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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가 장악하고 있던 시리아의 카데시 시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4개 사단과 예비병력을 이끌고 시리아를 침략했다.
무와탈리스는 자신의 가신국들 사이에서 대규모 동맹군을 모은 후 군대를
도시 둔덕 뒤쪽에 숨기고 훨씬 북쪽의 알레포에 자신이 있다는 허위정보를 흘렸다.
속임수에 빠진 람세스는 서둘러 병력을 카데시 쪽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의 부대는 오론테스 계곡 도로를 따라 줄지어 진군하게 되었다.
왕은 제1사단과 함께 저녁 무렵 카데시에 도착해서 막사를 세웠다.
사로잡힌 2명의 히타이트 정찰병이 그들의 전술을 자백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히타이트인들이 걸어서 강을 건너와
제2사단을 패주시킨 뒤 이집트 막사를 습격했다.
람세스는 히타이트인들을 배후에서 공격한 예비병력 덕분에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상당한 병력손실을 입은 이집트인들은 히타이트인들을 강으로 몰아넣고 전장을 다시 확보했다.
다음날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전투를 치른 뒤 람세스는 지친 자신의 부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뒤 히타이트인들은 다마스쿠스 남쪽지역으로 진군하여 재기한 이집트 부대의 시리아 진입을 저지했다.
람세스는 많은 사원들에다 이집트 관점에서 편파적으로 이 전투사건을 기록했다.
그러나 보가즈코이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 히타이트측의 전투기록이 밝혀짐으로써 이 전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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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전투에 대해 설명한다.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 치세에는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히타이트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마침내 기원전 1274년 람세스 2세는 카데시 전투에 직접 출정하여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와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는 카데시 전투에서 거짓정보에 속은 결과, 주력 군단이 괴멸당할 정도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달라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히타이트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 못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양쪽은 서로 상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던 중 람세스 2세의 재위 21년째인 기원전 1269년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이라 평가받는다. 또한 신전에 기록되어 있는 카데시 전투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승리선전은 이집트군의 군사제도 개혁을 방해했고 히타이트 역시 이 전쟁이후로 급격한 세력 약화로 인해 히타이트는 기원전 12세기에 멸망하면서 아나톨리아 지방에는 약 1000년동안 소국들이 난립했으며 이집트 역시 다음 왕조인 이집트 제20왕조에서 재앙의 불씨로 작용하게 되어 이집트 제21왕조부터 이집트가 피정복자로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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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세계의 이집트와 히타이트
고대이집트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은 누구일까?
아마도 19왕조 3대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일것이다
그가 왕의로 있던 시절
그의왕국은 최전성기를 달리고 오리엔트 최강이라고 불린만했다.
인류 최초의 철기를 사용한 민족 히타이트(배달국 치우천황 사절!)
지금 히타이트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고
그들이 세계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민족이다.
19세기 중반까지 히타이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국가였다.
히타이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8년에서 1892년에 걸쳐서 독일의 고고학자 루우샨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이
터어키의 동남단 진지르리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발굴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핫투사스라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다. 핫투사스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이 해독되고서야 비로소 히타이트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에 현 터키 지역을 통일한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의 수도를 키질강 만곡부의 중심 지점으로 옮기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핫투사스(Hattusas)라고 명명(命名)했다.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을 핫티 왕국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핫티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지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히타이트 왕국이라고 부른다.
히타이트는 점차로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530년경에는
무르실리시 1세가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진하여
함무라비 왕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실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자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 통치를 단념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왕은 암살된다.
그 후 1세기 반 동안 침체해 있던 히타이트는
기원전 15세기 후반부터 1세기 동안
인접 지역의 강국 미탄니와 격렬한 전투를 계속한다.
히타이트의 동쪽에 위치한 미탄니가 가장 번성할 때는 미탄니 군이
히타이트의 영토 내에 깊숙이 침입하여 간신히 수도 주변만 부지할 때도 있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슛필룰리우마시 1세로 그는 수도에 거대한 성을 쌓아
본거지를 튼튼히 하고 후방 지역의 여러 소국과 동맹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배제한 다음 미탄니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주효하여 미탄니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그곳에
친(親) 히타이트 정권을 수립하여 동부의 방위를 철저히 하였다.
이때 히타이트와 맞설 수 있는 국가는 남부의 이집트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세력권은 가나안까지 미치고 있었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정복하자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국경에 접하게 되었고
두 대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람세스 2세는
통치 초기에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로부터
남쪽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그를 추후에 이름이 붙는 ‘건축의 대왕’으로만 놔두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히타이트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라도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이집트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국경과 마주치고 강력한 제국 히타이트와 전쟁의 대 서사시이자 기록으로 남겨진 전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카데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재위 5년 여름에 피람세스(세티 1세가 델타 동부에 세운 도시)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칼은 아시아에서 이집트로 전파된것의로 파라오의 상징인 철퇴는 칼로 바뀌어졌다..
단검 역시 중요한 무기중에 하나였다
육탄전을 사용하던 시대에 칼은 아주 효과적인 무기엿다.
도끼의 중요성은 칼이 전파되면서 약해?봐嗤? 강력한 무기중 하나였다...
리비아와누비아인 포로들과 람세스2세
아시아에서 전차가 2명의 창병과 한명의 기수로 이루어진대 반해
이집트에선는 그와달리 하나의 부대로 이동했다
전차는 50개의 부대로 이루어져있었다
이들 누비아인은 이집트에서 흔히 볼수있는 부대였다...
투트모세3세의 죽음이후 이집트의 군사력은 아람인들과 히타이트인들의 공격과
내부의 분쟁의로 약해져있었다.
Bc1292년에 람세스2세가 파라오가 되었고 그는 예전 시리아의 이집트 영토를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카데시 전투 기적과도 같은 전투
이집트군 아몬.라,프타,세트 4개사단 약2만명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누어짐......
히타이트군 약 3만5천명
람세스는 군대를 넷의로 나누고 선수에선 아몬의 선봉의로 오론테스 강을 건넜다.
카데시에서 남의로10km떨어진 삽투나에서 북의로 행군 하였다.
이때 2명의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의며
이들은 히타이트군이 북쪽에 있는 알레포에 있다고 정보를 전했다
물론 이 2명의 베두윈인은 히타이트인들 의 첩자였다.
물론 람세스는 속앗의며 전투준비를 하지 않고 카데시로 가고잇엇다
그러나 히타이트군은 카데시북쪽에 숨어있었다...카데시는 그들이 숨어있기에 좋은장소였다
람세스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하고 북쪽의로 가자 히타이트군은 오론테스강을
몰레 건넌다음 남쪽의로 이동했다...그들은 남세스를 악박함의로서 작전을 성공했다
람세스는 고립되었의나.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히타이트군 스파이2명이 생포되면서
진실을 알았고 자신의 처지를 께달았다..이들은 진짜 였다...
(위) 이집트군의 아몬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했다
히타이트군은 오론테스강을 몰레 건너 동남쪽에서
그와 그사단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위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 총병력17000명이라는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라 사단을 급습하였다.
라 사단은 께졌의며 일부는 아몬 사단에 잇는 파라오의진지 까지 도망쳤다...
람세스의 아몬 사단마져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뚤릴 위기에 처했다.
람세스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은 이부분에서 무슨 일이 생긴줄 알것이다...ㅋㅋㅋ
약17000명의 히타이트군은 맹렬하게 공격했의며 람세스는 사로 잡힐 위기까지 놓였다...
하지만 람세스는 중앙진지의 히타이트군을 저지하는건 힘들다고 파악하고
강의 동쪽으로 이동했의며 이곳에 자신의 전차를 집중시켰다.
히타이트군은 이집트군 진지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기적과도 같은일이 벌어진다!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파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한 것이였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로 다른지방의 경계근무를 서던중이였다.
이들의 도착과 함께 동쪽강에서 공격을해 진지에서 히타이트군을 몰아낼수있었다.
이집트군의 전차는 맹활약을 하여고 투창의로 무장한 히트이트군 전차에 우세를보였다.
히타이트군을 남쪽의로 몰아냇의며 프타사단이 도착하고있었다.
날이 저물고 잇었의므로 히타이트군은 카데시로 퇴각하였다.
여하튼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가 있다.
우선 람세스 2세는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을 건조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 즉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멜, 라메세움 같은 여러 대신전과
누비아에 있는 두 개의 성소,
즉 아부심멜 대신전과 데르 대신전의 벽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이 벽화는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람세스의 공적과 전사들의 전투 장면으로 활기가 넘치는 구성은
고대의 상투적인 전쟁화와 비교해 볼 때 혁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부의 부조 벽화는 전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고,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 장군의 기록과 같다.
역시 고대에도 선전이 중요한듯
그러나 사실 카데시는 이집트가 승리한것이 아니다 히타이트의 우세속에 무승부이다...
아니 정확이 말하자면 람세스의 패베이다
그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시리아의 중부와 북부를 히타이트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승리했다면
당시 역사상 최대의 전투 현장을 히타이트에게 내어주었을 리가 없다.
또한 람세스 2세가 이집트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간 전리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전리품도 주로 적의 시체에서 걷어낸 무기와 말 따위가 전부로,
이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람세스 2세가 곧바로 후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투 장비를 보아도 보면 히타이트가 이집트보다 월등하였다.
히타이트는 당시 철로 된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는 이와 반대로 청동제의 무기를 사용했다.
히타이트의 하튜샤 제철소에서는 상질의 철제 무기, 갑옷, 철제 기구 등을 생산했다.
철제 무기가 청동제 무기를 가진 이집트군을 괴롭혔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다.
특히 히타이트의 가장 큰 무기로 전차는
일반적으로 마부 1명, 사수 1명, 전투병 1명이 타고 전광석화와 같이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집트군은 한 전차에 두 사람씩 탔다.
대부분이 장교인 전차 주인 한 사람과 마부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시 히타이트는 3만 여명의 상시군이 있었다.
이와 같이 카데시 전투의 진상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기록에 걸 맞는 히타이트의 기록 역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레된 조약
1906년에 베르린 대학과 콘스탄티노플의 오토만 박물관 공동 발굴팀은
터키의 보가즈코이(Bogazk?y)에서 히타이트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발굴에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로 적힌 판을 발굴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빈클러 판(tablet Winckler)이다.
이 판은 기원전 1270년,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핫투시리 3세(Hattushili Ⅲ)가 맺은 평화협정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협정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육로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3천 년 이상이나 경과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된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협정이 맺어지게 된 원인은 물론 카데시 전투 때문이다.
카데시 전투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두 나라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
놀랍게도 이 협정의 조문은 현대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협정의 이름은 ‘위대한 왕, 이집트 국왕이며 용자인 람세스와 히타이트 국의 위대한 왕 핫투시리 사이에, 좋은 평화와 위대한 왕자에 적합한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조약’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히타이트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핫투시리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힛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 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은으로 된 탁자에 기록하며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조약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아 그 나라와 신하들이 멸망하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라고 적혀 있다.
이후 양국은 자신들의 조약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협정의 방법으로
히타이트의 공주가 이집트로 출가하여 람세스 2세와 결혼했다.
또한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와 히타이트의 왕비인 푸두케파도 소식을 교환했고
서로 교환 방문도 했다.
그후에 히타이트는 아시리아에 멸망하고 이집트도 약해집니다..
그후 페르시아의 통일제국이 나타나기 전까지 오리엔트는 전쟁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