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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으신 하나님
시편 73:1-17
오늘 저녁부터 생각하게 되는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라고 했습니다. 시편이 150편인데 편집자가 다섯 권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73편은 셋째 권을 장식하는 유명한 시입니다.
아삽은 고라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성전의 성가대를 인도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히브리족은 아니고 에돔족으로서 히브리족에 귀화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삽의 시’나 혹은 ‘고라 자손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들은 순수 히브리 민족이 아닌, 그러나 히브리 민족으로 귀화하여 종교적으로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봉사는 경건한 신앙가들의 신앙고백임을 우리는 더욱 주목해야만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생각하게 되는 이 시편 73편은 우리의 신앙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간 신앙인의 고백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구약학자 와이저 씨는 "구약성경에 있어서 영웅적인 신앙투쟁에 있어 가장 성숙한 위치에 있는 시인들 가운데도 가장 첨단에 있는 시인의 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마치 구약 욥기에 표현된 인생문제와도 같은,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해답을 찾기 힘든 문제를 가지고 신앙으로 대결하여 해결 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시의 첫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선하심을 믿는 신앙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1-3절)
이 시인은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 속에서 고민하다가 이제까지의 생각을 뒤엎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얼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도다"
비록 악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되는 것 같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바로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택한 백성에게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 십니다.
참 좋은 하나님 참 좋은 하나님
참 좋은 하나님 나의 하나님
목자된 하나님 목자된 하나님
목자된 하나님 나의 하나님
진실한 하나님 진실한 하나님
진실한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의 한정된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나 하고 의심할 정도의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선하시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신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다는 사실만이 우리에게 확실하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형통해 보이고 강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특별한 은총을 하나님에게서 받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이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확고부동한 신앙의 자리에서 있지 아니하면 우리가 실족하고 우리의 걸음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 기자는 마음 속에 시험이 들어올 때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이 대 원칙은 놓치지 않고 꼭 붙잡고 있습니다.
옛날의 모든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가령 욥을 보세요. 그는 감당키 어려운 시험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전지 하심에 그 원칙을 세웠습니다. '내가 지금 당하고있는 이 어려움을 하나님은 아신다'고 생각할 때 큰 위로가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의 의에 기도를 두었습니다. 예레미야 12장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 인간이 이의를 제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해서 때로는 구부러진 길로 갈 수가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그 원칙을 두었습니다. 하박국 1장 13절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나이다"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의 원칙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이 원칙은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칙에 따라 살고 이 원칙에 따라 죽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과 하나님의 이 원칙과 조화를 시키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조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은 너희가 모르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뜻 있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장하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할 수 있을 까? 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3,34)
그렇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한 나라의 형편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십니다.
롱펠로우가 한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하나님의 연자맷돌은 매우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몹시 부드럽게 갑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너무너무 우수하게, 비할 수도 없이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시편 42편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 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2-5)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의 골자는 선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심입니다.
인간세계에는 때로는 역설적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우리 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인데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놀라운 이성으로 마음 아픈 문제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최선을 다하고서 그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에 맡겼습니다. 거기서 만족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방법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믿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많은 시험에 대해서 우리를 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십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그의 마음 속에 갖고 있었지만 드디어 이 말이 그를 안정시켜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은 선을 행하십니다.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십니다.’ 여기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아 죄의 더러움에서 깨끗해지고 완전히 하나님의 영광에 바쳐진 정결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정결함은 우리 마음의 진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에게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특별히 그의 교회와 백성에게 선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약속한 대로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과 법령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마음이 정결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선을 행하시나 얼른 볼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행복해 보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시험을 받게 되는데. 여기 시인이 말 것처럼 거의 실족할 뻔하고 그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시험을 받아 나는 거의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모든 기대를 단념할 뻔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아무리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때로는 몹시 흔들려 쓰러질 정도까지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믿음이 가장 큰사람, 가장 튼튼한 영혼의 닻을 반석에 걸고 있는 사람을 시험하려는 폭풍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욥을 보세요 그는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이 그래도 마귀에게 자랑할 만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장 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때 사탄이 욥의 신앙을 흔들어 보려고 무서운 시험을 했습니다. 욥의 신앙이 크기 때문에 큰 시험을 당했습니다.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지마는 때로는 완전히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파멸한 자처럼 되어 버리게 됩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거의 파멸할 뻔하였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기 일보직전까지 이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에 타기 직전에 꺼내진 나무토막처럼 간신히 구출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시편기자가 시험 당한 과정이 어떻습니까? 3절에 악인의 형통함을 슬프게 보았습니다. 4절에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심지어 선한 사람과 같은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이 없단 말입니다. 마치 어떤 특권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당해야 하는 고통에서 면제 당한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 악한 사람들은 오히려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편하게 살며 즐거움으로 목욕을 합니다. 저희들은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납니다. 모든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더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교만합니까? 저희의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예요?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나님은 있지도 아니하려니와 있다고 해도 알지도 못하는 무용지물이라고 망발합니다.
그런데도, 말하자면 이들은 다 악인인데 항상 편안하고 재물은 날로 더해 가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시인은 말합니다.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됩니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봅니다" 저희 악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뜻대로 바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오히려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시편기자에게는 안달을 느끼게 할 뻔했습니다. 만일 그들의 물질적인 번영이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다면, 만일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덜 격노케 하거나 사람들을 덜 압제하게 했다면 그것은 결코 시편기자를 화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교만이 저희의 목걸이가 되었습니다.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사람은 너무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바른 마음을 가지는 일이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법령을 지키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때로 "모든 것이 헛되다" 그리고 "신앙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싶은 유혹과 충동을 받아 왔습니다. 왜요? 악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오히려 형통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이런 고민 속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15-17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가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달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편 기자가 악인의 형통과 번영을 보며 마음 속에 심한 갈등을 가지다가 어떻게 그의 신앙적인 입장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위치를 지키면 승리를 얻는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내가 마음을 정히 하고 산다는 것이 헛되도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었습니다.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런 생각의 말이 나오려는 입을 막았습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에 대하여 반항하고 신앙을 저버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궤휼을 행하였을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도 기가 막혀서 악한 생각까지 했었으나 발설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는지 모릅니다.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더욱 나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한 생각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은 그것을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생각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두 번째의 생각이 첫 번째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입니다.
이 시인은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해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몰라 몸부림치다가 '6절 말씀에 보니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가 심히 곤란하더니" 17절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그에게 분명하게 밝혀 주시고 그로 하여금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한 사람의 비참한 결국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인의 형통함이 절정에 달했을지라도 그들은 멸망하기 위해 무르익은 것에 불과 하므로 그들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따라 하나님의 성소에 나와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주님께 기도함으로 마음에 평화와 위로를 받게됩니다.
오늘 오후에 어느 자매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작년 가을 9월에 미국에 가서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잘 봉사하던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어머니는 세상이 캄캄해지면서 도무지 살고 싶은 생각이 없고 아들 따라 같이 죽고 말겠다고 생각하고 석달 열흘 밥도 제대로 안 잡숫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게 되었는데, 정말 이렇게 오래 계속하면 위가 줄어들어 결국은 죽지 않겠나 생각했었는데 어떤 친구가 교회에 나가보자고 해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더니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오더랍니다.
'이제는 따라 죽을 생각보다는 내가 어떻게 하면 먼저간 아들이 하지 못한 일을 좀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사실 내 아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가지 않았으면 우리 내외는 세상에 파묻혀서 돈이나 버는 것으로 낙을 삼고 살다가 가고 말았을 것입니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에 나와 기도하면서 말씀을 상고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격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 바 있는 시편 37편에도 노래했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러분, 악인이 번영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번영은 단지 풀의 무성함 같고 푸른 채소와 같이 쇠잔할 때가 옵니다.
소나무 옆에서 자라는 호박 넝쿨을 보고 "너는 어쩌면 그렇게 빨리 잘 자라니? 그러다가 온 세상을 덮겠구나" 하면서 부러워합니까? 아닙니다. "두고 봐라. 네가 아무리 큰소리치며 세상을 다 덮을 듯이 야단하지만 두고봐라"합니다. 왜요? 오래된 소나무는 벌써 여러 해 겨울이 되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면 흔적도 없이 말라 버리고 만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번영이 이와 똑같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베어지고 말 것입니다. 저희가 기세를 부리는 것은 잠깐이요 저희의 애곡과 비탄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생활과 하나님께 만족을 두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를 받습니다. 이런 생활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행악자들의 번영을 불평하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찌어다"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사는 것은 가산의 넉넉한 데 있지 안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시편 37편 5-6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로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37편 7절 이하에 무엇이라 했습니까?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을 이렇게 구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 말고, 불평 말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팔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둘 것입니다"
건강할 때 뿐 아니라 병이 들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밝을 때 뿐 아니라 어두울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성공할 때 뿐 아니라 실패했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칭찬 받을 때 뿐 아니라 욕을 당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얻을 때 뿐 아니라 잃을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살았을 때 뿐 아니라 죽을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 : 23- 25)
영광의 비밀
(시 73:1-28)
찬송 80장
시편 73편은 다윗시대 성가대장인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의 시편은 시편에 73-83편에 이르기까지 모두 11편입니다.
내용을 보면 1-13절까지는 악인이 형통한 사례를 가지고 의문하고 갈등했던 지난날을 고백하고, 14-16절은 악인은 형통한데 의롭게 사는 의인들은 왜 고난이 많은지, 그리고 17-마지막절까지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그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지금은 형통하지만 한 순간 졸지에 파멸에 이르고 멸망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인들은 지금은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연단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이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