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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가 마흔 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요절한 까닭에 자신의 사상들을 충분히 정식화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후세에 남긴 그의 저작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반열에 앉혀 놓았다. 성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산학 저작의 전달 수단으로서 철학의 필요성을 예리하게 인식했던 신학자였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가 발전시켰던 척학적 도구는 천재성의 산물이다. 성 토마스와 스코투스는 동일한 가톨릭 신앙을 공유했지만, 그 신앙에 대한 그들의 이해들ㅡ달리 말해, 그들의 신학들ㅡ은 그들의 철학적 견해들, 그리고 특히 그들이 존재 관념들이 근본적으로 상이했기 때문에 의견이 맞지 않았다.
스코투스는 1277년의 합리주의적 철학에 대한 유죄 판결의 여파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한계들과 신학자들 간의 갈등들에 대해 성 토마스보다 훨씬 민감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들이 장황하게 논했던 불리한 조건이나 그들의 저작들에 나타난 결함들과 오류들을 자신의 독자가 망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순수 철학의 빈곤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이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용을 극찬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보았고, 신앙에 의해 계몽되었으며, 이교도 철학자들보다 뛰어나서 그들의 이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진리들을 손쉽게 증명했다.
철학의 한계
스코투스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저서 《옥스퍼트 강의 Opus Oxoniense》의 초두에서, 인간은 완전하며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주의 철학자들의 억측들에 맞서 계시의 필연성을 옹호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비첸나, 그리고 아베로에스의 철학들에 의해 그리스도교 단체들에 침입하는 잠식(蠶食)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고 인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순수하게 합리적인 철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서구 세계에 소개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위한 은총과 계시에 대한 그의 필요성에 대한 무리한 요구 때문에, 삶에 대한 전체적인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약화시켰다.
일견할 때 철학자들의 변명은 그럴싸하다. 스코투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인간이 힘들을 타고 난 본성을 갖고 있고, 각각의 힘은 그것에 비례하는 대상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시각의 자연적인 대상은 색채이다; 다라서 채색된 모든 것은 이러한 감각의 영역 내에 포섭된다. 지성에 비례하는 대상은 존재이다. 첫째 존재, 즉 하느님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들은 이러한 힘에 대한 자연적인 파악 안에 포섭된다고 결론짓는 것이 온당할 따름이다. 만약 열등한 기능들인 감각들이 초자연적인 도움 없이 그것들의 대상들을 지각할 수 있다면, 확실히 지성은 신적 도움 없이도 그것의 대상의 전 영역을 인식할 수 있는 것과 똑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주의의 논거를 매우 간결하게 요약한다: “자연은 필연적인 것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영혼론》,Ⅲ.9)
스코투스는 우리의 지성에 비례하는 대상이 십분(十分)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지성의 대상은 바로 천사적 지성의 대상만큼 광범위한데, 왜냐하면 어떤 존재도 지성의 파악 밖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성은 하느님, 즉 무한한 존재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생에서 지성의 힘을 초월한다. 우리의 현 상태에서 지성의 대상은 존재의 전 영역이 아니라 감각적인(sensible) 존재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존재 관념을 포함해서 모든 지식을 우리가 감각의 세계로부터 끌어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옳았다. 그러므로 현재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감각계가 존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바에 한정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동등하게 포함하는 존재 관념을 제공하는 영적 존재들에 대한 어떤 지적 직관들도 경험하지 못한다.
성 보나벤투라와 마찬가지로,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순수 철학자들의 기본적인 과실로 원죄에 대한 무지를 꼽는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감각에 의해 인식하는 현재의 방식이 안간에게 자연적이라고 받아들이며, 인간의 지성의 자연적 대상은 감각적 사물들의 본질들이라고 생각한다. 스코투스는 이것이 그렇지 않다고 우리를 확신시킨다: 이 본질들은 현 상태에서만 지성의 대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은총으로부터의 인간의 타락이나 현 조건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의지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이 인간의 현재의 인식 방법에서 인간 지성의 비례된 대상을 판단하지 말하야 하는 것은, 반쯤 어두운 상태에서 시각이 지각할 수 있는 바에 의해서 시각의 대상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 스코투스는 인간 지성의 비례된 대상을 감각적 사물들의 본질들이 아니라 십분 존재라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아비첸나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아비첸나의 통찰력을 철학적 통찰력에만 귀속시키지 않고 그의 이슬람 종교의 영향으로 돌린다. 그러므로 결코 자기 충족적이지 않기 때문에, 철학은 우리 지성의 참된 대상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조차 없다. 철학은 우리에게 하느님 같은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에 대해 매우 미흡하게 보증하거나, 이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을 지적할 수 있다.
현 상태에서 우리는 존재 관념을 감각 자료들로부터 추상한다. 물질적 존재와 영적인 존재 모두에서 도출된 좀 더 왕전하고 좀 더 풍요로운 관념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 관념을 우리의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존재로서의(qua) 존재, 즉 그것의 필연적인 속성들과 일차적인 구분들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점에 관해서 스코투스는 하느님이 형이상확의 대상이었다고 주장했던 아베로에스에 맞서서 아비첸나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아베로에스가 신학을 형이상학보다 우월한 학문으로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아베로에스는 형이상학을 최상의 학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형이상학에 가장 숭고한 대상, 즉 하느님을 할당했다. 사실상,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알려진 하느님은 신학의 대상이다. 신학 밑에는 형이상학이 존재 일반, 즉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모든 것에 공통적이고 일의적인(univocal) 관념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형이상학자ㅡ최소한 그가 계시의 지침을 수용한다면ㅡ는 존재에 관한 자신의 탐구의 끝에서만 하느님을 일차적이고 무한한 존재로 증명함으로써 그분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한다.
하느님의 실존
철학의 한계들에 대한 스코투스의 단언(그는 자신의 대변인을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생각했다)은 하느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 방법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보여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분석함으로써 제일운동자의 실존을 증명했다. 스코투스에게, 이러한 분석의 결론은 올바르지만, 하느님에 대한 접근으로서 그것은 부적합하고 불완전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은 운동에 관한 학문인 물리학의 질서에 속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첫 번째이고, 유일무이하며, 무한한 존재의 실존이 아니라 운동의 첫째 원인의 실존을 증명한다. 그러한 존재의 실존이 형이상학에서 증명되었을 때까지는 인간 정신이 그것의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인간 정신이 하느님의 고유한 완전성 안에서 무한한 존재인 그분에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에 의해 제공된 하느님의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은 선험적인(a priori) 논증, 즉 하느님의 실존을 그분의 본질에 대한 지식에서 연역하는 논증이 아니다. 스코투스는 이런 종류의 증명이 현재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신적 본질에 대해 어떤 고유한 개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실존을 오직 후천적으로(a posteriori), 즉 하느님의 결과들로부터 출발해서 그것들의 원인에 관해 그분에게로 올라가는 것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스코투스는 성 토마스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 증명이 근거해야 하는 결과들의 선택에서 스코투스는 성 토마스와 다르다. 성 토마스는 운동하는 사물들의 실존과 같은 감각적, 경험적인 사실들을 선별했고, 반면에 스코투스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선택한다: 어떤 존재는 산출될 수 있다(some being is producible). 이 같은 출발점의 이점은 그것은 그 자체로 피조물들의 현실적인 실존과 무관한 진리이다. 하느님이 창조하려고 의지하지 않았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존재가 산출가능하다는 것은 영원히 참일 것이다.
스코투스의 증명의 출발점은 따라서 개념도 아니고 감각적, 경험적 사실도 아니고, 오히려 어떤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리, 즉 존재의 산출 가능성이다. 이러한 출발점이 갖는 불리한 입장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존재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능존재(possible being)(산출되는 어떤 것의 가능성)에 관한 진리라는 것이다. 그 증명은 하느님의 현실적인 실존으로 완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능성의 지평으로부터 현실적인 실존의 지평으로 이행(移行)이 그 증명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이행은 그러한 증명의 바로 끝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증명 자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존재는 산출될 수 있다. 어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무(無)에 의해서, 또는 어떤 것에 의해서 산출될 수 있다. 처음의 두 가지 가능성들은 제거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떤 존재도 그 자체를 산출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무에 의해 산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산출적인 어떤 다른 존재에 의해 산출 가능하다. 이 같은 능동 원인을 A라고 나타내 보자. A가 일차적인 능동 원인이라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선행적 원인에 의해 산출되지 않고 그것의 결과를 그것 자체의 힘으로 산출하는 첫째 능동 원인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A가 일차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선행 B에 의해 산출된 이차적인 능동 원인이다. A에 대해 추론했던 것처럼 우리는 B에 대해서도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능동 원인이거나 이차적인 능동 원인이다. 우리는 이 같은 방식으로 무한히 계속하거나, 절대적인 첫째 능동 원인에서는 무한 퇴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능동 원인은 실존하고, 이분은 하느님이다.
이 증명의 핵심 부분은 본질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의 불가능성이다. 스코투스는 이런 종류의 계열을 우유적으로 정열된 계열과 세 가지 측면에서 구별한다: 1〕본질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의 계열에서, 이차적인 원인은 바로 그것의 인과성을 첫째 원인에 의존한다. 예컨대, 작가의 손에 쥐어진 펜은 손에 의해 움직여질 때에만 펜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우유적으로 배열된(accidentally ordered) 원인들의 계열에서,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이차적인 원인은 그것의 인과성이 아닌 그것의 실존을 첫째 원인에 의존할지 모른다. 이를 테면, 어떤 사람이 그의 아들에게 실존을 제공하지만, 그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무관하게 그 자신의 아들을 낳는다. 2〕본질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에서, 첫째 원인과 이차적인 원인의 인과성은 상이한 본성을 갖고 상이한 질서에 놓여 있는데, 왜냐하면 첫째 원인의 인과성은 이차적인 원인의 인과성보다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유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3〕우유적으로 배열된 원인들과 달리, 본질적으로 배열된 모든 원인들은 그것들의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동시에 현존해야 한다.
스코투스는 우유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시작도 끝도 없이 각각의 구성원이 자녀를 낳는 인간의 계열;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의 불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증명들을 제공한다. 그는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의 결과들의 총합을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 같은 총체성(totality)은 원인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 안의 모든 것이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총체성의 원인은 그것의 외부에 있어야 하고 그것 안에 결과로서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결과들의 총체성의 원인은 그것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결과들의 총체성의 원인이므로, 그것은 첫째 원인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본질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은 우월한 원인이 열등한 원인보다 더 완전한 위계질서 안에 정렬된다. 이런 방식으로 배열된 원인들의 무한 계열이 있다면, 그 같은 계열의 원인은 그것보다 무한하게 우월하고 무한하게 더 완전하다. 사실상, 그것은 무한한 인과적 힘을 지닐 것이고, 따라서 그것의 결과들을 산출하기 위해 그것 자체를 선행하는 어떤 원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절대적으로 첫째 원인, 즉 하느님일 것이다.
우리가 우유적으로 배열된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의 가능성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배열된 원인들 가운데는 첫째 원인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정에는 시간 안에서 펼쳐진 원인들의 무한한 연속이 있고(예를 들어,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낳고, 차례로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낳는 등 무한하다), 전체적인 계열과 그것의 구성원들 각각은 자신들의 실존을 시간의 길이가 유한한 계열의 구성원들 중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무한한 지속성을 갖는 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원인들의 시간적인 연쇄의 외부에 있고 그 연쇄와 시간 자체를 초월해야 하는 이러한 존재가 첫째 능동 원인이다.
이 논점에 이르기까지 스코투스는 첫째 능동 원인의 현실적인 실존이 아니라 그것의 가능성만을 입증했다. 그는 어떤 존재는 산출될 수 있다는 진술로 자신의 증명을 시작했다. 그는 이제 이러한 가능성이 다른 것, 즉 첫째 능동 원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다음 단계는 이 존재가 가능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실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스코투스는 이 존재가 현실적으로 실존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존재일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이것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성상 첫째 원인이기 때문에, 선행하는 존재에 의해 야기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존재가 현실적으로 실존하지 않았다면, 어떤 원인도 그것을 산출할 수 없었고 그것이 실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난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첫째 동 원인이 실존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첫째 능동 원인의 현실적 실존은 그것의 가능성의 유일한 근거이다.
유사한 논증을 활용하여 스코투스는 모든 존재들이 지향하는 일차적인 목적과 전박적인 창조된 우주를 초월하는 첫째 존재의 실존을 증명한다. 따라서 그는 첫째 능동 원인이 일차적인 목적 그리고 일차적인 존재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질서들 가운데 어떤 하나에서의 우선성이 나머지 다른 것들에서의 우선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피조물들에 관한 그분의 속성들 안에서의 하느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 같은 지식이 제아무리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스코투스는 그분 자신의 본질적인 속성, 즉 무한성(infinity)에서 하느님의 실존을 증명함으로써 한층 더 높이 오르려고 애쓴다. 스코투스에게는 무한성이 신적인 존재의 독특한 양태이며, “무한 존재”(infinite being)의 관념이야말로 우리가 현생에서 하느님에 대해 구성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무한성에 대한 증명은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상승하는 최고점이다.
하느님은 첫째 원인이자 원인 없는 원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왔다. 이것에서 그분의 인과적 힘이 무한하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제일운동자의 무한한 동력(動力)을 증명했다. 스코투스는 하느님이 모든 인과적 힘을 최고도로 갖고 있으며, 따라서 그분은 무수한 존재들을 동시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선다. 게다가, 최고의 존재로서 하느님은 무수한 가지적(intelligible) 대상들을 이해하며, 따라서 그분의 지성 또한 무한함에 틀림없다. 신적 의지 또한 무한함에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그분의 지식만큼 무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의지는 자연적으로 다른 아닌 하느님인 최고선으로 이끌린다.
무한 존재 관념이 전적으로 합리적이며, 어떤 모순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으로부터 도출된다. 진실로, 지성은 이와 같은 사유의 최고 대상에 관해 생각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재는 최소한 가능적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실존하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모순적이다. 단 하나의 온당한 결론은 무한 존재가 실제로 실존하며 이 존재가 그것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근거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실존을 무한 존재로 증명할 때, 스코투스는 성 안셀무스의 논증에 호소하고 있는데, 그는 단지 그것을 “손질했을”(touched up) 뿐이라고 주장한다. 안셀무스적 논증의 중심 논점은 사유의 최고 대상, 즉 하느님은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코투스는 이 같은 존재 관념이 어떤 모순도 수반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이 존재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 존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실존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 어떤 다른 이유도 제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인식하는 방법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져야 한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현생에서 정확히 어떤 종류의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스코투스는 긍정적인 지식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부정적인 지식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이 돌멩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분을 무(無)와 구분할 수 없는데, 무(無) 역시 돌멩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개념들은 그분에 대한 긍정적인 개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what he is)을 모르고는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사실(that God exists)을 인식할 수 없는데,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의 본질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의 실존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는 “하느님이 실존한다”(God exists)는 명제의 진리도 쉽게 알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명제의 용어들을 이해하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단순히 그분이 피조물들에 의해 재현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긍정적인 개념이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피조물들 안에서 그것의 기원을 갖지만, 그것이 하느님 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분을 알지 못한다.
부정과 유비를 거친 하느님에게로의 디오니시우스적이고 토마스적인 접근 방법들에 대한 이 같은 비판들은 우리가 하느님과 피조물들에 일의적인(univocal) 개념에 의해 그분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긍정적인 지식을 갖는다는 스코투스 자신의 입장을 위한 길을 연다. 일의적인 개념으로 그는 그것이 사용될 때마다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동일물에 대해 그것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존재 개념은 일의적이다. 그 대안은 하느님에게 적용되는 존재 개념이 피조물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유비적(analogous)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존재에 대한 단 하나의 관념은 감각 자료들에서 추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같은 개념과 유비적인 존재 개념을 구성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정보의 원천도 유효하지 않다. 만약 우리의 개념들이 하느님과 피조물들에 일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해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
존재에 대한 일의적인 개념은 따라서 현생에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필요 불가결하다. 이것은 존재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한 개념인데, 인간성과 동물성 같은 다른 본성들에 d대한 우리의 개념들과 유사하다. 물론 존재는 유(類)가 아니다; 유와 달리, 존재는 절대적으로 모든 것에 술어화될 수 있다. 그렇지만, 존재는 그것이 현실적인 실존에서 보이는 모든 차이점들과 별도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와 같다. 존재가 실존할 때, 그것은 언제나 어떤 양태에 의해 규정된다; 예컨대, 그것은 무한하거나 유한하고, 창조되지 않았거나 창조되었다. 존재에 대한 일의적 개념은 존재의 모든 양태들로부터 추상되며 존재 그 자체의 본성만을 보유한다. 만약 우리의 존재 개념이 존재의 양태들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일의적이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이 모든 존재들에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존재는 무한 존재에 귀속되며 부차적으로 유한 존재에 돌려진다. 그러므로 현실적 실존에서 존재가 우선적으로는 일부 존재들에 속하며 부차적으로 여타의 존재들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존재는 일의적이지 않고 유비적이며, 따라서 그것은 우선적으로(per prius) 그리고 부차적으로(per posterius) 그것들에 술어화된다.
존재에 대한 일의적 개념 말고도, 형이상학자는 선성, 지혜 등의 일의적인 개념들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데, 그것들에 의해서 그가 하느님을 다양한 속성들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 개념을 통해, 그는 하느님이 바로 그분의 본질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하느님에 대한 가장 왕전한 개념은 무한 존재 개념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그분에 대해 갖는 가장 단순한 개념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을 원인으로(virtually) 포함한다. 강의 헨리쿠스에게서처럼, 스코투스에게 무한성은 신적인 존재의 긍정적인 완전성이다: 무한성은 그것의“고유한 위대함”(magnitudo propria)이다. 스코투스는 또한 무한성을 신적인 존재의 본질적인(intrinsic) 양태라고 부른다. 존재의 양태는 그 존재의 본질에 어떤 형식적인 규정을 덧붙이지 않고 단순히 그 존재의 실존 방식을 규정할 때, 본질적이라고 말해진다. 백색광에 덧붙여진 빛깔은 그것이 백생광의 본질을 변경시키기 때문에 그 빛에 대해 비본질적이고 형식적인 부가이다. 그러나 만일 백색광의 강도가 증가된다면, 존재의 새로운 양태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그것에 부가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무한성은 존재의 신적인“강도”(intensity)를 결정하는 양태이다; 이와 달리 피조물들은 존재의 유한한 양태를 갖는다.
신적 속성
하느님의 실존을 증명하면서 한편으로 스코투스는 권능, 지식, 그리고 선성을 포함하여 신적 속성들 중 여러 가지를 확립한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전능(즉, 단독으로 무수한 결과를 산출하는 그분의 권능), 광대함, 무소부재(無所不在), 정의, 자비, 그리고 섭리 같은 여타의 신적 속성들은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진다. 이 같은 속성 등은 상호 간에 그리고 신적인 본질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스코투스는 속성들 간에 이성의 구분만 있다는 토마스의 견해를 거부하고, 인간적이든 신적이든 간에 어떤 이해 행위보다도 앞서는 하느님 자신 안에서 그것들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지성은 속성들을 구분하는 대신에 이미 하느님 안에 그 구분이 현존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스코투스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하느님의 가지성(可知性)이 문제가 된다. 만약 하느님의 속성들이 상호 간에 그리고 그분의 본질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가지적이지 않다. 속성들에 대한 신학자들의 연역은 개념들에 대한 쓸모없는 유희일 것인데,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것들 모두에 의해서 그런 것만큼 하나의 개념에 의해서 완전하게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투스는 신적인 속성들 간의 그 구분을 형상적 비동일성(a formal non-identity)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정신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니라 실제 안에(a parterei) 실존한다는 점에서, 심지어 실재 안에 토대를 갖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이성의 구분과는 다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실재적 구분(real distinction)이 아니다. 실재적 구분은 그것들 중 하나가 나머지 다른 하나 없이도 실존할 수 있는 사물들 사이에서 적어도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의해 실존한다. 두 사람은 실제로 다른데, 왜냐하면 그들은 따로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료와 형상도 실재로는 별개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본성상 분리될 수 없다고 해도, 하느님이 원하기만 하면 그것들을 다로 실존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상적인 비동일성은 사물들의 실존에서 그것들과 관련되어 있지 않고, 그것들 중 하나가 나머지 다른 하나에 대한 정의(定義)의 일부가 되지 않는 사물들의 형상성들이나 본질들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선성은 진리에 대한 정의(定義)의 구성 요소가 아니다; 따라서 선성과 진리는 형상적으로 비동일적이다.
형상적 비동일성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절대적인 단순성과 상충되지 않는가? 하느님은 형상적으로 별개인 속성들이 추가된 본질로 이루어진 복합 존재가 아닌가? 스코투스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들 모두는 그것들의 존재의 양태에서 무한하기 때문이고, 무한성을 통해 그것들은 실제로 동일하다. 그 자체로 정확히 고려할 때, 각각의 속성은 다른 모든 것 그리고 신적인 본질과 형상적으로 비동일적이다. 그러나 각각은 실존에 있어 현실적으로 무한하다. 하느님의 선성은 무한하고, 따라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도 무한하다. 본질 또는 (정의에서 표현되는) 통성 원리(quiddity)의 지평에서, 속성들은 형상적으로 상호 간에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속성들은 실존이라는 그것들의 공통적인 양태인 무한성에서는 실제로 하나이다. 무한성은 속성들의 형상적 구분을 억제하지 않으면서 그것들과 신적 본질에 실재적인 동일성을 부여한다.
하느님의 무한성 때문에, 인간의 논리 규칙들은 그분에게 충분하게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동물성은 합리성이다”(Animality is rationality)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논리 규칙들은 그것들을 포함하는 세 번째 통성 원리, 즉 인간성 안에서만 동일한 유한한 통성 원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신성은 신성이다”(Deity is goodness)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데, 왜냐하면 이러한 용어들의 형상적인 비동일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실재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용어는 무한하고 따라서 원인으로(virtually) 나머지 다른 것을 포함하며 그것과 동일하다. 스코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성과 위대함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다른 것들(신적 속성들)은 이른바 상호적인 동일성에 의해 동일한데, 왜냐하면 각각은 형상적으로 무한하고, 이러한 무한성 때문에 각각은 나머지 다른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스코투스주의에서 무한성의 역할을 따라서 토마스주의에서 esse에 수행되는 것과 유사하다. 성 토마스에게, 하느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개념은 존재의 순수 현실태(Ipsum Esse)이다; 스코투스에게, 그것은 무한한 존재(Ens Infinitum)이다. 성 토마스에게 존재의 순수 현실태가 탁월하게 그리고 완전한 단일성으로 모든 신적 완전성들을 포괄하는 것과 같이, 스코투스에게 존재의 무한성은 하느님의 모든 속성들의 실재적인 동일성을 확증한다.
인간
스코투스의 인간론은 형이상학적 관념들과 일치한다. 인간은 물질성이라는 그것 자체의 형상을 지닌 질료와 인간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구조의 이러한 요소들 각각은 그것 자체의 부분적인 존재(esse)를 갖는다; 그것들 전부는 복합적인 존재와 더불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스코투스는 인간존재(esse)는 단순하지만, 그의 본질은 영혼과 육체를 포괄하는 복합이라는 토마스의 이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거부한다.
인간 영혼에 대한 철학자의 인식의 한계는 스코투스에 의해 엄밀하게 확립된다. 철학이 인간의 본성을 합리적인 동물로 그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영혼이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만, 철학은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 따로 창조되었다거나 그것이 비물질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이 같은 후자의 진리들은 신앙에 의해서만 확실하게 알려진다.
이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 동일하다고 해도, 영혼의 힘들은 상호 간에 그리고 영혼의 실체와 형상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최고의 힘들은 그의 지성과 의지이며, 스코투스는 그것들 각각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인다.
인식에서 그것들의 역할들에 대한 그의 설명이 스코투스 자신의 것이라고 해도, 그의 동시대인들과 공통적으로 스코투스는 인간의 지적인 힘들을 능동 지성과 가능 지성으로 나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을 수용한다. 본성들은 실재 안에서 공통적이고 감각들에 의해 그 자체로 재현되기 때문에, 능동 지성이 수행해야 하는 모든 것은 본성들을 감각 자료들에서 추상함으로써 그것들을 완전히 보편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 능동 지성은 감각적 힘들 안의 영상들에 근거하여 행위 할 필요가 없으며, 성 토마스가 가르쳤던 바와 같이, 보편자들에 대한 추상 작용을 위해 영상들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능동 지성은 펼쳐진 책에서처럼 감각들에 의해 제시된 가지적 전언을 읽을 수 있고 능동 지성으로부터 그것의 보편적 개념들을 직접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우리의 현 상태에서 모든 인식은 추상 작용에 의해 획득되지만, 스코투스는 지식의 두 가지 유형들을 구분한다: 그것에 의해 우리가 어떤 것을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실존하고 현존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직관적인 지식; 그것에 의해 우리가 어떤 것을 그것의 실존이나 비실존에 상관없이 인식하는 추상적인 지식. 두 종류의 지식의 대상은 개물(個物)이거나 공통 본성일 수 있다; 그것들은 전자의 대상이 실존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반면에 후자의 대상은 실존으로부터의 추상 작용에서 알려진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스코투스는 감각 지식 안의 d사한 구분을 지적한다. 시각은 직관적인데, 왜냐하면 시각은 현존하고 실존하는 그것의 대상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상상력은 추상적이고, 그것의 대상의 실존이 없는 직관적인 인식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긍정적으로 답한 이들은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들이 실제로 실존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회의주의의 길을 열었다. 스코투스는 그 자신이 이러한 회의주의적 추세와 동맹을 맺는 것을 거부하고 비실존적 대상에 대흔 직관적인 인식을 용어상의 모순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논점에서 스코투스는 증대되는 철학에서의 회의주의를 저지하려 한다. 가장 세련된 철학적 분석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는 강의 헨리쿠스와 대부분의 프란치스코회 학파에 반대하여 특별한 신적 조명이 자연적 인식의 진리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코투스는 특별한 신적인 도움 없이도 자연 확실성이 가능한 세 가지 분야들에 대해 윤곽을 잡는다. 첫째, 용어들로부터 도출된 원리들과 결론들. 원리들은 그것들의 용어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 참이라고 알려진다. 이러한 인식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감각들이 원인들이 아니라 단지 원리들에 대한 지식의 계기(occasion)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성은 감각들의 오류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백인이라고 틀리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들의 어떤 실수도 “전체는 그것의 부분보다 크다.”같은 원리에 관해 지성을 오류로 이끌 수 없는데, 왜냐하면 지성은 단지 그것의 용어들을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진리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또한 몇 가지 일반적인 경험적 사실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예컨대, 빈번한 월식(月蝕)이나 어떤 종(種)의 약초는 “맵다”. 이러한 진리들의 확실성이 적용되는 개별적인 사례들 전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이러한 결과들이 발생하는 규칙성에 의존하고, 그것들이 자연적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우리는 다음의 명제에 대해 확신한다; 자유롭지 않은 원인(즉, 자연적 원인)에 의해 규칙적으로 산출된 결과는 그 원인의 자연적 결과이다. 우리가 어떤 종의 약초가“매운 맛”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규칙적으로 관찰할 때, 그 이유를 모른다고 해도, 우리는 이것이 이런 종류의 약초에 규칙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아마도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러한 종류의 과학적 명제를 정식화해야할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어떤 종의 약초는 매운 경향이 있는(apt to be)데, 왜냐하면 어떤 여건들 아래에서 그 성질이 그 약초에서 결핍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이나 내가 인식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나에게 필연적으로 확신시켜 주는 어떤 증거도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나에게 즉각적으로 명백하다. 시각상의 환각들은 가능하지만, 이러한 경우들에서 적어도 나는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that I see)을 확신한다. 감각들의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적인 세계의 실존에 대해 우리가 외적 세계가 갖고 있다고 지각하는 성질들과 더불어 확신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자유롭지 않은 원인에 의해 규칙적으로 산출된 결과가 그 원인의 자연적 결과라는 진리를 환기시킬 수 있다. 감각적 사물에 의해 규칙적으로 산출된 감각 작용은 그 사물의 자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각들이 규칙적으로 동일한 대상을 지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는 대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의 눈은 물속 지팡이를 굽은 것으로 지각하고 우리의 손은 그것이 곧다고 느낄 때와 같이, 우리의 감각들이 그것들의 판단에서 일치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좀 더 단단한 물체는 좀 더 부드러운 물체와의 접촉에 의해 부러지지 않고, 따라서 물 속에 들어간 지팡이는 실제로 부러져 있지 않다는 것을 지성은 인식한다.
형상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지성과 의지는 각각 그 자체의 작용을 갖는다: 지성은 진리를 인식하고, 의지는 선을 사랑한다. 의지는 인간의 활동성에서 그것의 명령하는 지위 때문에 인간에게 좀 더 고매한 기관이다. 그것은 지성에게까지 명령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우리가 그렇게 행하려고 의지하는 까닭에 인식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성은 의지의 행위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의지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의지 작용에서 지성의 역할이 완전히 우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의지에 선택하고 사랑할 대상들을 제공할 때, 지성은 의지 작용의 부차적인(occasional) 원인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분석에서 의지는 자동적이고 그 자체의 행위를 책임진다. 스코투스는 “의지만이 의지에 나타난 의지 작용의 총체적인 원인이다.” 라고 말한다.
스코투스의 견해에는 결과적으로 주의주의(voluntarism)의 기질이 있지만, 이것은 그것의 고유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스코투스의 개념화에는 어떤 주의주의도 없다는 것에 이미 주목한 바 있다: 신적인 의지는 신적인 지성 너머로 고양되지 않고, 신적인 이데아들과 그것들이 포함하는 영원한 진리들을 결정한다. 하느님의 의지는 창조하려는 그분의 자유로운 결정과 창조되는 본질들에 대한 그분의 선택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지만, 피조물들의 본질들 자체는 신적인 의지에 독립적이다. 본질에서 연역 가능한 영원한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필연적이고 불변한다.
따라서 신적인 의지의 지배하에 포섭되지 않는 필연적이고 사변적인 진리들의 체계가 있다. 유사하게, 도덕적 질서에는 자연법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독단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물들의 바로 그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 스코투스는 계명들 중 처음 세 가지를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법으로 간주한다; 그것들의 구속력은 매우 절대적이어서 하느님까지도 그것들을 폐지할 수도 없고 그것들 없이 지낼 수도 없다. 하느님은 인간이 우상 숭배를 실천하거나 그분의 이름이 헛되이 취급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들은 삶에서 인간의 목적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경배할 인간의 의무는 엄밀하게 자연법에 근거하고 있고, 아마도 정해진 날에 하느님을 경배할 의무까지도 스코투스가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다고 해도 그러하다.
나머지 다른 일곱가지 계명들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적어도 인간 본성과 조화된다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이것들은 자연법이고 인간의 행복을 확보하는 데 확실히 적합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도덕 질서의 첫째 원리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역될 수 없고,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하느님은 그것들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의지했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에 따라 실행된 행위들은 선한데, 왜냐하면 하느님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때때로 그것들 없이 지낸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엄밀하게 자연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령, 하느님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인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것을 허락했고,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우리에게 절도와 살인을 금지하는 법들이 엄밀하게 자연적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결정들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코투스에게는 대부분의 도덕법이 엄밀하게 필연적인 대신에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확정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하느님이 전제 군주로서 인간을 통치하고, 그에게 독단적인 법칙들을 부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무한하게 선하고, 그분의 모든 법들은 그분이 그것들을 만들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선하다. 그러나 그분의 무한성과 절대적인 권능 때문에 그분은 일련의 제한된 도덕 법칙들에 구속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우리 자신의 우주와 다른 무한하게 다양한 우주들을 창조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그분은 인간이 확립했던 것들과 다른 도덕 법칙들에 의해 인간을 그분에게로 인도할 권능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에서처럼, 그의 윤리학에서 스코투스는 하느님의 무한성과 그분과 피조물들 간의 우연적인 결속을 최전면에 둔다. 최종적인 조치를 취하고 하느님의 의지에 의존하는 전체적인 도덕 법칙을 구성하는 것은 오캄에게 남겨졌다. 그러나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우선 하느님과 우주에 어느 정도 필연성을 도입시키는 스코투스주의의 요소들, 즉 신적인 이데아들과 공통 본성들을 제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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