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단하지 않은 일본문화·일본불교
요즘 서점에 가면 일본문화에 대한 서적들이 매우 많다. 그 중에는 베스트 셀러가 되어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진 책도 상당수 있다.
그런데 그 책들을 보면 짧은 기간 내 막연하게 일본의 문화를 표면적으로 접했을 때 범하기 쉬운 오해가 적지 않게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저자들의 식견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문화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 즉, ‘폐쇄성’ 등이 작용한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폐쇄성이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어느 문화권의 사람들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것들을 흔히 ‘친절한 일본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일본에서 1982년부터 만 13년을 보낸 나의 경험으로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나 역시 일본인들이 일반적으로 친절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으나, 그들의 가슴 속 한 자락을 더 깊게 파고들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인들과 대화를 하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것만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으나, 그 중 한 가지가 외국인들이 개인들의 사생활이나 일본이라는 집단이 소유한 문화의 특질에 대해 질문을 하면 “글쎄요?” 혹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며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런 그들을 볼 때 ‘아, 이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구나’라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단기간의 여행자들은 겨우 일본의 ‘길거리 친절’에만 익숙해진 채 귀국을 하게 되고, 일본인들은 매우 친절하고 겸손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일본문화에 내재되어 있는 ‘내부의 부끄러움 내지는 껄끄러움 등을 밖으로는 흘리지 말라’는 일본인 사이의 어떤 암묵적인 약속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결코 외부 사람들에게 내부의 사정을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 그 어떤 외부인이 자신들 즉, 내부인들과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이든지 하나의 운명공동체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이상은 결코 입이 조개가 되는 것(입을 다문다)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일본과는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복잡한 감정들을 지니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도 대충 ‘길거리 친절’ 수준에서 일본문화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 버리고 만다.
이와는 다른 면에서 일본문화에 대한 오해 또한 적지 않다. 그 중에서 불교문화에 대해서는 특히 심각할 정도이다. 백제 성왕 때 우리가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묘한 우월감을 지니게 한다. 또 우리는 광복 후에도 우리 나라에서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몇몇 일본불교 교단의 활동 등을 ‘왜색불교’라는 감정 섞인 한마디로 비하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유학생들이 비싼 수업료를 들여가며 일본에서 불교학을 배워 오는 것이 현실이다. 일반인들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분야가 불교문화인 것이다.
일본불교의 원류
일본불교의 원류는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우리 나라의 백제 등 삼국과 중국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 나라란 백제의 성왕 때(537년)를 기점으로 하여 전해져 꽃피웠던 ‘아스카(飛鳥 : 약 592∼710년)·나라(奈良 : 710∼784년)시대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란 ‘헤이안(平安: 794∼1192년. 헤이안은 京都교또의 옛 이름)시대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각종 일본어 사전 뒷부분의 부록에 실려 있는 ‘한자(漢字) 일본어 읽기’를 보면 일본어에서 한자(漢字)를 음(音)으로 읽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오음(吳音) 읽기’와 ‘한음(漢音: 唐音이라고도 한다.) 읽기’가 그것이다. 오음(吳音)이란 백제 등에서 전해진 발음법이며, 한음(漢音)이란 중국 본토에서 직접 건너간 발음법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불교는 당시의 최신 학문이었으며 중국의 선진문물과 함께 들어왔다.
일본의 경우도 우리와 같았다. 오늘날 어떤 생소한 기계를 작동시킬 때는 기본적으로 반드시 원래 제작국가의 회사에서 발간한 물품 스타일을 소중히 한다. 고대 일본인들도 불교를 받아들여 수용·소화하는 과정에서 백제 등 삼국에서 전해준 발음 내지는 삼국의 습관을 소중히 하였음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즉, 일본은 한자 하나에서도 백제식, 중국식 발음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언어현상도 불교의 원류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불교는 유입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그 결과도 크게 달라졌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나라 지방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친근한 감정들은 단순히 자연풍광 탓만이 아니라 우리의 고대문화가 일본에 남아서 산출시킨 여운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토(京都) 지방 등을 방문했을 때 느끼는 이질감은 중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일본화된 갖가지의 현상 때문일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일본의 아스카 지방이나 나라 지방의 불상들은 한국 사찰의 부처님 상호와 매우 유사한 분위기를 보이는데 반해 교토 지역 등의 불상들은 무엇인가 엄청나게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거나, 분노에 가득 차 있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좀 거북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부족하나마 답을 찾는다면 나라 지역의 일본불교문화는 아직 일본문화 고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로 백제 등의 영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상태이며, 교토 지역 등의 일본불교문화는 나라 불교의 토대 위에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여러 종파의 불교가 접목되면서 차츰 요즘 우리들이 흔히 접하는 순수 일본화가 진행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에 뿌리 내린 불교, 그 빛과 그림자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일본 전국의 들판 한복판에서, 도심의 빌딩 옥상 위에서, 주택가의 한 골목길에서 붉은 천을 두른 석조 지장보살상이나, 관음보살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매일 청소한 것 마냥 항상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고, 조그만 불단(佛壇)에 올려지는 공양물 또한 수시로 바뀌어져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일본의 불교도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불교의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일본인에게 불교는 생활화 내지는 습관화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 삼칠일(3×7)이 되면 절에 데리고 가서 참배를 시키고(물론 신사에도 간다.) 죽으면 반드시 절에서 장례식을 치른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불교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특별히 눈에 띄는 불교적인 문화가 없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한다.
불교가 일상에 녹아 있다는 사실은 일본 승려들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 가정방문법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의 승려들은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신도의 집을 방문한다. 일단 현관에 들어서면 전통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수인사를 나누고 그 가정의 중심에 모셔진 불단 앞으로 인도된다. 그 다음 불단을 향해 앉은 채로 각 종파의 소의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독송하고 난 뒤 신도들과 마주 앉아 짧지만 법문을 한다. 그리고 회향을 하고 차 한잔을 마시는 것으로 가정법회를 끝낸다.
그런데 실은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이미 노령화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경우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우리 나라의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매우 외롭다. 가정법회를 위해 방문한 승려는 이들의 좋은 말상대가 된다. 승려들은 웬만큼 바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참석한 신도들의 수다를 들어줘야 한다.
대화 내용은 옆집의 누가 아프다거나, 누가 결혼을 했다느니 따위부터 누구네 집 개가 강아지를 몇 마리 낳은 것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이런 것을 잘 소화한 승려는 신도관리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따르는 신도들도 많다. 가정법회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기일이나 신도가 특별히 요청한 날, 소속 종파의 기념일 등에 한하는데 대부분의 신도 가정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방문하게 된다.
앞에서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일본의 불교계에서 행해지는 외형적인 모습들을 보면 일본은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불교를 생활화하고 있다. 또 실제로도 일본인들의 일상생활의 행주좌와로부터 시작하여 각 사찰에서 행해지는 갖가지 행사를 보면 감탄할 정도이다. 3박4일 일정의 참선 수행이나, 사경(寫經)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경건·진지함에는 머리가 절로 수그러진다.
꽃꽂이 등도 사찰에서 행해지던 것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일본 여성들이 시집가기 전에 전통의상인 기모노 입는 법을 배우는 곳도 대부분 사찰이다.
또 하나 일본에서 불교의 생활화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졌는지는 불교계가 세운 종립학교 연수 프로그램을 보면 알 수 있다. 연수 참가자들은 외형적이나마 성별·나이를 불문하고 참가기간 동안만은 출가 수행자와 똑같이 행동한다. 물론 우리 나라 사찰에서도 각종 수련대회가 거행되고 있지만, 일본의 각종 불교연수에 비교하면 아직 한참 멀었구나 하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하리 만큼 생활화된 일본 불교문화도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이는 참으로 커다란 모순이다. 이는 잠시 생각을 돌려, 쇼오토쿠(聖德) 태자나 구카이(空海) 등을 신앙하는 일본불교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일본불교의 매우 독특한 것 중, 혼지쓰이자쿠(本地垂迹,본지수적)라는 사상이 있다. 쓰이자쿠란 불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신(神)의 모습으로 환생했다는 것이다. 즉, 일본인들에게 있어 쇼오토쿠 태자나 구카이 등은 일본인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불보살이 화현한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나 수행에 모자람이 있다 해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극 중 전쟁에 관한 것들을 보면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마치 신탁(神託)을 받듯이 신불(神佛)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힘을 얻어 출전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진군하는 맨 앞 부분에는 “나무부동명왕” 등 불보살의 명호를 쓴 깃발이 군기처럼 맨 앞에 선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세계 어느 나라 불교계에도 없는 모습인, 그것은 주변 여러 민족을 침략·살상·강탈하는 것도 불보살의 이름 아래 자행되면 정당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요즘도 교과서 문제로 일본은 주변국가와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수많은 나라와 유엔 인권위원회가 문제를 지적해도 일본인들은 무시하고 만다. 나는 그러한 일본인들의 태도가 견지되는 근거 중 하나를 좀전에 지적한 대로 일본의 불교문화에서 찾는다. 우리 나라·중국·동남아를 침략, 약탈한 것도 일본인에게는 성전일 뿐이다. 일본의 천황은 당시 생신(生神)이라고 불렸는데, 천황도 쓰이자쿠라는 불보살의 화신이니, 그들의 행위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불보살의 가르침에 따른 정당한 행위였으며, 따라서 일본인들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의 특성을 논할 때 강자 앞에서는 약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는 제대로 한 수 가르쳐 주면 무릎을 꿇는 것이 일본인들이라는 것일 게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좀더 일본문화, 일본의 불교문화를 심도있게 연구하여 그들의 잘못된 인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본인들에게 제시하여 근본적으로 사고를 전환하게 해야 한다.
일본불교의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른바 ‘장례 불교’라는 것이다. 일본의 불교학 수준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제일의 수준이다. 이렇게 불교학이 융성하고, 불교의 역사가 장구하며, 신도가 많은 일본, 불교국가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일본에서 불교의 장래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바로 ‘장례 불교화’에 대한 우려다.
일본에서는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면 승려가 될 수가 있고,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교과를 교육받으면 주직(한국에서는 '주지'라고 한다) 자격증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직이 되어 신도들의 장례를 집전하고, 자신의 여가 생활을 즐기면 그 다음은 별로 할 일이 없는 것이 일본 승려들의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승려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면 무한히 많은 일이 있는 전문직이기도 하며, 신도들의 약간의 수군거림을 참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즉 그들은 임종을 맞은 자기 절의 신도들을 잘 인도(引導)하기만 하면 된다. 일본에서는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면 자신이 단가(檀家 : 신도)로 등록된 사찰 주직의 손을 빌려 저 세상으로 간다. 때문에 장례를 집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찰을 유지하거나 생활하는 데 거의 지장이 없다. 이로 인한 탓인지 승려들의 나태와 무기력 현상이 심각해졌다.
한마디로 이미 난숙의 경지에 이르러서인지 일본불교가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일본의 암흑사회를 지배한다는 야쿠자(조직폭력단)들도 승려들에게는 매우 관대하다고 한다. (매우 흉폭한) 그들도 언젠가는 승려들에 의하여 저승으로 인도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도에 의한 사찰 관리와 운영
연말이 되면 일본 사찰에는 몇 가지 모임이 있다. 우리 나라로 치면 거사림회와 보살회와 같은 모임인데, 그 자리에 승려들은 참가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이 모임에서는 해당 사찰의 다음해 예산과 행사 등이 결정된다. 예를 들면 법당 건물이 낡아 수리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곧바로 시행할 것인지, 아니면 몇 년간 예산을 책정하여 수년 후에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법당의 수리 보존은 신도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왜냐하면 법당이란 신도 모두가 모여 불법을 듣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새해의 행사에 소요되는 예산과 각각의 역할 분담에 대해 결정한다. 그리고 난 후에는 사찰의 1년 살림에 대한 예산을 책정한다. 여기에는 주직(住職 : 우리 나라 사찰의 주지에 해당)의 가족들의 1년간 생활비 예산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주직의 자녀가 대학생이면 1년간의 수업료와 하숙비, 그리고 매월 용돈까지 세세하게 책정된다. 물론 신도수가 적어 경영이 어려운 사찰의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대다수의 불교도들은 자신의 가정이 신도로 등록된 사찰의 경영에 책임을 진다.
이러한 예산에는 주지가 각종 불교행사에 참여하여 벌어들이는 수입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의 승려들이 불교행사에 참여하여 벌어들이는 수입은 주로 장례식이나 같은 마을 내지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거나 인연이 있는 같은 종파의 행사에 부전 등으로 참여하여 벌어들이는 것이므로, 부정기적이거나 전혀 없을 수도 있다. 물론 염불을 잘하여 인기가 있는 승려들은 수입이 짭짤하다.
일본의 단가제도와 사찰의 기능
우리 나라에서는 같은 값이면 수행을 많이 쌓은 고승이 천도를 해주기를 바라는데 일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집안이 소속한 종파의 특정 사찰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벗어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일본불교 특유의 단가(檀家)제도가 있다. 단가제도는 정토계 종단들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에도(江戶)시대 사찰이 담당했던 기능과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먼저 정토불교란 흔히 임종불교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과거 정토종 계열의 각 종파는 타종파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취약했다.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에는 나라 불교(화엄종, 법상종 등의 계열)나 헤이안 불교(천태종 계열)의 각 종파는 천황가(天皇家)나 귀족들의 귀의를 받았으므로 경제적으로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정토종은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포교한 데다 현세이익을 부정하는 교의 때문에 기도 등에 의한 수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장례식 법요를 중요한 불사(佛事)로 삼게 되었으며, 그런 와중에서 사찰과 단가(檀家 : 신도)의 관계가 강하게 결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요인으로 도쿠카와 막부의 폐쇄적인 정책에 의하여 반강제적으로 성립하게 된 사단(寺檀) 관계를 들 수가 있다. 즉 사찰이 막부의 명령에 따라 단가(신도)를 감시하는 기구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누군가 태어나면 반드시 소속된 사찰에 출생신고를 해야 했고, 또 누군가 죽게 되면 반드시 소속 사찰에 사망신고를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거주지를 변경할 때도 소속 사찰 주직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요컨대 사찰은 요즘말로 하면 경찰조직과 행정조직 일부를 담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일반 민중들은 거기에 종속되면서 차츰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부정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권력의 일부를 위임받아 일반 민중을 억압했던 사찰의 기능에 익숙해졌던 것이 일본불교 고유의 단가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본어 중에 단나(檀那)라는 용어가 있는데, 원래는 우리말의 ‘나리’ ‘주인’ ‘남편’ 등에 해당하는 의미였으나, 지역에 따라서 사찰의 주직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단나(檀那)라고 불려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요즈음은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 태평양전쟁 이후 미군정이 반포한 법령 등에 의하여 자유로운 종교활동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계속된 관습이 하루아침에 변하기란 불가능하다. 일례로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사찰에서 기록, 보관하던 과거장(過去帳)이 잘못 이용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과거장이란 사찰에서 생긴 일, 신도의 신분, 신도의 사망 연월일 및 속명, 법명을 비롯한 각종 사항을 기록한 것인데, 실질적으로 이것은 일종의 노예문서와 같은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이 기록이 악용되어 과거 조상들이 하층민 계급이었던 사람들은 취직이나 결혼 등에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현재 우리 나라에도 남아 있다. 그것은 일제가 우리 민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일례를 들면 우리 시골에 가면 흔히 어떤 동리를 무슨무슨 ‘부락’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부락(部落)’이라는 용어가 차별 용어에 해당한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인이 아닌 듯이 차별받고 살던 민중이 모여 사는 곳을 ‘부라쿠(부락)’라고 부르며,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을 ‘부라쿠민’이라 하면서 마치 문둥병환자를 보듯이 기피한다. 조선시대에는 없던 ‘부락’이라는 마을 호칭이 일제시대에 이 땅에 정착하였는데, 지금까지 우리들은 아무 느낌 없이 쓰고 있다. 참으로 역사의 산물은 무섭다. 지금도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이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
하여간 일본에서의 불교가 지닌 영향력은 안팎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일본의 일반 성인 남성이 돈을 벌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주택을 장만하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집안의 가장 좋은 방안에 들여놓을 고가(高價)의 불단(佛壇)을 장만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불단 중에 비싼 것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와 맞먹는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 집보다 불단이 비싼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일본인들을 보면 그들이 아직도 과거의 억압된 기억 속에 사는 것인지 아니면 참으로 깊은 신앙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개산조사 중심의 불교 행사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일본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일 것이다. 필자도 이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고 그때마다 대답을 하지만 대부분의 질문자들은 썰렁한 표정을 짓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불교도들에게는 가장 큰 명절인 4·8 봉축행사가 현대 일본 불교도들에게는 동네 어린이들을 상대로 하는 수준의 행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행사의 명칭도 봉축행사가 하나마쓰리(お花祭り)이며, 탄생불을 단 위에 세우고 동네 어린이들이 스님의 안내를 받아 아마자게(甘酒)라고 하는 것을 국자로 떠서 탄생불에 끼얹는 것이 행사의 중심이며, 그 뒤에는 사찰에서 준비한 선물을 주는 것으로 끝이다. 종파에 따라 어른 신도들도 참석하고, 규모가 제법 큰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4·8행사와 비교해보면 그 열기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물론 과거 일본 불교도들이 초파일을 성대하게 치르던 흔적들은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모든 행사는 자파의 개산조사(開山祖師)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자신들에게 불법을 만나게 해준 것은 현재로서는 해당 사찰의 주직이며, 그 정점에는 해당 사찰이 소속한 종파의 개산조사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래서 간혹 종파에 따라서는 조사당이 부처님을 모신 불당보다도 월등히 큰 경우도 있다.
조사당은 소속 종파의 종지를 따르는 교도들이 모이는 장소이므로 커야 되며, 불당은 승려 몇 사람이 예불을 올리면 되므로 그리 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본불교의 가장 큰 행사는 각 종파의 개산조사나 중흥조의 기일에 올리는 감사의 행사(예를 들면 정토진종의 報恩講보은강 등)이다.
일본의 유명한 불교 행사 가운데 등롱(燈籠)축제가 있다. 우리의 추석 정도에 해당하는 오봉(おぼんろ : 양력 8월 15일)이라는 명절에 하는 행사인데 도로나가시(燈籠流し)라고 한다. 이 등롱축제는 해가 진 후 전국의 강변에서 행해지며, 특히 원폭현장이었던 히로시마에서 행해지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10여 년 전 한강에서 실시된 유등제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분위기가 있다. 등롱은 여러 가지로 각각의 소원을 담고 있다. 그 소원은 조상 등에 대한 추선(追善)공양 등이 주를 이루는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들을 달래려는 의도가 짙은 것 같다. 이 행사는 우리의 우란분재와 그 기원이 같다고 한다.
이 밖에 특이한 불교행사로 하리구요(針供養)라는 것이 있다. 매년 2월 8일 하리마츠리(針祭)라는 것이 열리는데, 이 날은 바늘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며 봉제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래된 바늘이나 부러진 바늘을 모아 두부나 어묵 같은 것에 찔러 아와즈시마사(淡島社)에 봉납한다. 아와즈시마사는 예로부터 부인병 등을 기원하면 잘 낫는다는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2월 8일 부인 등을 위하여 힘을 다한 바늘을 위해 공양하는 것이다. 이런 행사는 일본 곳곳에 퍼져 있는데, 고야산(高野山)에 가면 바늘 무덤, 볼펜 무덤, 견공(犬公) 무덤, 연고가 없는(無緣) 무덤군 등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는 생명, 무생명 등을 위한 무덤이 곳곳에 있다.
일본의 특이한 신앙 형태
일본불교를 들여다보면 ‘쭛쭛신앙’이라는 생소한 용어를 접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타이시(太子)신앙·다이시(大師)신앙’ 등이다. 타이시 신앙은 쇼오토구(聖德) 태자를, 다이시 신앙은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를 신앙하는 것이다.
쇼오도쿠 태자는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로, 요즘에는 쇼오도쿠종(聖德宗)이라는 종파가 성립해 있을 정도이며, 담징의 벽화로 유명한 호우류지(法隆寺)를 본산으로 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쇼오도쿠 태자는 일본 왕실의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전륜성왕(轉輪聖王)과도 같은 존재다. 쇼오도쿠 태자가 창건했다는 시덴노지(四天王寺)는 오사카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는 천태종이었으나 후일 와슈(和宗)로 종명(宗名)을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 또한 쇼오도쿠 태자에 대한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와슈의 화(和)가 쇼오도쿠 태자가 제정했다는 ‘17조 헌법’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정신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쇼오도쿠 태자는 이 ‘화(和)’의 정신으로 당시 서로 대립하고 있던 호족들을 하나로 묶어 일본을 하나의 나라로 성립시켰다고 한다.
다이시 신앙의 정점에 있는 홍법대사 구카이는 고야산(高野山)의 오쿠노인(奧の院)의 영굴(靈窟)에서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이루어 생신(生身) 그대로 오늘날까지도 계속 살아 있는 존재라고 숭배되고 있다. 고야산을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서 살아 있는 구카이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들이 속출하며 오늘날에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한 신앙 형태와 그 심화 정도는 일본의 각지에 산재한 구카이가 수행하였다는 장소에서 ‘헨로(遍路)’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순례자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순례복인 흰 옷차림의 등에는 ‘나무대사변조금강(南無大師遍照金剛 : 이 명호는 구카이를 가리키는 것이다.)’이라는 문자를 적고 삿갓에는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고 적어 죽는 순간까지도 구카이와 함께 한다는 신앙심을 나타내고 있다.
날씨가 좋은 가을철이면, 일본의 어느 곳에선가 ‘나무대사변조금강’을 염송하면서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순례의 길을 걷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비록 티베트 불교도들의 라사 순례의 열망만은 못한다 하더라도 구카이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많은 일본 불교도들은 오늘도 일생에 단 한 번인 헨로(遍路)의 여행길에서 구카이와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이한 신앙 형태로 참배와 관련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특정한 날 절을 참배하면 그 단 한 번의 참배로 4만6천일 내지 4만7천, 4만8천일 참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도쿄의 유명한 아사쿠사데라(淺草寺), 교토의 기요미즈테라(淸水寺), 오사카의 시덴노지(四天王寺) 등이 그러한 절이다.
고야산·히에잔의 색다른 수행
고야산은 해발 1000m에 가까운 산인데 그런 곳에서 한 겨울에 꽁꽁 얼은 얼음을 깨고 계곡에 들어가 진언염송을 하는 수행승과 일반신도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라고 하겠다. 겨울이면 NHK에서 겨울의 풍물시(風物詩)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하얀 눈 속의 계곡에서 엷은 속옷만 걸친 그들 모두의 머리에서는 증기가 발생하여 화면이 뿌옇게 보인다.
또 히에잔(比叡山)의 천태종을 보면 천일회봉(千日回峰)이라는 출가 승려의 수행이 있다. 이것은 예로부터 매우 어려운 수행이었다고 하는데, 천일 동안 히에잔의 연봉을 신새벽에 출발하여 홀로 돌며 걷는 것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떤 일이 있어도 멈춰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이런 회봉 수행은 다음에 언급할 수험도의 영향으로 성립되었다고 한다. 나는 히에잔을 한 번 걸어서 올라 봤는데, 참으로 악산(惡山), 험하기는 왜 그리 험하고 웬 원숭이와 뱀은 그리 많은지, 그런 곳을 불빛 하나 없이 걷는다는 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평상심이 항상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요즘 일본에는 진정한 비구승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금 그분이 생존해 계시는지 모르나 20여 년전 천일회봉을 이룬 고령의 스님이 일본 전국민들로부터 종파를 떠나 존경을 받는 것을 보았다(참고: 그 스님은 일본 천태종 승려로 酒井 雄哉(사카이 유사이,1926~2013)이다).
일본문화의 원형 수험도
일본의 텔레비전 역사극을 보다 보면 우리 나라나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복장을 한 인물(修驗行者)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등에는 네모난 상자를 지고, 머리에는 시커먼 옻칠이 되었음직한 어른 주먹만한 아동용 모자처럼 생긴 두건을 눌러 쓰고, 허리에는 긴 칼과 커다란 소라로 된 법라(法螺)를 차고 손에는 긴 봉을 들고 옷매무새를 전쟁터에 임하는 병사처럼 깡뚱하게 한 채로 험한 산중을 거의 뛰어 날아다닌다. 일명 ‘야마부시(山伏, 山武士)’라고 하는데 그들이 불교 수행자라는 것이었다.
과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수험도(修驗道)라고 불리는 그들의 주의주장과 역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게 된 것에는 하숙집 동료였던 친구가 수험도 종파 출신인 덕분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수행집단이라고 기억하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수험도의 수행방법은 신라 화랑들의 수행방법과 매우 유사하며, 또한 그들의 사상을 이루고 있는 골간 역시 화랑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즉 산악이라는 수행의 장소, 그리고 토속신앙으로부터 유불선(儒佛仙)까지 흡수한 사상체계가 그것이다. 비록 한쪽은 승려라는 전문인이고 한쪽은 청소년, 무사계급이라는 특성이 있지만 잘 살펴보면 거의 대동소이하다고 할 것이다.
화랑도는 개인 수행보다는 집단 수행이 중심으로 낭도 중에는 승려들이 반드시 동참했고, 그 목적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에 있다고 한다. 수험도 역시 개인 수행도 있으나 집단 수행이 중심이며 주법(呪法)을 닦으며 얻어진다는 신통력으로 모든 재난, 질병 등을 제거하고, 현재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增益) 것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이 양자의 목적은 표현은 다르지만 거의 동일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수행방법 중에는 상박(相撲; 씨름 내지는 수박희, 태껸에 해당한다고 보여짐)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수행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 손발로 하는 무술(空手)이 민간에 퍼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만일 이 상박이 요즘 말하는 일본씨름인 ‘쓰모’나, 우리의 옛 무술인 수박희와 유사하다면 여러 분야에서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우리의 화랑도에도 씨름(相撲)은 있었다고 한다.
수험도는 오쓰누(小角 ; 634∼701)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오쓰누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승려 혜관(慧灌 ; 625년 渡日)으로부터 《공작명왕경법(孔雀明王經法)》을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공작명왕의 주법(呪法)을 성취하여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통을 보였다고 한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일설에는 한반도에서 도래한 집안의 자손이라 하기도 한다.
일본의 역사서에 의하면 오쓰누의 스승이었던 혜관 역시 주법에 능통하였으며, 일본에서 활동하던 당시 기우제를 지냈는데 매우 영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것과 혜관이 당시의 승정(僧正)을 지냈다는 것을 상상하면 오쓰누의 신분 역시 상당한 것이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오쓰누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과 능력이 있었을까? 그는 일문십지(一聞十知)의 총명함 탓인지 13세에 이미 세간의 학문에 한계를 느끼고 입산 수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입산하여 심산유곡에서 명상에 잠기거나, 있는 힘을 다하여 이곳 저곳을 달리거나, 폭포 밑에서 앉아 선조로부터 전해지는 비밀주(秘密呪)를 외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오쓰누가 32세가 되었을 때, 수행에 진전이 없어 고민하며 우연히 고구려 승려 혜관의 앞을 지날 때, 혜관이 오쓰누를 불러 세워 “행자여, 그대에게 비밀한 경법(經法)을 전하마. 이 행법을 끝까지 닦으면 그대의 고민은 해소될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전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우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혜관의 신분은 당시 승정(僧正), 당시 일본이 보유한 최첨단 정보지식을 취급 관장하는 신분이고, 아무나 만나 볼 수 없는 매우 높은 신분인데 어찌 전혀 안면이 없는 길가는 젊은 수행자를 몸소 불러 가르침을 내렸다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오쓰누의 선조와 오쓰누가 입산하여 수행할 때 기본적으로 외웠다고 하는 비밀주(秘密呪)의 출처 등이다. 즉, 내가 상상하는 것은 오쓰누의 가계와 그들을 둘러싼 문화 속에서 혹시 그들이 신라 등 한반도에서 도래하였으며, 그들 중에 화랑도를 닦던 이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과, 당시 일본에 신라의 화랑도가 어떤 형태로든지 유입되어 유행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대단한 능력을 보였던 오쓰누의 제자들은 수험도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그 세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대부분의 가르침이 일반불교에 흡수되어 외형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특색이 없는 종파가 되고 만 탓인가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일본의 종교 중 천리교(天理敎)라는 것이 있는데, 이 종교의 출발에 오쓰누의 수험도가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음은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참고로 천리교에서 세운 대학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유일하게 한국어과를 두었으며, 그 대학 박물관은 우리 문화재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 나라 천리교 신자는 수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 불교학계의 현실
언젠가 일본의 젊은 교수와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문헌학적인 연구방법이 화제가 되었다. 설왕설래 끝에 현대 불교학자들 대다수가 택하고 있는 문헌학적인 방법은 그 출발부터가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런 접근 방법으로는 불교의 지엽적인 것은 알 수 있어도 전체적인 것, 즉 불교는 모르게 되는 폐단이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배포된 류우코구(龍谷)대학의 입학 안내 유인물을 살펴보니 불교학과 안에 ‘불교문화사’ 코스가 신설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 나라 각 대학에도 1960년대만 하더라도 ‘쭛쭛문화사’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지만 외국학문의 영향인지, 당시 일본의 대학들이 대학 전공에서 문화사라는 것을 폐지하자 우리도 서둘러 폐지하였다고 한다.
그 사실 여부는 어찌 되었던지, 일본의 불교학은 문헌학적인 연구방법이 지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맹점에서 벗어나고자 인간의 문화를 널리 둘러보고 일정 부분은 상상을 허용하는 ‘문화사’라고 하는 연구방법을 또다시 채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본은 과거 우리에게 불교를 배워갔는데 현재에 이르러서는 왜 우리가 일본에게 불교를 배우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일본의 대학에는 거의 불교학 전공 교수가 재직하며 불교·불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대학 중의 절반 정도에서는 불교학을 전공할 수 있는 체제가 잡혀 있다. 수많은 불교 종립학교와 거기에 근무, 재학하는 연구인력이 우리보다 월등히 많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행정직, 별정직 공무원 등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계층에 많은 사람들이 사찰에서 태어나거나, 불교학을 전공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보다도 불교학을 훨씬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나라이다. 연구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 파벌, 즉 불교학파도 많다. 대표적으로는 도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학파가 있으며, 각 대학별로 스스로 특색으로 삼고 있는 불교학 분야가 있다. 예를 들면, 오오다니(大谷)대학은 화엄학, 류우코쿠(龍谷)대학은 유식학을 간판으로 삼는다.
이러한 것은 일본에서는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며, 연구인력들은 서로의 출신대학을 살펴가며 상대를 존중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각 불교 종단은 각기 종단의 교상을 연구하는 기관을 설치 운영하므로 거기에서도 하나의 학파 개념을 찾아볼 수가 있겠다. 이는 일본불교의 역사가 질적, 양적으로 모두 그리 만만치 않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판단할 때 참고삼아 볼 필요가 있다.
간단한 사례를 들면, 일본의 출판업계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종목 중 하나가 불교학 관계 서적인데, 보통 적게 인쇄할 때 초판을 3000부 찍으며, 내용상 그리 하자가 없으면 대부분의 경우 1주일 정도면 매진된다. 그런 탓인지 일본의 헌책방에 가보면 심한 경우는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출판 당시의 책정가격보다 무려 20∼30배에 달하는 서적을 보게 되는 경우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이는 일본에 불교학을 접하며 살아가는 인구가 매우 많다는 것이니,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불교학계가 일본의 경제,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한 가지 부언을 한다면, 일본을 공략하려는 우리 나라의 사업가는 반드시 일본의 불교문화를 알아야 성공할 수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맺는 말 :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
누군가 외국인들이 우리의 불교문화를 체험할 때, 불필요한 선입견이나 자기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한 채로 다가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할까? 물론 나는 이 글을 진행시키면서 일본인들이 만약 이 글을 읽는다면 따지고 덤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해 버렸다.
사실 그보다는 좀더 많은 숙고를 거쳐 일본의 불교문화를 다시 한 번 소화하고 난 후에 쓰고 싶었으나 그럴 능력도 시간도 없는 나 자신에게 한계를 느끼면서, 한마디만 하겠다. 일본을 누가 아는가? 일본인들도 일본을 모른다. 일본문화를 누가 아는가?
일본인들도 일본문화를 모른다. 일본의 불교문화를 누가 아는가? 일본 승려들도 일본불교를 모른다. 내 자신에게 묻는다. “너 자신은 한국을, 한국문화를, 한국의 불교문화를 아는가?” “모른다.”
박보경
일본 류우코구(龍谷)대학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논문으로 <중국 유식학에 있어 이파(異派) 논란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