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지은 뼈대, 숙종 때 완성
후문 대남문, 문수.보현보살이 협시
북한산엔 크고 작은 사찰 100여 곳
봉우리 이름도 불교에서 딴 것 많아
과거엔 영취봉이라 불렸던 염초봉
석가모니가 설법한 영취산서 유래
승려가 지휘해, 승려들이 만들었다.
둘레 12.7km, 내부 면적6.2km2의 거대한 구조물.
한 해 탐방객 수백만 명을 끌어당기는 구심력, 북한산성이다.
그 산성을 이고 있는 북한산을 찾았다.
부처님오신날을 나흘 앞둔 지난 23일의 북한산은 크고 작은 사찰 100여 곳이 내건 연등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왕도 지나갔고, 대통령도 드나든 문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정무닝다.
숙종은 어린 세자였던 영조를 데리고(1712년) , 영조는 다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와 함께 북한산성을 찾았다.(1772년)
박현옥 경기문화재단 선임연구원은 '3대에 걸친 왕들이 북한산성을 찾았는데, 숙종만 정뮨인 대서뮨을 이용했다'며
'영조가 1760년에 북한산성을 찾았을 때는 대성문을, 1772년에는 대남문을 입구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서울 은평구 진관로 산성입구에서 대서문을 지나는 탐방로를 '숙종의 길'로 부른다.
북한산 한해 탐방객 600~700만명
숙종은 승려 성능을 팔도도총섭(승군 초고직)에 임명해 붓한산성을 짓게 했다.
삼국시대부터 뼈대를 갖췄던 산성은 9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남한산성은 승려 각성의 진두지휘로 3년 만에 지어졌으니(1624년), 한강 남북이 두 산성은 승군의 불심과 노역이 갈고 다듬어진
공양이었다.
박 연구원은 '정확히 말하면 성을 쌓는 대가로 공명첩을 받아 노역이였음은 분명했다'며 '승려 외에 군인.도성민이 축성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성능은 '북한지'를 남긴다.
요새 나오는 책 제목으로 설명한다면 '북한산성에 관한 것'이나 '알기 쉬운 북한산성'쯤 되겠다.
성능은 '북한지' 속 지도 '북한도'에 북한산성 정문 양쪽의 봉우리를 대선교(불교 용어로 '존자 뚀는 대덕' '원효(617~686)'와 '의상(625~702, 북한지에는 의상으로 씀)'으로 표기했다,
김순배 한국지명학회 총무이사(충주여고 지리 교사)는 '북한산성 초입의 두 봉우리를 원효원효봉과 의상봉으로 부르게 된 건,
두 대사가 한국 불교의 개조(종파의 원조가 되는 사람)로 통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며 '뷸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나 그 이전부터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 불기 2567년 5월 의 한낮은 따가웠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면 탐방객 670만명 중 한 명, 2021년 기준으로는 736만명 중 한 명이 돼 북한산 대서문을 지났다.
대서문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그의 호 '우남'이 새겨져 있다.
북한산성 승영사찰 13곳 중 하나였던 상운사에서 기거한 인연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1958년 대서문을 찾으면서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너무나 평탄해 숙종의 걱정을 자아낸 길 위로 한 아이가 몇 발 앞으로 뛰어가더니 오른손을 들어 뒤따라오던 엄마와 가위바위보를 한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보를 걸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인지" 연규 스님(전남 여수 항일암 주지)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상에 나밖에 없다.
내가 제일이다'로 잘못 쓸 수 있다'며 '하늘 안에, 땅 위에 모든 것이 존귀하고, 모든 것들은 꺠달은 바대로 만들어진 것이며,
결국 차별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는 세상을 꺠달았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숙종의 길' 중간 선봉사에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는 싯다르타 상이 석가탄신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이 뒤바낀 상도 간혹 있다.
불기는 불멸기원의 준말.
그래서 불기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해(기원전 624년)부터 세는 게 아니라 열반한 해, 기원전 544년부터 세기 떄문에 올해가 2567년이다.
석가모니는 인도 영취산, 혹은 영축산에서 설법했다.
북한산에도 영취봉이 있다.
아니, 있었다.
현재 영취봉은 염초봉으로 부른다.
성능도 '북한지' 속 '북한도'에는 '염초봉'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본문에는 '영취봉'이라고 썼다.
김순배 이사는 '혀냊도 그렇지만, 북한산에는 불교 지명이 많다'며 '하지만 사찰인 (경북 영주) 숙수사 위에 유교를 대표하는
소수서원이 세워졌듯, 조선 시대에는 불교 지명이 유교 지명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영취봉과 염초봉의 관계도 그럴 것 같지만 좀 더 정확한 자료가 있어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숙종의 길 중간 선봉사엔 싯다르타상
염초봉은 '날카롭다' 염과 '가파르다' 초를 쓴다.
염은 청렴, 염치로 두루 쓰이지만 '날카롭다'라는 뜻으로는 생소하다.
공자가 말했다.
'옛날엔 사람에게 세가지 병폐가 있더니 지금은 그것마저 없다...옛날 긍지가 센 사람은 청렴하여 위엄이 있었는데 지금의 긍지가 센 사람은 화를 잘 내고 거세다.
'논어 양화16)'주희는 여기에서 '염'을 이렇게 ㅎ석했다.
'염은 모사리가 뾰죽한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바르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같은 해석을 했다.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염초는 '물리적' 가파름과 날카로움도 뜻하지만 '정신적' 강직함과 올곧음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 영위봉(염초봉) 서쪽 맞은 편에 나한봉이 있다.
나한은 부처의 말씀을 실천해 큰 꺠달음을 얻은 고승과 대덕을일컫는다.
마주 보는 봉우리 사이에는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김 이사는 '나한은 불제자이기에 부처로 상징되는 영취봉을 마주하는 것처럼 '북한지'에 지명이 배치돼 있다'고 밝혔다.
염초봉 밑에는 도교의 '칠성'이 새겨진 바윋 있다.
칠성각.삼신각 등 사찰 속 전각처럼, 불교가 도교.민속신앙 등과 어울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북한산성을 찾은 숙종은 길이 너무 평탄해 성문 하나를 더 짓도록 지시했다.
중성문은 그렇게 태어났다.
성능은 중성문 위, 북한산 13개 승영사찰의 중심인 중흥사에서 30년을 지냈다.
근처 봉성암에 그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가 있다.
중흥사는 태고사와 함께 북한산성 한 가운데 있다.
그런데, 태고는 원증국사 보우(1301~1392)의 법호다.
조계종의 중시조다.
김 이사는 '북한산성 축조와 사찰 배치는 승군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전략적 의미와 함께 역사 공간이자 문화 공간인 산성 위에 불교적 의미를 다믕려던 노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서문이 정문이라면 후문은 어디일까.
대남문이다.
이 성문을 나오면 보토현과 북악산을 거쳐 경북궁으로 이어진다.
문수봉과 보현봉은 대남문을 협시(받들어 모심)하고 있다.
석가모니를 좌우에서 모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는 사자를 타고, 보시를 상징하는 보현은 코끼리를 자고 있다.
이렇게 보현보살-석가모니-문수보살(죄측부터)을 모시는 불전은 대웅전이라고 부른다.
보살이 아니라, 아미타여래.약사여래 같은 부처가 협시를 하면 격을 높여 대웅보전으로 부른다.
태고사에는 대웅보전이 있다
숙종은 후문 대남문이 아니라 대동문을 통해 북한산성을 빠져나가 환궁했다.
지난 23일 기자는 대동문을 지나 용암문을 통해 하산했다.
예불이 끝나는 시간, 도선사의 한 승려가 불전사물인 법고.범종.목어.운판을 순서대로 두드렸다.
땅위의, 땅속의 , 물속의, 하늘의 중생과 짐승.미물이 차례대로 ㄲ어난다.
어둑해진 길, 연등이 켜진다.
불을 켠다는 뜻의 연등이 맞긴 하지만, 연꽃 모양이라 연등으로 브르건 무슨 문제더냐.
내 마음의 불이 켜지면 되는데.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