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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용회장님의 카톡에서]
게이지 플리글: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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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기원 33년 니산월 11일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예수께선 성전에서 바쁘게 가르치고 계셨죠.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그분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잠잠하게 하셨고, 그분의 지상 봉사 중에 가장 중요한 몇 가지 가르침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고 하셨죠.
후에 한 서기관이 예수께 나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것입니까?”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요?
그분이 하신 대답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대답을 마가복음 12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12:29, 30을 보시죠.
29,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 계명은[또는 가장 중요한, 가장 큰 계명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 여호와는 한 분인 여호와이시니, 네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너의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라.
간단해 보이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싸우거나 그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또 하느님의 도덕 표준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죠.
모두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주장과 모순되는 행동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애정을 느끼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고 말하신 거죠.
얼마나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지 강조하셨습니다.
마음, 영혼, 정신, 힘을 다하라고요.
모든 걸 포함하죠.
우리의 눈, 귀, 손, 전부 다요.
30절의 연구 노트는 여기에 감정, 욕망, 느낌이 포함된다는 걸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또 여기엔 우리의 지적 능력과 사고력이 포함되죠.
신체적, 정신적 힘도 포함됩니다.
네, 우리의 모든 것, 전부를 다해서 여호와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삶 전체에 빠짐없이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가장 큰 계명에 대해 강조하신 직후에, 이때 예수께선 성전에 계셨다고 했었죠?
그때 예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나쁜 예와 좋은 예가 되는 인물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우선 그분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정죄하셨죠.
그에 관한 내용이 마태복음 23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 위선자들은 아주 작은 식물의 10분의 1은 바치면서도 “더 중요한 것, 곧 공의와 자비와 충실은” 등한시했습니다.
나쁜 예였죠.
이제 예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훌륭한 예에 주의를 돌리십니다.
아직 마가 12장을 보고 계시다면 41절부터 읽겠습니다.
“[예수께서는] 헌금함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무리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셨다. 여러 부자들이 많은 주화를 넣고 있었다. 그때에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가치가 아주 적은, 작은 동전 두 닢을 넣었다. 그분이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헌금함에 돈을 더 많이 넣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넉넉한 가운데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넣은 동전 두 닢은 15분치 품삯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선 아버지의 견해를 알려 주셨죠.
영혼을 다한 과부의 희생을 칭찬하셨습니다.
뭘 배울 수 있죠?
물질적인 것을 드리는 것 이상이 관련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의 동기는 그분께 중요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시죠.
과거의 우리, 더 젊었을 때의 우리와 비교하지도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가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10년이나 20년 전처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만큼요.
이제 질문이 하나 생기는데요.
여호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하길 바라시는 것이 과연 합리적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죠?
이제 이사야 40장에서 44장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해야 하는 많은 이유들 중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동시에 우리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 주는 예들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예가 이사야 40장에 나오는데요.
11절입니다.
11절.
“그분은 목자처럼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실 것이다. 어린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실 것이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부드럽게 이끄실 것이다.”
아름다운 표현이죠?
여호와를 부드러운 목자로 묘사합니다.
에스겔 34:15, 16에서 여호와께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직접 내 양들을 먹이고 … 잃어버린 양을 찾고, 길 잃은 양을 다시 데려오며, 다친 양을 싸매 주고, [삽화처럼요] 약한 양을 강하게 할 것이다.”
그분의 동정심과 부드러운 돌봄을 감동적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비유적으로 말해 가시에 찔리거나 넘어져서 다치게 되면 여호와께서 감싸 주십니다.
치료해 주시죠.
우리가 도움을 구할 때 “그러게 알아서 잘했어야지” 하며 꾸짖지 않으십니다.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그분의 말씀을 통해 일깨워 주십니다.
양은 어떻게 느낄까요?
삽화에서처럼 여호와의 돌봄 아래 안정감을 느끼죠.
우린 그분의 동정심 어린 돌봄에 대해 어떻게 느낍니까?
우리도 안정감을 느끼죠.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커지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40:28, 29을 보겠습니다.
28절부터 보면, “너는 알지 않느냐? 듣지 않았느냐? 땅끝까지 지으신 창조주 여호와는 영원토록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결코 피곤해하거나 지치지 않으신다. 그분의 이해는 찾아낼 길이 없다. 그분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힘이 없는 자에게 기력을 채워 주신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강력한 성령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의 맏아들을 시작으로 수많은 강력한 영적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가득한 거대한 우주와 끝없이 다양한 식물과 동물들이 있는 지구를 만드셨습니다.
또 놀라운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경이로운 인체도 만드셨죠.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전능한 창조주이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나 저나 피곤하거나 완전히 지쳤을 때 어떻게 합니까?
긴 하루가 끝나고 몸이 지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재충전합니까?
전기 차처럼 충전소에 가서 충전하나요?
아니죠.
우리는 휴식과 우리의 연료라고 할 수 있는 음식을 섭취함으로 재충전되도록 놀랍게 만들어졌습니다.
음식을 통해 에너지를 얻도록 한 것은 여호와의 사랑의 증거이죠.
힘을 줄 뿐 아니라 기쁨도 주기 때문입니다.
아침으로 뭘 드셨나요?
이곳에서 드셨다면, 평균적으로 하나의 도넛에는 190에서 300칼로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칼로리 걱정 하지 마세요.
우리가 뭘 먹든, 에너지와 음식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재충전할 수 있도록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은 우리가 살면서 시련을 겪다 지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제도에선 해결책이 없는 문제라면 어떨까요?
우리가 영적으로 좋은 습관을 유지할 때 여호와께선 힘을 주십니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죠.
그분의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주어 우리가 또 하루를 살아가게 해 줍니다.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이 힘을 주는 거죠.
네, 지친 자에게 힘을 주는 여호와께서는 말하자면 힘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그분에게 마음이 이끌리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사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이사야 41장 10절과 13절에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고 너를 도와주겠다. 내가 참으로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13절.
“나 여호와 너의 하느님이 네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여호와는 돕는 분이죠.
그분은 자신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의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을 때 그분은 우리를 끌어내 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출하셨죠.
이사야 63:9은 “그들이 온갖 고통을 당할 때에 그분도 고통스러워하셨다. … 지난 모든 세월 동안 그들을 들어 올리시고 안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최근에 여러분을 시련에서 구출해 주신 때는 언제입니까?
시편 18편에서 다윗은 매우 생생한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를 구출하시는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묘사했습니다.
시편 18:8-10.
“그분의 코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그분의 입에서 태워 없애는 불이 나왔으며 … 그분이 하늘을 구부려 내려오시니, 그 발밑에는 흑암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룹을 타고 날아오시고, 영의 날개를 타고 쏜살같이 내려오셨습니다.”
16절.
“하느님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뻗어 나를 붙잡으시고 깊은 물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19절.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내셨으니, 나를 좋게 여겨 구출해 주신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의로운 오른손을 뻗어 우리를 시련에서 구출하십니다.
이유가 뭐죠?
여호와께서 영혼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하늘의 아버지가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제 네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과 9절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새긴 형상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보라, 처음 일들은 이루어졌다. 이제 내가 새로운 일들을 알려 준다. 그 일들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가 너희에게 말해 준다.”
이게 왜 여호와를 사랑할 이유가 될까요?
그분은 예언의 하느님이시죠.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선 약속을 지키십니다.
이 점은 그분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데, 그 의미는 “그분은 되게 하신다”로 이해되죠.
“그분이 자신의 종 모세를 통해 하신 모든 선한 약속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말했죠?
여호수아와 솔로몬 모두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솔로몬 시대보다 3000년이 더 지났습니다.
우리에겐 더 큰 확신이 있습니다.
더 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었으니까요.
하느님의 왕국이 통치합니다.
순결한 숭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우린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선한 약속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졌다’고요.
그게 어떻게 여호와를 더 사랑하게 해 줍니까?
예언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이사야 33:24이나 요한복음 5:28, 29이나 계시록 21:3, 4을 읽을 때,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사라지면 어떤 축복을 얻게 될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환영할 때를 고대하십니까?
그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그 점을 보증하죠.
여호와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그분의 모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9:11에서 여호와께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평화를 주려는 생각이니, 너희가 미래와 희망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정신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죠.
그분은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사야의 예언에서 여호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 네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우리의 목자이시고 둘째, 창조주이시고 셋째, 돕는 분이시고 넷째, 예언의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을 겁니다.
왜 여호와를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고 한 형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제 기도를 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합니다.”
한 자맨 말했죠.
“여호와는 다가가기 쉬운 분이세요.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고 저를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큰 특권이죠.”
또 다른 자맨 이렇게 말했죠.
“그분은 오로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걸 만드셨습니다. 맛을 몰라도 사는 덴 지장이 없죠. 석양이 아름답지 않아도 음악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 주셨죠. 제가 여호와를 사랑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분이 필요한 것보다 넘치도록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이에요.”
또 다른 형제는 여호와의 용서 때문에 그분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여호와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인 그분의 아들 예수의 대속 희생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 각자는 나는 왜 여호와를 사랑하는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왜 여호와를 사랑하시나요?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무엇을 하게 됩니까?
그 답을 알기 위해 이사야 43:10을 보겠습니다.
10절.
여호와의 말씀이죠.
“너희는 나의 증인들, 내가 선택한 나의 종이다.”
1931년에 러더퍼드 형제가 새 이름을 발표했을 때 다들 얼마나 가슴이 설렜겠습니까!
그때부터 우린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소중히 여겨 왔습니다.
여호와께선 무슨 목적으로 우릴 그분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까?
이사야 43:21을 보시죠.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해, 나에 대한 찬양을 선포하도록 지은 백성이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선포하도록 하셨죠.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놀라운 특권입니다!
여호와께선 바위나 나무나 동물들을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자신의 충실한 종들을 선택하셨죠.
여러분과 저를 선택해 찬양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최근에 저는 미국 서부에 갔다가 아내와 함께 들소와 엘크와 무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안전한 거리에서요.
이들은 거대하고 아주 힘이 센 동물입니다.
이 동물들을 사용해 찬양을 선포하게 하셨다면 어땠을까요?
근처에 갈 때마다 말하죠.
“야를 찬양하라.”
그러지 않죠.
그냥 풀만 먹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여호와를 찬양하죠.
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분과 그분의 특성들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선 기계적인 찬양이나 강요에 의한 찬양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온 찬양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놀라운 특성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대한 하느님에 관해 온 세상에 선포합니다.
많은 사람은 듣지 않죠.
정부의 반대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사야 44:8을 보죠.
이 구절을 기억해야 하는데, 앞서 들은 것처럼 우리가 반대에 직면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44장 8절.
여러 곳의 일부 형제들은 이미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8절.
“무서워하지 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마라. 내가 너희 각자에게 그것을 미리 말해 주고 알려 주지 않았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다. 나 외에 하느님이 또 있느냐? 다른 반석은 없다.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여호와께선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십시오.”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막으려 한다면 카이사르는 위험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계속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세계적인 가족도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타티야나라는 한 충실한 자매는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남편은 현재 미결 구금된 상태이죠.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힘든 시기이지만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계시다는 걸 계속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시련이 오든 그분의 도움으로 인내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죠. 제 마음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평온해요. 다른 사람에게 여호와에 대해 알려 주겠다는 결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합니다. 제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워요!”
네, 타티야나는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그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매달 몇 시간이나 봉사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커질수록 상황이 허락하는 한 더 온전히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여호와를 열심히 찬양함으로 그분의 증인임을 증명합니다.
여호와에 대한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위대한 하느님에 대해 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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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리(義理)를 지킨 남자
조선조 연산군 때 교리(정5품 문관) 이장곤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연산군이 잡아 죽이려 하자 함흥 땅으로 줄행랑을 쳤다.
어느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우물에서 물 긷는 처녀가 있었다. "내가 목이 몹시 마른 데 물 한 바가지 떠 줄 수 있겠느냐?" 나그네의 몰골을 살펴보던 처녀가 바가지로 물을 뜨더니 우물가에 흐드러진 버들잎을 훑어 물 위에 띄우고 건넸다.
교리 이장곤, 바가지에 뜬 버들잎을 후후 불어 마시고 갈증을 풀고 나니 그제야 제 정신이 돌아왔다.
이장곤은 바가지를 돌려주면서,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처녀에게 물었다.
"왜? 물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느냐?" "선비님이 급히 마시다가 체할 것 같아서 그랬사옵니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참으로 영특한 처녀로구나.
치렁치렁 땋아 내린 긴 머리는 발밑에 닿을 듯하고, 얼굴은 달덩이, 미소 지을 때 옴폭 파인 보조개, 앵두 같은 입술,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입맛이 쩍쩍 당기는 처녀였다.
그러나 어쩌랴. 쫓기는 신세 이장곤은 더 이상 아름다운 시골 처녀의 환상에 젖어 있을 겨를이 없다.
당장 오늘밤 숙식부터가 문제 아닌가. 그래서 그는 이 동네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어느 허름한 집에 들게 되었다. 이 마을은 버들가지로 고리짝이나 바구니 등 가재도구를 만들어 먹고 사는 천민 계급 고리백정 마을이었다.
암튼, 이날 저녁상을 들고 들어 온 여인은 놀랍게도 낮에 봤던 그 처녀. 처녀는 밥상을 내려놓고 입술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되돌아 나갔다. 저녁상을 물린 후 그는 주인을 불러 수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자기는 한양 사는 이선달이고, 과거에 낙방하고 상심해서 무작정 유랑 길에 나섰다는 것 등등, 철저히 신분을 속였다.
그리고 주인에게 청을 넣었다. "여보게 자네 딸 날 주게"였다. 지금의 상식으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화법이지만 그 시대 상황에선 양반과 천민 간엔 당연한 말투였다. 천민으로 태어나 한스럽게 살아온 처지에 양반 사위를 본다는 것은 천지개벽을 할 노릇, 그야말로 신분 상승의 좋은 기회가 아닌가. "미천한 딸년이지만 그렇게 하시죠“ 이렇게 해서 교리 이장곤이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었고 피신 길에 숨어 지낼 안가(安家)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는가? 먹고 자고 먹고 자고가 일과였다. 처음엔 양반 사위님 보았다고 끔찍이도 위하든 장인도 놀고먹는 사위가 미워 말투도 차츰차츰 변했다.
"이 서방님 일어나셨습니까?"
"이 서방 일어나셨는가?"
"이 서방 일어났나?" "야, 이놈아 이 서방 아직도 자빠져 자냐?" "밥도 아깝다 그 자식 밥 주지 마라" 고리백정 장인의 말투가 이처럼 갈수록 거칠어졌다. 그럴수록 누구 편도 들 수 없는 딸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낸 지 몇 해 후, 어느날 게으름뱅이 사위가 느닷없이 장 구경을 다녀오더니 내일 관가에 보낼 고리짝은 자기가 받치고 오겠다고 자청했다. 장인은 생각했다. "관가에 고리짝 받치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데 제깐 놈이 감히 고리짝을 받치러 가겠다고? 오냐 못 받치고 오기만 해 봐라." 이튿날 교리 이장곤, 지게 위에 고리짝 한 짐 짊어지고 관가를 찾아가 문을 지키는 관졸들을 물리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고리백정 사위 교리 이장곤이 버들고리 받치러 왔소" 관무를 보던 현령이 깜짝 놀랐다. "뭣이라고? 이장곤이라고?"
당시 조정은 중종반정 이후 임금이 이장곤을 백방으로 찾았다. 각 고을 수령 방백에게 이장곤을 찾아 보내라는 통문을 내렸으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현령이 벌떡 일어나 고리짝 짐을 지고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사나이를 보았다. 비록 의복은 남루하지만, 번쩍이는 눈빛이 동문수학하고 함께 벼슬길에 올랐던 죽마고우, 이장곤. 바로 그 이장곤이 분명했다. 버선발로 뛰어 내려간 현령, "이 사람 장곤이 자네 이게 웬일인가? 자네 그동안 어디서 숨어 지냈나? 전하께서 자네를 백방으로 찾고 계신다네" "그동안의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쩔텐가? 이 고리짝 받아 줄란가 말란가?" "그야, 여부 있겠나“
두 벗은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털어 놓았다. 저녁 늦게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온 사위를 본 장인, "고리짝은 받쳤느냐?" "받쳤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게으름뱅이 사위 놈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갑자기 마당은 왜 쓰느냐?" "손님이 온다네" "이놈이 미쳤나? 어제 고리짝 받치고 오더니 헛소리하네. 그래 누가 온다더냐?" "좀 있으면 알게 될 걸세" 잠시 후, 동구 밖이 시끌시끌했다. 시종배 거느리고 쌍 나발 불고, 이 고을 현령이 말타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길바닥에 엎드려 머리 조아리면서 현령이 어딜 가시나 지켜보고 있는데. 아니 이게 웬일? 게으름뱅이 이 서방 놈 처가로 들어가지 않는가? 느닷없이 찾아온 현령 행차에 장인도 장모도 이 서방 색시도 마당에 무릎 꿇고 엎드려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웃고 있는 천덕꾸러기 이 서방이 현령을 맞이했다. "자네 왔는가. 어서 이리로 올라오게, 그리고 자네 형수한테 인사 올려야지, 여보 당신도 이리 올라와 인사 나눠" 마당 위에 엎드려 있던 이장곤의 색시가 마루 위로 올라와 하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 이 고을 현령과 형수씨. 계수씨, 허물없는 농담을 하면서 인사가 오갔다. 그리고 장인 장모도 불러올렸다. 주변에 모여서 이 희한한 광경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의 웃음소리는 산 넘어 물 건너 멀리 더 멀리 메아리쳐 흩어졌다. 그후 교리 이장곤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실세 박원종의 천거로 복직되어 승승장구, 병조판서까지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실화(實話)다.
어떤가? 의리의리(義理)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가
여인의 지혜였다. 체할까 봐 물에 버들잎을 띄워 준 것은, 그야말로 참으로 지혜롭다. 비록 백정의 딸이었지만 그 어떤 여인보다 지혜롭다. 성경 잠언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지혜로운 여인은 집을 세우는데 반면, 미련한 여인은 그 집을 자기 손으로 허무다"라고.
둘째는
이장곤의 그 의리(義理)다. 백정이 무언가? 천민이다. 사회적으로 짐승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던 백정이었다. 그런 백정의 딸을 정경부인 삼은 의리의 사나이 이장곤, 그야말로 "사람이 하늘이다"를 실천한 인물이 아닌가? 얼마나 의리의리한 사람인가?
의리를 지키는 乙巳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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