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와 한국경제 ]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패전국들을 모두 점령한 유일한 승전국이자 역사상 가장 막강한 원정 역량을 지닌 국가로 부상했습니다.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세 개의 대륙과 두 개의 대양에서 전쟁을 치른 미국은 서반구와 동반구 사이에 있는 주요 공격 교두보들을 모조리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새로운 로마제국이 탄생할 수도 있었지만 미국은 제국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자국의 영토가 이전의 어떤 제국이 점령했던 땅보다도 풍요롭고 활용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물자를 수탈해 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승전국이 전리품을 차지하는 오랜 국제관계의 전통을 깨고 오히려 미국의 군사력으로 연합국의 경제와 안보를 지켜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대신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소련에 맞서 미국의 편에 서야 한다는 한 가지 조건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미국이 연합국들을 불러 모아 이러한 제안을 한 곳이 뉴햄프셔주에 있는 휴양지 브레튼우즈(Bretton Woods)였습니다. 종전 무렵 미국은 브레튼우즈 협정을 이용해 세계 질서를 구축하고 게임의 규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던 국가들을 모조리 같은 편으로 만듦으로써 국가 간의 경쟁 관계를 협력 관계로 변화시켰습니다. 브레튼우즈 협정에 참여한 국가 간의 군사적 경쟁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각국은 군비 증강보다는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제안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45년만에 브레튼우즈 체제는 소련을 봉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목 졸라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 덕분에 인류는 경제적 성장과 안정이 유지되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별한 시대를 만들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자 브레튼우즈 동맹은 존재 이유를 상실했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강력한 경쟁국이 사라졌는데 미국이 계속해서 동맹국을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러한 상황 변화에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문제는 잠복해 있었지만 1990년대는 거의 모두에게 호시절이었습니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해 주고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치르는 비용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지만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그쯤은 감당할 만해 보였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은 통일되었고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는 날아올랐으며 중국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시대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는 미국이 지정학적 분쟁을 중단시키고 군사력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하에서 세계 각국은 자기가 잘하는 일에 특화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해서 얻은 소득으로 자국 내에서는 획득하기가 어려운 재화와 용역을 전 세계에서 구매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 미국이 구축한 안보와 무역 질서가 낳은 인위적인 결과입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덕분에 그동안 발전을 해 본 적이 없거나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짓밟혀온 국가들도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서 발을 빼는 순간 이 나라들은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국가가 한국과 대만 등인데 이들 국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공급사슬을 갖고 있으며 바닷길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고 상품을 수출하는 국가들입니다. 역설적으로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하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국가는 이 같은 세계 질서가 붕괴하는 순간 가장 큰 고통을 받게 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국내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원자재가 거의 없습니다. 원유와 철광석과 식량 등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이를 가공하여 수천,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해외시장에 수출하여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원자재 시장이나 수출 시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될 때 직면하게 될 난관은 그 어느 국가보다 클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는 자체적인 해군력으로 우리의 공급사슬이나 해상 무역로를 안전하게 지켜낼 역량이 없습니다.
세계 질서의 유지를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했던 후보들은 지난 여덟 번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패했습니다. 앞으로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든 미국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며 미국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권국도, 세계적 공동선의 구현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설 국가도 없습니다.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재의 세계 질서가 우리에게 당연히 주어진 축복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우리 앞에 닥쳐올 냉혹한 현실에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업연구원 명예연구위원, (사)지역산업입지연구원 원장 홍진기 드림
첫댓글 홍진기 연구원 원장의글 잘보았습니다.
많은공부를 하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