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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전부 합쳐도 딱 1승밖에 못했다는 이야기는 과연 사실인가.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 왜냐하면 1승이 아니라 2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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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한 줄은 물론 농담이다. 그러나 '한니발 이외 카르타고 장군들의 전과' 문제 자체는 분명 생각해 볼만 한 것이다. 일단 이 사람들이 교전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사례처럼 보이는 것들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대강의 교전 시점은 파란색, 장소는 빨간색으로 표시하고 군대를 지휘한 카르타고 장군은 폰트를 볼드체로 했다.
기원전 218년(가을?) 스페인. 타라코 근처. 하스드루발 바르카, 흩어져 있던 로마 수병과 선원들을 공격해서 큰 손실을 입힘.(Liv.21.61.1-3, Polyb.3.76.8-10)
기원전 217년(가을?) 북아프리카 해안. 지휘관 불명. 약탈 중이던 Cn.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휘하 로마 함대의 병사와 선원들을 습격하여 큰 손실을 입힘. 1,000명을 쓰러뜨렸다고 함. (Liv.22.31.2-5)
기원전 216년(여름?) 스페인. 바이티스강 하류 지대? 하스드루발 바르카, 타르테시 반란군을 격파.(Liv.23.26.4-27.8)
기원전 215년(~여름) 이탈리아, 브루티움. 히밀코, 페텔리아 점령.(Liv.23.30.1 이 페텔리아는 11개월간 포위공격을 받았음. cf>Polyb.7.1.3)
기원전 215년(여름) 이탈리아, 브루티움. 히밀코, 콘센티아 점령.(Liv.23.30.5. 문맥상 이 작전의 지휘관도 페텔리아에 이어 히밀코.)
기원전 214년(~여름) 이탈리아. 루카니아(?) 한노, Ti.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보낸 로마군 약탈 부대를 공격. 큰 손실을 입힘.(Liv.24.20.1-3. 리비우스에 따르면 해당 로마 부대는 루카니아에서 일으킨 코호르스들. 지휘관은 praefectus socium[공화정기 로마군에서 동맹 부대를 지휘하던 장교]. 또한 한노는 그 자신이 1차 베네벤툼 전투에서 당한 것에 비해 과히 적지 않은 손해를 적에게 주었다고 한다. Liv.24.15.2의 정보가 보여주는 한노 군대의 1차 베네벤툼 피해는 16,000명에 육박하므로[18,200-2,000] 의문스러운 부분. 약탈 부대가 그 정도 규모였다고 보기 어렵다. 한노의 성공이 과장되었는가? 반대로, 이것은 1차 베네벤툼의 로마군 전과가 사실 크게 부풀려졌음을 시사하는 단서일 수 있다.)
기원전 214년? 스페인 어딘가. 하스드루발 바르카, 스페인 반란군을 격파.(Liv.24.41.1)
기원전 214년?213년? 북아프리카 어딘가. 하스드루발 바르카(?), 쉬팍스의 마사이쉴리 군대를 격파.(Appian:Hisp.15.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쉬팍스 제압을 위해 아프리카로 불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Liv.24.49.4-5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마시니사의 마쉴리 군대가 카르타고군[지휘관 불상]과 합세해서 쉬팍스를 이겼고 30,000명을 쓰러뜨린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기원전 213년(여름?) 이탈리아. 브루티움? 루카니아? 한노, T. 폼포니우스 베이엔타누스의 부대 격파. 큰 손실 입힘.(Liv.25.1.1-4. 베이엔타누스의 지위는 praefectus socium. 여기에서는 베이엔타누스의 부대가 브루티움에서 약탈을 했다는 이야기만 나오지만, Liv.25.3.9에서는 한노에게 격파된 것이 루카니아에서 약탈하던 도중이었다고 되어 있음.)
기원전 212년(여름?) 이탈리아. 브루티움. 한노(보병 지휘)와 마고(기병 지휘), M. 아티니우스의 로마군 투리이 수비대를 격파.(Liv.25.15.8-17)
기원전 211년(~여름) 스페인. 카스툴로 인근?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고, P.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로마군을 격파.(Liv.25.32.1-34.14. 일레르게테스 군장 안도발레스도 카르타고 편으로 참가.)
기원전 211년(~여름) 스페인. 일로르키 인근?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고. Cn.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로마군을 격파.(Liv.25.32.1-33.9, 35.1-36.16)
기원전 208년(~여름) 이탈리아. 브루티움. 마고, 로크리를 포위한 로마군(L. 킨키우스 알리멘투스 지휘)을 공격하여 공성을 무산시킴.(Liv.27.28.13-17. 한니발이 보낸 누미디아 기병대도 참가.)
기원전 205년(?) 이탈리아. 리구리아. 마고 바르카, 게누아 점령.(Liv.29.5.2, 30.1.10. 마고는 기원전 205년에 리구리아에 옴. 어떤 산지 주민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Liv.28.46.9. 게누아는 기원전 203년에 이미 파괴된 상태로, 어째서인지 Sp. 루크레티우스가 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볼 때 마고는 도시를 파괴한 후 어느 시점에 물러난 것 같다.)
기원전 204년(?) 이탈리아. 리구리아. 마고 바르카, Cn.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로마군을 격파.(Frontin:Str.3.6.5. 마고는 기원전 203년 로마군[P. 퀸틸리우스 바루스, M.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지휘]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얼마후 카르타고로 귀환하다가 사망했다. Cn. 피소 격파는 필시 이 전투 이전일 것이다. Cn. 피소는 이 연간 로마 정무관 명단에 없는 사람이다. 천부장이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추측 이상은 될 수 없다.)
기원전 203년(여름?) 북아프리카. 우티카. 하밀카르(? Appian:Lib.24)의 함대, 우티카 공성중인 로마 함대를 공격. 수송선 60척을 빼앗았다고 함.(Liv.30.9.6-10.21. 리비우스는 카르타고 지휘관의 이름을 전하지 않음. 아피아노스의 글에는 나오지만, 여기에는 로마 함대가 승리한 것 처럼 되어 있어 사료적 신빙성이 의문스럽다.)
어쩐지 더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으니 이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이걸 가지고서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자.
1. 전쟁중 카르타고측이 일시 확보했던 지역은 상당히 넓었다. 하지만 페텔리아처럼 전투 끝에 카르타고군이 접수한 것으로 나오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 중에는 한니발 이외 장군들의 알려지지 않은 승리가 들어있었을 수도 있다.
2. 기원전 215년 로크리 이반의 계기가 된 하밀카르의 기병 작전(Liv.24.1.2-12)은 위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때 하밀카르 부대가 나포한 것은 전투원이 아니라 물자 수집조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역시나 별다른 저항 능력은 없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전투원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기원전 218년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사례 등은 목록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물자 수집조 사이에 경비원 정도는 같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대 사회에서 전투원과 비전투원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 분명한지도 의문이긴 하다.
3. 기원전 203년 우티카 앞 바다에서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 수송선을 60척 가량 탈취했다고 한다. 그것은 공적이라고 보는데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해상 교전을 카르타고가 '승리' 한 전투로 분류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 우티카 해전은 대평원 전투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고, 당시 카르타고의 상황은 상당히 나빠져 있었다. 함대는 당연히 이런 국면을 타개하고자 출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로마군의 우티카 공성을 해제시키려는 목표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cf>Polyb.14.9.7)
그런데 결과적으로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군의 전함을 격파하지 못했다. 수송선이라면 다수 빼앗았지만, 이로 인해 아프리카 방면 로마군의 보급이 차단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아마 수송선이 원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시에는 400척. cf>Liv.29.26.3) 우티카 공성도 해제되지 않았다. 따라서, 생각하기에 따라 기원전 203년 우티카 앞바다의 해전은 카르타고의 전략적 목표를 좌절시킨 로마측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나 자신은 이 해전을 카르타고의 승리로 분류하는데 그다지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여기엔 아무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 나는 소인배라, 60척의 배가 너무 탐스럽게 보인다. 그저 그것 때문이다.
4. 아닌게 아니라, 집정관급이나 법무관급이 지휘하는 로마 정규 군대의 주력 부대를 상대로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이긴 일은 아주 드물다.(본대와 분리된 약탈 부대나 도시 주둔군을 이긴 사례는 보인다.) 기원전 211년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을 제외하면 그러한 사례는 정말로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5. 기원전 212년 투리이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기록상 카르타고군은 보병으로 로마군을 적절한 장소까지 유인한 다음, 지형을 이용해서 미리 감추어둔 기병으로 들이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 묘사대로라면 카르타고 장군 '마고'와 '한노'는 현장 상황에 맞으면서도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꼭 이 시대 장군으로서 특출난 능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실력을 보여줄만한 기회를 어쩌다가 잡은 것 뿐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할 만한 증거는 더욱 없지만.
6. 투리이의 승장 '마고'와 '한노'는 대체 누구인가? 카르타고에는 동명이인이 너무 많다. 이것은 카르타고 역사를 살펴보는데 있어 아주 뚜렷한 문제점이다. 아마도 동시대 카르타고인들은 동명이인을 구별하기 위해 별칭이나 '누구의 아들 누구' 라는 식의 정보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은 기록에는 이런 것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2차 포에니 전쟁중 카르타고군 지휘부의 구성은 대단히 알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먼저 '마고'부터 생각해 보자. 2차 포에니 전쟁중 활약한 '마고'로서 제일 신상이 뚜렷한 사람은 아마 한니발의 동생 '마고'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마고'는 기원전 216년까지는 형과 원정을 함께 했으나 이해 가을 무렵 귀국한 다음, 기원전 215년부터는 스페인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 발레아레스를 거쳐, 다음해 리구리아로 갔다.(목록에는 구별을 위해 '마고 바르카'로 표시되었다. '바르카'는 성이 아니기에, 썩 좋은 명칭은 아니다) 따라서 기원전 215년 이래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견되는 '마고'일 수는 없다.
그나마 그 다음 정도로 신상이 알려진 '마고'로, 한니발의 친구이며 브루티움에서 군대를 지휘한 '삼니움인[별칭] 마고'라는 사람이 있었다.(Polyb.9.25.1) 이 '삼니움인 마고' 라면 투리이의 승장 '마고'나 기원전 208년에 로크리를 방어해낸 '마고'와 동일 인물일 수 있다. 마침 활동 지역도 전부 브루티움이다.
확정할만한 단서는 없지만, '삼니움의 마고'가 곧 투리이의 승장 '마고'이고 동시에 로크리의 '마고' 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주 상황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다고 해서 그게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노'는 어떤가? 기원전 215년의 기록에는 카르타고로부터 도착한 증원병력을 인수해서 한니발과 함께 2차 놀라 공방에 참가했으며 그 후에는 브루티움에서 작전을 수행한 '한노'가 등장한다.(Liv.41.12, 43.6, 46.8, 24.1.1-3.16) 이것을 볼 때 이 '한노'는 아마도 그 시점 브루티움에서 활동하던 카르타고 장군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의 로마 야전군 하나와 비슷한 정도 병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1차 베네벤툼 전투의 '한노'(즉 같은해 루카니아[?]에서 승리한 한노)도 이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이탈리아 방면 카르타고군 내에는 한니발의 주력군과 별도로 활동하다가 필요하면 합세하기도 하는 '제 2군' 같은 성격을 지닌 군대가 있었고, 바로 그 사령관이 이 '한노'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 기원전 212년의 2차 베네벤툼 전투(Liv.25.13.3-14.14)에서 패한 '한노'도 아마 같은 사람일 것이다. 이 '한노'의 역할은 농성을 대비하여 카푸아에 식량을 보급하는 것이었다. 로마 집정관군의 방해가 자연스럽게 예상되었을 상황이므로, 작은 규모의 파견대가 이런 임무를 맡았다고 보기 어렵다.(다소 못 미덥지만, 리비우스에 의하면 2차 베네벤툼에서 한노는 17,000명을 잃었다. 역시 원래 군대 규모가 제법 컸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투리이의 '한노'는 위에서 상정한 '2군 사령관 한노'와는 달리, 보유했던 병력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투리이에 주둔했던 로마 수비 대장은 '한노'의 보병 부대를 보고서, 싸우러 나왔다. 충분히 이길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니발에 다음가는 '2군 사령관 한노'와, 투리이의 승장 '한노'는 서로 다른 사람 아니었을까?
- 이렇게 무언가 길게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것도 증명할 수 없다. 그저 2차 포에니 전쟁사에서 수도 없이 많은,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의 하나일 따름이다. '2군 사령관 한노'가 예하 부대의 일부만 사용해서 투리이 공략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2차 베네벤툼에서 지는 바람에 병력이 많이 줄어들어버린 결과가 바로 투리이 공략에서 보여준 모습이라고 해도 딱히 문제될 일은 없는 것이다...
7. 2차 포에니 전쟁을 비롯한 헬레니즘 시대 중기의 사료 가운데 보통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인정받는 것은 폴리비오스의 책이다. (물론 폴리비오스의 글은 모두 옳다는 생각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대강 기원전 216년 여름 이후를 다룬 부분은 거의 실전되고 말았다.
위 목록에 포함시킨 사례들도 대부분 현전하는 폴리비오스의 글에는 나오지 않는다. 가장 믿음직한 사료에 의지할 수 없다는 점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설마 후대의 작가들이 카르타고의 승리를 조작해 내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정황 논리를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역사 기록은 꼭 조작에 의해서만 오염되지는 않는다. 오류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 일이 착각때문에 혼입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또, 사건이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채로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조금 괴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시대 기록에서는 로마군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과장되게 쓰여있는 경우도 등장한다. 예로, 패배 사례 : Plut:Pyrr.17.4, 승리 사례 : Liv.27.49.7) 어쩌면 후세의 누군가가 드라마틱하게 전개 과정을 부풀려 적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불안에 떨지 않기 위해 非 폴리비오스적 사료에 나오는 모든 사건을 없던 일인셈 쳐버리면 그것은 그것대로 모종의 괴론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 자체는 분명하다.
8. 위 7과 관련이 있는 사항이다. 기원전 217년 북아프리카에서의 사건은 진실인가?
기원전 217년의 북아프리카라면, 폴리비오스의 현전 완본이 다루는 범위에 포함된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폴리비오스의 글 속에는 Cn. 게미누스의 로마 함대가 케르키나와 코쉬라 섬에 들른 일만 나온다.(Polyb.3.96.12-13) 아프리카 레이드가 폴리비오스가 준 정보와 특별히 모순되지는 않으므로, 크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단순히 폴리비오스가 참고한 자료에는 나오지 않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생략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렇다 해도 목록의 모든 사건들 중에서, 존재 그 자체가 가장 의심스러운 것을 굳이 뽑으라면 단연 이 기원전 217년 북아프리카에서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아 오랜만이다. 한니발 이야기 ㅋㅋ
하이요.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