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3년 임인(1662) 12월 1일에 부정(副正) 김공(金公)이 별세하여 자모산(慈母山) 아래에 안장되었는데, 우리 선친께서 묘지명을 써 주었다. 그 후 무오년(1678, 숙종4) 겨울에 공주(公州)의 치소 남쪽에 있는 수장산(壽藏山) 을좌(乙坐)의 언덕에 다시 자리를 잡아 이장(移葬)하고, 숙인(淑人) 완산 이씨(完山李氏)와 영월 엄씨(寧越嚴氏)를 모두 그 왼편에 부장(祔葬)하였다. 맏아들 전중공(殿中公)이 이번에 돌을 캐다가 묘갈(墓碣)을 세우고 다시 나에게 명(銘)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부족한 재주로 이를 감당할 수 없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의 휘는 우엄(友淹), 자는 자범(子范)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처음에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5대손 김주원(金周元)이 나라를 양보하고 강릉에 거주하여 그대로 명원군왕(溟源郡王)에 봉해졌으므로 자손들이 드디어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문정공(文貞公) 상기(上琦)와 문성공(文成公) 인존(仁存)의 부자에 이르러 고려 시대의 명신이 되었으며 두 사람을 포함해 삼대(三代)에 걸쳐 육공(六公)이 배출되어 당대에 빛을 발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휘 추(錘)는 판서를 지냈고, 휘 의공(義恭)은 지평을 지냈다. 지금까지도 벼슬길이 끊어지지 않아, 고조 휘 상(湘)은 사마시에 장원하여 참교(參校)의 벼슬을 지냈고, 증조 휘 사희(士熙)는 군수를 지냈으며, 조부 휘 평(枰)은 일찍 별세하였다. 부친 휘 행(行)은 기개가 넘치고 호방하였으나 관직이 시정(寺正)에 그쳤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호는 장포(長浦)이며 선조 때의 명망 있는 인물이다. 모친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판서에 추증된 원룡(元龍)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갑신년(1584, 선조17)에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부친을 여의었고, 조금 자라서는 스스로 분발하여 추포(秋浦) 황 문민공(黃文敏公)에게 학문을 배웠다. 문민공이 광해군의 어두운 시기에 무고를 당해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공이 곧바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세상을 피해 은둔하였다. 인척 가운데 조정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인조 초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내시부 교관을 거쳐 광흥창 주부,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진잠 현감(鎭岑縣監)으로 나갔다. 임기가 끝나자 진위 현령(振威縣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복시 판관, 은진 현감(恩津縣監), 진산 군수(珍山郡守)를 역임하였는데, 재임하는 곳마다 옛 순리(循吏)의 풍모를 보였다. 벼슬에서 돌아온 뒤에는 창강(滄江) 가의 문민사(文敏祠) 아래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노년을 보냈다. 말년에 부정(副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마침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첫째 부인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상익(商益)의 따님으로 병조 정랑 응(凝)의 손녀이다. 현숙한 덕과 착한 행실이 있었으며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부인 숙인 엄씨(嚴氏)는 군수 열(悅)의 따님으로 자식을 보지 못했다.
장남 훤(楦)은 앞에서 말한 전중공으로, 훌륭한 재주를 지니고서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부친을 따라 강호(江湖)에서 지냈다. 둘째 광(桄)은 통덕랑(通德郞)이고, 딸은 통덕랑 박세기(朴世耆)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자식으로 아들 둘에 딸 넷을 두었는데, 아들은 항(杭)과 건(楗)이고 사위는 방환(方渙), 안준(安濬), 이근(李根)이며 막내딸은 첩으로 들어갔다.
장남 전중공은 나의 종조할아버지로 도승지에 추증된 윤전(尹烇)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 홍서(弘瑞)는 생원이고 딸은 통사랑(通仕郞) 박상소(朴尙素)에게 시집갔다. 또 서출로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문서(文瑞), 명서(命瑞), 중서(重瑞)이고, 사위는 윤설(尹揲)과 이기양(李基陽)이다.
둘째 아들 광은 참판에 추증된 이제(李穧)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에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진서(鎭瑞), 항서(桓瑞), 신서(信瑞)이고, 딸은 생원 김담(金澹)과 진사 박재현(朴再炫)에게 시집갔다.
사위 박세기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박태흥(朴泰興)과 박태제(朴泰齊)이다.
측실 소생의 항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하서(夏瑞)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건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은 장서(章瑞)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며, 딸은 이세방(李世芳)에게 시집갔다.
홍서는 재주와 지조를 지니고 있었으나 명이 짧고 자식이 없어 신서의 아들 천석(天錫)을 후사로 삼았다. 진서는 아들 하나, 요석(堯錫)을 두었고, 항서는 아들 둘, 즉 태석(泰錫)과 정석(鼎錫)을 두었다. 박상소는 아들 셋, 즉 박명익(朴明益), 박성익(朴誠益), 박신익(朴信益)을 두었고, 사위는 임매(林邁)이다. 이하 나머지 증손과 현손은 다 기재하지 않으며, 남녀 모두 70여 명이 된다.
공은 지극한 성품이 어릴 때부터 형성되어 정성을 다해 부모를 섬겼다. 다른 사람의 극진한 효성에 대해 들으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으니, 이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어진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학문에 뜻을 세워 훌륭한 스승에게 배웠으며 혼란한 시대를 만나서도 정도(正道)를 지켜 10년 동안 세상을 멀리하며 비굴하게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는 의(義)에 맞게 뜻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노년에 모친상을 당해서 한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선조를 받들고 제사를 모시며 언제나 공경한 마음과 청결함을 유지하였으니, 이는 집안에서 보인 아름다운 행실의 대표적인 것이다. 총명하고 강인한 마음으로 정사(政事)를 잘 보았고 근본적인 면과 지엽적인 면을 잘 파악하여 청렴하고 신중한 자세로 일을 처리하였으니, 이 때문에 치적이 잘 드러났다. 장중하고 엄격하여 거친 말을 하거나 조급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70세가 넘어서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는 엄숙한 위의(威儀)를 보인 것이다. 강직한 자세를 견지하여 남의 말에 좌우되지 않았으며 득실과 영욕에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대처하였으니, 이는 품은 뜻이 원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옛 시대의 풍취를 노래하고 옛 사당을 새로 단장하여 사문(斯文)을 흥기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을 변함없이 유지하였다. 이는 또한 진심으로 도(道)를 믿었기 때문으로 평소 덕행과 학업을 닦는 근본이 되었다.
아, 이상은 모두 공이 실제로 갖춘 덕행으로서 나의 선친이 묘지명에서 이미 기술한 내용이니, 내가 어찌 감히 한마디라도 덧붙이겠는가. 게다가 공이 과장을 매우 싫어하는 유지(遺志)를 내렸던 까닭에 조심하면서 오로지 사실에 벗어난 지나친 말을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또한 어떻게 이를 어길 수 있었겠는가. 삼가 행적의 시말(始末)을 모아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도가 떨어져 / 世道一降
과장과 아첨을 숭상하니 / 夸毗相尙
외물만을 중시할 줄 알 뿐 / 惟知物重
마음 잃은 것 그 누가 부끄러워하랴 / 孰恥實喪
진실한 군자여 / 允矣君子
큰 학자의 학문을 이어받아 / 龍門舊學
타고난 착한 마음을 홀로 보존하고 / 獨保天衷
하나의 맥을 끝까지 지켰도다 / 終守一脈
재주에 비해 벼슬길이 막혔고 / 才通仕枳
덕망에 비해 지위가 낮아서 / 德厚位薄
남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 人方稱屈
자신만은 즐겁게 지냈도다 / 我自爲樂
평온하게 지내면서 / 載其逸休
후손에게 복을 남겼으니 / 以貽後慶
큰아들은 뜻을 이어받았고 / 伯嗣志事
둘째는 자손이 번성하였도다 / 仲蕃子姓
이수를 세워서 / 有矗螭頭
이 산을 누르니 / 鎭此山岡
내 글은 비록 짧지만 / 我文雖短
그 영향 오래가리라 / 流風則長
첫댓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요새 저의 선조이신 감찰공 박여해 선조의 생애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감찰공 선조를 연구하게 된 과정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전문을
게시판에 올린 것입니다.
감찰공의 장인이 운암공 김윤남 선생이신데 6대손 창암공 김우엄
선생의 묘갈명을 명재공께서 찬하셨으며, 묘지명을 미촌공께서
찬하셨습니다.
2024년 5월 15일(수)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