단층(單層)》, 중편 《재혼의 조건》, 장편 《노을진 들녘》 《파시(波市)》 《신교수(申敎授)의 부인》 등과 시집 《못 떠나는 배》, 에세이집 《Q씨에게》 등이 있다. 인촌상․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현대문학' 4월호 '옛날의 그 집'
[1923년] 그리스 오페라 가수 칼라스(Callas, Maria) 출생
본명은 Maria Cecilia Sophia Anna Kalogeropoulos.
1923. 12. 2 뉴욕 시~1977. 9. 16 파리.
서정성과 극적인 자질을 고루 갖춘 다재다능함으로 고전적인 콜로라투라의 배역을 부활시켰다. 1937년 아테네 음악원의 소프라노 엘비라 데 히달고에게 배우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미국을 떠났다. 아테네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보카치오 Boccaccio〉에 출연한 뒤 1945년 미국으로 돌아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했지만, 곧 이탈리아로 떠나 베로나에서 〈라 조콘다 La Gioconda〉에 출연했다(1947).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한 뒤 곧 〈청교도 I puritani〉의 엘비라, 〈토스카 Tosca〉·〈노르마 Norma〉·〈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의 주인공역으로 갈채를 받았다.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노르마 역으로 미국에서 데뷔했고, 같은 역을 1956년 10월 29일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했다.
칼라스는 비범한 발성 능력을 요구하는 배역들을 맡아 이름을 떨쳤고,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에 모두 출연했다. 때로 그녀의 기교를 흠잡는 비평가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그녀가 힘차면서도 명확한 넓은 콜로라투라 음역과 카리스마적인 연기능력을 가진 가수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벨리니·로시니·도니체티·케루비니 등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칼라스의 능숙한 연기 때문이었다.
변덕스런 기질 때문에 악평을 얻기도 했지만 미국과 유럽 전지역의 대극장에서 공연했으며, 1965년 7월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로 오페라 출연을 마감한 뒤 영화 〈메데아 Medea〉(1970)에 출연했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유럽 연주여행(1972~73)을 하기 전에 1972년 줄리어드 스쿨에서 오페라를 가르쳤다. 은퇴할 무렵까지 40편이 넘는 배역을 맡았고 20편이 넘는 오페라 전곡을 녹음했다.
[1910년] 하와이의 한국인 노동자가 처음으로 한국 여자와 사진 결혼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삶의 새 터전을 잡은 한인들은 기대와는 달리 심한 노동에다 언어와 풍습의 차이, 그리고 고국에 대한 향수 속에 이민의 의욕을 잃어 갔다. 특히 나라 잃은 망국의 설움까지 겹치자 일부 노동자들은 술을 마시고 때로는 폭력에다 도박까지 손을 대는 이들도 있었다. 갈수록 거친 생활로 일할 마음을 잃어가는 노동자들이 늘어만 갔다. 또한 이웃에게 돈까지 빌리고는 밤새 어디론가 사라지는 이민자가 생기기도 했다.
사탕수수 농장 측은 대책마련에 부심하던 중 한인 노동자 중에는 노 총각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신자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에 착안하게 된 것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주인들은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노 총각들에게 결혼과 건전한 가정생활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당시 하와이에는 동양인 여자의 숫자가 아주 적었다. 그러나 백인 여성들은 우월의식에다 다른 백인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진 결혼은 하와이나 혹은 본토에 이민 온 노총각이 고향의 처녀에게 사진을 보내서 선을 보고, 미주로 시집가기를 원하는 사진신부( Picture Bridle) 을 맞이하는 한국과 미국간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색다른 동족간의 결혼제도이다.
미국정부도 마지못해 사진결혼으로 미국에 들어오는 동양인 처녀들에게 영주권을 주기로 허락을 했다. 한국에서 미주이민길이 막힌 후 사진결혼제도가 없었다면 노동자들의 각종사회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을 것이다.
한국인 사진신부 제1호로 최사라(23세)가 1910년 12월2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하와이국민회' 총 회장이던 노총각 이래수(李來洙 38세) 씨는 이민국에서 민찬호 목사의 주례 하에 사진결혼으로 첫 가정을 이루었다.
그 당시 미주의 신랑들은 고국의 신부가 마음에 들면 여행경비로 2백달러를 보내주었다. 사진결혼은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14년간 (1910-1924) 계속되었다. 그사이 영남출신 신부 951명이 하와이로 들어왔고, 상해를 거쳐 북한출신의 신부 105명이 미국본토로 건너왔다. 이들 사진 신부들은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았지만 남편과의 나이차이 등 현지 생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미주한인회총연합회
http://www.koreanfedus.org/main/bbs/board.php?bo_table=history&wr_id=3&nca=
[1901년] 질레트, 일회용 안전면도기 발명 ← 안전성을 강조한 질레트 면도기의 초기 광고
19세기까지 남성 상징은 수염이었다. 그러나 20세기는 남성 얼굴 에 수염이 없는 세기였다. 이같은 남성 혁명의 일등 공신은 인류 최초 안전면도기를 발명한 킹 캠프 질레트였다. 1901년 12월 2일 세일즈맨 출신 발명가 질레트는 동료 닉커슨과 공동으로 안전 면도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1902년 대량 생산에 들어갔지만, 51개 면도기와 168개 면도날을 파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 질레트는 9만개 면도기와 1,240만개 면도날을 생산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 속에서 생활했던 병사들에게 질레트 면도기가 지급됐고, 종전 후 귀환 병사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화됐다. 오늘날 질레트사는 매일 1억2,000만명이 지구촌 각지에서 질레트 면도기 를 사용한다고 자랑한다. 초창기 질레트 면도기 광고는 갓난 아이가 면도하는 그림이었다. 질레트 면도기는 인류에게 대체 개념도 불어넣었다.오늘날 장기 이식 수술은 그같은 `대체 문명`의 최정점을 보여준다.
질레트는 면도기 발명가로만 생애를 마치지 않았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민중의 협동`(1924)이란 책을 통해 경쟁은 비합리적이라면서 민중이 모두 주주로 참여하는 거대 회사를 통해 제품을 생산하는 경제 체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이상주의는 면도기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고, 그 책은 일회용품처럼 잊혀졌다./조선
[1899년] 이탈리아계 영국의 지휘자, 첼로 연주자 바르비롤리(Barbirolli, John) 출생 ← 바르비롤리(1899. 12. 2 ~ 1970. 7. 29)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바르비롤리(Giovanni Battista Barbirolli)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4세 때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나중에 첼로로 바꾸었다. 10세 때에는 트리니티음악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12∼1916년에는 런던 왕립음악원에 다녔으며, 관현악단의 첼로 연주자 및 독주자로 활동했고, 20대 중반에는 실내악곡 연주에 몰두했다. 그뒤 오페라로 방향을 돌려 지휘자로 활동하는 데 전념하여 코번트가든과 새들러스웰스오페라단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영국국립오페라단에도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런던교향악단·스코틀랜드관현악단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1935∼1937년 시즌에는 뉴욕필하모닉의 초빙을 받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의 뒤를 이어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이 관현악단의 100주년이 되는 1941∼1942년 시즌을 이끌었다.
그후 맨체스터의 할레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으며(1943∼1968), 지휘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 휴스턴교향악단(1961∼1967)과 베를린필하모니관현악단(1961∼1970)을 지휘하기도 했다. 1949년 작위를 받았다. /naver
[1894년] 전봉준, 관군에 체포 ← 전봉준(가운데), 전북 순창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모습
1894년 12월 2일 갑오농민전쟁을 이끌던 전봉준이 전라북도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무아문권설재판소에서 5차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3월 29일 사형을 언도받았고, 그날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과 함께 처형당했다. 지방 양반의 자손인 전봉준은 동학에 입교한 후 고부 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반발하여 고부민란을 주도했다. 조정에 대한 불신과 외세에 대한 불안이 퍼져가면서 고부민란은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자, 조정은 청(淸)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맞서 일본군마저 국내로 진격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전봉준이 이끈 갑오농민전쟁은 비록 일본군과 친일 개화파 정권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반외세·반봉건 정신으로 무장한 각성된 민중의 등장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1891년] 독일의 화가·판화가 딕스(Dix, Otto) 출생 ← 딕스가 그린 유화 〈화가의 부모〉(1921)
1891. 12. 2 독일 튀링겐 운터름하우스~1969. 7. 25 바덴뷔르템베르크 징겐.
연민과 표현주의자의 절망을 결합하여 신랄한 사회비판적 작품을 만들었다.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 Neue Sachlichkeit) 화가들과 사귀었고 함께 전시회도 열었다.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딕스는 장식미술가의 도제로 들어갔고, 이어서 드레스덴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인상파 화풍으로 그리다가 현대 미술의 여러 경향을 시도하면서 신랄하고 독특한 화법을 만들어내어 당시 사회의 현실을 악몽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뒤셀도르프에서 가르칠(1922~25경) 때 그는 〈포주와 여자들 Pimp and Girls〉·〈자본주의의 두 희생물 Two Sacrifices of Capitalism〉(기괴한 매춘부와 추한 퇴직군인이 희생물임) 같은 대표적인 회화와 드로잉을 그렸다. 1924년에는 전쟁의 공포를 기록한 〈전쟁 War〉을 50점의 에칭으로 남겼다.
1927년 드레스덴 미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31년 프로이센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군사적인 작품을 보고 격분한 나치 정권이 그의 아카데미 가입을 취소시키고 전시회도 금지했다. 1939년 아돌프 히틀러 암살 음모의 공범 혐의로 투옥되었다. 1945년 53세의 나이에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딕스는 나중에 신비주의로 전향하여 〈사울과 다윗 Saul and David〉(1945)·〈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rucifixion〉(1946)를 제작했다.
[1891년] 과테말라의 화가 메리다(Merida, Carlos, 1891~1984) 출생
주로 벽화와 판화로 알려져 있다. 1910~14년에 메리다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미술을 공부했고, 파블로 피카소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전위파 화가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는 1919년에 과테말라로 돌아와서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1920년에는 멕시코의 사회·예술 혁명에 매혹되어 멕시코 시로 가서 멕시코 벽화 부흥운동에 앞장섰다. 메리다는 1927년에 2번째로 유럽을 여행한 뒤 구상화에서 더욱 멀어졌으며, 결국에는 그 특유의 추상화 양식을 개발해 기하학적인 인물과 구성 쪽으로 발전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입체파와 파울 클레, 후안 미로 및 바실리 칸딘스키 같은 유럽 현대 화가들의 영향만이 아니라 고대 마야 예술의 영향도 보여준다. 그는 멕시코 시의 베니토 후아레스 주택단지(1952)에 중요한 모자이크 벽화를 그렸고, 과테말라시티의 시청에도 모자이크 벽화(1956)를 그렸다. /브리태니커
[1881년] 독일의 물리, 전기공학자 바르크하우젠(Barkhausen, Heinrich Georg) 출생
1881. 12. 2 독일 브레멘~1956. 2. 20 드레스덴.
금속의 자기적 특성 변화와 관련된 원리인 바르크하우젠 효과를 발견했다. 1907년 괴팅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는 뮌헨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 다녔다. 베를린의 지멘스 운트 할스케 연구소에 있다가 1911년 드레스덴의 공과대학에서 세계 최초로 통신공학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자발 진동자(振動子), 비선형 전환소자 이론에 대해 연구했고 아직도 사용되는 전자관 상수들을 공식화했다. 음파에 관한 실험도 했고 소리의 강도를 주관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음향학과 자기학 연구는 1919년 바르크하우젠 효과를 발견하게 했다. 이로써 자기화(磁氣化)가 개별 원자들은 물론 강자성 물질의 모든 영역(domain)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1920년 그는 카를 쿠르츠와 함께 극초단파를 내는 바르크하우젠-쿠르츠 진동자(마이크로파 관의 전신)를 개발했다. 이 진동자로 인해 속도 변조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단파 무선전송에 관한 실험으로도 유명하다.
[1885년]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Kazantzakis, Nikos) 출생
Kazantzakís는 Kazantzakés라고도 씀.
1885. 12. 2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1957. 10. 26 독일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
그의 수많은 작품과 그 작품들이 지닌 다양성은 근대 그리스 문학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크레타 섬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시기에 태어났고, 그의 가족은 잠시 그리스의 낙소스 섬으로 피난했다. 1902~06년 아테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907~09년 파리에서 앙리 베르그송에게 철학을 배웠다. 그후 스페인·영국·러시아·이집트·팔레스타인·일본을 널리 여행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그리스 아이기나 섬에 정착했다. 1945년 그리스 정부에서 내무장관으로 일했고, 1947~48년 파리에 있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고전 번역 부장을 역임했다. 그후 프랑스 앙티브로 이주했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철학적 수필, 기행문, 비극을 비롯해 단테의 〈신곡 Divina Commedia〉과 괴테의 〈파우스트 Faust〉 같은 고전을 근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는 서정시뿐만 아니라 서사시 〈오디세이아 Odíssa〉(1938)도 썼는데, 3만 3,333행으로 된 이 서사시는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의 속편으로서 카잔차키스 철학의 전영역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의 소설이 널리 번역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의 소설로는 가난한 철학자이며 삶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을 묘사한 〈그리스인 조르바 Víos kai Politía tou Aléxi Zormpá〉(1946), 19세기에 크레타 섬에서 종주국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과 맞서 싸운 그리스인들의 용감한 투쟁을 묘사한 〈자유냐 죽음이냐 O Kapetán Mikhális〉(1950)·〈그리스의 열정 O Khristós Xanastavrónetai〉(1954), 수정주의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O televtaïos pirasmós〉(1955) 등이 있다. 자전적 소설 〈그레코에게 보내는 보고서 Anaforá stóv Gréko〉(1961)는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는 〈그리스의 열정〉을 각색한 〈죽어야 할 사람 Celui qui doit mourir〉(1958), 〈그리스인 조르바〉(1964),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 등이 있다. 2번째 아내인 헬렌 카잔차키스가 그의 전기 〈니코스 카잔차키스 Níkos Kazantzakís〉(1968)를 썼다.
[1875년] 한말 의병장 양윤숙(楊允淑) 출생
1875. 12. 2 전북 순창~1910. 4. 14.
일명 인영(寅泳)·춘영(春泳). 호는 춘계(春溪). 아버지는 석민(錫民)이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해 참가했으나 의병진이 무너지고 최익현 등이 체포되자 은신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순창군 구림면 회문산(回文山)에서 의병을 조직해 호남의군부(湖南義軍府)의 도총독(都總督)이 되었다. 좌선봉 최화(崔華), 우선봉 임순호(任洵鎬), 중군 최산흥(崔山興), 후군 이국찬(李國贊), 향관 서기협(徐基俠), 교련관 한자선(韓自善) 등으로 의병진을 구성한 뒤 1908년 8월 순창 일본군수비대, 9월에는 남원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1909년에는 일본군헌병대·일경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등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계속했다. 1909년 가을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으로 거점을 상실하고 은신했으나, 12월 3일경 김제군 월산면 봉월리에서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전주분감에서 사형당했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68년] 프랑스의 시인 잠(Jammes, Francis) 출생
1868. 12. 2 프랑스 투르네~1938. 11. 1 바욘 근처 아스파랭.
투르네 출생. 프랑스 상징파의 후기를 장식한 신고전파 시인이다. A.지드와의 북아프리카 알제리 여행과 약간의 파리 생활을 제외하고는 일생의 거의 전부를 자연 속에 파묻혀 자연의 풍물을 종교적 애정을 가지고 평명(平明)한 가락으로 노래하였다. 상징주의 말기의 퇴폐와 회삽(晦澁)한 상징파 속에서 이에 맞선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S.말라르메와 지드의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지드와는 평생의 벗으로서 두 사람의 왕복 서한은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되어 1948년에 간행되었다.
주요 시집으로 《새벽 종으로부터 저녁 종까지》(1898), 《프리물라의 슬픔》(1901), 《하늘의 빈터 Clairieres dans le ciel》(1906) 등이 있고, 아름다운 목가적인 소설에 《클라라 델레뵈즈 Clara d’Ellebeuse》(1899)가 있다. 또, 1906년부터는 종교적인 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는데, 그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농목시(農牧詩) Les Georgiques chretiennes》(1911∼1912) 등이 있다. /naver
[1859년] 19세기 프랑스의 신인상주의를 이끈 화가 쇠라(Georges Seurat) 출생 ← 캉캉, Georges Seurat가 그린 유화 (1889~90)
1859년 12월 2일 태어남 / 1891년 3월 29일 죽음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진솔했고 비현실적인 품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재 축에 든다고 자만하지도 않았다. 몇몇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시적(詩的)이라고 평할라치면, 그는 이를 반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단지 내가 터득한 기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 로저 엘리엇, <조르주 쇠라의 생애>
쇠라는 폴 시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신인상주의를 이끈 화가이다. 인상주의의 경험론적 사실주의에 반대한 그는 체계적인 계산과 과학이론을 이용해 미리 정해진 시각효과를 얻고자 했다. 그 방편으로 색점들로 빛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점묘법을 적극 활용했다. 쇠라는 시냐크의 소개로 한때 점묘법을 구사했던 카미유 피사로와 교분을 쌓았다. 마침내 쇠라는 1886년에 열린 인상파 전시회에 대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를 선보였다. 그의 기법을 뚜렷이 보여주는 이 그림은 당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쇠라는 제8회 앵데팡당 전시회에 미완성작 <서커스 Le Cirque>를 마지막으로 출품하고 1891년 사망했다.
[1823년] 먼로 미국 대통령, 고립주의 외교노선 천명 ← 먼로, Thomas Sully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E.O.Sully가 그린 오일스케치(1836)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Monroe, James, 1758~1831)가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간섭배제를 천명한 이른바 '먼로독트린'을 1823년 12월 2일 의회연설을 통해 발표했다.
먼로는 의회 연단에서 "만약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 어디라도 식민지로 만들려 하거나 아메리카의 어떤 나라든지 억압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이는 미합중국의 안전과 평화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유럽에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다.
먼로독트린은 스페인의 간섭없이 남미에서 자유무역을 원하는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가 뒷받침됐다. 영국은 당초 불간섭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영미선언 공동발표를 주장했었다. 먼로의 발표에 가장 당혹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였다. 그는 스페인과 공동으로 군사를 동원해 남미지역에서 일고 있는 혁명바람을 차단할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1804년] 나폴레옹, 황제 즉위 ← 나폴레옹 1세, Jacques Louis David가 그린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1812)
1804년 12월 2일 프랑스의 종신통령이었던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당파를 지원하는 외세로부터 혁명을 지켜내고, 동시에 온 유럽에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혁명을 지지하는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그는 통령에 취임하여 독재 정치를 펴나갔다. 그리고 영국의 선전포고와 왕당파의 암살 위협이라는 혼란한 정국은 그를 황제로 만들었다.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교황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후일 그는 전쟁에서 패하고 퇴위했지만, 중앙집중의 행정제도, 나폴레옹 법전, 프랑스 은행과 금융조직, 대학과 육군사관학교 등 현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제도들을 남김으로써 프랑스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브리태니커
[1547년]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자 코르테스(Cortes, Hernan, 1485~1547) 사망
하급 귀족 출신으로 살라망카대학에서 배운 후 19세에 대서양을 건너 쿠바에서 근무하였다. 인디오의 인구 격감에 수반하여 편성된 중앙아메리카 신식민지탐험대장이 되어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로 유카탄반도에 상륙하였다.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인디오들의 공포 속에서 멕시코에 들어가 황제 몬테수마 2세에게 에스파냐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케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임무를 넘어선 반란으로 간주되어 쿠바에서 원정군이 왔으나 코르테스는 이들을 격파하였다. 그 동안에 멕시코에서는 인디오의 반란이 일어나 많은 에스파냐인들이 학살당하였다. 이것을 ‘슬픔의 밤’(1520. 6. 30)이라고 한다.
이듬해 9월 철저한 파괴와 유혈 가운데 멕시코를 탈환하여 노바 에스파냐 식민지를 건설하고, 1523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26년 월권혐의로 파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왕을 설득하여 재차 멕시코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만(灣) 등을 발견하였다. 1540년 귀국한 후에도 계속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냉대를 받아 실의 속에 죽었다. /naver
[1522년] 근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교자 사비에르(Xavier, Saint Francis, 1506~1552) 사망
한자명은 방제각(方濟各). 에스파냐 북부에 있던 나바라 왕국 귀족가문 출생으로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동양의 사도'로 불린다. 1534년 27세 때에 이그나티우스데로욜라와 함께 예수회(Jesuit)를 창설하였고, 1540년 로욜라를 초대 총장에 추대, 교황의 공인을 받았다. 일본에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전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예수회의 동인도 관구장(管區長), 교황특사로서 동양 일대의 선교책임을 맡아 일하였는데, 1545∼1547년에는 주로 말라카제도 포교에 전념하였다. 1552년 다시 중국에 선교하려고 광둥항[廣東港]에 도착하였으나 열병으로 죽었다. /naver
그 밖에
2002년 로또복권 발매 시작
2002년 장병희 영풍 명예회장 사망
2002년 기아차 국내업체로는 처음으로 중국형 신차 현지 합작생산
2001년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인 엔론사. 뉴욕법원에 파산 신청
1999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출범. 영국의 25년 통치 마감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의 기·예능보유자 하보경 사망
1997년 9개 종금사 영업정지
1990년 마샬군도, 유엔안보리 신탁통치로부터 독립
1990년 일본인 최초의 우주비행사, 소련 우주선 `소유즈11호`에 승선
1988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첫 여성 총리 취임
1983년 특정 재래식무기 금지 협약(CCW) 발효
1983년 미국 우주선 콜롬비아호 과학자들 우주서 아연과 알루미늄 합금 성공
1983년 소련 폭격기 9대 독도근해 출현
1982년 스페인 사회당수 수상에 취임
1980년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 자살
1980년 대청다목적댐 준공
1977년 아랍강경국 수뇌. 반(反)사다트 회의
1972년 서울시민회관 화재로 53명 사망
1968년 신탁은행 개점
1962년 인도 파키스탄에 불가침조약 제안
1961년 세제를 전면 개편(호별세, 교육세 폐지. 재산세 신설)
1961년 제3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개막(프랑스 파리)
1961년 국토건설단설치법 공포
1961년 재향군인회 결성
1954년 석공광부 7천여명 파업
1954년 미국, 대만 상호방위조약 조인
1946년 이승만 도미.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
1945년 알바니아 총선(민주전선 압승)
1944년 이탈리아계 프랑스 작가 필리포 마리네티 사망
1918년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 사망
1915년 원세개 황제를 잠칭
1911년 혁명군 남경 점령
1902년 한국 최초의 극장 협률사, 일반인을 상대로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 공연
1899년 미국-영국 사모아군도 분할협정 체결
1897년 러시아 금본위제 채택
1814년 ‘새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프랑스의 작가 사드 사망
1804년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