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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40) 절망의 시대 극복하는 희망을 통한 행복
희망, 하느님 은총의 처방전으로 참행복 맛보는 영적 백신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따르면, 지옥의 입구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여’라는 서늘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선언은 지옥을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 가해지는 장소가 아니라, 기회와 용서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된 ‘폐쇄된 공간’으로 규정한다.
한국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헬조선’이란 표현은 이러한 지옥의 속성을 함축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신을 잠식하고, 개인의 노력이 구조적 벽에 부딪혀 냉소와 비관으로 치환되는 현실은 현대인이 처한 ‘희망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태는 단순히 심리적 위축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파괴로 이어진다. 희망이 거세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궁극적 목적으로 정렬시킬 동력을 잃고, 현재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희망론을 고찰함은 세속적 욕망과 참된 기대를 구별하여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지침이 된다. 토마스는 희망을 막연한 낙관주의나 정서적 위안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희망을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궁극적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실천적 힘으로 해석한다.
희망이라는 덕의 필수 요건
토마스는 ‘희망(spes)’의 본질을 규명함에 있어 이를 단순한 감정적 상태인 정념과 탁월한 습성인 덕으로 엄격히 구분한다. 정념으로서의 희망은 미래의 선에 대한 본능적 기대에 불과하여 도덕적 가치에서 중립적이지만, ‘대신덕’(신학적 덕)으로서의 희망은 인간의 행위를 신적 기준에 순응시킴으로써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고차원적 원리이다.(II-II,17,1)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상이 선(bonum)이어야 하고, 미래의 것(futurum)이며, 획득하기 어려운 것(arduum)임과 동시에, 가능한 것(possibile)이어야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요소는 ‘어려운 것’이다. 토마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선은 단순한 갈망의 대상일 뿐이지만, 난관을 극복해야 얻을 수 있는 선만이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켜 덕의 차원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어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게 만들고 희망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려는 투쟁적 용기를 북돋운다.
또한 대신덕으로서의 희망은 그 가능성의 근거를 인간의 계산이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에 둔다는 점에서 세속적 낙관주의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희망의 궁극적 대상은 하느님 자신이며, 그분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행복(beatitudo)이다. 이는 지상에서의 일시적 안락을 넘어선 완전한 선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
‘나그네’로서의 삶에 필요한 하느님의 도우심
인간은 본래 미완성의 존재로서 본향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나그네(viator)’의 지위에 있다. 이러한 나그네로서의 처지는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한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최고선에 이르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에 전적으로 의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동력이 바로 ‘하느님의 도움(auxilium divinum)’이다. 토마스는 희망이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에 유착함으로써 덕의 지위를 획득한다고 논증한다.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존하는 방식은 비굴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활동에 적합한 척도를 확립하는 영적 완전성을 의미한다.(II-II,17,1)
이러한 의존은 희망의 확실성으로 이어진다. 비록 인간의 노력은 실패할 수 있으나, 약속하신 하느님의 성실함은 변치 않기에 희망은 신앙에서 유래하는 확실성을 지니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II-II,18,4) 따라서 희망은 나그네가 겪는 시련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는 ‘영혼의 닻’이 된다. 그러나 이 완전한 신뢰의 여정은 양극단의 왜곡, 즉 절망과 자만이라는 암초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절망과 자만에 의한 희망의 왜곡
토마스는 희망의 덕에 반대되는 두 가지 악습으로 ‘절망(desperatio)’과 ‘자만(praesumptio)’을 지목하며, 이를 인간 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로 분석한다. 절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의지적 거부이며,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상태이다. 토마스는 절망을 가장 위험한 죄 중의 하나로 규정하는데, 이는 희망을 버린 인간이 선을 추구할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필연적으로 악습에 추락하기 때문이다.(II-II,20,3) 이는 하느님의 전능을 자신의 나약함 아래에 두는 인식적 왜곡의 결과이다.
반면 자만은 하느님의 정의와 지혜를 도외시한 과잉된 신뢰이다. 이는 회개 없는 구원을 바라거나 자신의 자력만으로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방자한 태도이다.(II-II,21,1) 현대 사회의 냉소적 비관주의가 절망의 변종이라면, 기술적 진보나 물질적 풍요가 모든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자만의 한 형태이다. 토마스의 관점에서 이 두 극단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한 영적 파멸의 징후들이다. 이 악습들을 극복할 때 비로소 희망은 인간을 진정한 인내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를 통해 확인한 희망은 단순한 심리적 낙관이 아니라, 신적 도움에 의탁하여 최고선을 향해 나아가는 ‘확실한 덕’이다. 지옥문 위의 경구가 희망의 단절을 선포하고 세속적 희망이 인간의 계산에 머문다면, 신학적 희망은 인간의 시선을 영원한 행복과 연결하여 현재의 결핍을 완성의 과정으로 정화한다. 토마스의 희망론은 어떤 시련 속에서도 인간이 신적 은총을 통해 최고선에 연결되어 있음을 증언한다.
현대인이 처한 ‘헬조선’의 폐쇄성은 토마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직 본향에 도달하지 못한 ‘나그네’임을 망각한 데서 기인한다. 희망의 덕을 지닌 이는 타인과 연대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에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절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희망의 덕을 함양하는 것은 인간 본질을 회복하고 진정한 행복의 가능성을 수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에 침잠하는 절망과 역량을 과신하는 자만을 경계하며, 신적 은총에 의탁하여 영원한 선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나그네의 자세를 회복해야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영성의 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
가끔 어떤 방문은 실패처럼 끝납니다. 문을 두드렸지만 반갑게 맞아 주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했지만 대답은 짧습니다.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지만, 상대는 어색하게 웃거나 말을 돌립니다. 병원에 찾아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앉아 있다가 조용히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묻게 됩니다. ‘오늘 내가 한 일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런 날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 보이고, 찾아가도 열매가 없어 보이고, 기다려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내가 애쓴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내가 기억한다고 그 사람이 살아날까. 내가 바친 묵주기도 한 단이 정말 누군가에게 닿을까.
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우리가 보는 자리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앗은 땅 위에서 먼저 자라지 않고 어둠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아무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 생명을 준비합니다. 은총도 그렇습니다. 어떤 기도는 바로 응답하지 않고, 어떤 방문은 그 자리에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남겨 둔 작은 사랑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다시 만지십니다.
사람은 큰일 때문에만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기억해 주었다는 사실 하나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조용히 안부를 물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마음 한쪽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아직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오래 닫아 두었던 마음의 문을 아주 조금 열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다 보지 못합니다. 내가 한 번 찾아간 그 발걸음이 훗날 그 사람이 다시 성당 문을 바라보게 한 작은 시작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함부로 실패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성모님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셨고, 불안한 길에서도 떠나지 않으셨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에도 십자가 아래에 머무셨습니다.
성모님의 사랑은 소란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닫은 사람을 억지로 열 수 없습니다. 멀어진 사람을 내 힘으로 끌고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완전히 잊히지 않도록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올 길을 잃지 않도록 작은 불빛 하나를 켜둘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하느님 앞에 조용히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지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오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잊힙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이름을 계속 기억합니다. 활동 수첩 한쪽에, 묵주기도 한 단 안에, 조용한 방문길 위에, 미사 중 짧은 기도 안에 그 이름을 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는 아직 따뜻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일을 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에 품고 걷는 사람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자리에 다시 한번 마음을 두는 사람들. 쉽게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성모님처럼 조용히, 그러나 끝까지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로는 지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활동 보고는 한 줄로 끝나고, 실제 마음은 그 한 줄보다 훨씬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한 줄 뒤에 숨어 있는 발걸음과 망설임과 기도와 눈물을 아십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보십니다. 사람은 성공을 묻지만, 하느님께서는 충실함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너무 빨리 실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기도가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사랑으로 한 일이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지금도 버티고 있을지 모릅니다. 성당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돌아갈 힘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생각이 나서 연락드렸습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말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내가 완전히 잊힌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내 이름이 아직 누군가의 기도 안에 있다는 것. 하느님께서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사람은 그런 작은 사랑을 통해 다시 느낍니다. 그러니 오늘도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에 품고 걸어가십시오.
교회는 큰 목소리로 사람을 붙드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는 작은 마음들로, 오늘도 한 영혼이 돌아올 길을 남겨 두는 곳입니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7) 공동체의 길 위에서 만나는 진리
가톨릭교회는 종종 ‘마리아 교회’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아무리 진심을 다해 설명하고 오해를 풀려고 해도, 오랜 시간 굳어진 편견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도 선교 현장이나 일상 안에서 이러한 종류의 난감한 질문을 마주한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런 순간마다, 2019년 성인품에 오르신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 추기경을 떠올리곤 합니다.
유학하던 시절, 영국 런던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종교 서점에 들어갔는데, 서가 대부분이 영국 국교인 성공회 관련 서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 벽면 전체에 한 가톨릭 성직자의 책들로 채워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바로 뉴먼 추기경이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살아생전에도 그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분이 서로 갈라진 두 세계를 사랑으로 이어 주는 다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뉴먼은 영국에서 태어나 성공회 신자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학 서적을 가까이하며 자연스럽게 반가톨릭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뒤 성공회 사제가 되어 활발히 활동하였지만, 서품 후 20년 만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단이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오랜 세월 쌓아 온 명성과 인간관계, 학문적 기반까지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진리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는 묘비에 써놓은 “그림자와 환영을 넘어 진리 안으로”(Ex umbris et imaginibus in veritatem)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이 받은 수많은 오해와 비난에 대해서 자신이 묵묵히 살아온 삶의 방향을 표현해 놓고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개종 이후 뉴먼은 로마의 우르바노 대학에서 가톨릭 신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였습니다. 이후 가톨릭 사제로 새롭게 서품받고, 성 필립보 네리의 영성을 따르는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 겸손한 시작 안에서 그는 가톨릭 신앙의 깊이를 더욱 발견해 갔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뉴먼 추기경 역시 처음에는 마리아 신심에 적지 않은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의 성모 공경, 곧 성상과 기도, 여러 신심 행위들이 자신에게는 큰 ‘걸림돌’(crux)처럼 느껴졌다고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을 깊이 연구하면서 그는 개종 이전 자신이 추구하던 진리가 오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였고, 그간 ‘틀린 것’이라 단정했던 교리들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양심의 요청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양심은 단순한 개인감정이 아니라, 오랜 세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신앙의 공통 감각 안에서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뉴먼 추기경은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전하는 것은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Traditio)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 전통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고 수많은 신자가 시대를 이어 가며 함께 고백해 온 ‘공통의 신앙 감각’(consensus fidelium)이며, 성령의 인도 안에서 교도권(Magisterium)이 확인하고 보호해 온 객관적인 신앙의 유산이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나 성모 승천 교의를 두고 성경에 없는 내용을 덧붙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뉴먼 추기경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교의가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삶 안에서 교의에 대한 발전이 이뤄지는데 이는 신앙 공동체의 기도 생활, 전례, 그리고 세상과의 영적 상호작용 안에서 다각도로 일어나는 입체적인 발전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그는 마리아 교의의 발전은 창작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건강한 성장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결코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을 기다리던 제자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사도 1,14)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잃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성모님의 품 안에서 다시 하나의 공동체로 모일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를 모으는 성모님의 품 안에서 교우들은 공동의 신앙을 키워가며, 신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갈 수 있습니다.
뉴먼 추기경은 자신의 사목 표어로 “마음은 마음에 말한다”(Cor ad cor loquitur)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논리로만 전달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마음에서 다른 마음으로 스며드는 살아 있는 사랑을 통해 전해집니다. 저는 2019년 로마에서 거행된 뉴먼 추기경의 시성식 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영국에서 온 많은 신자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기뻐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2025년 11월 11일, 성인 뉴먼 추기경은 레오 교황님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포되었습니다.
이날 미사에서 교황님께서는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인상적인 영적·문화적 위상은, 무한을 갈망하며 연구와 지식을 통해 ‘고난을 거쳐 별에 이르는’ 여정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새로운 세대에게 큰 영감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직자의 개종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수많은 비난을 견뎌야 했던 추기경은, 마침내 가톨릭교회의 진리를 만나면서 성모님의 올바른 역할과 공동체 신앙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이 결코 혼자만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주는 살아 있는 믿음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매주 모이는 레지오 모임 역시 단순한 만남이 아닙니다. 성모님의 품 안에서 공통의 신앙을 고백하고, 교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며 신앙을 키워가는 자리입니다. 신앙은 말재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빛이 자기 자신만을 비추지 않고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듯이, 성모님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 또한 메마른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아름다운 순례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공동체 안에서 간직되는 신앙의 은총을 소중히 여기며, 성모님과 함께 이 기적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묵주기도 학교] 은총의 비
사랑의 행위
2025년 5월 8일, 새로 교황직에 선출되신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는 로마와 전 세계를 향한 첫 강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폼페이의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우리 곁에 머무르시고, 당신의 전구와 사랑으로 우리를 도우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꼭 1년 뒤인 2026년 5월 8일, 교황님께서는 ‘폼페이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성당’ 앞 바르톨로 롱고 광장에서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강론에서,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 직무를 맡게 된 날이 바로 ‘폼페이의 지극히 거룩한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바치는 청원 기도’의 날이었기에, 교황 직무를 묵주기도의 거룩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 아래 맡겨 드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밝히셨습니다.
또한, 교황님께서는 묵주기도 안에서 반복되는 성모송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선포로 시작되고, 주님의 기도와 영광송 사이에 놓여 반복되는 묵주기도의 성모송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지치지 않고 ‘사랑합니다’라고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레오 14세 [미사 강론]”, 바티칸 뉴스 한국어판, 2026.5.8, 박수현 역.
교황님은 이 말씀을 통해, 성모송의 반복이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사랑의 지속적인 고백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마리아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기도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라는 천사의 인사는 성모송 전체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향하도록 하는 복음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성모송은 흔히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로 이해되지만, 그 핵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특별히 전반부에 놓인 ‘예수님’의 이름은 성모송 전체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의미 있고 효과 있게 바치는 표지가 바로 이 이름에 대한 강조에 있습니다. 성모송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하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우리가 찬미하고 관상하는 분은 태중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4,12).
성모님은 당신 자신에게 사람들을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아드님께로 이끄십니다. 성모송의 반복은 성모님의 인도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성을 더 깊이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의 마리아적 성격은 그리스도적 성격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믿음과 순명, 침묵과 관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가 더 빛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성모송은 마리아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의미의 그리스도교적 기도입니다.
성모송의 전반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기도
성모송의 전반부는 천사와 엘리사벳의 인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늘에서 온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인간의 응답이 함께 만나는 기도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성모송의 전반부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모송은 하늘과 땅의 경탄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3항 참조)
이 표현은 매우 아름답고도 정확합니다. 천사의 인사(루카 1,28)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엘리사벳의 인사(루카 1,42)는 온 인류를 대신한 인간 편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우리는 바로 이 두 목소리를 이어받아, 성모님 앞에서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찬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모송은 과거 갈릴래아의 한 고을 나자렛에서만 울려 퍼졌던 인사말이 아니라, 지금도 교회 안에서 계속 울려 퍼지는 현재의 기도가 됩니다.
성모송을 정성껏 바칠 때, 우리는 천사가 되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엘리사벳이 되어 성령 안에서 성모님을 맞이합니다. 이처럼 성모송은 하늘과 땅, 말씀과 응답, 은총과 인간의 자유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안에서 성모송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이루어지는 강생 신비의 기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송의 후반부: 자녀가 어머니께 드리는 청원
성모송의 후반부는 찬미에서 청원으로 넘어갑니다.“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이 후반부에는 우리의 삶과 죽음의 순간을 성모님의 전구에 맡기며 드리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전구의 기도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맺으시는 독특한 관계, 곧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Theotókos), 곧 성모(聖母)가 되시는 그 관계에 근거합니다(교서, 33항 참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모님께 직접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하고 전구를 청한다는 점입니다. 곧 성모송의 후반부는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이며, 그 전구의 근거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어머니이시라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제와’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의 삶 전체를 가리키고, ‘저희 죽을 때에’라는 말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성모송의 청원은 어떤 특별한 위기의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 전체를 감싸는 기도입니다.
은총의 비
성모송을 반복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은총의 비’를 내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모송이 단지 성모님께 드리는 찬미에 머무르지 않고 죄로 메마른 세상과 인간 영혼 위에 내리는 은총의 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모송이 거듭될수록 메마른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흐려진 시선은 맑아지며, 분주한 영혼은 다시 하느님께 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 안에서 성모송을 바친다는 것은 단지 기도문을 입으로 되풀이하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폼페이에서 하신 교황님의 강론처럼, 그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며 은총에 자신을 열어 드리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천천히 적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성모송은 묵주기도의 본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고, 신비 안에 머물게 하며,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에 더욱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지식이 없으면 신앙은 그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첫째로,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는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하느님께 내 삶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확증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믿을 때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살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의 실존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막연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고통과 죄를 친히 짊어지신, 우리와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사랑의 역사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교리를 맹목적으로 외우기보다 깊이 이해할 때 신앙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 ‘사랑’이며, 그 사랑 안에서 세 위격이 하나를 이루신다는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때, 이 교리는 비로소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된다. 이처럼 신앙의 신비를 교리적 지식으로 명확히 인식할 때,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정서적 위안을 넘어 흔들리지 않는 깊은 확신으로 나아간다.
둘째로, 신앙은 삶 속에서 그 참됨이 증명됨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믿을 때, 정말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며, 더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는 삶을 통해 계속해서 합리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들이 일상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기쁘게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도 부활을 더 잘 믿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큰 고통인 죽음 앞에서도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평화롭게 눈을 감는 모습을 볼 때, 신앙의 진실함은 더욱 강력하게 증명된다.
셋째로, 신앙은 본질적으로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은총이 자연을 전제하고, 완전함이 불완전함을 전제로 하는 것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두고 “신앙은 자연 인식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은총이 자연을, 완성이 완성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신학대전」 참조)고 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적 지식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들, 이를테면 성황당의 고목나무, 호랑이 혹은 토정비결 같은 것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여 그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신뢰’이다.
즉, 이성과 지식이 밑받침되고 이를 통과한 신앙이지, 결코 허무맹랑한 신앙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과학자와 석학들도 하느님을 고백하고 믿었던 것이다.
넷째로, 믿음은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한 역사적 사건, 곧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의 역사가 지닌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깊게 인식한 사람이 계속된 믿음의 결단을 통해 굳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역사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으면 신앙은 그 완성에 이를 수 없으며, 그 신앙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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