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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32편 1-7절
찬송 / 405장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성서 / 이사야 59장 9-15절, 마태복음 26장 20-25절
말씀 /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주님, 주님께 지은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발뺌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죄를 우리가 잘 압니다.(이사야 59장 12절)
예수를 넘겨줄 사람인 유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복음 26장 25절)
“나는 아닙니다.”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특히 온 세상 모든 일을 자기가 다 했다고, 그래서 자기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나대던 인사들이, 무슨 청문회 마이크 앞에만 서면 입을 맞춘 듯 한결같이 모르쇠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을 까맣게 모르는 게, 그게 그렇게 당당할 일은 아니지요.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그게 목을 바짝 세우고 도리질 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참 무책임한, 비겁하고 비루한 것을 넘어서 비열하고 사악한 일입니다. 쥐구멍도 아까울 일이지요. 적어도 사람은,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도 또 그랬습니다. 작년 여름 폭우에 한 해병대 병사가 실종자 수색을 하려고 강물에 들어갔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습니다. 참 허망하고 안타까운 사건이었지요. 그런데 그 강물에 들어간 병사들이 구명조끼조차 입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서 들어가면 안 되는데도, 무리하고 무모하게 투입했다는 사실도 밝혀졌지요. 도대체 누가 왜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는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의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해병대 수사단이 꾸려지고 수사를 했습니다. 수사 단장은 수사한 결과를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해서 결재받고, 법에 따라 수사 자료를 경찰에 넘겼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참 괴이하게 흘러갔습니다. 경찰에게 넘긴 수사 자료를 다시 빼앗아오고, 수사 보고서의 내용까지 수정 변경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입니다. 누군가 대단히 격노했기 때문이랍니다. 이른바 VIP가 격노했으니 모든 수사 결과를 다시 뒤집으라는 것이지요. 참 황당한 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 따라 수사하고 법에 따라 처리한 수사 단장은 졸지에 그 무서운 항명죄로, 무슨 대역죄로 고발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해병대 수사 단장의 이름이 박정훈 대령이지요. 이 단장이 무슨 VIP가 격노했다는 말에 주눅 들어서, VIP가 이뻐하는 해병대 사령관은 슬쩍 빼버리고, 두루뭉수리로 꼬리 자르기 수사 보고서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사 단장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사건은 다시 공수처로 넘어가고, 누가 왜 수사 외압을 넣었는지, 도대체 격노했다는 VIP라는 자는 누구인지, 문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느닷없이 국방부 장관이 호주 대사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국방부 장관은 수사 상황을 보고받아 잘 알고, 또 이 사태의 원흉인 격노한 VIP가 누구인지도 잘 아는 당사자지요. 공수처의 수사 대상자, 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출국 금지 상태였는데, 출국 금지도 풀어버리고 대사 신임장도 없이 다급히 호주로 날아갔습니다.
이거 왜들 이러는 것일까요? 우리의 생때같은 아들 아닙니까? 그 젊디젊은 병사가 허망하게 희생당했는데, 누구 하나 자신이 잘못했다고 책임지는 자 하나 없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지요. 그러니 누가 그 폭우에 위험한 강물에 들어가라고 했는지, 명령한 자가 있겠지요. 현장 지휘관들이 위험하다고 보고해도, 그래도 들어가라고 명령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사령관 아닙니까? 그러니 사령관이 나서서 나라고, 내가 명령했다고 나서서 마땅한 책임을 지면 끝날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아니라네요. 참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령관입니다. 우리나라 국방을 책임진다는 장관은 또 어떻습니까? VIP가 격노해서 그래서 수사 결과를 좀 변경하라고 했다고, 내가 그렇게 지시했다고 말해야 하지요. 만약 정말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다면, 그건 더 큰 일입니다. 장관도 모르게 어느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슨 좀도둑 도망치듯이 바다 건너로 냅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발, ‘바로 저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국민 앞에 책임지고 나서는, 그런 지도자를 좀 볼 수 있었으면,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 무교절이라고도 부르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해방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지요.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아 빵을 떼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배반자가 있다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제자들은 술렁이면서 설마 나는 아니겠지 서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있는 사람,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아 한 그릇을 쓰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누구일까요? 그때 유다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유다가 한 말입니다. 사실 다른 제자는 몰라도 유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배반자, 예수님을 넘길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14절에서,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만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은 눈엣가시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제일 먼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성전을 청소하셨지요. 성전에서 팔고 사는 짓거리 하지 못하도록 판을 둘러 엎어버리셨습니다. 성전을 대놓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정말 서슬 퍼렇게 질타하셨습니다.
지난주에 모처럼 오대산 월정사에 들렀습니다. 가끔 생각할 게 있으면 들르곤 하는 곳이지요. 그런데 다시는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절이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보아도 너무나 장사꾼 야바위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들어서자마자 큼지막한 메뉴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무슨 기도는 얼마 무슨 기도는 얼마, 기도 메뉴도 참 다양하게 개발하고, 기도의 부가가치에 따라 정가제로 기도를 판매하고 있었지요. 장사가 잘 되는지 건물 지붕 기와도 빤들빤들하게 다 바꾸었습니다. 돌탑에 묻은 세월의 오랜 흔적도 반짝이는 장식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차마 못 볼 꼴 본 듯 얼른 나와버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떠올라 맴돌았지요. 아마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처음 보셨을 때, 그때 어쩌면 이런 느낌 아니셨을까요?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한국 교회에 들어와 보신다면, 어쩌면, 그보다 더 맘이 참담하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그런 예수님을 보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은 어땠을까요? 자신들이 이룬 거룩한 성전을 야바위판이라고 뒤엎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질타하고, 거룩한 성전 뜰에서 더러운 병자들을 고쳐주고, 은근히 아니 노골적으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와 성전 지도자들을 위선자라고 헐뜯고, 급기야 그 위대한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막말 저주하는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결국,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대제사장 관사에 모였습니다. 그냥 둘 수 없지요. 대책을 마련해야지요. 항명죄로 집어처넣던지, 멀리 호주로 날려버리든지 뭐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지요. 아예 그 싹을 없애야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속임수로 잡아서 죽이기로 머리를 맞대고 결의했습니다. 명절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유월절이 끝나면 실행하기로 모의했습니다.
그런데 일은 의외로 잘 풀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제 발로 대제사장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돈을 많이 요구하면 어쩌나 우려했지만, 겨우 은돈 삼십 냥, 노예 한 사람의 값, 헐값으로 협상이 타결되었지요. 대제사장들은 얼른 은 삼십 냥을 셈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랬으니 유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배반자가 누구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넘길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라도 내가 선생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기기로 했다고, 내가 바로 배반자라고 실토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나는 아니라고 시치미 떼며 발뺌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서에서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한 것은 유다가 처음이 아닙니다.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한 첫 사람은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첫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나무 가운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만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그 열매를 먹었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때 아담이 하나님께 ‘제가 먹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아담은 비겁하게 나는 아니라고 말했지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랬다고, 여자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쩌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때 여자도 나는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 저 뱀 때문이라고 뱀에게 책임을 넘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사람 아담과 이브는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라 한낱 뱀에게 휘둘리는 무책임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아들 가인은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샘하여 들로 꾀어내어 아우를 쳐서 죽였습니다. 살해한 동생을 땅에 묻어버렸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이 물음은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셔서 묻는 물음이 아니지요. 네가 아우를 죽였느냐고, 그 책임을 묻는 물음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아니지요.’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참 오래된 말입니다. 아담이 그렇게 말했고, 가인이 그렇게 말했지요. 네로가 그렇게 말했고, 히틀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카기 마사오가 그렇게 말했고, 전두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무슨 VIP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니지요.’ 참 무서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는 유다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나는 아니지요’ 이 말이 곧 배반자의 말이라는 말씀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사야 60장 이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이스라엘이 다시 영광을 되찾는 희망을 노래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발한다고, 도저히 우리는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다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아프게 자복할 때, 마음을 찢으며 부르짖을 때,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고백하는 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에스더도 이스라엘 백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백성을 불러모아 슬피 울게 하였는데, 그 함께 우는 게 무슨 힘이 있다는 걸까요? 죄를 고백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 역사의 분기점이 될 만큼,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함께 죄를 고백하는 것, 함께 슬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너무도 중요합니다. 물론 함께 슬퍼한다고 해서 우리가 역사를 바꿀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슬퍼한다고 죽은 채상병이 다시 물에서 살아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슬픔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본문 15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보셨다.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자복하며 슬퍼하는데, 그 슬픔을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진 이스라엘을 슬퍼하는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서도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슬픔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슬픔을 슬퍼하실 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슬퍼하실 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슬픔은 나약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슬픔은 힘이 있습니다. 예언자 요엘도 하나님의 긍휼한 아픔에서 역사의 희망을 보았습니다.(요엘 2:1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십자가는 아담이 ‘나는 아니지요’ 하고 도망친 이래 모든 사람이 나는 아니라고 도망치니까, 결국 하나님 자신이 ‘그래 나다’ 하신 사건이 아닐까요? 아무도 책임지는 인간이 없으니 하나님의 외아들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자기 몸에 지신 것,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유다는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아담 이래 배반자는 언제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말하는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저입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 아닐까요?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리새파였던 바울은 그 누구보다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란 자신의 의가 죄를 덮고도 남을 만큼 많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사도가 된 바울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바울은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슬퍼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저 죄의식에 찌들어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또한 ‘나는 아니지요’ 하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오시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순절에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슬픔에 함께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