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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릴 때마다 한 잔/감태준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 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을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시 읽기> 흔들릴 때마다 한 잔/감태준
감태준의 고향은 마산입니다. ‘마산’ 하고 소리를 내면 제 머리 속에는 내륙으로 깊숙이 흘러든 이 도시의 여성적인 바다와 이은상이 작사하고 김동진이 작곡한 10절이나 되는 노래 <가고파>가 떠오릅니다. 이들이 각각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 <가고파>를 10절까지 듣고 있노라면 이은상의 고향 ‘마산’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고향의 원형처럼 살아납니다.
감태준은 그런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의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의 문예창작과를 다녔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 사람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서울 사람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감태준의 초기 시에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흘러든 사람들의 이른바 ‘떠돌이의 의식’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의 첫시집 이름이 ‘몸 바뀐 사람들’이고, 그의 시선집 이름이 ‘떠돌이의 새’라는 것만을 보아도 그를 사로잡고 있는 의식을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떠돌이 의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토대를 두고 나타난 것이겠지만, 그것은 더 나아가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도시가 확대되고 그에 따라 이농 현상이 급속화되던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때 고향을 떠난 자들이 도시에서 보편적으로 갖고 살았던 의식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면 그런 ‘떠돌이 의식’은 고향을 떠났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인간이라면 이 광야 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시도 때도 없이 만나야 하는, 이른바 인간된 자가 감당해야 할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고향이란 어떤 곳입니까? 그리고 ‘떠돈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고향이란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을 익힌 곳입니다. 우리는 캄캄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살다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곳으로 밀려나왔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온 우리들에게 이곳은 얼마나 낯설고 어색했을까요? 아 낯선 세상으로 나온 신생의 아기들은 3일이 지나서야 눈을 뜹니다. 그리곤 한 달이 다 될 때까지 하루에 약 20시간씩 잠을 잡니다. 과학적으로는 그것이 어떻게 설명될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아마도 그들이 맞이한 세상이 낯설기 때문에, 그것이 호기심 이전에 공포감을 주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던져진’ 아기들은 비록 이 세상이 그가 선택한 곳은 아닐지라도 낯선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그 세상과 낯을 익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 차음으로 낯을 익힌 곳, 그곳을 우리는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 고향은 우리 몸 속에 맨 처음 체화된 것이라서 우리는 쉽게 그곳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고향은 관조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몸 그 자체가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낯을 익힌 곳으로부터 우리는 굳이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연으로 인하여 그곳을 떠났다 하더라도 처음 낯을 읽힌 고향은 늘 우리의 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앞을 보며 달려가느라고 잠시 고향을 잊거나 무시해버려도, 아니 몇 십 년간을 의도적으로 잊은 체하거나 못 본 체해버려도, 고향은 언젠가 다시금 그런 세계가 네 삶 속에 있었노라고, 그리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속삭입니다.
이런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는 시대는 어쩌면 행복한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에 닥쳐온 문명사의 엄청난 변화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고향’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떠돈다는 것’ 혹은 ‘떠돌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 한편은 항상 떠돌고자 하는 욕망으로 저 먼 곳의 수평선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한편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한 곳에 붙박여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에,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일은 아주 흥미롭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막상 낯선 곳으로 떠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의식’ 으로 불안정한 나날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떠돈다는 것’ 혹은 ‘떠돌이 의식’이라는 것은 아직도 그가 고향을 떠나 새로 맞이한 곳에서 낯을 읽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소외감과 이질감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울 때가 많다는 뜻입니다. 체제내로 진입해 들어가서 기득권자와 권력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만나는 것들 속에서 아직도 이물감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왜 이옥으로 떠나왔는가를 알 수 없거나, 알면서도 금세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더 말한다면 자신이 떠나온 일이 진정 바람직한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떠돌이 의식’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떠돌이 의식’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그 나름대로 텃세와 기득권과 안정감 속에서 행복한 살을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떠돌이 의식’ 속에서 허덕여본 사람은 또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어 떠돈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깊은 비밀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떠돌이 의식’ 속에서 허덕여본 사람 역시 행운(?)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다 그 속에 양면성을 내재시키고 있는 까닭에 어떤 것도 절대적인 우월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필요한 아픔’혹은 ‘필요한 실패’라는 말이 있듯이 ‘떠돌이 의식’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 진실을 맛볼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떠돌이 시간’을 통하여 긴 고통과 방황과 불안의 나날들을 보낸 자만이 그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생의 비밀과 그 속에서 쌓아올릴 수 있는 내면의 계단 수를 늘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인지라, ‘떠돌이 의식’을 갖고 산다는 일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우선 괴로운 일이며,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심리적 상태입니다.
고향 이야기와 떠돌이 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느라고 많은 시간이 흘러갔군요. 그것은 제 탓이기도 하지만 감태준의 시세계가 저를 그리로 이끈 탓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감태준의 시 창작이 좀 뜸해져서 아쉬운 감은 없지 않지만 그가 등단 후 여러 편의 시들을 통해 보여준 이 ‘떠돌이 의식’은, 이제 누구나 도시인이 되어 아스팔트 위를 유목민처럼 흘러다니는 것이 일상이 된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감상할 감태준의 시는 그 제목이 ‘흔들릴 때마다 한 잔’입니다. 한 10여 년 전쯤 될 거예요. 그때 저는 서울의 신촌에서 광화문 쪽으로 오는 버스를 탔는데, 오는 도중에 한 허름한 술집의 간판이 ‘흔들릴 때마다 한 잔’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감태준이 시세계를 잘 아는지, 아니면 그의 시 가운데서 이 시만을 잘 아는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제목이 그냥 매력적이어서 술집 간판을 그렇게 붙였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술집 이름치고는 꽤 괜찮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시집 《몸 바뀐 사람들》 속에 들어 있는 감태준의 작품 <흔들릴 때마다 한 잔>을 소개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 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을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전문
여러분들은 ‘흘들릴 때’ 어디로 가십니까? 아니,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가 여태껏 사용해온 말을 빌려다 이야기하자면 여러분들은 ‘떠돌이 의식’으로 괴로울 때 도대체 어디도 가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하십니까? 사람마다 흔들리는 자신을 달래는 방법이 떠도는 마음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방법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누구는 독서를 할 것이고, 누구는 바닷가로 나갈 것이고, 누구는 하늘을 우러를 것이고, 누구는 그림을 그릴 먹이고, 누구는 한 잔의 차를 마실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그 숱한 방법들을 여기에다 다 열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위 인용시 속의 화자는(혹은 시인인) 포장술집을 찾아들었습니다. 그 허술한 포장술집에서 그는 흔들리는 자신을 어떻게든 다잡아보자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포장술집에서 마시는 그 한잔 의 술이 흔들리는 자신이 내면과 삶을 다스릴 수 있게 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습관적으로 그곳을 찾아들었던 것일까요? 어쨌든 좋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 인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과, 그 흔들림을 이겨내기 위하여 포장술집을 찾아 들어갔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린다는 사실과, 흔들림을 어떻게든 다스려보고자 하는 안간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술은 차와 더불어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낸 아주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술은 차가워진 인간의 몸에 열기를 더해주고, 차는 뜨겁게 달아오른 인간의 몸에 차분한 기운을 가져다 줍니다. 술을 마심으로써 우리는 지나치게 타올라서 위험하기까지 했던 생의 에너지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술과 차는 둘 다 생의 에너지에 균형을 가져오기 위해 고안된 것들인 것 같습니다. 술을 맹물과 다르게, 차는 휘발성 콜라나 탄산수와 다릅니다. 맹물이 너무나도 이성적이라면, 콜라란 탄산수는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가볍습니다.
위 인용시의 본문 내용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시의 기본틀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성 위 인용시에서 시간적 배경은 가을 단풍이 든 저녁시간입니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허름한 포장술집입니다. 그런 시공 속에 몇 사람의인물이 등장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참새구이를 안주로 내놓으면서 막걸리과 소주를 파는 주모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주모의 포장술집에서 떠돌이가 되어 술을 마시는 ‘꾼’들입니다. 가을이라는 시간적 배경, 그중에서도 저녁이라는 시간적 배경, 포장술집이라는 공간적 배경, 싼 술이나 마시며 떠도는 ‘꾼’들과 무표정하게 술을 팔고 있는 주모, 이 모두가 어울려서 환기시키는 분위기는 쓸쓸하고 적막하고, 어둡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배경과 인물들이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인용시를 보면 포장술집에서는 두 꾼이, 뒷산에는 단풍든 나무들이 흔들립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온통 흔들리는 존재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유독 흔들림에 대한 자의식으로 괴로워하는 두 꾼은(짐작컨대 이 두 꾼은 중년의 남성인데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서민 같음), 막걸리를 마시며, 다시 소주를 마시며, 그 괴로움을 이겨보고자 합니다. 이런 두 꾼의 눈은 자신과 같이 떠도는 또 다른 ‘꾼’들을 포장술집에서 발견합니다. 흔들리는 괴로움을 어지간히 이겨내기가 힘든지 두 꾼들이 그 꾼들 옆의 또 다른 꾼들이나 꽤 취할 만큼 술을 마신 것 같습니다. 이런 꾼들에게 주모가 구워낸 초라한 참새구이는 꼭 자신들이 처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학적인 말들을 주고받습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몸과 마음은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길만큼 흔들리며 젖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중얼거리는 말을 잘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의가 그 곳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말입니다. 결국 그들이 포장술집을 찾은 것을 이 말을, 이 결의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에게 달라붙는 그 흔들림의 시간들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결의가 다시금 세상의 별 앞에서,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 심각한 자리 앞에서 힘을 잃고 또다시 흔들리게 될지라도.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없는 한, 사회의 제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용기가 없는 한, 그들은 여전히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거듭거듭 외쳐대며 이 세상이라는 늪을 살아서 건너고자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저나 여러분들 역시 매일매일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외쳐대며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포장술집을 찾아간다고 해서 존재의 흔들림이 온전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일 줄을 뻔히 알면서도 또다시 그 포장술집에 앉아 막걸리에 소주로 술을 바꿔가며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힘주어 외쳐댈 수박에 없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이렇게 반복되는 흔들림과 ‘시작에의 결의’ 속에서 우리의 인생인 하루하루 흘러갑니다.
위 인용시의 후반부로 보면 술에 취한 꾼들의 몸과 마음처럼 시인의 눈에는 포장마차 사이로 보이는 길 또한 비에 젖어 흐늘흐늘 풀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꾼들도 풀려 있고 길들도 풀려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풀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이 풀려 있다는 것은 ‘흔들리고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을 보며 시인은 술에 취해 포장마차를 떠난다고 해서 자신을 포함한 ‘꾼’들의 흔들림이 근원적으로 치유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포장마차를 떠나는 그 순간에조차 흔들림은 치유가 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술을 마시는 일도 비틀거리며 술집을 빠져나가는 일도, “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속에서도 순간적으로나마 스치고 지나가는 한가닥의 ‘기쁨’을 찾아냅니다. 그가 위 인용시의 윗부분에서 말한 “풀리는 기쁨”이 그것을 뜻하지요. 그러면서 그는 의도적이기라도 한 듯,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르게 비약을 감행하면서,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는 기운찬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앞에서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겨울을 이겨내려고 준비하는 단풍나무들의 모습을 닮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흔들림이 때문에 인생을 소진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흔들립니까? 어떻게 사는 것일 바람직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기 때문인가요? 인간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인가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인가요? 질병과 죽음이 두려워서인가요? 사회와 역사의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인가요? 사회와 역사의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인가요? 타인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인가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인가요?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지 못해서인가요? 크고 작은 이유가, 무거운 이유가 혹은 가벼운 이유가 육체적인 이유가 혹은 정신적인 이유가 우리를 흔들림 속에서 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의 저자 리처드 칼슨이 한 말처럼 우리를 흔드는 많은 것들은 참으로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죽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사소한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상상이 불가능할 만큼 거대한 우주를 생각하면 인간사 속의 모든 것들이 아주 사소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제가 너무 거칠게 말을 했나요? 그러나 이렇게 거친 생각을 한 번 하고 나면,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좌절과 흔들림 속에서 나날을 소모하던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우리의 마음 또한 한결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물론 저는 압니다. 이런 생각들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잠시 평온을 찾고 반석처럼 의연해진 것 같아도,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머지않아 우리의 몸과 마음은 또다시 흔들릴 것이고 우리는 ‘떠돌이 의식’을 안고 포장술집의 막걸리잔과 소주잔을 거울 삼아 고뇌의 시간을 보낼 것임을…… 그러나 이 세상의 그 누가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흔들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자기 위안의 시간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좀 견딜 만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흔들릴 때마다 찾아갈 수 있는 포장술집이 있다는 사실과 그럴 때마다 마실 수 있는 술 한 잔이 있다는 것도 우리를 위로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외칠 수 있는 힘이 나올 수 있다는 것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절망하지 않도록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흔들린다는 것’과 ‘떠돌이 의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고 그렇게 나쁜 일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흔들리는 자와 떠도는 자에게 깨달음의 축복이 있기를……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3.
첫댓글 생각해보니 금새 지나간 시간입니다 80년대는 내나이도 30대 초반, 먹고 사는일에 바빠 고향 생각할 틈이 없었지요.
이만큼 지나와 돌아보니
술 한잔 안 마셔도 정신없이 살았다고 생각하네요.
고향을 불러보라 하니
작년에 잠시 시 쓰는 부천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쓴 내 시 "도시로 떠난 뻐꾹이"
이따가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