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역 근처에는 니시 혼간지와 히가시 혼간지가 있습니다.
이 두 절은 전국시대의 세 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명 모두와 관련이 있는 절입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이 원래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당시의 절은 승병까지 조직되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히에이잔의 엔라쿠지(연력사)였죠.
알려진 바로는 귀족들이 재산을 절에 기부하고, 더불어 귀족, 왕족들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다보니 가진 재산을 가지고 들어가기도 하고 그 후 많은 기부도 이루어져 재산이 많아졌고 반목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에 많은 재산이 있으니 그 재산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승병을 조직했고, 그 힘이 강하여 조정에 까지 압력을 넣게되는 일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텐류지(천룡사)가 지어질 당시 절 이름으로 연호를 사용하려 할때 엔라쿠지(연력사)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연호를 절 이름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텐류지라고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일까지 있을 정도 였습니다. 참고로 연호를 절 이름으로 사용하는 절은 엔라쿠지(연력사)와 겐닌지(건인사) 같은 절들이 있습니다. 이런 정도로 힘이 강해지자 오다 노부나가가 연력사를 쳐들어가 절을 불태우고 전몰 시킨 일이 있었죠.
혼간지는 1244년 일본 불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신란의 묘소인 대곡본묘에서 출발한 것으로 1272년 히가시야마(東山)에 창건되어, 후에 사원으로 발전하여 1321년 혼간지가 되었지만 전국시대에는 다이묘에 맞먹는 봉건세력으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불교도들이 봉건제에 반대해 일으키는 봉기가 심각해 졌고, 그 신도들의 요새가 혼간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580년 4월 오다 노부나가는 이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혼간지를 근거지로 4만 명의 농민군과 폭동을 주도하고 있는 겐뇨 일당의 승려와 신도들을 섬멸 하였습니다.
11년 간에 걸친 포위 공격이었다니 당시 혼간지의 세력도 대단 했었던가 봅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혼간지는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현재 자리에 사원 영지를 기진 받고, 지금의 자리로 이전 하였던 겁니다.
160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시대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혼간지 세력의 약화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진하여 지어진 절이라는 것도 유쾌하지 않아 기존 혼간지 동편에 또하나의 절을 만들게 됩니다.
혼간지의 내부 불만이 있는 세력을 떼어내어 그 옆에 히가시 혼간지를 세우므로 인해 분열을 유도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도대로 혼간지는 분열되어 세력이 약화 되었고, 새로 세워진 히가시 혼간지로 인해 원래의 혼간지는 반대로 니시 혼간지라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니시 혼간지입니다. 절의 규모가 대단합니다.
경내에는 정토진종의 개산조로 일본불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신란(親鸞)의 진영을 모신 고에이도(御影堂)와 아미타불이 모셔진 아미타도(阿彌陀堂)가 있는데 이 두 건축을 통로로 이어지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일본의 절을 보면 부처님 말고 이렇게 스님중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의 진영을 모신 법당을 어영당이라 해서 주 법당으로 사용하는 절들이 많습니다.
니시 혼간지도 사실 신란의 진영을 모신 어영당이 아미타당보다 주 법당으로 보입니다.
본당(어영당) 입니다.
어영당(창립자의 전당)의 크기가 어마어마 합니다.
니시 혼간지의 볼거리로는 국보인 모모야마시대의 당문입니다.
위치를 몰라서 안내소에 가서 위치를 물어서 갔습니다.
당문은 국보답게 멋집니다.
천출에 볼품 없었던 외모때문에 열등의식이 많았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열등의식을 크고 화려하게 장식해서 본인의 볼품없는 외모에서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게 하기를 즐겨 했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시대의 건물인 만큼 화려합니다.
오다노부나가의 시대문화를 아즈치문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문화를 모모야마 문화라하는데 묶어서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문화라고도 하는데 특히 모모야마 시대의 건축물들은 아주 화려합니다.
니시 혼간지는 이런 당문이나 비운각 같은 국보들로 인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겁니다.
종루도 여늬절의 단순하고 담백한 종루와는 다르게 화려한 색감이 돋보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시대의 문화를 모모야마 문화라고 하는데 바로 이렇게 화려하게 장식된 디자인이 특징이죠.
교토를 여행하다보니 교토는 대나무 특산지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아라시야마의 텐류지 뒤편 치쿠린의 대나무 밭에서 나는 대나무로 일본 죽도의 90%를 만든다고 할 정도다보니 교토의 특산물임에 틀림 없습니다.
니시 혼간지 어영당 정면 담장쪽에 대나무 공예를 멋지게 해서 세워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나무도 이렇게 해 두니 한폭의 작품처럼 멋진 대나무 공예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히가시 혼간지 입니다.
교토 역에서 걸어가다 보면 들어가는 문이 거대하여 절의 규모상 볼만 하겠다고 생각하던 절이었었는데 니시 혼간지에서 히가시 혼간지로 가는 버스 번호를 물어보니 걸어가면 10분 정도 걸리니 그냥 걸어 가는 편이 좋겠다고 알려줍니다. 히가시 혼간지쪽으로 걸어가는 길 절 밖에는 이렇게 해자라하기에는 좀 적은 수로가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절이라는 곳이 요새 역할을 했던 곳들도 있어 외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작게라도 이런 해자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동대사의 대불전과 비슷한 크기로 목조 건물로는 교토 최대 수준의 크기라니 규모가 워낙 커서 한국의 절들과 비교가 됩니다.
한국에도 이만큼 큰 절 건물이 있나,,,,,,,?
쇼군이나 덴노들의 지원을 받으며 불교가 성장해서인지 메이지 유신때 폐불 훼석으로 절 부지의 90%를 수용당했다는데도 이런 정도의 크기를 유지하는 교토 절들의 규모를 보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신란의 어영을 모셨다는 어영당 안에 들어가 보니 이렇게 다다미가 깔려 있어 한국 절 처럼 정겹습니다.
일본 불교가 이렇게 불상을 법당에 모신것이 아니라 도력 높은 스님의 어영을 모신데에는 처음 불교가 일본에 들어 갈 때 기존 민속신앙속 신들과의 개념 정립상 이론적으로 충돌이 일어났는데 신들의 땅이라는 일본에서 왜 부처님이 태어나지 않았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신들의 땅이라는 일본에는 후생에 사람의 모습으로 부처님이 일본에 태어나 살았다는 개념이 되어 도력 높은 스님을 부처의 환생으로 생각하고, 어영당을 만들어 불상대신 이렇게 도력높은 스님을 불상과 같은 개념으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고야산에 묻혀있는 홍법대사 같은 분도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는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개념인 것입니다.
히가시 혼간지는 1895년에 재건한 절인데 나라(奈良)의 다이부쓰덴(大佛殿) 다음으로 큰 목조건물인 고에이도(御影堂)로 유명합니다.
이보다 관광객에게 유명한 것은 이 절을 지을 당시 거대한 목재를 옮겨야 했는데 당시의 동아줄로는 거대한 목재를 산에서 옮기는 과정에서 끊어져 사고가 많았답니다. 하여 더 질긴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동아줄을 만들어 사용을 하였답니다. 처음에는 절의 신도들만 머리카락 모으기에 참여를 하였지만 점차 전국적으로 머리카락 모으기 운동을 벌여 머리카락으로 만든 동아줄로 목재를 옮겨와 히가시 혼간지를 지었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도하에 지은 절이니 자발적 참여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겠죠?
당시의 그 머리카락 동아줄을 이렇게 유리관에 전시해 두었습니다.
고에이도와 아미다도를 잇는 통로 한켠에 유리관으로 해서 세워 두었습니다.
산에서 거대한 목재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튼튼하지 못한 동아줄로 인해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이런 사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석고 모형으로 만들어 머리카락 동아줄 옆 유리관에 설명처럼 전시를 해 두었습니다.
법당 앞 툇마루에는 이렇게 교토 시민들이 앉아서 휴식도 취할 수 있도록 되어있어 제대로 절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절들은 탑두사원조차도 입장료를 받는 것에 비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니시 혼간지도 그리고 이 히가시 혼간지도 입장료가 없는 절입니다.
한동안 툇마루에 걸터 앉아 충분한 휴식도 취할 겸 명상에도 빠져 볼겸 시간좀 보내고 왔어야 하는데 교토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들만 돌아보려 해도 시간이 빠듯해 지친 몸을 이끌고 또 바삐 발걸음을 떼어 놓아야 했습니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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