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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
일본의 역사에서 큰 사건중 하나의 빌미가 되게한 8글자입니다.
오늘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제목처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니 당시 조선인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정도의 욕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일이지만 심한 욕들은 가장 심한 것으로 선택해서 한국인 모두가 각자 아는 욕으로 하는 걸로 하고,, 후기 이어갑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는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후 일본을 통일하고 63세의 나이로 6개월정도 병을 앓다가 병사를 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불과 6살이었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게다가 어리기만한 아들을 남겨두고 눈을 감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가신들을 불러모아 아들에게 충성을 부탁하다못해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쓰게했다니 강한자만 살아남는 전국시대에서 본인도 오다 노부나가의 자손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니 본인역시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 준대로 받고 살게 되는 법일지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어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오르지 않았던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민 출신으로 가문과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린데다 그 반발심리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일을 벌여야만 자신을 알아줄거라는 망상과, 일본 통일후 남아도는 무기들을 소진시키며 강대해진 많은 무사집단의 힘을 잃게 만들 욕심으로 관심의 대상을 대륙진출이라는 명분으로 1592년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침략에 성공하면 일본역사상 아무도 생각해내지 않았던 대륙진출을 하게되는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강력해진 무사계급의 힘을 빼놓는 일이 되니 일석이조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임진왜란은 이순신 장군의 맹활약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1598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다 정유재란중 끝내 병사하고 말았죠.
남은 6살 아들을 부탁하고 죽었지만....
다른 무장들에 비해 임진, 정유재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은 그대로 살아 있어 세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상태였던 겁니다.
지금의 도쿄인 에도가 당시에는 늪지대로 거의 쓸모 없는 땅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내린 영지가 바로 이곳이었던 겁니다.
하여 조선 파병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늪지대 초석을 다지는 일만도 힘에 부쳐 조선에 파병할 수 없다는 적절한 핑계를 댔던 겁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이 땅 영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정했을 때만 해도 이런 쓸모 없는 땅을 내리다니 하면서 분노에 속을 끓일 일이었을겁니다.
그러나 "인내의 화신"이라 불리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일을 오히려 임진, 정유재란때 조선에 자신의 군대를 파병하지 않아도 되는 전화위복으로 만들게 되었던 거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가 남기고 간 막대한 재산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 결국 힘이 되지 못하게 만들 속셈으로 6살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에게 이 돈을 전란후 파괴된 교토를 재건하는데 돈을 쓰게 만들었죠.
특히 절을 재건하는 일에 막대한 돈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교토에 있는 절이 1467~1477년 사이에 있었던 오닌의 난때 대부분 파괴 되었었고, 전국시대 또한번 풍파를 겪게 되어 많은 절들이 파괴 되었는데 바로 이때 히데요리의 기부로 재건된 절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교토를 여행하다보면 히데요리가 재건했다는 절이 엄청 많습니다.
호코지도 그 중 하나의 절이었습니다.
바로 이 호코지 재건때 범종을 기부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 종에 쓰인 8글자를 트집 잡아 눈에 가시같았던 히데요리를 죽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멸족시킵니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보다 더 가증스러운 앞잡이도 있는 법이죠.
전문적인 지식을 팔아, 권력이 원하는 핑계를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일본 역사에서 그런 짓을 한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 하야시 라잔[林羅山]이라는 유학자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해 나아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주군으로 섬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손을 걸림돌로 여기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보니 대망이라는 소설이나 드라마에 그려진 내용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공격하는 일에 대해 엄청 고뇌하는 척 그렸지만 권력욕이란 것이 한도 끝도 없는 법인건데 언제든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제거할 기회만 보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거하기 위한 트집거리로 찾아낸 것이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호코지(方廣寺)라는 절의 종에 새겨 넣은 문구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절이 완공되면, 절의 종에 글을 새겨넣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호코지의 종에도 당연히 그런 글이 새겨졌고 그 내용은 ‘國家安康 君臣豊樂 子孫殷昌, 즉 "국가는 평안하고 군신은 즐거우며 자손은 번창하리"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야시 라잔을 중심으로 한 일부 유학자들과 승려들이 이 문구를 두고 해괴한 해석을 내놓았죠.
‘국가안강’은 이에야스의 이름(家康)을 잘라('가강'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름이 덕천가강이니> 이름 사이에 '안'자를 넣어 도쿠가와를 반으로 잘라버리면서..)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 저주를 걸은 것이고, ‘군신풍락’은 臣과 豊을 거꾸로 읽으면 도요토미[豊臣]이니 도요토미 가문의 번영을 기원한 뜻이라 해석을 했던 것이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하야시 라잔의 이런 해석이 생트집임을 뻔히 알면서도,,이런 생트집을 잡아 대규모 토벌을 감행했고, 다이묘들에게 오사카성 공격을 명해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후 결국 절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해서 평화로운 시대가 온 것 같지만, 일본 농민들은 수확의 반을 연공이라는 명목으로 바치며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도쿠가와 바쿠후에서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어주기 보다, 검소하게 살라고 미천한 백성들을 ‘계몽(?)’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통일의 위업 운운하지만, 결국 권력 다지고 누리려는 목적이었지, 피곤한 백성의 삶을 돌봐주려는 목적은 아니었던 셈이었던 것입니다. 에도 막부 260년간 도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누리며 잘먹고 잘살았던 역사가 이루어졌죠.
그러한 역사적 평가는 일본이 알아서 할 일이고..
저는 여행자이니 지금의 호코지 모습을 보러 갔습니다.
호코지는 산신산겐도, 도쿄국립박물관, 풍국신사, 귀무덤등 주변 거기거기 걸어서 다녀도 되는 거리에 볼거리들이 있는 지역이어서 일부러 호코지만 보러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호코지는 절의 규모도 작고 초라한 절입니다.
호코지는 위와 같은 내용의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간다면 교토의 다른 절에 비해 보고말고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게할 정도의 절입니다.
누각에 매달린 범종에 흰색칠을 해둔 이 종외에는 볼 것이 없는 절입니다.
호코지로 들어가는 길도 작고 초라합니다. 큰 길가에서 오른쪽에 풍국신사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는 신사가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빌어봐야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후시미 이나리 신사처럼 사업번창이나 금전운을 비는 신사에 비해 규모도 작고고 가꾸어진 것도 별반 없어보이는 풍국신사도 초라했습니다.
현재의 호코지는 이 범종 말고는 딱히 볼거리도 없는 절이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은 여행의 재미를 더해 줍니다. 과거에 호코지는 히데요리가 재건을 하는데 도움을 줄 정도의 절이었으니 규모가 적지 않았을 텐데 지금의 호코지는 건물이라고는 이 방장 건물 말고는 없고 그 역사적 현장의 범종만이 종루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풍국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는 신사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일만큼 유명한 인물(물론 악명높은쪽으로 유명한..)이지만 그를 모시는 신사는 그저 초라합니다.
호코지 오른쪽으로 이렇게 풍국신사로 들어가는 도리이가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는 호코지와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풍국신사 바로 길 건너 왼편에 이총공원이 있고 그 놀이터 옆에 귀무덤이 있습니다.
임진 정유재란때 자신의 공을 알리기 위해 조선 군민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이곳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묻었답니다.
교토 여행을 하면 꼭 이곳은 들러서 묵념이라도 줄서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국민의 저력을 이런 곳에서라도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불어 다시는 이런 일들을 한국 땅에서 벌이지 못하도록 무언의 시위같은 개념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일이 이곳에서 일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같은 일은 이제 절대로 허용하지 않도록 힘을 기르고 잊지 말도록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애국에 도움되는 일은 전혀 없이 그저 남이 잘못 사용한 글자한자 가지고 "그 글자 거슬리니 고쳐써라" "친일파냐", "쪽발이냐" 하면서 같은 한국인을 공격하는 일에는 열성적이면서.....본인 혼자만 애국자인척줄 아는 부류가 일본여행관련 인터넷 글의 댓글을 보면 유독 많이 보여 안타깝습니다.
진정한 애국이란 같은 한국인을 비난, 비방을 하면서 혼자 애국자인척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애국자다운 모습이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런 슬픈 역사의 사실이 있는 귀무덤에 교토여행을 가는 모든 한국인이 줄서서 참배하는 그런 날을 기대해 봅니다.
그러면서 결코 그런 비극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이어야 작은 애국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귀무덤은 찾기가 쉽습니다.
귀무덤은 풍국신사 바로 건너편 왼쪽에 있습니다.
풍국신사를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왼쪽에 놀이터가 있는데 그 놀이터를 지나자마자 바로 옆에 붙어 있습니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한 마을 한중심에 있었습니다. 풍국신사 전방 30미터 정도. 귀무덤에서 풍국신사쪽을 찍은 사진이니 찾아가기 쉽습니다. 말로 설명된것 인터넷 후기보고 찾다가 저는 호코지 앞쪽 마을로 한참을 돌아서 물어물어 여기로 왔네요.
이렇게 사진 한장으로 설명하면 찾기 쉬웠을텐데 말이죠.
교토 국립박물관
다음으로는 천민 출신으로 일본을 통일해 불세출의 인물이 되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죽고난 후 무엇이 의미가 있는건가? 그리고 특히 적어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풍수지리에는 젬병이었나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가 봤습니다. 그의 아들이 있던 오사카성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공격하여 가문을 멸족시겼기 때문입니다.
교토라는 도시가 처음 탄생할 때 중국의 장안성을 모델로 풍수지리에 입각해 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도 풍수지리를 중시하는 나라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인이 죽은뒤 묻어 달라했다던 곳에 묻어 줬는데 가문이 다 멸족을 당하는 일이 벌어 졌으니 하는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은 일본 최고였고 어마어마한 부가 쌓여 있던 상태였기에 얼마든지 화려하고 최고의 요지에 묘를 쓸 수 있었을 텐데 왜 가문이 멸족 당했을까?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묘자리를 보게한 것이 아니었나?
본인이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다하니 적어도 히데요시는 풍수지리 전문가는 아니었던가 봅니다.
일본의 장묘 문화가 원래 소박해서 그런건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몰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은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를 폭파했었다니...묘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은 아니겠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는 호코지 풍국신사 귀무덤을 보고 교토 국립박물관을 지나 산쪽으로 쭉 걸어 올라가 교토여자대학교쪽으로 올라가면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신사가 하나 있길래 들어가 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묘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교토여자대학교 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이 문을 지나 한차례 계단을 더 올라가면 묘가 있습니다.
20분은 족히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까마득한 계단길을 한번더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묘 안으로 들어가갈 수 있게 해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전국시대의 영웅의 묘치고는 관리가 너무 허술합니다.
이제 내려 가는 길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덤은 교토여자대학쪽으로 쭉 올라가 계단으로 되어 있는 가파는 계단길을 20분 올라가야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을 통일한 인물로 조선을 침략해 고통에 빠지게 하고 결국 명나라마저 망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쟁을 일으켰던 인물이지만 죽고나니 그저 초라한 몇평 묘자리속에 묻히고 말것을,,,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시절 히데요시 묘를 폭파시키는 일까지 있었다하니.....
폭파되기 전에는 얼마나 화려했었는지 모르겠지만 유적지라 하기에도 쓸쓸한 현재 모습의 묘였습니다.
하기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부관참시까지 당한 격이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본인 정권의 합리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전 정권을 무참히 짓밟는 과정에서 행한 일이겠으니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를 떠나 히데요시의 무덤을 보니 권력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란 글자도 같이 떠오르는 날이었습니다.
TIP : 교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버스를 기다렸다 타고 가느니 성질 급한 사람은 그냥 걸어가도 되는 거리에 호코지, 풍국신사, 귀무덤, 산신산겐도, 도쿄국립박물관이 옹기종기 다 모여 있습니다.
천수관음상 1,000개를 모셔놓은 삼십삼간당이 워낙 유명하니까 이곳은 빼놓지 말고 꼭 가봐야 하는 곳인데 이곳으로 가는 버스를 교토역에서 타서 구경후 나와서 박물관 주변에 있는 호코지 풍국신사 귀무덤을 휘이 둘러보고 귀무덤에서 참배도 하고 하면 참 좋은 코스가 될것 같습니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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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첫댓글 아픔과 전쟁이
교차하는곳..
언제나처럼..
"그 글자 거슬리니 고쳐쓰라, 친일파냐, 쪽발이냐"
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두어달전에 동아일보 칼럼에 보니...
미국에서는 선플이 90% 에 악플이 10% 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선플 40% 에 악플이 60% 라네요?
해서 유명 연예인이 시달리다 못해
어린 자식들을 두고 생을 마감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여행 카페는 같은 취미를 공유한 탓인지
압도적으로 선플이 많은가 합니다.
히데요시를 미워하는 분은 많지요?
그런데 어차피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고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세력이 커지면 반드시 이웃나라를 침략한게 역사이니....
이웃나라를 비난하기 전에
침략을 받지 않도록 국력을 키우는게
답이라 여겨집니다!
국력을 키우고 사전에 대비하면 침략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게 말 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보듯....
조선은 전쟁에 대비해 경상감사 김수,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선각을 내려보내 성을 수축하며
이순신과 원균등 무장도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하루 살기도 힘든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리니
불평이 높아지고 무단 이탈하니 조정은 공사를 중지합니다.
국왕과 종친이며 대신들이 재산을 내어놓고
그 자제들이 책과 붓을 집어던지고
경상도로 내려와 성쌓는 일에 몸을 바쳤으면
백성들이 저랬겠습니까?
우리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으니...
양반들은 군에도 가지않고
백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전담시켰으니. ..
즐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