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바그
'새로운 물결'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1958년경 부터 프랑스 영화계에서 일어난 새로운 풍조를 지칭. 좁은 의미로는 영화 평론지 <카예 뒤 시네마>를 본거지로 삼고 활동했던 신예 비평가들의 영화제작활동을 말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당시 프랑스 영화계의 새로운 풍조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960년 이후로 프랑스 영화의 주류가 됨과 동시에 세계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400번의 구타》의 프랑수아 트뤼포, 《네 멋대로 해라》의 장뤼크 고다르,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루이 말 등이 있다 장뤼크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이 중요 참여 인물이다. 고전적/현대적 분기점의 영화 사조이다.
프랑수아즈 지루는 ‘누벨 바그, 젊음의 초상화’란 잡지의 기사에서 ‘기성세대들이 영화를 시간 떼우기 용 오락거리로 보는 것과 달리 새로 형성될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신세대들에게 영화는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공식적으로 누벨 바그는 1958년에서 1963년까지 프랑스 영화감독 일부와 그들이 제작한 영화를 가르킨다. 영화사(映畵史)에서는 흔히 ‘현대 영화는 누벨 바그에서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1950년까지 제작한 프랑스 영화는 대부분이 문학작품을 각색한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문학의 이야기 기법으로 기승전결 형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야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다. 이럴 경우 영화는 문학의 아류가 되기 마련이다. 재미 때문에 대중들의 여가활동 용이 되었다. 대중들에는 감독보다는 주연 배우의 이름이 더 많이 알려졌다. 누베 바그 감독들은 이런 영화를 심리적 사실주의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영화는 다르게 만들려고 하였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감독이 되기 전에 모두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에서 비평가로 활동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영화계의 일반적인 관행의 수순을 밟지 않았다. 이들은 영화 보기를 좋아했고, 영화에 대한 평을 쓰고 다음에 영화를 만들었다. 이들은 영화를 좋아하되,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간주한 지식인들이었다.
영화잡지인 ‘키이에 뒤 시네마’는 리얼리즘 영화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이 1951년에 창간한 영화 전문 잡지이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이 잡지에 기서 영화에 대하여 공격적인 비평을 썼다. 바쟁은 리얼리즘 영화를 지지하면서도 기존의 리얼리즘 형식을 뛰어 넘는 새로운 리얼리즘 영화를 제시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헐리우드의 하워드 훅스, 엘프리드 힛치콕, 존 포드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한 쇼트를 찍는데 몇 시간을 허비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가급적 촬영장에서 일어나는 우연적 사건이나 퍼포먼스를 화면에 담으려고 했다. 현장에서 직접 뛰는 배우나 감독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 누벨 바그 영화는 작가주의 미학을 담았다. 대중적인 상업주의를 거부하고 누벨 바그의 영화의 선두를 달리던 트뤼포는 급진 좌파 영화감독인 고다르로부터 보수 우파 영화에 포섭되었다면서 결별을 선언당한다. 장 루이도 체제에 투항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트뤼포는 ‘나는 체제에 투항한 것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 나의 방식대로 작업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프랑스의 누벨 바그와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등에서 계속되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이나 요청은 유럽이나 미국 뿐 아니고 전 세계에서 영화학교를 졸업했거나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여기에 속한 젊은 작가들은 문학이나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영화의 제작에 고심했다. 영화의 주류에서 독립하여 영화를 만들려 했다.
오늘에 ‘영화는 재미가 있으면 되지’ 하는 사람들과 ‘영화는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상영관은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상영관 수백 곳을 독점한 블록버스터 영화는 1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지만, 상영관을 잡지 못해 한 명의 관객도 확보하지 못하는 영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