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판자집에서 무등산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서석교회 지나 경전선 철로가 뻗어서 약간 오르막이 되고 철로를 넘으면 광주에서는 꽤 알려진 도내기 시장이다. 왜 도내기 시장이냐 하면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냥 사람들이 도내기 시장이라고 불렀으니까. 도내기 샘은 깊게 판 샘이고 도내기 홈은 창문의 홈을 깊이 판 것이다. 깊은 샘이 있었나? 모르겠다. 아시는 분 답좀 해 주셔유.
어머니는 우리들 신발이 다 닳아지면 귀한 돈을 손수건에 몇 번이고 싸고 또 싸서 웅크려지고 신발을 사기 위해 아들들을 대동하고 도내기 시장으로 향하였다. 만나는 장사치들마다 안부하기 바쁘다.
“첫째놈이유? 엄청 컷네. 좋겠수.”
“둘째놈은 영판 공부 잘한다고 소문났데.”
“셋째놈은 속 깨나 썩힌 담시로.”
“넷째놈 인자 학교 갈 채비 해야 쓰겄네.”
아예 점호를 취하는 시장 상인들에게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기 위해 물건을 떼작떼작 이리저리 고르며 속내를 숨겼지만 그래도 ‘자랑스런 내 아들들 만지지 마시오, 보기만 하시요’를 속으로 되뇌이면 쾌재를 불렀던 상 싶다.
어머니는 운동화를 사라고 하는데, 군화가 마음에 든 까까머리 맏이는 한번만 신어보겠다고 말하고 그만 구석에 빼초롬이 고개를 내민 탄탄한 신발을 신고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공산품이 턱없이 부족하던 그 때 그 시절, 군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이나 군화가 가장 좋은 멋쟁이용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군복이나 군화. 텐트가 하나 둘씩 집안에 들어오기도 한다. 청바지도 이때부터 태동한 것이다.
어머니는 매일 이 도내기 시장에서 우리의 밥상을 마련했지만 제사나 집안 대소사가 오면 멀리 남광주 시장이나 말바우 시장으로 새벽 일찍 나가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혼자 그 먼 길을 다니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나중에 버스가 생기고 나서는 좀 덜하셨겠지만 걸어서 시장 가는 그때는 물건 사가지고 오실때가 엄청 힘드셨을거라 지금 생각하면 다덜 불효 자식들이었다. 자식덜 네놈이 그걸 모르고 맨날 투정만 부렸으니까...
나지막한 판자집들이 이어져 있는 골목, 골목을 향해 열려있는 대문, 대문으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친구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60년대 광주의 모습이다. 넓은 장독대와 절구통은 그때의 생활필수품들이었다. 김치 담그기에는 조금 일을 덜어 드린것 같다. 절구통에 밥을 으깨고 절구질하는 것을 우리들이 순번 정해 도와드렸다.
4 19가 나던 해 나는 어머니께서 긴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오셔서 이불을 모두 내간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무슨 일인줄 몰라 방문을 빼초롬히 열고 내다보니 어머니는 20여개 되는 장독들을 부지런히 이불로 덮고 계셨다. 이마에는 방울방울 땀방울이 맺혀... 그러나 절구통은 왠일인지 덮지 않으셨다. 왜 그런지 그땐 이유를 몰랐다.
잠시 후 공고 2층 교실과 강당에서는 길거리로 돌들이 쏟아져 내리고 어머니가 덮어준 장독의 이불 위로도 우수수 달려 들었다. 4 19가 일어나자 공고생들은 학교에서 반항하기 시작했고 학교 주위를 경찰이 에워 싸자 돌멩이를 거리를 향해 쏟아 부었는데 우리집 장독대까지 월담해 날라든 겄이었다.
내가 4.19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가기 바로 전 일이지만 이렇게 장독대와 이불로 세상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 그 때에 우리 동네 코찔찔이 동무들과 장난을 치며 동네 한바퀴 길거리를 순찰하고 왔더니 너무 살벌하였다. 공고 정문에는 붉은 글씨로 물러나라고 앙칼진 글씨가 무서웠지만 철부지 어린 것들은 그저 좋아서 팔짝팔짝 토끼같이 뛰어서 집으로 돌아 오면 어머니의 호통이 추상같았다.
“밖에 나다니지 말고 조용히 집에 쳐박혀 있거라. 총도 쏘고 그랑께 나가지 말란 말여. 장독위에 돌들 봐라. 고거 맞으면 너희들도 죽는다. 놀다가 맞는 돌멩이야 된장 바르면 낮지만 저렇게 힘주어 싸우는 와중에 맞으면 골로 강께...”
내가 아직 초딩 전이라 광주광역시에서 써놓은 광주 학생들의 4 19 역사를 훔쳐보니 광주에서도 3·15 선거 당일 민주당원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튿날에는 광주공고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지역에서는 최초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마산의 학생시위에 호응한 광주고 학생들이 궐기대회를 개최하려 준비했다.
4월 19일부터 광주고를 비롯한 고교생들의 규탄시위가 본격화되었다. 경찰에 굴하지 않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부정선거 다시하라' . '구속학생 석방하라' . '학원에 자유를 달라' . '광주학생 살아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충장로와 금남로를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온몸으로 저항했다.
19일 밤, 일부 시위대는 자유당 도당사무소와 학동파출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물리적인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욱이 나이어린 중학생들도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밤거리에는 시민들까지 합세한 약 1만명의 시위대가 '폭력경찰 때려 죽여라' . '민주역적의 소굴 경찰서를 습격하자' 등의 구호와 함께 경찰서를 공격했다. 경찰은 최루탄과 위협사격을 가하며 시위대의 해산에 진력했다. 시위대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경찰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광주지역 4월혁명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고, 71명이 크고작은 부상을 당했다.
광주학생운동 4 19혁명 5 18민주화운동. 훗날 전라도 사나이의 지역 삶의 화두다.
1960년 4.19 의거 당시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모습으로 교문 앞에서 교사와 경찰의 제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