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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북한산성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사적 제162호.
우리는 북한산성이 숙종때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원래는 백제 개루왕때 축성됨
아래는 이 산성에 대해 삼국의 현황을 살펴본다.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을 도성으로 삼았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쪽의 방어성으로 (개루왕 5)
에 쌓았다.
신라는 553년(진흥왕 14)에 백제의 영토인 한성(漢城) 일대를 점령하고,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
를 세웠다.
고구려는 603년 신라가 장악하고 있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는데, 신라의 진평왕은 친히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게 북한산성을 빼앗기면 한강 하류 일대의 주도권을
잃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북한산성은 전략적으로 중시되었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현종은 태조의 유해를 모신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기고 건물을 증축하였다.
1232년(고종 19)에 고려군은 이곳에서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387년(우왕 13)에는
산성을 고쳐 쌓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또한 북한산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여
여기에 도성 방위를 위한 외곽성을 축조하게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북한산성이다.
당시 성곽에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北門) 등 성문 13곳과 함께 시단봉 위쪽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에 남장대,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에 북장대 등이
각각 설치되었다.
또한 1712년에는 130칸 규모의 행궁(行宮)과 140칸 크기의 군창(軍倉)도 건립되었다. 성 안에는
승군(僧軍)이 머물도록 136칸의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하여 사찰 12곳을 두었고,
99곳의 우물과 26곳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산성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흙으로 된 성벽이 약간 남아 있다. 하지만
시내에서 바라본 북한산북한산은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에서 뻗어내린 서울의 진산으로 그리 높지는 않으나 수려한 산세가 사철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어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북한산성
규모
전체 둘레는 11,6km dlwnd 99% 고양시.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원효봉 의상봉등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둘러쌈 포곡식 방어력을 높이기위해 외성 내성을 쌓았음
구조
출입대문 6개
암문 8곳 수문 2성벽을 지키는 초소 성랑 143개
임금의 거초 행궁
군대가 주둔하는 군영 3곳
승영사찰 13곳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 3곳
산영루를 포함한 누각 3곳축
축성배경
숙종임금의 명으로 6개월만에 완공
이것은 왕권 강화와 더불어 숙련된 토목기술을 보여줌
축조방법
북한신의 자연바위를 그대로 이용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낸 모습
북한산의 돌의 형태나 크기가 달리 쌓았으며개곡부는 온전한 높이로 지형이 가파른 곳은 1/2, 1/4로 쌓거니 여장만 올렸으며 험난한 보우리는 쌓지 않았음.
고대
고대부터 한강을 차지하기위해 삼국 쟁패의 요충지임
고려왕실및 불교와의 밀접한 관련
북한산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하늘로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린다.
아! 얼마나 우렁차고 높은 기상을 가진 산인가
늠름하고 우렁차고 수려하고 부드러운 산인가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든 속살
우리민족의 자랑이요 수호신이라
한산(漢山) 또는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는 북한산(北漢山, 837m)은 백두대간의 한북정맥(漢北正脈)에서 뻗어내린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신라 때는 인수봉을 동쪽에서 본 모습이 어린애를 업은 모양이라 하여 부아악(負兒嶽)으로 부르기
도 했던 북한산은 백운대(836m), 인수봉(810m), 만경대(799m) 세 바위 봉우리가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일명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한다.
이 세 봉우리에서 잘 나타나듯 중생대에 관입(貫入)한 화강암층이 크게 발달하여 경사가 심한 바위 봉우리가 곳곳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가파른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불러모으기도 하고 유사시에는 천혜의 요새로 활용
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오! 아름다워라 우리나라의 기가 여기서 부터 흘러내렸음이리라.
운무에 쌓인 산정기를 듬뿍 받은 신비의 북한 산성
북한산성 배치도
성을 쌓을 자리는 오늘날 보는 모습 그대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 시단봉, 보현봉,
문수봉,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미륵봉), 원효봉, 영취봉 등 북한산
연봉을 잇는 선으로 정해졌다.
축성은 삼군문,
의상봉과 원효봉 사이 골짜기에 있는 수문(水門)부터 용암(龍岩)까지의 2,292보(약 2.9㎞)1)는
훈련도감에서, 용암에서 보현봉까지의 2,821보(약 3.5㎞)는 금위영에서, 보현봉에서 수문까지의
2,507보(약 3.1㎞)는 어영청에서 담당하여 쌓았다.
(우리가 밥 먹은 자리가 예전에 수문자리라고 하던데?)
행궁
진골님의 사진 펌 감사합니다.
행궁은 국왕이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의 일종인데 행궁의 공사는 숙종 37년 8월에 시작되어
이듬해인 숙종 38년(1712) 5월에 마무리되었다. 완공된 행궁은 내전과 그 부속건물이 63칸,
외전과 그에 딸린 건물이 51칸 하여 거의 120칸에 가까웠다.
동장대 시단봉 정상에 자리잡은 장대로 산성의 최고 지휘관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곡식이나 그밖의 물품들을 비축할 수 있는 창고였다. 이것도 상창·
중창·하창·호조창 등 140여 칸 아울러 2만 6,000여 섬의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또 산성을 수비하는 군인들의 거처 역시 143개의 성랑이 이루어짐으로써 해결되었다.
장군들이 전황을 살피고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본부 곧 장대(將臺)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시설이었다. 동장대·남장대·북장대가 그것으로, 이 가운데 동장대는 최고 지휘관의 지휘소로
시단봉 정상에 자리잡았다.
나한봉 동북쪽의 남장대터에는 기단석만 남아 있으며,
중성문 서북쪽에 세웠다는 북장대는 자취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축성 문제가 논의될 때 반대론의 논거 가운데 하나였던
물 부족은 훈련도감에서 11개소, 어영청에서 12개소, 금위영에서 3개소 해서 모두 26개의 저수지를 확보했으며, 우물은 모두
99개에 달하였다.
행궁의 수호와 관리를 위해서는 북한산성 이전부터 존재하던 중흥사·태고사(太古寺)·문수사
외에도 아홉 개의 사찰과 두 개의 암자를 산성 수비를 목적으로 새로이 창건하여 승병들이
거주하게 하였다.
특히 중흥사는 30여 칸에 불과하던 것을 136칸으로 증축하여 도총섭이 상주하는 승군사령부로
삼았으며 북한산성은 조선의 멸망 이후 쇠퇴를 면치 못하였으나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을 통해서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성문들
대동문
북한산성에는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안에 쌓은 중성(重城)이 있었는데, 현재 노적봉
기슭 계곡에서 그 일부를 볼 수 있다.
대서문
북한산성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유적은 바로 대서문. 산성의 대문 중 가장 크고 예쁘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대서문은 문 양쪽에 상서로운 동물 모양의 배수시설이 붙어 있다.
문루에 오르면 안쪽으로는 북한산의 위용을 새삼 느낄 수 있고
바깥으로는 서울 은평뉴타운과 고양시 지축동, 삼송지구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글 사진 인터넷펌
암문
북한산성에는 문루까지 달린 커다란 성문들과 달리 문루 없이 숨어 있는암문들
암문 (용숭문)
부왕동 암문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암문으로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고,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남한 산성에 있는 문들
1. 대서문(해발165m/ 성문크기 11尺X13尺. 3.3m X 4m)
북한산성탐방안내소~대서문 0.85Km.
의상봉(義相峯) 서북쪽 해발 150m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
남북, 4개 방위중 서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인 동시에 북한산성의 정문(正門)이었다.
성안길은 북한동, 위문, 대남문, 등 산성계곡 들머리 성밖은 북한산성매표소로 빠져나가 포장도로를 따라 새마을 교를
지나 우측으로-.
2. 중성문
대서문~중성문 2Km.
원효봉(元曉峯)과 의상봉(義相峯)을 직선으로 그은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현재 산성주차장
일대에서 산성안 중심부에 위치한 중 흥동 계곡을 향하여 오르는 중간 지대 길목에 위치한 성문.
보조성곽으로 (길이 약 200m) 주성 축성후 1년후인 숙종38년(1712)에 완성하였으며 중성문과 시구, 수구가 있다.
성안길 행궁지 대남 대성 대동 보국 청수동암문 용암동암문, 성밖길, 대서문, 수문지, 성문을 통과한 후 시구로 빠져
나와 뒤로 잠시 돌아 내려온 후 좌측 국령사 표지를 따라 올라 계곡을 지나 우회로 표지에서 우측으로 조금 걸으면
3. 가사당암문(488m/ 국령문, 국령사암문이라고도 함)
의상봉(義相峯)과 용출봉(龍出峯) 사이 산능선 해발 488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서 부근 산성
안에 국녕사(國寧寺)가 있다고 하여 국녕문(國寧門) 또는 국령사암문(國靈寺暗門)으로도 불리웠다.
성안길 북한동 0.8km – 국령사 거쳐서 성밖길 백화사 2.8km.
매표소에서 우측으로 가면 산성매표소.암문밖 우측 쉼터.
경사가 심한 쇠줄 잡으며 틈틈히 뒤 돌아서서 시시각각 변하는 의상봉,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을 볼수
있다
용출봉(571m) 철계단을 내려서 바위사이를 요리조리 가 용혈봉(581m)을 내려서면 원각문(圓覺門/ 소남문으로 팻말
붙어있슴) - 증취봉 (593m)
4. 부왕동암문(521m/ 소남문, 원각사암문, 바깥쪽만 홍예문 형태)
나월봉(蘿月峯)과 증취봉(甑炊峯) 사이 산 능선 해발 521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7개 암문(暗門)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정식 홍예(虹霓)는 아니지만 위쪽 성돌을 둥글게 파서
홍예문(虹霓門)처럼 만든 아름다운 성문이다.
최근까지 성문 우측에 '소남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듯이 이 암문(暗門)은 처음에는 소남문
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근처에 원각사(圓覺寺)가 있었기 때문에 원각사암문(圓覺寺暗門)
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그
리고 부왕동(扶旺洞)이란 이름은 성안 동쪽에 있는 부왕사(扶旺寺)로 내려 가는 계곡 일대를
일컫던 이름으로 보인다.
성안길은 부왕사지 지나 북한동으로 – 조금 내려가면 샘터가 있고 성밖길은 삼천사로 통한다.
작은 암릉도 있는 계곡길
나월봉 (680m)은 우회로 갈림길에서 조금 더 올라 왼편으로 우회.
나한봉(688m) 오르다 뒤로 본 조망은 북한산에서의 최고 전망중 하나.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와 715m봉을 올라 다시 내려가면
5. 청수동암문(694m)
문수봉(文殊峯)과 나한봉(羅漢峯) 사이 해발 694m 에 위치한 성문으로 산성주능선과 의상능선 과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다.
성안 산성매표소 5.6km 와 대남문 우회로가 있고 성밖은 깔닥고개 된비알을 내려가 비봉 1.8km/
삼천사매표소 4km.
비봉능선을 타고 가다가 승가사, 향로봉, 수리봉, 탕춘대능선, 진관사, 불광동 기자촌으로-.
문수봉으로 오르면 태극기가 있고 마가목이 한그루가 서 있다.
6. 대남문(663m, 문수봉암문 11尺X11尺)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남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처음 축조 당시는 문수봉
암문(文殊峯暗門)으로 불리웠던 성문이다.
해발 715m 의 보현봉(普賢峯)과 해발 727m 의 문수봉(文殊峯)이라는 두 거봉을 잇는 해발 663m
능선 한가운데 안부(鞍部)에 위치 해 있다.
성안길은 중성문을 거쳐 북한동으로 가는 계곡길, 성밖길은 구기동/ 문수사로-.
7. 대성문(626m, 제일 큰문으로 13尺X14尺)
대남문~대성문 0.35Km.
보현봉(普賢峯)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성 능선 해발 625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이다.
원래 처음에는 소동문(小東門)으로 불리우는 작은 암문(暗門)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
행궁(行宮)이 있는 곳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형제봉과 보토현(輔土峴-현재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
하여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편리한 코스에 위치하고 있어서 임금이 이문을 출입하게 됨으로써
뒤에 성문을 더욱 성대하게 개축하여 임금이 출입하는 성문으로 위용을 갖추고이름도 대성문
(大城門)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성안길 대성암(0.2km)지나 북한동, 성밖길, 일선사, 형제봉, 삼거리(1.77km)지나 평창동 정릉 북악매표소.
8. 보국문(567m, 동암문)
대성문~보국문 0.65Km.
정확한 본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의 해발 567m 되는 지점에 위치
하고 있다.
성밖길 정릉 2.5km, 성안길 북한동
칼바위 갈림길 통과
9. 대동문(540m)
보국문~대동문 0.6Km.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우이동 진달래능선이
끝나는 해발 540m 지점에 위치.
성안길은 북한동, 성밖길은 아카데미하우스/ 진달래능선/ 소귀천 계곡길.
동장대, 북장대, 남장대는 자리만 있고 동장대는 복원.
북한산대피소(585m)
10. 용암문(580m/ 용암봉암봉)
대동문~용암문 1.55Km.
정확한 본래 이름은 용암봉암문(龍巖峰暗門)으로 무인대피소인 지금의 북한산장 부근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이 일대의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龍巖寺)가 부근
에 있었다한다.
성안길 중흥사지~북한동, 성밖길 도선사~우이동.
노적봉 삼거리~용암문.
11. 위문
용암문~위문 1.2Km.
문앞 삼거리의 고도가 700m나 되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성안길은 약수암~대동사~상운사~북한동으로 , 성밖길은 백운산장~인수산장~하루재~우이동.
약수암~대동사 계단을 올라 바위 앞에서 좌로, 상운사도 좌측으로 비껴서 내려가다 보면 또 다시 힘든 오르막.
12. 북문(430m)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북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원효봉(元曉峰)과
영취봉(靈鷲峰-현재 염초봉의 본래이름) 사이의 해발 430m 지점 안부(鞍部)에 위치하고 있다 .
원효, 염초봉 사이의 안부이며 성안길로 산성매표소 까지 2.9km
성밖으로도 오솔길이 나있는데 이정표는 없고 숨은벽 효자비 성황당 사기막으로 가는 길.
원효봉(505m) 가을엔 억새와 쑥부쟁이가 무성한 원효 정상.
13. 시구문(180m/ 서암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서암문(西暗門)으로 대서문 북쪽, 수문(水門)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성안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에게 시구문(尸柩門)이라고 불리웠고 이
이름이 원래 성문이름인 서암문(西暗門)을 대신하여 현재도 성문에 '시구문'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14. 수문(水門)
대서문 북서쪽 근처 산성계곡에 있었던 폭 50척(15.5m)에 높이 16척(5m)인 큰 규모의 수문
(水門)으로 1925년 8월 을축년
대홍수(乙丑年大洪水)때 성돌과 장대석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유실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시구문과 대서문으로 오르는 계곡 양옆 산비탈에 남아있는 성곽의 흔적만이 이 두 성곽
사이의 협곡에 웅장했던 수문(水門)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할 뿐이다.(우리가 밥 먹던 근처라 한다)
14개였던 성문은 석축으로 쌓은 무지개문 위에 목조건축을 올린 누문인 대동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을 비롯하여 13개의 문이 현존하고 있다.
복원공사를 한 시기에 따라 돌을 다듬고 축조한 솜씨가 달라 아쉽기는 하지만 성벽도 허물어진
곳을 보수하고 없어진 부분을 복원하여 옛 모습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중성문 대서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북한산을 오르다보면 만나는 성문들
승병과 절들의 운명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승병은 갑오개혁 이후 강제 해산,
절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스러지고
그나마 남은 것들도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모두 사라져서 지금은 옛 이름을 따서 새로
들어선 몇몇 사찰이 어설픈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북한산과 불교에 대해
북한산성 중흥사이다.
전소되기 전 북한산성 중흥사의 전경. 사진=불광연구원 제공
북한산(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중흥사(重興寺)는 대표적인 호국도량으로 손꼽히는
북한산성 안에서도 전략적 요지에 위치한 중흥사에는 팔도도총섭을 겸한 승대장이 머물렀고, 산성의 유지관리
물론 승군을 지휘하는 사령부의 위상을 갖게 되면서 대표적인 호국도량으로서의 위상을 가져왔다.
지금 남아있는 북한산성의 중흥사터
또 고려 숙종 만들어진 중흥사 반자(飯子)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봉은사 판전에 봉안되었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위탁보관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향로,
곧 1344년에 제작된 보물 제321호 지정4년명청동누은향로(至正四年銘靑銅縷銀香爐)도 원래는
중흥사 대웅전에 봉납된 것이었다.
그밖에도 순조 28년(1828)에 그려진 두 점의 불화, 약사회탱(藥師會幀)과 아미타탱(阿彌陀幀
)이 국립청주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온전하지는 않으나 옛 모습을 간직한 것들도 얼마간은 있다.
그밖에도 새로 들어선 태고사에 가면 고려 말의 고승 원증국사(圓證國師), 즉 태고 보우
의 부도인 원증국사탑(보물 제749호)과 원증국사탑비(1385년 건립, 보물 제611호)를 볼 수 있다.
삼천사
고려말 고승 보우의 부도
태고사 원증국사 부도고려 말 고승 보우의 부도로 도굴로 인해 쓰러져 있던 것을 1980년 지금의
상태로 복원하였다.
보현당 부도
나이들어 궁(宮)을 나온 후 도선사에서 마음 닦다 여생을 마친 한 궁녀의 삶의 흔적이다.
북한산성은 1968년에 성곽과 그 안쪽 16만 8,989평이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자세하게 올려준북한산성 역사
눈이 좋으면 많은 공부를 하고 갈텐데 대강만 보고 가려니 아쉬움이,,,,,
낭만 친구 오랜만에 만나 너무 반가웠고 행복한 하루였어요
해설의 내용보다 더 섬세해서 기억에 담고 갑니다.
넘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소서 - -
낭만님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역사적인 고증들 감사합니다
특히 북한산에 대해서는 많으것을 배웠습니다 낭만님 고맙고요...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