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가 정체성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제영화제란 무엇인가?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특별한 의도와 목적으로 선택된 영화들을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기간 내에 상영하는 것이다. 영화제의 성격은 어떤 영화들이 상영되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화려한 이벤트나 특별 게스트가 참여하는 행사도 영화의 선택에 우선하지는 않는다. 프로그래머는 어떤 영화들을 선택해서 영화제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며 또 대중적 소통도 가능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선택에는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적 특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관객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그들만의 영화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전주국제영화제의 태생적 문제점은, 영화제를 만들 당시 지역적 공간적 특성이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주라는 지역적 공간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면, 디지털과 대안영화제로 성격이 정해질 수 없었다. 문제는 [디지털 대안 독립]이라는 화두가 전주라는 지역적 특성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1기 최민 위원장 집행부에서 2기 민병록 현 집행위원장 체제로 넘어오면서 수많은 시행차오를 했다. 동성애나 과도한 실험적 성격의 인디 영화들이 영화제 목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전주 시민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기도 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 시민들이 낸 10억원이 넘는 혈세와 기타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많은 시민들이 의아해 하는 것은, 왜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영화들이 전주국제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상영되는가 하는 것이다. 전주는 전통의 도시다. 거리 곳곳에서 판소리가 흘러나오고 한옥마을의 기와지붕과 창호지 문의 고즈넉한 멋이 살아 있는 도시다. 그렇다고 옛날이야기만 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적어도 전주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라면, 또 지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대통합의 축제라고 한다면, 역사와 전통을 토대로 둔 영화제가 개최되어야 했다. 대안영화제로서의 디지털이라는 화두는 매력적이지만 지역민들의 보편적 정서와 거리가 있었다.
전주 지역에서 촬영되는 영화들을 보면, 전주라는 브랜드로 어떤 영화들을 선택해야 하는지 역으로 알 수 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들 중에서 구이저수지에서 촬영된 [오래된 정원]은 80년대 운동권의 후일담 사랑이야기이고, 전주동물원에서 촬영된 [파란 자전거]는 동물원 코끼리 사육사로 일하는 한 장애인 청년의 가족과 사랑이야기다. 전주 한옥마을을 배경으로 촬영된 [날아라 허동구]는 저능아 아들과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성애를 그리고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진로의 방향 수정을 하고 있다. 이제 세계적으로 디지털은 대안이 아니다. 주류를 점령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디지털 스팩트럼]을 [인디비전:국제경쟁부분]으로 흡수하고 출품 편수도 대폭 줄였다. 초기의 전주국제영화제 성격이 축소되고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영화 섹션들은 늘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분 수정이 아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장기적인 로드맵이나 목표 의식 없이 매년 즉흥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화 사회에서는 테크놀로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삶의 변화 속도는 매우 가파르다. 디지털에 키워드를 맞췄다면 놀라운 혜안으로 세계영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앞서 파악하고 그 맥을 짚어내야 한다. 하지만 전주국제영화제 집행부는 그때그때 눈앞의 현실 추수에 그치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언제나 3류 영화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전주 시민들이 매년 10억원이 넘는 시의 예산을, 시민들의 삶과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대안영화제에 쏟아 붓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시민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영화제 폐지가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제 집행위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게 한국영화 부문을 확대함으로써 대중적 코드와 접목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주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전주국제영화제 규모 이상의 영화제는 전세계에 100여개가 넘는다. 이제 디지털은 화두가 되지 못한다. 대안영화제로서의 매력도 사라졌다. 올해 8회를 맞는 전주국제영화제는 그 성격을 뚜렷이 해야 한다. [시민이 중심이 되는 영화제, 관객 인프라 확대를 통해 관객 중심의 영화제, 전주라는 브랜드를 강화하는 영화제로 나아갈 것]이라는 송하진 전주시장의 말처럼, 전주국제영화제는 대중적 친화도를 높여야 한다. 문제는, 친화도를 높일수록 대안영화제의 순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현집행부의 태도는 모호하다. 딜렘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장기적 비전과 거시적 시각없이 운영되는 영화제가 정체성 혼돈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