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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용하는 인명은 노르망디가 프랑스 왕국의 공국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어 발음으로 표기합니다. 당시 앵글로-노르만 왕조의 궁중 용어는 프랑스 어였습니다. 리차드Richaed는 리샤르로 찰스Charles는 샤를로 윌리엄William은 기욤Guillaume으로 헨리Henry는 앙리Henri 혹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일 경우에는 독일 발음인 하인리히Heinlich로 로버트Robert는 로베르로 기술하였습니다. 지명 역시 최대한 프랑스식으로 기술하려 하였고, 발음이 모호할 경우에는 원음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911년 7월 20일 롤로는 생클레르-수르-압Saint Clair-sur-Epte 조약을 통해 서 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Charles the Simple3세와 노르만인에 의해서 점령되었던 네우스트라시아Neustrasia의 일부 인 루앙Rouen 주위의 동부 노르망디를 영토를 하사받는 대신 더 이상 약탈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였다. 이것이 노르망디 공령公領의 시초이다. 센Seine 강어귀 양편의 노르망디 땅을 받는 대가로 노르망디 공작에 임명된 롤로는 프랑스의 샤를 단순왕을 주군主君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 조약에서 샤를 3세가 롤로에게 수여한 땅은 후일 노르만인의 땅이란 뜻인 노르망디라 부르게 되었다. 롤로는 처음에는 샤를과의 약속을 잘 지켰지만 얼마 뒤 약속을 어기고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롤로가 노르망디에 정착한 이후 많은 바이킹들이 프랑스의 서북방으로 유입流入되었고 정착하였다. 이들은 프랑크 왕국의 언어, 관습,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약탈을 자제하였다. 롤로의 후계자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교도로 성장하였고, 일련의 전쟁을 통해 주변영토를 획득함으로써 매우 강성해져서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의 가신家臣이나 봉신封臣을 자칭하였으나 이들이 차지한 영역 내에서는 사실상 프랑스 국왕과는 무관하게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네우스트라시아Neustrasia/Neustria는 새로운 땅이란 뜻이다. 아퀴타니 접경에서부터 잉글랜드 해협에 이르는 지역으로 511년에 설치되었다. 넓이는 대략 잉글랜드의 웨일즈 정도의 크기이지만 여기에는 앞으로 프랑스의 중요 도시가 될 파리Paris와 스와송Soisson이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6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s의 서쪽 영토를 형성하였다. 이 지역은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이 정복을 통해 만들어져 10세기 후반 카페 왕조 때까지 존속하면서 브레통인Bretons과 바이킹에 대항하는 국경의 공국으로 존재하였다. 브레통인은 브레타뉴Bretagne/Brittany 반도에 거주하는 Brythonic어를 사용하는 인종이다. 이들은 3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콘웰과 브리튼 섬 서남부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로부터 1204년 프랑스의 필립 존엄왕Philippe Auguste으로부터 봉지를 몰수당하기까지 대략 293년간 노르망디는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 내 영지로 존재하였다. 노르망디 지역을 봉지로 받으면서 롤로는 둑스Dux라는 칭호도 함께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세례명洗禮名을 프랑크 형태의 이름인 로베르Robert로 바꾸었다. 롤로는 공령公領의 수도를 루앙Rouen에 정하였다. 이로부터 루앙은 잉글랜드를 정복한 앵글로-노르만 가문의 정신적 고향이 된다. 앞으로 롤로의 후손들은 노르망디 공작公爵Duke이란 칭호를 세습하게 된다. 롤로는 세례를 받은 뒤에 로베르라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에게 로베르 1세란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그래서 후대의 장엄공 로베르를 로베르 2세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반면 롤로라는 이름이 너무 알려져 있기에 그대로 사용하고 후대의 장엄공 로베르를 로베르 1세라고 하기도 한다.
Dux는 영도한다는 라틴어 ducere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Dux는 영도자란 의미이다. 후에 Duke, Duce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었다.
927년 롤로는 노르망디의 공작 지위를 자신의 아들인 장검 기욤에게 넘겨주고 소일하다 933년경에 사망하였다. 롤로는 912년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았지만 자신이 섬겼던 북유럽의 신을 숭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롤로의 직계는 윌리엄 클리토William Clito에서 끝나지만 혼맥을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여러 귀족가문의 선조가 될 뿐 아니라 많은 유럽 왕가에도 그의 흔적을 남겼다.
롤로는 기록에 따르면 바이외Bayeux를 급습하여 베렝가르 백작Count Berenger의 딸 포파Poppa를 납치하여 정부로 삼아 장검長劍 기욤Guillaume Longue-Épée/William Longsword, 아퀴텐 공Duke of Aquitaine 기욤William의 아내가 되는 게를록Gerloc, 스코트족의 왕 브요란Bjolan과 결혼하는 카들린Kadlin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의 샤를 단순왕의 딸인 기셀라Gisela와도 결혼했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듯하다.
노르망디 공국은 1134년 윌리엄 클리토William Clito의 사망으로 직계가 단절되고 1259년 파리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한동안 영국 국왕들이 세습하였다. 라틴어 클리토Clito는 앵글로-색슨어Anglo-Saxon 에설링Aetheling과 같은 의미이다. 독일어에서는 아델리누스Adelinus라고 한다.
장검 기욤Guillaume Longue-Épée/William Longsword은 927년 부친인 첫 번째 노르망디 공작 롤로가 살아있을 때 공작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장검 기욤은 정실부인인 베르망두아Vermandois의 뤼트가르데Luitgarde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대신 브레통Breton에서 납치한 스프로타Sprota와의 사이에서 용맹공 리샤르Richard the Fearless/Sans Peur를 낳았다. 그러나 용맹공 리샤르는 정식 결혼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서출庶出로 인정되었다. 용맹공 리샤르가 태어났을 때 장검 기욤은 바이킹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어 아들이 태어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난 다음 리샤르를 처음 대면한 장검 기욤은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춘 뒤 신하들에게 자신의 영지를 리샤르에게 상속한다고 선언하였다. 장검 기욤이 살해된 뒤에 스프로타는 부유한 제분업자인 에스페를렝Esperleng과 결혼하여 이브리의 라울Rodulf of Ivry/Raoul, comte d'Ivry를 낳았다. 라울은 용맹공 리샤르와는 이복형제가 된다.
라울Raoul, comte d'Ivry은 선한 리샤르가 어린 시절 동안 섭정으로 후견하였다. 996년 장검 기욤이 살해되자 형수인 군노르와 함께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 공국을 유지하는데 힘썼다.
933년 장검 기욤은 북부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서프랑크의 왕 라울을 인정하였다. 이에 라울은 아브랑슈Avranches와 코탕탱Cotentin을 포함하는 브레통의 지배권을 주었다. 이에 저항하는 브르타뉴 공작과 렌의 백작이 저항하였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브르타뉴 공작은 잉글랜드로 도주하였고, 렌의 백작은 장검 기욤과 화해하였다. 935년 장검 기욤은 위대한 위그의 동의 아래 푸아투의 백작 기욤과 여동생 아델라Adela /Gerloc와 결혼을 약속하였다. 이와 함께 장검 기욤은베르망두아Vermandois의 뤼트가르데Luitgarde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Longueville, Coudres 그리고 Illiers l'Eveque를 가져왔다.
939년 장검 기욤은 플랑드르Flanders를 공격하였다. 이에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프Arnulf와 프랑스 왕 루이 4세가 노르망디를 보복 공격하였다. 아르눌프는 몽트로이-수르-메르Montreuil-sur-Mer 성을 빼앗고 푸아투 백작 Herluin을 추방하였다. 장검 기용은 Herluin과 연합하여 성을 다시 빼앗았다. 하지만 장검 기욤은 아르눌프의 성을 파괴하고 공격한 행위로 파문을 당하였다.
940년 장검기욤은 프랑스의 루이Louis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그 댓가로 아버지 롤로에게 주어진 땅을 되돌려 받았다. 3년 후인 942년 12월 17일 솜Somme의 Picquigny에서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동안 아르눌프Arnulf의 동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루앙의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942년 12월 17일 용맹공 리샤르Richard the Fearless/Sans Peur는 부친인 장검 기욤이 살해되자 10살의 나이로 노르망디 공이 되었다. 이때 프랑스 왕 루이Louis 4세는 리샤르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공국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푸아투 백작을 리샤르의 궁전에 상주하게 하였다. 루이 4세는 노르망디를 분할하여 저지 노르망디를 위그Hugh the Great에게 주고 리샤르를 라옹Lâon에 유폐하였다. 하지만 리샤르는 롤로의 동료이자 신하였던 오스몽 드 생트빌Osmond de Centville과 베르나르 드 셍리Bernard de Senlis, 이보 드 벨렘Ivo de Bellèsme과 데인의 베르나르Bernard the Dane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946년 리샤르는 파리 백 위그Hugh에게 자신을 의탁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런 다음 노르만과 바이킹의 연합군을 형성하여 루앙의 루이 4세를 공격하여 몰아내고 947년 노르망디를 회복하였다. 962년 리샤르의 아성인 루앙을 블로아 백작 테오발트가 공격하였다. 이에 리샤르는 노르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테오발트의 군대를 철저히 격파하였다. 이에 서프랑크의 왕 로타르Lothair가 개입하여 둘 사이의 전쟁을 중지시켰다. 996년 사망할 때까지 리샤르는 공국을 왕국으로 확장하기 보다는 공국의 내실화에 주력하는데 노력하였다.
데인의 베르나르는 덴마크 출신으로 900년대에 롤로를 따라 서 프랑크 서북과 잉글랜드 등을 습격하고 약탈하는데 가담하였다. 911년 롤로가 노르망디 공작에 임명되자 정착하였다. 베르나르는 롤로로부터 퐁토 드메르Pont Audemer와 루므와Roumois의 후작에 임명되었다. 912년에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베르나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롤로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장검 기욤의 치세인 930년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루앙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롤로 사후 장검 기욤이 어려 제대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노르망디 동부지역의 실권을 장악하고 독립적인 바이킹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942년 장검 기욤이 암살당하자 베르나르는 노르망디 공국의 섭정을 지내기도 했다. 945년과 946년에는 푸른 이빨 하랄드Harald Bluetooth가 공격해오자 자신의 공국을 지키기 위해 루이 4세와 위그Hugh the Great의 영지를 침략하기도 했다. 베르나르는 프랑스와 영국의 백작가문인 하코트 가문Harcourts 및 영국 귀족 뷰몬트Beaumonts 가문의 시조이다.
로타르는 루이 4세와 작센의 게르베르가Gerberga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르베르가는 독일의 매잡이 하인리히Henry the Fowler의 딸로 루이 4세와 결혼하기 전에 로렌의 길베르와 결혼하여 자녀를 네 명 두었다. 939년 길베르가 죽자 프랑스 왕 루이와 결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다.
용맹공 리샤르는 프랑크의 위대한 위그Hugh "The Great" of France와 작센의 헤드비히Hedwiga de Sachsen-매잡이 하인리히Henry the Fowler의 딸-사이에서 태어난 엠마Emma와 960년 결혼하였다. 엠마의 부친인 위그는 리샤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준 파리의 위그이다. 이 결혼으로 리샤르는 카페 가문과 연결된다. 하지만 엠마는 자녀를 낳지 못하고 968년 사망하였다. 하지만 용맹공 리샤르는 정부情婦인 군노르Gunnor와 사이에 자식을 여러 명 두었다. 당연히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적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에 용맹공 리샤르는 군노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자식들을 적출嫡出로 인정받게 하였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용맹한 리샤르를 계승하는 선한 리샤르Richard II “the Good”/Le Bon, 에브르Evreux의 백작Count이자 루앙의 대주교Archbishop 로베르Robert, 코르베일Corbeil의 백작Earl 모제르Mauger, 노르망디의 엠마Emma of Normandy, 블로아의 오도Odo II of Blois와 결혼한 모드Maud of Normandy, 브리타니 공Duke of Brittany 조프리와 결혼한 Hawise of Normandy, 파피아Papia of Normandy, 유의 백작 Count of Eu 기욤William을 낳았다.
프랑크의 위대한 위그Hugh "The Great" of France의 아들이 프랑스의 카페 왕조를 개창한 위그 카페Hugh Capet이다.
996년 선한 리샤르Richard 2세“the Good”/Le Bon는 부친인 용맹공 리샤르를 계승하였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처음 5년간은 삼촌인 이브리의 라울이 섭정攝政이 되어 리샤르를 도와주었다. 신심이 깊었던 리샤르는 프랑스 왕 로베르 2세와 군사적 연합을 결성하여 부르군디 공국duchy of Burgundy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이웃인 브리타니와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의 여동생 하위스를 브리타니 공 조프리 1세와 결혼시키고 자신 역시 조프리의 여동생 주디스와 결혼하였다. 이로서 노르망디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은 결혼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1001년 잉글랜드의 왕 준비 안 된 에설레드Æthelred the Unready 2세가 코탕탱Cotentin 반도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처남 매부 지간이지만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선한 리샤르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 사건으로 잉글랜드와 관계가 어색하게 된 리샤르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엠마를 에설레드 왕과 결혼시켰다. 이 결혼은 후일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리샤르 2세의 손자가 되는 사생아 기욤-정복왕 기욤-이 잉글랜드의 왕권을 주장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서 노르망디, 브르타뉴, 잉글랜드는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되었다.
1013년 갈래수염 스베인Sweyn Forkbeard이 잉글랜드를 침입하자 에설레드Æthelred는 엠마에게 두 아들 에드워드-훗날의 고백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와 알프레드를 데리고 친정인 노르망디로 피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에설레드 자신도 얼마 후 노르망디로 피신하였다. 1014년 갈래수염 스베인 죽자 아들인 크누트Knut가 계승하였다. 이때 에설레드의 전처 소생의 장남인 에설스탄Æthelstan은 오래 전부터 후계자로 인정되어 있었다. 노르망디로 피신한 에드워드는 에설스탄보다 후계 서열은 명백하게 뒤에 있었다. 그러나 에설스탄이 1014년 사망하자 엠마는 자신의 아들인 10살의 에드워드가 후계자가 되도록 시도하였다. 엠마는 자신이 에설레드의 두 번째 부인이고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많은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에드워드를 후계자로 만들려 하였다. 당연히 에설레드의 생존해 있는 아들 가운데 철기병 에드문드 Edmund Ironside가 이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에드문드는 아버지인 에설레드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1015년 갈래수염 스베인의 아들인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런던에서 크누트에 대항하여 저항하던 에설레드가 1016년 4월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에드문드 역시 11월에 사망하였다. 이제 크누트가 전 잉글랜드의 주인이 되었다. 당시 여왕인 엠마는 런던에서 크누트에게 저항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엠마는 크누트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들을 노르망디로 보낼 수 있었다. 이 결혼으로 엠마는 자신의 아들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엠마와 크누트의 결혼에서 적법한 상속자인 하르데크누트Hardekut가 태어났다. 1035년 크누트가 사망하자 엠마는 노르망디에서 망명 중인 자신의 두 아들을 이듬해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이들은 이복형제인 하르데크누트에게 의탁하였다. 당시 하르데크누트에 대적한 세력은 크누트가 엠마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토끼발 하랄드Harold Harefoot가 있었다. 그러나 토끼발 하랄드가 1040년 사망하면서 잉글랜드는 잠시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때 하르데크누트는 만약 자신에게 아들이 없다면 다음 왕위를 이복형제인 에드워드에게 줄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에드워드는 하르데크누트가 사망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선한 리샤르의 결혼 정책이 이후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에 어떤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는지는 위와 같다.
갈래수염 스베인Sveinn Tjúguskegg은 잉글랜드와 덴마크, 노르웨이를 합쳐 1013년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제국은 아들인 크누트Knut와 손자인 헤럴드와 하르데크누트Hardeknut로 이어졌지만 1042년 소멸되었다. 갈래수염 스베인의 아버지는 푸른 이빨 하랄드Harald Blåtand이다.
선한 리샤르는 브르타뉴 공 코난의 딸 주디스와 첫 번째 결혼하여 후일 노르망디 공이 되는 리샤르, 부르군디 백Count of Burgundy 레지날Renaud과 결혼한 알리스Alice, 후일 노르망디 공이 되는 로베르, 페캉Fécamp의 수도사가 된 기욤, 플랑드르 백Count of Flanders 보두앵Baldwin과 결혼한 엘레오노르, Fécamp의 수녀가 된 마틸다가 있다. 엥베르뮤Envermeu의 포파Poppa와 두 번째 결혼하여서는 루앙의 대주교가 된 모제르Mauger, 아르퀴Arques 백작 기욤을 낳았다.
1026년 리샤르Richard 3세는 부친 선한 리샤르를 계승하여 노르망디 공이 되었다. 리샤르 3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1020년 경 리샤르는 부친의 명에 따라 살롱의 위그Hugh of Chalon의 공격을 받은 매제인 부르군디Burgundy의 레지날Reginald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다. 그리고 살롱의 위그를 사로잡아 레지날을 구원하였다. 리샤르 2세가 1026년 사망했을 때 리샤르 3세는 장자로서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때 불만을 품은 노르망디 국경 지역의 Hyemes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로베르Robert가 이에 합세하여 형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로베르는 리샤르의 강력한 공격에 쫓겨 사로잡혔고 결국 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리샤르가 동생의 반란을 진압하고 루앙으로 귀환하여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리샤르가 급사하고 말았다. 동생 로베르가 의심을 받았지만 증거는 없었다. 리샤르 3세의 자리는 동생인 로베르가 계승하였다.
살롱의 위그는 살롱의 오통Autun 대성당의 참사회원인 람베르Rambert의 독자獨子로 살롱의 백작이며 오세르Auxerre 주교였다. 부친이 사망한 후 부르군디의 앙리 1세에 의해 999년 오세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부르군디의 레지날은 1016년 선한 리샤르의 딸인 노르망디의 알리스와 결혼하였다. 레지날은 1026년 부친이 사망하면서 부르군디를 물려받았다.
리샤르 3세는 프랑스의 왕 로베르Robert 2세와 아를Arles의 콩스탕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난 아델라Adela와 1027년 결혼하였다. 그러나 리샤르가 1029년 8월 6일 급사하자 과부가 된 아델라는 후에 플랑드르 백 보드앵 5세와 재혼하였다. 리샤르는 정식 결혼에서는 자식이 없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情婦와 사이에서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바이외의 자작Viscount of Bayeux 라눌프Ranulph와 결혼한 알리스, 수도자가 되어 루앙의 생-오앵Saint-Ouen의 대수도원장이 된 니콜라Nicolas가 그들이다.
1027년에 노르망디 공이 된 장엄공 로베르Robert the Magnificent/le Magnifique는 로베르 1세로 알려져 있지만 로베르 2세로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롤로가 세례를 받고 로베르로 개명하였기에 그를 로베르 1세로 칭하면 장엄공 로베르는 로베르 2세가 되기 때문이다. 로베르 2세는 리샤르 2세와 브르타뉴 공 코난Conan의 딸인 주디스Judith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베르는 롤로의 현손玄孫이고 장검 기욤의 증손曾孫이며 용맹공 리샤르의 손자孫子이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정복한 기욤이 그의 아들이다. 선한 리샤르가 죽기 전에 자신의 상속자로 장남인 리샤르 3세를 지명하고 둘째인 로베르에게는 엠스Exmes를 영지로 주었다. 1026년 선한 리샤르가 사망하자 장남인 리샤르3세가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로베르가 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고 로베르는 리샤르에게 충성을 서약해야만 했다. 리샤르 3세가 죽은 후에 공국의 대부분을 물려받은 로베르는 자신이 형에게 대항한 반란의 후유증으로 공국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웃의 바론baron들은 로베르의 치세 동안 공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 하였다. 이 시기에 세력이 약화된 많은 귀족들이 노르망디를 떠나 남부 이탈리아와 다른 지역으로 자신들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 떠났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오뜨빌 가문Hauteville family의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이다. 기스카르란 교활하고 음흉하며 꾀가 많다는 뜻으로 로베르의 별명이다. 오뜨빌의 탕크레드Tancred of Hauteville의 여섯 아들 가운데 하나였던 로베르는 자신의 이복형인 무쇠팔 기욤William Iron Arm과 드로고Drogo의 후광을 통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자신의 왕국으로 삼았다.
로베르는 1035년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다. 그는 순례를 떠나기 전에 서자인 기욤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래서 그가 순례를 마치고 귀환 도중에 병사病死하였을 때 공국公國은 큰 혼란 없이 기욤이 노르망디의 공작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로베르는 정부情婦인 팔레스Falaise의 아를레테Herleva 사이에서 기욤을 낳았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첩으로부터 아델라이드Adelaide를 낳았다. 아델라이드는 팔자가 기구했던지 무려 세 번이나 결혼하였다. 첫 번째는 포아투 백작Enguerrand II, Count of Ponthieu, 두 번째는 렌의 백작Lambert II, Count of Lens, 세 번째는 상파뉴의 오도Odo II of Champagne였다.
서자庶子 기욤William the Bastard은 1027년 혹은 1028년 노르망디의 팔레즈에서 태어났다. 기욤은 장엄공 로베르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서자 기욤이 13살이 되던 해인 1040년 잉글랜드를 다스리던 토끼발 하랄드가 사망하였다. 토끼발 하랄드가 사망함으로서 플랑드르로 추방되었던 엠마가 돌아왔고 잉글랜드의 왕관은 하랄드의 배다른 형제인 하르데크누트에게 돌아갔다. 하르데크누트는 용맹공 리샤르의 딸인 엠마와 크누트가 낳은 아들이었다. 엠마는 서자 기욤에게는 대고모 뻘이었다. 하르데크누트는 1042년 사망하였다. 이에 잉글랜드의 왕관은 엠마와 준비 안 된 에설레드 사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에게 돌아갔다. 에드워드는 서자 기욤과는 숙질叔姪간이 된다.
역사에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로 알려진 그는 알프레드 대왕의 피를 이어받은 웨섹스 가문House of Wessex의 마지막 잉글랜드 왕이었다. 그의 별명처럼 에드워드는 정치보다는 종교에 더 어울리는 왕이었다. 잉글랜드 교회로서는 성인을 한 사람 얻을 수 있었지만 왕국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왕의 결단과 지도력이 필요한 시기에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한 왕으로서 사나운 귀족들을 억누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에드워드 치세에 귀족 가문 가운데 고드윈 가문Godwin family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1042년 왕의 자리에 오른 에드워드는 1016년부터 잉글랜드를 지배해 온 데인인들의 지배를 종식시켰지만 그 자신은 그에 걸맞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결국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왕관은 웨색스 가문이 아니라 고드윈 가문의 해롤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에게 돌아갔다. 이는 노르망디에 있던 서자 기욤에게 하나의 시빗거리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고드윈슨은 자신의 여동생 에디스와 결혼한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위탄회의에서 자신을 왕으로 선출함으로서 잉글랜드의 왕관을 차지하였다. 이에 대해 노르망디의 서자 기욤은 할머니 엠마를 걸고 자신에게도 잉글랜드의 왕관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에게 있어 이 공언은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인 것이었지만 도전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였다.
서자 기욤은 대륙의 여러 곳에서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귀족들을 모집하였다. 당시 귀족들에게 장자상속長子相續이 원칙이었기에 장자 이외의 아들들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런 떨거지 귀족자제들에게 서자 기욤의 외침은 군침이 당기는 것이었다. 사실 서자 기욤도 장엄공 로베르의 선언으로 노르망디 공의 지위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서출의 서러움을 톡톡히 경험하였다. 그래서 서자 기욤은 봉신의 자격으로 소유한 노르망디 공국이 아니라 자신만의 왕국을 가져야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바로 대상이 잉글랜드였다.
1058년 헤레포드의 백작Earl of Hereford이 된 해롤드는 가장 먼저 한 일이 잉글랜드에 퍼져있는 노르만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참회왕 에드워드는 무려 25년간을 노르만의 궁전에서 망명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알게 모르게 잉글랜드 왕실에 노르만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롤드는 웨일즈에 대한 정복전쟁을 시작하여 그루피드 압 르웰린Gruffydd ap Llywelyn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이 결과 웨일즈는 1063년 그루피드가 사망하면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잘 나가던 해롤드는 1064년 퐁띠외Ponthieu에서 배가 난파되어 퐁뛰외 백작 귀Guy에게 체포되어 노르망디 공 서자 기욤에게 보내졌다. 짧은 억류기간 동안 해롤드와 서자 기욤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는 말이 있지만 진실은 분명하지 않다. 당사자인 해롤드는 2년 후에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반쪽의 진실만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웨색스와 캔트의 백작인 고드윈슨과 토르길 스프라칼레그Thorgils Sprakaleg의 딸인 귀타Gytha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토스티그는 1051년 결혼하였다. 결혼의 상대는 플랑드르 백작 보드앵 4세의 딸인 유디스Judith였다. 유디스는 노르망디 공 서자 기욤과 결혼한 보드앵 5세의 이복여동생인 플랑드르의 마틸다Matilda의 고모이다.
1065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왕위 계승에 관한 분명한 언급이 없이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이듬해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하였다. 당시 연대기에 따르면 잠깐 의식을 회복하였던 에드워드가 해롤드에게 자신의 부인과 왕국을 보호해 주도록 하였다고 하지만 그 역시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위탄 회의를 소집하여 그 다음날 해롤드를 왕으로 선출하였다는 사실이다. 1월 5일에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주의 공현축일인 1월 6일에 해롤드가 왕으로 선출되고 당일 날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1월 초순 해롤드의 대관식 소식을 들은 노르망디의 서자 기욤은 잉글랜드 침공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서자 기욤의 계획은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기욤은 퐁뛰외에서 배가 난파되어 자신에게 몸을 의지하던 해롤드가 자신에게 왕국을 주었다고 떠들어 대었다. 이에 호응하여 교회가 기욤을 축복하자 잉글랜드 원정군이 각지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해롤드는 침공에 대비하여 와이트Wight 섬에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거친 날씨로 인해 기욤의 잉글랜드 침공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9월 8일 서자 기욤의 군대가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해롤드는 군대 소집을 해제하고 자신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같은 날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가 해롤드의 동생인 토스티그Tostig Godwinson와 연합하여 잉글랜드의 왕관을 요구하며 침공을 시작하였다. 침공군이 타인Tyne 만 어귀에 상륙하였고 9월 20일 요크York 근처의 풀포드Fulford 전투에서 해롤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5일 후에 스템포드 브릿지Stamford Bridge에서 해롤드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9월 12일 서자 기욤이 자신의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폭풍 때문에 기욤의 군대는 생-발레리-수르-솜Saint-Valery-sur-Somme 근처로 대피하였다. 15일간 출항이 지연되었으나 9월 27일 기욤의 군대가 서색스의 동쪽 해안인 페븐시Pevensey에 도착하였다. 28일 서자 기욤의 군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상륙할 수 있었다. 당시 해롤드는 토스티그의 군대를 격파하고 쉴 틈도 없이 386㎞의 거리를 4일 만에 주파하여 기욤의 군대를 막아섰다. 두 군대는 10월 14일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격돌하였고 최후의 승리자는 기욤이었다. 해롤드는 전투 중에 전사하고 그의 시신은 전리품을 원하는 병사들에 의해 난자亂刺당했다. 여기서 서자 기욤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런던을 공격하여 함락하지 않고 포위하여 잉글랜드가 자신에게 스스로 왕관을 갖다 바치기를 고대하였다. 그리고 갈구하던 잉글랜드의 왕관을 받쳤을 때도 일부러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12월 25일 성탄절 날 서자 기욤은 드디어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대관식을 갖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앞으로 그는 더 이상 서자 기욤이 아니라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으로 불리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이 섬을 대대로 통치하게 될 것이었다.
첫댓글 기옌과 함께 중세 잉글랜드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똘추 존이 1201~14년간 죄다 존엄갓 필리프에게 뜯어먹혔죠ㅋㅋㅋㅋ
형인 리차드가 개판벌였다지만 세수가 존엄갓의 배인데다 조카찬스까지 썻음에도 말아드신 ㅋㅋㅋ
헨리2세 아들이 존엄갓였다면 영불제국 꿈도 아녔을텐데
최후의 승자는 조카님네 후손이쥬
@데미르 사실 리처드는 잘 하고 있었는데 어이없게 빨리 죽었고 동생이 ㄹㅇㅋㅋ
@헨셀 Jung 그래도 강에서 어이없이 익사한 빨간수염보다는 ㅋㅋㅋ
@데미르 존가놈이 좀만 더 오래 살았어도 영불제국이 성립됐을지도요? 존 치세 말엽 왕의 트롤링에 질린 홍차귀족들의 초청으로 루이 왕자가 섬으로 건너가 플랜태저넷 충성파 뚝 깨고 다녔으니요ㅋㅋㅋ
존엄갓 vs 사자심왕이 개인적으론 중세 최고의 꿀잼 시대인데, 외교와 좆간질로 리처드를 궁지로 몰아넣는 필리프와, 그걸 또 무력으로 다 극복해내는 인간흉기..ㅋㅋㅋㅋ
@bamdori 그러고보니 루이 8세도 별명이 사자왕... ㅋㅋ 존엄갓은 헨리2세부터 리차드까지 단련되다보니 유노낫띵따위 ㅋㅋㅋㅋㅋ 그리고 손자때부터 방계가 이전부터 있었지만 씨가 더욱 강려크해진..
@bamdori 그러고보니 성깔 더러운 인겔러(앙주)가 + 노르망디가인 부계와 낭만찾는 모계(엘레아노르의 불행한(?) 삶을 보면 궁정시인을 왜 후원했는지 이해가...)를 보면 제대로 된 후계가 나올리가...
@데미르 나중에 헨리 5세때 가서야 노르망디 되찾고, 성깔아서 지배하는데...
는 장 뷔로의 대포가 처리했다구!!
@데미르 그러고보니 플랜태저넷 애들이 능력에 관계없이 다들 한성깔 했군요ㅋㅋㅋ 헨리 2세, 리처드는 물론, 존가놈도 승질은 꽤나 있었죠ㅋㅋㅋㅋ 베넉번에서 쳐발리고 바게트 왕비에게 감금사육당하다 죽은 에드워드 2세도 성깔 있었고요ㅋㅋㅋㅋ
@bamdori 사실 리처드도 왠만한 ㅈ간질의 달인입니다. 존이 신롬 황제 데려와서 프랑스랑 비빌 뻔 한 부빈 전투의 배경도 리처드가 만든 외교라인이 있어서..
존이 오래 살아도 사실 힘들 겁니다. 루이 패는 건 패는거라도 대륙 넘어가는 건 사실상 물건너간.. 헨리 3세가 아버지의 명을 이어받았으나 실패했듯이..
@헨셀 Jung 근데 부뱅 당시의 상황은 ㅈ간질이라기보단, 카페-호엔슈타우펜 vs 플랜테저넷-벨프 두 대립세력간의 파워게임 성질이 상당히 짙죠.
뭐 어쨌든 그 관계를 성립해 프랑스를 압박할 동맹을 만든 건 리처드의 수완이 맞지만요!
@bamdori 벨프가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좀더 수월했을지도.. 아 [ㅈ]때문에 안되는..
@데미르 존가놈을 빼더라도 존엄갓한테 부뱅에서 대차게 개박살이 난지라... 결국 도로호엔슈타불...
그니깐 옛날에 꼬마 벨프 5세가 마틸데 아줌마랑 으쨔으쨔 해서 영지를 먹었어야.. 는 아줌마 그때 40대였죠? 눙물
@bamdori 그랬다면 황제파는 구엘프로 불렸겠져..
재미있게 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