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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4 그림자
범인이 자살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게이조는 이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은 신문을 지금도 서재의 책상 위에 펴놓고 있었다.
노을에 물든 황금빛 저녁 구름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변하고 숲에서 까마귀 떼가 요란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루리코를 죽인 범인- 유치장에서 목매어 자살>이라는 4단짜리 커다란 활자를 볼 때마다 게이조는 또다시 가슴이 아파 왔다.
‘자살할 거라면 왜 애꿎은 루리코의 목숨을 앚아간 걸까.’
게이조는 씁쓸한 심정으로 중얼거렸으나 신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사히가와 교외 카쿠라 읍에 사는 의사 쓰지구치 게이조 씨의 장녀 루리코양 (3세)의 교살 사건을 수사 중인 삿포로 경찰서는 8월 2일 오후 삿포로 시내에서 용의자로 보이는 아사히가와 시 교외 카쿠라 읍에 사는 일용 인부 사이시 쓰치오(28세)를 체포했다. 사이시는 루리코 양을 죽인 사실을 자백한 직후에 유치장 독방에서 입고 있던 셔츠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관할 경찰서에서는 2일 아침에 사이시가 묵었던 여관 주인 나가사카 시치로 씨로부터 아기를 데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묵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오후 3시가 지나 사이시가 외출하기를 기다려 불심 검문을 하자 뿌리치고 도주하는 것을 통행인의 도움을 받아 체포했다.
처음에 사이시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도망쳤을 뿐이다”라며 극구 범행을 부인했으나, “밤에 가위에 눌려 잠꼬대를 한다던데?”라고 추궁하자 지난 7월 21일 아사히가와 시 교외의 비에이 강변에서 루리코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아래층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컴, 컴 에브리바디, 하우 두 유 두, 앤드 하우 아 유(Come, come everybody, how do you do, and how are you).”
도오루가 전쟁이 끝날 즈음부터 유행한 영어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게이조는 귀여운 목소리로 루리코도 도오루와 함께 이 노래를 부르던 것을 회상했다. 금방이라도 루리코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게이조는 갑갑한 듯 풀을 약간 지나치게 먹여 빳빳한 욕의의 가슴을 풀어 헤치고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이시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스물여덟 살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여 서른 대여섯 살은 됨직해 보였다. 사이시는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단단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맥이 빠진 듯한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뜻밖에도 얼굴은 단정했으며, 눈썹이 짙고 시원스럽게 생긴 이마는 지적인 느낌까지도 풍기고 있었다. 약간 두툼한 입술이 좀 둔한 느낌을 주기는 했으나 광부 노릇을 했다는 경력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놈이 루리코를 죽였구나.’
게이조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사진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적의와 증오심을 품고 노려보아도 범인의 얼굴에서는 흉악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루리코가 손목을 잡혀 따라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진 밑에 <범인 사이시가 걸어온 길>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범인 사이시가 걸어온 길>
사이시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도쿄 태생으로 어렸을 때 관동 대지진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아오모리(靑森)현에 살고 있는 백부의 농가에서 자랐으며, 1934년 대기근 때 16세의 나이로 홋카이도의 광산 인부로 팔려간 후 여기저기 광산을 떠돌아다녔다. 1941년에 입대, 중국 출정 중에 부상을 입고 제2육군 병원에 후송되었으며, 종전 직전에 홋카이도로 건너와 품팔이 인부로서 아사히가와 시 교외 가쿠라 읍에 정착하여 결혼했다. 내연의 처인 고도는 딸을 해산함과 동시에 사망.
이것도 거의 외울 만큼 몇 번이나 읽은 기사였다.
루리코의 아버지인 쓰지구치 게이조 씨는, “경찰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군요.”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는 내용의 기사도 되풀이해서 읽을 적마다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저녁놀이 짙게 드리운 구름은 이미 검게 그늘져 있었다. 게이조는 어둠이 깃든 하늘을 쳐다보면서 와다 형사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갓난아기만 남겨 놓고 마누라가 죽었으니 첫째 곤란한 것은 젖이었지요. 게다가 기저귀를 손수 갈고 빨아야 했으니 말이에요. 마구 울어대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이런 형편인데도 벌이를 나가지 않으면 입에 풀칠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요. 다행히 세든 집 주인 아주머니가 친절하여 아기에게 목욕도 시켜 주고 그랬대요. 그 날은 축제일이라 다니던 도로 공사도 쉬게 되었나 봐요. 무더운 날인데다가 아기는 울며 보채지요, 지칠 대료 지쳐 있었겠죠. 그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기를 내팽개쳐 둔 채 수영이나 하러 갈 요량으로 집을 뛰쳐나왔나 봐요. 그런데 선생님 댁 앞을 지나치려고 할 때 마침 뒷문에서 루리코가 뛰어나왔다는 거예요. 그때 자기 아이도 하다 못해 이 애 정도의 나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발을 멈췄다는 거예요. 그러자 루리코도 멈춰 서서 사이시를 쳐다볻래요. ‘얘야, 강가에 가지 않겠니?’하고 물었더니 루리코가 ‘응’하고 곧 따라나서더래요. 그런데 강가에 갔더니 축제 때문인지 아무도 없더래요. 그러자 루리코가 갑자기 무서웠는지 울기 시작하더래요. 사이시는 수영을 하려고 옷을 벗고 있었는데, 울지 말라고 달랬으나 ‘엄마, 엄마’하고 점점 더 크게 울더라는 거예요. 이건 마미야(間宮) 형사의 이야기지만, 그는 어랜애의 울음소리로 지칠 대로 지쳐 신경 쇠약에 걸려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아이뿐만 아니라 남의 집 아이까지도 울어대면 서글퍼지고 화가 치밀었겠지요. 위협할 작정으로 목에 손을 댔는데 금세 축 늘어져서 깜짝 놀라 도망쳤다는 거예요. 사이시는 자백을 하고 나서 무척 피곤한 얼굴로, 아내가 죽은 후 20일 동안이나 잠도 변변히 자지 못했으니 이제 낮잠이나 좀 자게 해달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발작적으로 자살한 것이 아닌가 싶군요.”
와다 형사의 말도 신문에 실려 있었다.
‘지나가는 악마에게 걸린 격이군!’
게이조는 중얼거렸다.
‘만일 루리코가 1분 후에 집을 나갔던들 사이시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을텐데.’
루리코의 불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이시에게도 역시 불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루리코를 만나지 않았던들 그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하자 게이조는 ‘우연’이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조금 전까지 숲속에서 울부짖던 까마귀들도 조용해졌다. 게이조는 전기 스탠드의 스위치를 눌렀다.
“엄마, 엄마’하고 루리코가 울며 보채고 있을 때 나쓰에 넌 무라이와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는 아내에게 추궁하고 싶었다.
“루리코가 저 마가목나무 밑에……” 하고 나쓰에가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 게이조는,
‘혹시 미친 것이 아닐가?’
하고 뜨끔했었다.
‘정신분열증일지도 모른다.’
하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쓰에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정신분열증에 걸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선배인 정신과 의사 모리가 진단을 해보더니,
“심한 신경쇠약이야. 신경 쇠약이라도 환상을 보는 경우가 잇지. 입원해서 전기 치료를 받으면 보름쯤 후엔 퇴원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말해서 게이조는 마음을 놓았다.
루리코의 환상을 볼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가 싶어 나쓰에가 몹시 가련해 보였다. 그렇게까지 괴로워한 나쓰에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루리코를 죽인 건 너와 무라이야.’ 하고 마음 속으로 줄곧 힐난해 온 자신이 아주 냉혹한 인간으로 여겨졋다. 지금은 누구든지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서로 위로하면서 셋이서 행복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런데 나쓰에는 예상보다도 빨리 건강을 회복했다. 의사도 놀랄 정도로 원기를 되찾았다. 식욕도 되찾고 조금씩 살이 오르는 나쓰에를 보자 게이조는 웬일인지 그 순조로운 회복을 단순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의외로 강한 신경이야. 용케도 미치지 않고 잘도 견디어 내는군.’ 하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큰 타격을 입은 아내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자 게이조는 그런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전기 스탠드 주의를 날아 다니는 커다란 불나방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게이조는 이윽고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밉기는 밉지만 생각해 보면 사이시도 가엾은 사람이군.’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빠, 쓰기코 누나와 이웃집에 가서 놀다 와도 돼요?”
아래층에서 도오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너무 늦지 말고 일찍 와야 해.”
게이조는 요즘은 도오루와 놀아 주지도 않고 저녁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이층 서재에 틀어박히는 자기 자신을 의식했다.
‘도오루도 쓸쓸하겠군.’
그렇게 생각은 되었지만 지금은 같이 놀아 줄 기분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게이조는 다시 사이시의 일을 생각했다.
고아의 몸으로 겨우 열여섯 살의 나이에 감옥과도 같다는 그 무서운 광산촌에 팔려간 사이시가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이조는 학창 시절에 여행을 갔을 때 인부들이 팬티 하나만 걸친 알몸으로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저것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험상궂은 얼굴을 한 십장이 짐승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가혹한 노동에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총을 든 십장들이 군용견 몇 마리를 데리고 그 뒤를 쫓는데, 운수가 사나워 붙잡혀 온 사람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강물 속에 거꾸로 쳐박거나 등을 화젓가락으로 지지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그때 들었다.
홋카이도나 사할린의 철도, 도로, 하천 공사 등은 가불금으로 중노동을 하는 이러한 인부들의 희생에 의해 준공되었다는 것을 게이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에 본 그들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엇다. 그래서 루리코를 죽인 너무도 미운 사림이긴 했지만 사이시가 열여섯 살 때부터 백부에 의해 광산에 팔려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정의 여지가 있었다.
‘광산에서 죽을 고생만 하다가 군대에 가서 또 부상까지 당하고….그렇다면 이 사나이는 자유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거의 몰랐을 것이 아닌가.’
게이조는 사이시를 그저 밉다고만 생각했을 뿐 오늘처럼 그의 과거를 동정한 적은 없었다. 그는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아내가 갓난아기만 남겨두고 죽은 사이시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이시는 루리코를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고된 노동과 군대 생활로 인해 사이시의 손은 너무나 억세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당히 힘 주는 것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죽임을 당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이시의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증오에 불타고 살의가 넘치는 손에 의해 힘껏 목을 졸려 죽임을 당했다면 루리코가 너무나 가엾게 여겨졌다. 사이시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때의 루리코에게 두려운 마음이 적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아버지로서는 다소나마 견디기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무도 없나요? 나 도독질 해 가요.”
하고 아래층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게이조는 욕의의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누구세요라니, 누구세요가 더 뭐예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요. 이 다쓰코의 목소리를 잊어버리다니요. 어서 내려오세요.”
상가집에 온 사람치고는 무례할 정도로 밝은 목소리였다. 다쓰코는 나쓰에의 학창 시절부터의 친구였다.
“이거 정말 다쓰코 씨에게는 두손들어야겠군요.”
게이조는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창문이 죄다 열려 있지 뭐예요. 쓰기코와 도오루는 어디 갔어요? 나쓰에의 옷을 몰래 훔쳐갈 걸 그랬군요.”
다쓰코는 웃지도 않고 불단 앞에 앉아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그때 여러 가지로 폐가 많았어요……”
게이조가 무릎을 꿇고 양손을 짚자 다쓰코는 흑백의 세로 무늬가 있는 옷소맷자락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난 이런 거 딱 질색이에요. 이 집은 나쓰에도 선생님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깍듯이 예의가 발라요. 그런 딱딱한 인사치레가 나한테는 실례가 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텐데.”
하고 게이조에게도 담배를 권했다. 그녀는 가볍게 눈을 감고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큰일났군요.”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동정심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게이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쓰코는 눈가를 가볍게 누르더니 다시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암요, 큰일이고말고요. 큰일이란 말은 이런 때 써먹어야 하는 거예요. 루리코는 죽어 버리고 나쓰에는 돌아 버렸으니, 이런 큰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방금 나쓰에한테 다녀오는 길이에요. 어제와 오늘은 선생님이 문병을 오지 않아 섭섭하다고 제법 사치스러운 말을 하더군요. 문병을 오라고 전해달라지 뭐예요. 혈색은 아주 좋더군요.”
하나야기류(花柳流: 일본 무용의 일파)의 나도리(名取: 스승으로부터 예명의 사용을 허락 받은 사람)인 다쓰코는 아름다운 손짓으로 담뱃재를 털었다.
“도오루는 어디 갔어요?”
“쓰기코와 이웃에 놀러 갔어요.”
“그래요? 도오루도 쓸쓸하겠군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떠세요?”
다쓰코는 ‘어떠세요?’라는 대목만은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 둥그스름하고 붙임성 있는 얼굴에 깊이 파 놓은 듯한 쌍꺼풀눈이 생기 있어 보였다.
“다쓰코 씨, 오늘은 천천히 놀다 가지 않으실래요?”
게이조는 자신이 마치 손아랫사람이라도 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다쓰코 앞에 있으면 웬일인지 마음이 몹시 유순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쓰코는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아직 오봉(음력 7월 15일) 전인데 오늘밤은 좀 선선하군요. 마루의 창문을 닫아야겠어요. 선생님께서도 좀 거들어 주세요.”
하고 말했다.
게이조는 아름다운 발걸음으로 어두운 복도 쪽으로 걸어가는 다쓰코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활짝 열어 놓았던 마루의 창문을 닫으니 갑자기 창 너머로 보이는 밤이 꽤나 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참, 사흘 전에 삿포로에 갔었는데 니시무라의 한 다방에서 다카기 씨와 우연히 마주쳤지 뭐예요. ‘쓰지구치는 어떻게 지내고 있죠? 가엾은 일을 당했지 뭡니까’하고 말하더군요. 그 사람이 가엾다는 말을 하니 약간 마음이 찡해 오더군요.”
“그래, 다카기는 잘 있어요?”
“여전히 활력이 넘치더군요. 그분은 살아 있는 동안은 늘 잘 있을 거예요. 저번에도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하던데…..”
다쓰코는 웬일인지 말꼬리를 흐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괜찮으시겠어요?”
다쓰코는 약간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일단 들어 봐야지요……”
“그럴 테지요. 두 분께서는 친구 사이니까 말할게요. 다카기 씨, 유아원인의 촉탁으로 있잖아요? 그곳에서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아이를 맡아 기르고 있다지 뭐예요.”
게이조는 무릎에 날아온 작은 나방을 휴지로 잡고 나서 말햇다.
“그래요? 하긴 범인의 자식을 시립 유아원에 맡겼다고 와다 형사가 말한 것 같기도 해요. 맞아요, 거기가 바로 다카기가 관계하고 있는 곳이군요.”
“그분은 이상한 인연이라고 말하더군요. 그 다음 말이 너무 얄밉더군요. ‘쓰지구치 녀석, 학창 시절에는 곧잘 네 원수를 사랑할지어다 어쩌고 하면서 무슨 주문이라도 외듯이 말햇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설마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르겠다고는 못하겠죠?’하지 않겠어요.”
게이조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불단에 장식해 놓은 루리코의 사진 쪽으로 갔다.
루리코는 흰옷 차림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어떤 꽃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곧바로 일어나 이쪽으로 달려오기라도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사진이었다.
‘바보 같으니!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르다니,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린가?’
이런 말이 거의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게이조는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도오루가 “적이 뭐야?”하고 물었을 때 “적이란 가장 사이 좋게 지내야 할 사람이야”하고 대답한 자신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잠자코 있는 게이조를 보고 다쓰코가 위로하듯이 말햇다.
“전 말이예요, 다카기 씨에게 그게 어디 친구에게 할 소리냐고 쏘아붙였어요. 네 원수를 사랑하고 말했을 땐 쓰지구치 씨에게 아직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말했더니, ‘쓰지구치는 다쓰코 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그릇이 큰 인물입니다’라고 하더군요.”
게이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쓰코도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침묵이 계속되는 사이에 게이조는 느닷없이 마음속으로,
‘지금 이 집에는 나와 다쓰코 씨 둘 뿐이군.’
하고 생각했다.
“다카기는 쓸데없이 나를 과대 평가하고 있어요. 난 원수의 자식을 맡아 기를 만큼 큰 인물이 못 돼요.”
이 집에 다쓰코와 단둘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게이조는 침묵이 두려워 입을 열었다.
“그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겉보기에는 성인군자 행세를 하지만, 성인군자란 약간은 도깨비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대부분 가짜예요.”
게이조는 순간 다쓰코와 단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들켜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깨비라는 말은 지나치시군요. 하긴 나 역시 성인군자가 아니지만요.”
게이조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순간,
‘정말 사이시의 자식을 맡아서 키워 볼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단지 그런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쳤다.
‘사이시의 자식을 기르다니, 그건 모르고서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얼굴?”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이조에게 다쓰코가 상냥하게 물었다.
게이조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예요. 와다 형사 말이, 불쌍한 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시의 자식이라고 하더군요. 엄마도 죽고 아빠가 목매어 죽은 것도 모르고 젖만 먹으면 얌전히 잘 논대요.”
“그래요? 가엾어라.”
“다쓰코 씨도 가엾다고 생각하세요? 난 그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어요. 와다 형사에게도 말했지만 죽임을 당한 루리코 쪽이 몇 배나 더 가엾지 않나요?”
“그야 루리코가 더 가엾지요. 가엾은 정도가 아녜요. 너무나 참혹해요. 하지만 범인의 자식 역시 가엾군요.”
“그럴가요?”
게이조는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만일 루리코가 아빠도 엄마도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쓰코의 말을 듣고 보니 게이조는 갓난아이가 혼자 살아가는 것은 혼자 죽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엾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루리코가 그렇다면 그야 가엾지요.”
“만일 내 자식이라면, 만일 나라면……하는 식으로 일일이 환산하지 않으면 사물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나 보군요. 인간에겐 잣대가 여러 개 있나 보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평하게 생각해 보면 사이시의 자식도 가엾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게이조에게는 와다 형사나 다쓰코처럼 단지 가엾다고만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그는 아까 순간적으로,
‘사이시의 자식을 맡아서 키워 볼까?’
하고 생각한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게이조도 이때는 마음에 떠오른 순간적인 그 생각이 이윽고 자신을 괴롭히고 나쓰에를 괴롭히게 되리라고는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