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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 탓이다. 이 동네에 와서 쓴 소주를 떠올린 건. 퀴퀴하고 정답고 눅눅하고 축축한 골목골목에 내리는 비가 어찌나 고운지, 비와 이 낡은 동네가 어찌나 한배에서 떨어진 형제 같은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술잔에 흰 술이 쌓이는 것만 같다. 그곳에 가야 했던 이유를 깜깜하게 잊은 채, 길에 멈춰 선 채 여중생처럼 우헤헤헤 웃는다. 그 순간 청춘아, 청춘아 그만 일어서라, 일어서서 너의(거룩하고 성실한 에디터의) 책무를 다하라고 바람이 뒤통수를 갈긴다.
웬 헤식은 감상이냐 싶겠지만 이 낡은 길에 서면 당신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을 리 없다. 그러지 않을 수 없다. 종로, 명동 거리의 옛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이 ‘판타스틱 스튜디오 부천’에 오면 당신도 청춘의 모서리를 그리워하는 시인이 된다.
판타스틱 스튜디오 부천은 1930년대부터 1970년대 종로, 청계천, 명동, 을지로 등의 옛 모습을 1만 2천 평 규모에 재현해 놓은 영상 스튜디오. 지금은 사라져 기억 속에 묻힌 서울의 옛 건물들을 반영구적인 세트로 제작했다. 화신 백화점, 종로 경찰서, 우미관, 옛 YMCA 등 유명 건축물뿐만 아니라 60년대 도시 개발과 함께 땅 속에 묻혔다가 지금 한창 복원 중인 청계천의 모습도 재현되었다. 실물의 약 70퍼센트 크기로 만들어진 2백여 개의 건물을 비롯해 벽보, 간판까지 꼼꼼한 고증을 거쳤다.
이렇게 우리 옛적의 모습을 담뿍 담아 낸 판타스틱 스튜디오에서는 ‘야인시대’를 시작으로 임권택 감독의 새로운 대작 ‘하류인생’과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요 장면이 촬영되었다. 또 KBS 드라마 ‘로즈마리’ ‘찔레꽃’을 비롯한 연속극, 단막극, 특집극, CF 등이 촬영되고 있다.
실용 정보는 부천시가 제공하는 안내 책자에 다 들어 있다. 판타스틱 스튜디오 부천에서 당신이 엿보기를 바라는 건 이런 거다. 과거는 결코 흐릿하지 않다. 모노톤의 거친 화질이 아니다. 따듯하고 선명한 시간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이미지다. 그 선명한 시간의 퍼덕거림, 재잘거림, 그 가벼운 상스러움…. 그걸 B사감처럼 질투하며 돌아오면 되는 거다. 당신이 꼭 눈도장 찍고 와야 할 몇 곳만 간추린다. ‘긴또깡’과 ‘야인시대’를 사랑한 당신이라면 이해가 한결 쉬울 것이다.
화신 백화점 평남 용강 출신의 박흥식은 지물상으로 돈을 번 뒤 종로 1가의 금은방을 매수해 화신 상회를 경영하며 ‘떼돈’을 그러쥔 거부다. 1937년 화신 상회가 불타자 이 걸출한 배포의 사내는 그 자리에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백화점을 지었다. 연건평 2천 평이 넘는 면적에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물이었으며 설계는 건축가 박길룡이 맡았다. 화강석을 두르고 현관 주위는 대리석을 깐 외관의 이 건물은 당시로선 최고층 빌딩이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당시로선 ‘최첨단’의 시설까지 갖추어 늘 구경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서울 사람의 80퍼센트가 이곳을 다녀갔다 할 정도로 관광 명소였다.
종로 경찰서 종로 경찰서는 민족 탄압과 치안 유지라는 두 개의 얼굴을 함께 거느린 곳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말살하는 데 힘썼던 곳으로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고문과 압박을 받았던 곳이다. 1923년 김상옥 의사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삼판동, 효제동에서 혈전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건이 바로 종로 경찰서에서 있었다.
우미관 조선 협객 김두한의 활약 무대. 김두한은 우미관에서 매점 점원을 하다가 싸움 실력이 눈에 띄어 주먹들에게 발탁되었다. ‘쌍칼’과 ‘구마적’, 구마적과 김두한의 대결이 이루어진 바로 그곳도 우미관이다. 1910년 고등 연예관이란 이름으로 세워졌다가 1915년 우미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층 벽돌 건물이었으며 긴 나무 의자가 있어 한꺼번에 1천여 명이나 되는 관객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주로 외화를 직수입해 상영했는데 ‘황금광 시대’ ‘카츄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파우스트’ 등의 무성 영화들이 우미관에서 개봉해 인기를 끈 작품이다. 단성사, 조선 극장 등과 함께 광복 무렵까지 서울을 대표하는 일류 개봉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청진옥 ‘야인시대’에서 원 노인이 설렁탕을 팔던 곳. 사실은 독립군 자금을 대는 곳이었다.김두한이 거지패 시절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김두한이 스승이자 독립 운동가인 유태권에게서 무술을 전수받던 곳이기도 하다.
수표교와 청계천 움막 청계천은 1910년대와 20년대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청계천 제방에 움막을 지으면서 대표적인 빈민 지역이 되었다. 청계천 움막은 거지패 시절 김두한이 친구인 ‘개코(이동훈 역)’ ‘정진영(김정민 역)’과 함께 기거하던 거지 움막이다.
평화 극장 자유당 말기 한국 영화계의 대부였던 임화수의 주요 활동 무대. 임화수는 수많은 여배우를 자유당 권력자에게 소개하면서 정권과 결탁했고 평화 극장을 아지트로 삼아 정치 깡패로 이름을 날렸다. 3·15 부정 선거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몰락하기 시작한 임화수는 5·16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최인규, 이정재, 곽영주와 함께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비너스 카페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복혜숙이 운영하던 카페로 복혜숙은 이화 여전을 나오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신여성으로 최고의 인기 배우였지만 당시엔 영화 개런티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이 카페를 차렸다. 비너스 카페에는 나운규, 문예봉 등의 배우와 여운형, 김준연 등의 정계 거물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전차 한 대당 1억 5천만 원을 들여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이 전차는 서울 시민의 주요한 교통 수단이자 명물이었다. 전차가 서울의 유일한 대중 교통 수단이던 시절에는 늘 초만원 상태로 운행되어 정원 80명의 객차에 평균 2백 명이 넘는 인원을 태우고 다녀야 할 정도로 무리한 운행을 했다. 버스가 보급되면서 도로 한가운데를 지나는 전차는 오히려 교통 정체의 원인이 되었고 1969년 선로가 철거되면서 영영 사라졌다.
영화 ‘하류인생’ 세트 1960~7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한 사내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임권택 감독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 ‘하류인생’의 오픈 세트. ‘취화선’에서 구한말 암울한 종로 거리를 생생하게 펼쳐 보인 주병도 미술 감독이 다시 한 번 1960년대 명동의 번화가를 그려 냈다. 당시 최고의 번화가임을 드러내기 위해 높은 건물을 세우고 2백 60여 개의 간판과 네온을 설치해 화려함을 강조했다. 또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시대 분위기를 위해 일제 시대 건물 양식도 디자인에 반영했다. 섬세한 디테일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는데 ‘벽보나 간판은 시대의 메시지’라는 생각 아래 2백 60여 개의 간판을 만들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서체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건물마다 창이나 현관을 튀어나오고 들어가게 설계해 눈과 비, 낙수의 방향, 고드름 등이 얼 때 달라지는 공간의 표정까지 세심하게 연출되었다. 비 온 후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친 모습을 담아 내기 위해 여러 번의 테스트 끝에 시멘트 바닥을 울퉁불퉁하게 깔았고 오래된 거리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각종 재료를 혼합하는 실험도 이루어졌다. 내부를 채우는 옛 물건을 위해 무게만 총 3톤, 트럭 20대 분량의 소품을 배치하는 데만도 열흘 이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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