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돌과 춘화
삼 년 전 강원도 영월 땅 아담한 기와집으로 한 부인이 열대여섯 되는 딸 하나와 몸종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이웃과 왕래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기껏해야 명절 전 대목장에 가느라 대문을 나서지만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 민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나 기품 있는 귀부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궁금증만 더해가, 남편이 귀양을 갔다느니 친정집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다느니 온갖 뜬소문만 난무했다.
딸은 그 어미보다는 동네 출입이 잦았다.
몸종과 함께 들판에 가서 봄나물을 뜯기도 하고 동강 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보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였다.
두어 달 전부터 이 집에 매파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호사가들이 매파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매파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름이 ‘숙경부인’이라는 것과 사군자를 치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매파가 들락거리는 것은 무남독녀의 혼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강 건너 부잣집 이진사네 둘째 아들과 혼담이 오갔다.
이진사네도 이곳 영월 토박이가 아니라 칠 년 전쯤, 한양에서 이주해온 집안이다.
혼담이 무르익어 상견례 날까지 받았다.
신랑감과 신붓감이 서로 만나보는 것은 양쪽 양반 가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앞으로 사돈이 될 양가 부모들이 서로 만나기로 했다.
신랑집에서 숙경부인 집으로 가마를 보냈다.
숙경부인은 가마를 타고 동강을 건너 사돈이 될 이진사 댁으로 갔다.
스물네 칸 우뚝 솟은 기와집에 닿자 안사돈 될 신랑의 어머니가 대문 밖에서 반갑게 맞았다.
머리가 부딪힐 듯이 서로 절을 하고 음식상이 차려진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바깥사돈이 될 이진사가 큰 갓을 쓰고 고개 숙여 숙경부인에게 절을 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숙경부인은 얼어붙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으려다 기둥을 잡고 휘청거리자 안사돈 될 이진사의 부인이 놀라
“사부인,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하며 팔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이진사도 ‘악’ 소리가 나올 만큼 당황했지만 숙경부인이 쓰러질 듯 균형을 잃은 모습에 놀란 듯하다가 곧 태연함을 찾았다.
숙경부인이 사과를 했다.
“어젯밤 뭘 잘못 먹었는지 토사곽란이 일어나더니 오늘 이런 추태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사주단자 보낼 일은 매파 편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숙경부인은 반식경쯤 앉아 있다가 가마를 타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안방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소를 잡고, 돼지를 잡아 푸줏간을 하던 작자가 이곳에 와서 이진사라, 양반이 되었네!”
숙경부인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평생 살아온 일이 실타래처럼 풀렸다.
‘숙경부인은 무슨 놈의 숙경부인! 삼패기생 춘화지.’
춘화가 이팔청춘일 때는 지금 그녀의 딸보다도 더 예뻤다.
권번에서 춤과 노래를 익히고 사군자 치는 법과 시 짓는 법을 배워 명월관으로 들어갔을 때는 장안의 한량들이
춘화를 품에 안으려고 불나비처럼 달려들었다.
윤참판이 기와집을 마련해 머리를 얹어주고, 만석꾼 부자 오생원의 첩이 되었다가, 비단장수 왕서방의 첩실이 되고….
가난에 한이 맺혀 예쁜 얼굴과 탱탱한 몸을 팔아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한평생 남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들고 춘화의 치마끈을 풀려고 안달일 줄 알았는데,
서른이 넘어 눈 밑에는 잔주름이 생기고 젖무덤이 밑으로 처지자 남정네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물간 춘화는 색줏집을 차려 푼돈을 받고 아무에게나 치마를 벗는 삼패기생이 되었다.
그때 소 잡고, 돼지 잡고 푸줏간을 하던 재돌이도 만났다.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숙경부인은 혼자서 술을 마셨다.
“재돌이가 양반, 이진사가 되었다 이거지.
그래 그래, 삼패기생 춘화는 숙경부인이 되고!”
며칠 후 매파가 건넨 쪽지를 받은 날 밤, 숙경부인은 동강 가 버드나무 아래서 이진사를 만났다.
“춘화씨, 아니 숙경부인.
우리 둘만 입을 꿰매면 그만이잖소.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혼례를 올립시다.”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글쎄 안 돼요, 안 돼!”
“말 좀 해보시오.
왜 안 되는지!”
“내 딸의 아비가 당신일지도 모른단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