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서 겪는 유일한 지옥이 바로 전쟁이란 말이옵니다!” 드라마 <고려 거란전쟁>(2024) 8회에서 강감찬이 어린 황제의 순진함이 초래할 위험을 질책하며 한 말이다. 대조적으로, 성경은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깃드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이사야와 미가 예언자는 사자와 양이 함께 뛰놀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메시아 시대를 상상했다. 지옥 같은 전쟁이 현실이 되어 지구에 펼쳐지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약속을 대관절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성경과 우리 기독교에는 전쟁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각축을 벌인다.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대별된다.
‘거룩한 전쟁론’(holy war theory),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
‘기독교 평화주의’(pacifism).
첫 번째, ‘거룩한 전쟁론’은 그 명칭에서 보듯이 한편으로 전쟁은 거룩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거룩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온건한 관점에서는 전쟁은 항상 그렇지 않지만, 이따금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점에서 신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구약에서의 ‘야훼의 전쟁’과 성경의 세계 이후에 벌어지는 전쟁을 동일시한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편이자 ‘절대 선’으로 치부하면서, 상대를 ‘절대 악’으로 분류하고 타자를 완전히 섬멸하여 지상에서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야훼의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대한 특정한 신학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를 현대의 세속적 전쟁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다.
다음은 ‘정당한 전쟁론’인데, 용어 정리가 시급하다. 철학 쪽에서는 ‘just’를 ‘정의롭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면 ‘거룩한 전쟁론’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여기서 ‘just’는 ‘정당화되다’라는 뜻이다.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justifiable)는 의미다. 정당화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롭지 않다는 뜻을 내포한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악이지만,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정당화되려면, ‘전쟁 전’(jus ad bellum)과 ‘전쟁 중’(jus in bello) 각각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전쟁 전에는 방어가 목적이라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성공 가능성, 그리고 전쟁이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요구된다. 또한, 전쟁 중에는 민간인을 공격해서는 안 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폭력만 허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실제로 전쟁을 억제하기보다는, 공격적 전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악용된 사례가 많다.
예컨대, 서구 기독교의 최악의 오점 중 하나가 십자군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수행된 것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신비주의자인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에 의해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이 정당한 이유와 올바른 의도를 충족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도 정당하다면, 도대체 어떤 전쟁이 정당화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정당한 전쟁론’은 전쟁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기준은 남용될 위험이 있지만, 비판적 검토와 엄격한 적용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하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이 전쟁론은 원래 의도대로 엄격한 기준으로 전쟁을 비판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환은 ‘정당한 전쟁론’을 현대의 윤리적 전쟁 논의에서 여전히 중요한 틀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평화주의’이다.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의 정신에 근거하여, 폭력과 전쟁은 기독교 신앙과 결코 양립할 수 없으며 정당화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군사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종종 순교를 감수하며 비폭력적 신앙을 고수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점차 국가와 결합하며 전쟁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나뱁티스트와 퀘이커 등은 비폭력 평화주의의 전통을 이어 왔다. 역사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던 이 입장은 20세기 후반부터 그 설득력과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외적으로는 핵전쟁의 공포로 인해 ‘정당한 전쟁론’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고, 내적으로는 평화주의의 이론적 엄밀성과 현실 적합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핵 운동과 시민권 운동 등에서 평화주의는 비폭력적 저항의 원칙을 바탕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었다. 게다가, 분단 상황에서의 전쟁은 우리가 일구어온 산업화와 민주화를 한순간에 파괴하고 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지옥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에 평화는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지상명령이자 정언명령이다. 이는 단지 전쟁을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해와 비폭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실천적 요청이기도 하다.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전쟁 같은 삶을 사는 우리에게 ‘정당한 전쟁론’을 지지하든, 평화주의를 지지하든, 서로 적대적인 논쟁이 아니라 평화를 일구는 생산적인 토론과 협력을 모색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성도의 삶 안에서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주님이 주시는 평화(요 14:27)를 먼저 누리고, 그것을 세상을 향해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부름에 순종할 때다. 그렇다. 전쟁은 지옥이다. 평화는 천국이다!
첫댓글 전쟁은 지옥이다ㅜㅜ
모든 전쟁이 멈추고 일상이 회복되는 평화가 찾아오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