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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 바로잡기, 중하지요, ‘시역(弑逆) 아님’ 밝히는 일도 중요합니다”
기씨 집안에 봄이 온 날
1591년 윤3월. 학생 기정헌(奇廷獻) 집에 진짜 봄이 왔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난리 속에 떠도느라 봄이 왔어도 봄답지 않다고 불평했지만,
그건 기정헌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봄이 정말 봄이었다.
지난 해에 할아버지 기대승이 광국공신에 들었을 때 집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그런데 올해 또 경사스런 일이 생겼다
. 아버지 기효증(奇孝曾), 숙부들인 기효민(奇孝閔), 기효맹(奇孝孟), 고모부 김남중(金南重)까지 광국원종공신록에 이름이 올라갔다.
공신에 들어가리라는 말은 있었지만 집안 남자들 이름이 한꺼번에 공신녹권에 오르리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기정헌은 할아버지 모습을 그려내려고 했지만 기억에 없었다.
아버지가 늘 들려주던 할아버지의 말씀만 생각났다.
아버지 기효증은 어떨까. 할아버지는 1572년 40대 중반 나이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기효증은 겨우 20대였다. 기효증은 아버지로부터 집안을 이끌어갈 역량을 배워야 했지만, 가르침을 줄 아버지는 세상에 없었다. 아버지의 빈 자리는 너무 컸었다.
그런데 아버지 모습을 다시 떠올릴 좋은 일이 생겼다.
기효증은 이 모든 일이 아버지의 음덕이라고 여겼다.
기정헌은 스스로 물었다. 할아버지가 하셨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1591년에 기정헌에게 발급된 광국원종공신녹권. 기효증, 기효민, 기효맹, 김남중, 기정헌 등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소장 |
왜곡된 짧은 말은 200년 짜리 난제를 만들고 : 종계변무(宗系辨誣)
고려 말 공민왕 시기에 국제 정세는 복잡했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했지만, 강남쪽에서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지속적으로 커져갔다. 그는 1368년에 황제에 올라 나라 이름을 명(明)이라고 했다. 고려는 원과 명 사이에 외교를 펼쳤다. 조정 관리들은 갈라졌다. 그들은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분석하면서 원을 지지하거나 명을 지지했다. 이성계는 주로 명을 지지하는 편이었고, 이인임(李仁任)은 원을 지지했다. 그런데 1390년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에 들어가 이성계가 이인임(李仁任) 아들이라고 일렀다. 이 말은 명 태조인 홍무제 주원장의 유훈인 황명조훈(皇明祖訓)에 그대로 들어갔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곧 고려이다. 이인인(李仁人)과 그 아들 이성계, 지금 이름은 단(旦)이라는 이들이 홍무 6년(1373년, 공민왕 26)부터 홍무 28년(1395년)까지, 그 사이에 왕씨 4명의 왕을 시해했다.
『대명회전』 권 105, 예조 63, 조공 부분에 있는 ‘조선국’ 항목. 황명조훈의 내용이 그대로 쓰여있다. 이미지출처:장서각 https://jsg.aks.ac.kr/ |
조훈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1395년에 공식적으로 간행되었다. 홍무제는 자신의 유훈을 한 글자도 고쳐서는 안된다고 했고, 수정하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적으로 간주해야한다고 엄중하게 말했다.
1402년(태종 2)에 조온(趙溫)은 성절사로 명에 갔다가 황명조훈의 내용을 봤다. 단 몇 줄에 불과했지만 조선 사람에게 충격을 줄 만했다. 왕실 가계의 오류는 물론이고 고려 신하였던 이성계가 왕을 시해했다는 오명을 얻게 될 판이었다. 홍무제가 조훈의 한 글자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대대로 전해질 터였다. 조선 조정에서 민감하게 여겨 신속하게 처리해야할 사안이었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작업의 시작이었다. 변무란 무함을 당한 일에 대해 해명하여 바로 잡는다는 말이다. 잘못 적힌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 잡고 ‘왕을 시해했다.’는 오명을 벗겨야 하는 일이었다.
조온은 즉시 태종에게 알렸다. 태종은 1403년 11월에 이빈(李彬)과 민무휼(閔無恤)을 사은사로 보내면서 조훈에 쓰인 이성계의 가계 내용이 잘못되었으니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의 예부에서는 개정하겠다는 홍무제의 말을 써 넣은 자문을 발급했고, 1404년 3월에 이빈은 귀국하면서 이 자문을 갖고 왔다. 태종은 당연히 개정되겠다고 여겨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다시 조선의 국제 문제 쟁점으로 떠오른 때는 1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1518년(중종 13) 4월에 명에 다녀온 이계맹은 『대명회전』에 조훈의 내용이 전혀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실린 것을 보았다고 했다. 마침 이지방(李之芳)이 『대명회전』을 구입해 온 터라 확인했다. 옛날 조훈 그대로였다. 태종 때 확실이 확인하여 매듭짓지 않았던 일이 중종 때 더 커진 것이었다.
『대명회전』은 나라를 통치하는 규정을 담은 책이었다. 1502년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511년에 정식으로 간행되었다. 명 무종(武宗) 때인 정덕(正德) 6년에 나와서 『(정덕)대명회전』이라고도 한다. 명의 통치는 이것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니 온 천하에 알려질 터였다. 중종은 대신들과 논의했다. 그러던 중 『(정덕)대명회전』을 속수(續修)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명에 사신을 보내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뒤이어 즉위한 명종도 계속 수정해달라고 요구했다. 1563년(명종 18)에 명의 세종은 반드시 개정하여 기록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칙서를 조선에 전달했다. 명종은 칙서에 만족하지 않았다. 속수한 『대명회전』(일명 『(嘉靖)대명회전』)을 달라고 했다. 받지 못했다. 『(정덕)대명회전』 속수작업이 이루어졌지만 황제가 윤허하지 않아 간행하지 못했다. 속수한 원고 상태로 있었다. 당시 명에서는 조훈의 내용은 절대 수정할 수 없 고 다만 조선에서 요청했던 내용들을 뒤에 첨가하겠다고 했다.
이성계의 가계(家系) 오류에 대한 수정은 이성계의 행적과도 직결되었다. 이인임은 고려 말에 정권을 잡고 전횡했는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네 명의 왕을 시해했다.’는 정보는 그럴 듯하게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계 오류 수정 다음에 풀어야 할 문제는 ‘시해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여, 그것을 대명회전에 분명하게 올리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태종 2년을 기점으로 하여 200여 년이 흐른 뒤에 조금 해결되었다. 윤이와 이초의 짧은 말 한마디는 조선의 200년 짜리 난제가 되었다.
난제에 도전하다 : 종계 바로 잡기와 ‘시해’의 오명 벗겨내기
난제가 던져진 지 150여 년 즈음 지난 때인 1572년 선조는 기대승을 불렀다. 종계 문제와 ‘시해의 오명’을 해명하는 일을 맡길 참이었다. 1570년 11월에 이황에게 쓴 편지에 ‘부경사(赴京使)에 임명되었지만 의리상 억지로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사면을 청했다.’고 한 것을 보면, 종계변무와 관련하여 선조는 기대승을 적임자로 여겼던 듯하다. 기대승은 건강치 않은 몸으로 임금에게 나아갔다. 이미 한 차례 거절했기에 거듭 글만 올려 사양할 수 없었다. 우선 주문(奏文) 작성이 시급했다. 주문이란 어떤 사안에 대해 임금 또는 황제에게 아뢰는 글이다. 조선 왕실의 일을 다루면서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선조를 대신하여 황제에게 아뢰므로 공손함과 간절함을 함께 넣어야 했다. 옛날 태종 시절에 명의 홍무제는 조선에서 올린 표문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화를 냈다.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들을 명 조정으로 불러 들였다. 몇 사람은 중형에 처해졌다. 조서(曺庶)는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인 묵형(墨刑)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인지라 글자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기대승은 등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조선국왕 신(臣: 선조)은 무함을 변명하는 일을 삼가 아뢰옵니다. …(중략)…가정 42년(1563년) 12월에는 서장관 이양원(李陽原)이 칙유(勅諭)를 받들어 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중략)…여러 번 선조(先祖)의 종계를 가지고 개정할 것을 요청하였으니, 이는 선조가 무함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밝게 씻으려고 급급해하는 것이다. 그 정성이 말에 나타나므로 나는 특별히 그대가 아뢴 것을 윤허한다. 사관(史館)에 선부(宣付)하여 『대명회전』의 예전 글 밑에다가 그대 조상의 진짜 파(派)를 기재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사실을 기록하여 해와 별처럼 밝게 하려고 한다. 중국 조정과 그대의 나라에서는 조선국왕의 시조가 이자춘에게서 나왔고 이인임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모두 알고 있다. 이에 칙서를 내려서 그대에게 보여 주노니, 그대는 공경히 받들라.” 하였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 후 흠정개정(欽定改正)한 것을 살펴보오니,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사옵니다. 다만 국조의 내력만을 기록하였고, 네 왕을 시해했다는 무함의 본말은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선신(先臣: 명종을 말함) 로 하여금 악명(惡名)을 입게 하였습니다. 끝내 천하에 이것을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게 되었으니 후세 신자(臣子)의 정리상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략)… 그 후 다행히 무종황제와 세종황제께서 요청을 윤허하여 상세히 기록해 주겠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공손히 속찬(續纂)을 반포할 날을 밤낮으로 목을 늘이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흠정개정(欽定改正)한 조항을 보니, 종계 한 가지 일만을 바로잡았고, 악명에 대한 무함은 다시 서술해 넣지 않았습니다. 또 개정한 것은 『대명회전』의 옛 책이요, 속찬한 새 책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후일 새 책이 반포되고 옛 『대명회전』이 폐지되면 이른바 개정했다는 것은 끝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선신이 무함을 받은 원통함은 이미 씻을 날이 없게 됩니다. 열성조들이 개정하도록 준허하신 명령 또한 증거할 만한 곳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폐하에게 번독(煩瀆)하게 아뢰면서 스스로 그칠 줄 모르는 것이옵니다.
기대승이 쓴 <변무주>. 이성계의 가계를 쓰고, 시해의 오해를 풀기 위해 이인임의 전횡 사실을 자세히 서술했다. 이미지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
기대승은 이성계의 가계, 이인임의 가계, 이인임이 권력을 잡고 권횡했던 일들을 기록했다. 아울러 1403년, 1518년(중종 13), 1519년(중종 14), 1529년(중종 24), 1539년(중종 34), 1540년(중종 35), 1557년(명종 12)에 명의 황제들이 ‘요청한 대로 내용을 개정해주겠다.’고 약속한 내용을 나열했다. 그리고 우선 약속대로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 잡아 옛 기록 아래에 덧붙여 서술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썼다. 하지만 개정되지 않은 부분도 명확히 짚어 서술했다. ‘네 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이 고쳐지지 않았다고 했다. 종계 수정 만큼 ‘시해’했다는 오명도 반드시 벗겨내야할 사안이었다. 여기에다 기대승은 수정한 책이 다시 편수한 대명회전이 아니라 과거 1511년에 출간한 옛 대명회전이라고 지적했다. 대명회전은 1511년에 간행된 『(정덕)대명회전 』이 있고, 가정 연간에 속수되었지만 간행되지 않은 『(가정)대명회전』, 그리고 1576년부터 중수하기 시작하여 1587년에 완성, 간행한 『(만력)대명회전』이 있다. 기대승은 정덕본과 속수한 가정본을 살피고, 가정본에는 수정된 내용이 들어가지 않음을 짚었다. 속수한 새 책이 세상에 나오면 옛 책은 버려질 터인데, 새 책에 수정된 내용이 없다면 그 동안 변무했던 수고들은 헛된 일이 될 터였다. 『(정덕)대명회전』에 있는 ‘시해’와 관련한 내용을 바로 잡아 기술하게 하는 것, 속수한 『대명회전』에 올바르게 개정된 가계와 ‘시해’라고 잘못 알려진 정보를 수정하여 올리도록 하는 것. 기대승이 해결해야 한 문제였다.
가계 오류 고치기와 ‘시해’의 오해를 푸는 일. 당시 변무하는 일을 논의할 때, 신하들 사이에서는 이성계의 종계를 바로 잡는 것이 ‘시해’의 오해를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기대승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개국할 때의 일은 태조 이성계의 본의도 아니었는데 간사한 이들이 더 꾸며내서 무망을 가한 것이니 이것도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주문에서 종계를 개정해 준 일에 감사하다고 하면서, 아울러 시해의 일이 시원스럽게 해결되지 않았다고 꼭 짚어 말했던 것이다.
기대승은 이 주문을 갖고 명에 가야만 했다. 변무하는 일은 중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50년 이상 묵은 문제였다. 그 동안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도 여전히 매듭짓지 못하고 있었다. 기대승도 이 일이 언제 어떻게 풀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조선에 던져진 난제였으니 할 수 있다면 신하로서 도전해야 할 문제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기대승은 북경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주문을 쓴 직후 명 황제 목종이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변무를 위한 사행은 보류되었다. 하지만 그가 쓴 주문은 효력이 분명 효력이 있었다.
기대승, 광국공신에 들다
변무하는 주문을 쓰는 데에 기대승은 온 힘을 쏟았다. 이 글을 쓰고 1572년 10월에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병을 얻었고 11월 1일에 세상을 떴다. 이후 선조는 다음에 1573년 2월에 이후백, 윤근수 등을 주청사로 파견했다. 기대승이 지은 주문도 함께 갔을 터이다.
이성계의 종계와 이성계가 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에 대해 해명하고 수정하는 일은 200여 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1588년(선조 21) 조선국 조항이 실려 있는 『대명회전』 1권을 유홍(俞泓)이 받아오고, 1589년(선조 22)에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왔다. 만력본 『대명회전』이다.
조훈(祖訓). 조선국은 곧 고려이다. 이인인(李仁人)과 그 아들 이성계, 지금의 이름은 단(旦)인 자가 홍무 6년부터 홍무 28년에 이르는 사이에 왕씨 네 명의 왕을 시해했다. …(중략)…영락(永樂) 원년에 그 왕이 주문을 갖추어 세계가 이인인(李仁人)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고 조훈에 실린 시역(弑逆)에 관한 일을 해명하므로 개정하도록 허락했다. 정덕(正德), 가정(嘉靖) 연간에 여러 차례 요청하여 칙서를 내려 깨우쳐 주었다. 만력(萬曆) 3년에 사신이 다시 예전 일을 요청하기에 사관 편집하는 이들에게 말하여 뒤에 기록한다. 이성계는 본국 전주 출신이다. …(중략)…행리(行里)가 춘(椿)을 낳고, 춘은 자춘(子春)을 낳으니 이가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이다. 이인인은 경산부의 아전인 장경(長庚)의 후손이다. …(중략)…사람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나라의 일을 맡아 보 게 했다.
명 태조의 조훈 내용은 역시 그대로였다. 조훈 내용 다음에 조선에서 개정을 요청했던 과정을 간략히 썼다. 그리고 요청 내용을 첨가했다. 이성계의 아버지를 이자춘으로 쓰고, 시해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추대’라고 했다. 내용을 보면 기대승이 주문에 쓴 것과 많이 닮았다. 조선의 바람은 조훈 내용을 넣지 않거나 적어도 오해 살 만한 글자 몇 개를 빼는 일이었을 터이다. 그나마 종계를 바로잡고 시해의 일은 잘못된 가짜 정보임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만력 연간에 다시 편찬된 『대명회전』을 확인하자, 선조는 1590년 2월 1일에 공신들을 녹훈하라고 명했다. 공신명은 ‘광국공신(光國功臣)’이었다. 나라를 빛낸 공신들이 정해졌다. 모두 20명이 광국공신에 들었다. 기대승은 3등이었다. 주문을 잘 지어서였다. 3등에게 주어진 이름은 ‘수충공성광국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이다. 충심과 정성을 다해 나라를 빛낸 공신이라는 말이다. 터무니 없는 가짜 정보를 바로잡기 위해 온 마음을 다했던 이들에게 딱 적합하다. 살아 있을 때 공신 칭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기대승의 성심 어린 도전은 죽은 후에도 빛났다.
왼쪽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잡아 쓴 내용. 오른쪽 : 조훈에 서술된 ‘시역’의 일을 개정하도록 허락했다는 기록. 황명조훈은 그대로 두고 그 아래에 첨가해서 기록하였다. |
『동국역대총목』 부분. 이미지출처:장서각, https://jsg.aks.ac.kr/ |
<광국공신녹권>(『동국속수문헌록(東國續修文獻錄』중에서). 고봉기대승이 3등에 들어 있다. 주문을 쓴 공적으로 덕원군에 봉해졌다. 이미지출처:장서각, https://jsg.aks.ac.kr/ |
의기 서린 후광, 후손에게도
공신의 영예는 후손에게도 미친다. 자손들은 음서(蔭敍)로 벼슬도 할 수 있다. 기정헌은 광국원종공신에 들었다. 공신은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나뉜다. 원종공신은 정공신을 도와주었거나 어려운 일이 해결되는 데에 조력한 이들, 정공신의 후손들에게 주어지기도 했다. 광국공신을 정하면서 광국원종공신 녹훈도 함께 추진되었다. 872명이 올랐다. 기정헌은 아버지 기효증, 숙부들, 고모부 김남중과 함께 3등에 들었다. 할아버지 기대승이 문장에 뛰어나 세상에 드문 인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한 시대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던 퇴계 이황과 대등하게 성리학에 관해 논설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녹권을 받아들고 보니 대단했던 할아버지 명성을 체감했다. 나라를 위한 할아버지의 성심을 알 것 같았다.
공신녹권 말미에 각 등급에 따른 상 내역이 쓰여있다. 기정헌의 <광국공신녹권> 부분. 한국학호남진흥원 소장
기대승의 후광에는 충심의 서려 있었나보다. 기효증은 임진왜란 때 김덕령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다. 기정헌은 정묘호란 때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주까지 갔었다. 의기(義氣)로 조선을 위해 변무했던 기대승의 정신은 아들은 물론 손자 기정헌에게도 이어졌다. 이것이야말로 광국 공신가의 기맥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도움받은 글들>
『대명회전』
한국고전종합 DB, 한국고전번역원, https://db.itkc.or.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s://kyu.snu.ac.kr/
디지털 장서각, https://jsg.aks.ac.kr/
김경록(2014), 「선조대 홍순언의 외교활동과 朝•明 관계」, 『명청사연구』 41, 명청사학회.
김덕진(2023), 「義穀將 기효증의 거의와 활동」, 『남도문화연구』 50, 남도문화연구.
김문식92009), 「조선시대 국가전례서의 편찬 양상」, 『장서각』 21,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주(2003),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종계 문제」, 『경주사학』 22, 경주사학회.
송일기,진나영(2010), 「"광국원종공신녹권(光國原從功臣錄券)"의 서지적(書誌的) 연구(硏究)」,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41(4), 한국도서관정보학회.
염강락(2021), 「『대명회전』 성질신고」, 『동아문헌연구』 27, 한국교통대 동아시아연구소.
임상훈(2020), 「명대 국제 관계의 기틀-홍무제의 15개 不征諸夷國 구상과 그 형성 과정」, 『한중관계연구』 6(3), 한중관계연구원.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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