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4~22)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라도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을 앞에 두고
그는 왕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자신의 왕은 자신을 통치하는 세상의 왕인
시저밖에 없다고 소리친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를 가장 참혹한 십자가에 매다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소름끼칠 정도로 두려운 일이다.
그것을 나에 대입하면,
예수님의 진리를 행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정작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행동하는 자가 아닌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 없는 계엄을 실행하고
내란 혐의를 받는 자는
우상에 복종하는 자임에도
지금은 기독교 세력만을 의지하는
이상 야릇한 상황이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거대세력은
기독교 세력이 거의 유일하다.
예수님을 처단하는데 가장 앞장 선 이들도
당시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다.
로마총독 빌라도의 스탠스도 참으로 엉뚱하다.
예수님의 무죄임을 알면서도
단호하고 맹목적으로 외치는
기독교 지도자들 및 그를 따르는 군중이
그의 정치적 입지에 영향을 줄 세력임을 알기에
그들의 원대로 결정한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은 것이 희한하다.
일단은 조롱이나, 그가 죄 값을 받는 이유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어쩌면 자신에게 들리는 양심의 소리의 한 조각을
소심하게 옮긴 것일 수도 있다.
양심의 소리는 살아 있었으나
그것을 도말했다.
이런 전후상황들을 생각하면 -인간의 한 일들에 매몰되면-
참으로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생각만 든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찬양의 가사처럼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그런데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일이 사람들의 죄덩어리의 산물이면서도
매우 반전인 것이,
하나님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사람의 죄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도맡아 감당하는 사건,
그것을 통해 사람의 죄가 사하여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오, 주여!
급작스럽게 내란 혐의자가 구속 취소 결정이 나고
오늘 관련 책임자가 그에 대한 항소를 하지 않고
석방시키는 절차를 이행하려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분노스러운 일이다. 왜곡된 가치관과 죄성으로
진실의 반대편에서 교묘하게 행동하는 일들이
어떻게 이렇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한숨이 나오고 울분한다.
그래도 가만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자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이 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치료할 것은 치료하고, 고칠 것은 고치는 것.
결국 사랑의 행위의 일환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믿음을 가지고
감당할 것은 감당하고, 극복할 것은 극복하는 과정이
하나님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견디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 뿐이다.
<오늘의 명언>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복종으로 표출된다. -멕시 더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