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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성공,행운의 법칙 스크랩 넬슨 만델라
김박사 추천 0 조회 16 09.03.03 16: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넬슨 만델라
(1918~)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7세기 중반에 백인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빈곤과 질병, 무지 속에서 살아온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자유를 얻게 해준 사람이 바로 넬슨 만델라이다. 1918년 남아공화국 트란스케이에서 출생 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부당하게 차별대우를 받게 된 만델라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 한평생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고 청년동맹과 민족회의를 결성해 저항운동을 전개했고, 27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권운동의 투사이다. 44세 때 종신형을 선고받아 수감된 뒤 72세의 나이에 석방되었다. 그는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제도를 철폐시켰는데, .아파르트하이트(흑백분리정책)란 이름 하에 전세계적으로 악명높았던 남아공 백인정권의 흑백차별정책을 종식시켰고 흑인 다수사회인 남아공에서 백인통치를 끝내는데 결정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화해와 관용의 정치가」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인들에 대한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았다. 흑백화합을 위한 관용과 화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통치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무욕(無慾)의 정치가」이다. 후계자로는 타보 음베키 부통령(55)을 지명했다. 
최근 들어 국제사회와 아프리카인들은 만델라 대통령을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라 부르고 있다. 그는 △국제무대에서 아프리카의 이익 대변 △아프리카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내전의 중재 △아프리카 국가들간 경제협력 주도라는 크게 3가지 방면에 활동을 하고 있다. 
만델라는 국제사회의 논리와 입장이 아프리카의 이익과 주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카다피 리비아대통령으로부터 리비아 방문을 초대받은 만델라는 미국의 간섭에 쐐기를 박고. 트리폴리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에 맞설 용기가 있음을 분명히 과시했다. 만델라의 용기는 아프리카인들의 가슴속에 서방 강대국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있는 정치가라는 분명한 인식을 심어줬다. 
그는 자이르내전 분쟁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견해를 교환해 유혈충돌 막았고.앙골라내전의 중재를 위해서는앙골라 대통령과 반군지도자 요나스 사빔비를 초대해 회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만델라는 또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을 위해 아프리카국가들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96년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남아공에서 혁명 대신 백인정권 지도자들과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성취해 낸 탁월한 정치력과 도덕성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 보다는 21명에 이르는 손자·손녀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8일기자들에게 10년전인 90년 2월 11일 케이프 타운 인근 빅토르 버스터 감옥에서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는 자유를 다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던 중요한 전기였다”고 밝혔다. 
그는 백인 소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으나 인종차별제도 아래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F.W 데클레르크 대통령의 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만델라에 대한 사면발표는 소수 백인통치의 종말을 예고한 것이었으며 만델라는94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만델라는 석방 당시 클레르크 대통령과 싸워 자신의 지지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빅토르 버스터 감옥에서 석방시켜줘야 한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고 회고했다. 
당시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를 프리토리아에서 조용히 석방시켜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려고 했다.. 만델라는 “나는 빅토르 버스터에서 석방되기를 원했으며 이문제로 우리 둘은 약6시간동안 논쟁을 벌였다”면서 “나는 사람들이 나를 빅토르 버스터에서 맞아주기를바란다고 말했으며 마침내 그가 빅토르 버스터에서의 석방에 동의했을 때 나는 적지않은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석방 당일 이른 아침 만델라는 당시 부인이었던 위니의 손을 잡고 감옥의 정문을 걸어서 나왔으며 수 만명의 지지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만델라는 석방 10주년 기념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인종차별을 극복한 것은 모든 조직과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이들은 서로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함께 뭉쳐서 이뤄내야할 더욱 많은 일들이 있다는 점을깨닫고 있었으며 모두를 같은 운명을 지닌 하나의 국가로 이끌어 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300년이상 지속된 정책이 단 10년만에 모두 해소되기를 바랄수는 없다”며 경고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은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주도한 해방운동 과정에서 여러 조직과 세력들과 함께 연합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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