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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스포츠로 재탄생 시키려는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5월 28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제20차 집행위원회를 열고 바둑, 롤러스케이팅, 정구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종목 수를 늘리기 힘들어 체스의 세부종목으로 들어간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스포츠로서의 바둑이 국제적으로 인정 받았다는 것은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한국기원 및 대한바둑협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 일본과 협의해 참가자격, 경기방식 등 처리해야 할 실무적인 사안은 물론 최종 목표인 올림픽 정식종목 입성을 위해 많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위 이세돌, 본격적인 일인시대 구축
이세돌 9단의 융단폭격에 세계가 경악했다. 도요타덴소배와 TV바둑아시아선수권을 획득하고 몸을 푼(?) 이세돌 9단은 한국이 주최하는 양대 세계기전인 LG배와 삼성화재배 결승에 오르며 독주체제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국내에서는 GS칼텍스배에서 박영훈 9단에게 2연승 뒤 3연패로 타이틀을 빼앗기긴 했지만 랭킹1위 기전인 명인과 최고(最古)의 기전인 국수를 획득해 랭킹 일인자의 명분을 얻었다. 이뿐 아니라 물가정보배와 맥심커피배를 포함해 6관왕을 차지하며 '과연 이세돌 시대인가'라는 논쟁을 '이세돌의 시대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로 바꾸어 놓았다.
3위 한상훈, 초단태풍 일으키며 급부상
유난히도 초단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한 해였지만 한상훈의 활약은 그것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한상훈 초단(현재 2단)은 2006년 12월에 입단해 공식 대국을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왕위전 도전자 결정전에 올라 바둑계를 뒤집더니 LG배와 삼성화재배에서 정상급 활약을 보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LG배에서는 '초단 최초의 세계대회 결승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이세돌 9단에 도전장을 던졌다.
퇴출 일보직전에 늦깎이 프로가 된 한2단의 활약은 많은 연구생들과 프로 초년생들에게도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박정상, 조훈현 9단 등을 누르고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에 오른 최기훈 초단이나 파죽의 6연승으로 GS칼텍스배 본선 진출권을 획득한 김승재 초단 등의 활약도 눈에 띈 한 해였다.
4위 목진석, 기록 제조기로 부활
2007년은 목진석 9단에게도 뜻 깊은 한 해 였다. 목9단은 지난 2004년 LG배 준우승 뒤로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시드 한 장 없이 모든 기전에서 예선부터 참가해 거둔 122국(93승 29패) 이라는 전적은 2007년의 빼어났던 활약뿐 아니라 지난 몇 년간의 저조한 성적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했다.
목진석 9단은 지난 11월 29일 농심배 8국에서 후야오위 8단과의 112번째 대국으로 1989년 이창호 4단(당시)이 세웠던 최다대국 기록을 경신했고 12월 13일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강동윤 7단을 누르고 91번째 승리를 거두며 이창호 6단(1993년 당시)의 90승을 넘었다.
목9단의 기록경신을 두고 항간에는 '타이틀이 없어 아쉽다.', '예선대국이 많아 이창호 9단과 비교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18년, 14년 이라는 시간이 말해주듯 내용을 떠나 수치만으로도 큰 의의를 둘 수 있음은 물론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기록이다. 목진석 9단은 엄청난 승수에 힘입어 꾸준히 랭킹이 올라 12월엔 최철한 9단을 제치고 5위를 차지했다.
5위 한국, 남녀동반 세계대회 싹쓸이
한국은 중국과 일본, 대만에 내준 세계대회 타이틀을 모조리 회수하며 다시 한 번 최강국의 면모를 확인했다.
이세돌 9단과 박영훈 9단이 각각 도요타덴소배와 후지쯔배를 차지해 한국의 연패를 이어갔고 이창호 9단은 중국의 투톱 구리 9단, 콩지에 7단을 누르고 농심배를 되찾았다. 올해 중국과 대만에 빼앗겼던 삼성화재배와 LG배는 1년이 채 안되어 한국 기사들이 모두 결승에 올라 사실상 탈환에 성공한 셈.
한국의 낭자군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대리배 결승에서 박지은 8단과 김혜민 5단이 자매대결을 펼쳐 박8단이 우승을 차지했고 이민진 5단은 정관장배 5연승으로 한국의 첫 여자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박지은 8단은 지난 10월 열린 원양부동산배에도 루이 9단과 함께 결승에 올라 토종 여자기사 최초의 9단 등극을 노리게 되었다.
'이젠 정말로 중국에 추월 당한 것 아니냐.'는 2006년 연말의 우려가 깔끔하게 사라진 한 해였다.
6위 새내기 타이틀 보유자 대거 출현
새로운 타이틀 홀더의 연이은 탄생은 바둑계를 흥분시켰다. 안조영 9단의 십단전 우승을 시작으로 윤준상 6단과 강동윤 7단은 이창호 9단을 무관의 위기로 몰아붙이며 각각 국수와 왕중왕을 차지했다. 박정환 2단은 마스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해 간발의 차(약 10개월)로 이창호 9단 다음의 최연소 타이틀 보유자가 됐고 올해 마지막 결승에서는 원성진 9단이 천원에 올라 생애 첫 본격타이틀의 기쁨을 누렸다.
이들 외에도 이영구, 백홍석, 김지석, 한상훈 등의 신예기사들이 대거 부상하며 1인 독주 혹은 4천왕 체제로 이양되던 정상권을 강하게 위협했던 해였다.
7위 박영훈, 한국의 후지쯔배 10연패 위업 달성
7월 9일 박영훈 9단의 우승으로 한국은 후지쯔배 10연패에 성공했다. 사실 준결승이 열린 이틀 전 이창호 9단과 박영훈 9단의 동반 결승 진출이 결정되며 예정된 기록이었다. 총 20번의 대회 중 한국은 10회 연속 우승, 총 13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명실상부한 최강국임을 한번 더 증명했다.
박영훈 9단은 최철한 9단을 상대로 기성을 지켜내고 이창호 9단을 맞아 후지쯔배를 차지한 뒤 이세돌 9단에게 2연패 후 3연승으로 GS칼텍스배를 빼앗았다. 연말에 최철한 9단의 랭킹이 6위로 떨어지긴 했지만 자신과 함께 사천왕이라 불리던 세 명을 모두 결승에서 제압한 박영훈 9단은 이세돌 9단과 함께 한국의 새로운 투 톱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8위 이민진, 정관장배 5연승
유난히도 스타탄생이 잦았던 한 해. 한국바둑은 깊은 바다에 감춰져 있던 이민진이라는 진주를 발견했다. 1999년 입단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민진 5단은 단 다섯 번의 승리로 한국바둑의 영웅이 되었다.
지난 3월, 멀리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하루에 한 번씩 어김없이 날아온 이민진 5단의 역전승 소식에 바둑팬들은 모니터와 TV화면을 떠나지 못했다. 기적의 연승질주는 팬들의 폭발적인 성원으로 돌아왔고 모든 언론이 그녀에게 주목했다. 이민진 5단은 한국팀의 우승을 이끈 공로로 한국 기사 최초로 정관장배 시드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9위 영남일보, 꼴찌에서 1등으로
한국바둑리그에서 영남일보가 팀 컬러를 바꾸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난 해 최 하위를 차지한 영남일보는 최규병 감독을 영입하고 이영구 6단, 김지석 4단 등 젊은 선수들로 팀을 재구성해 돌풍을 일으켰다.
애초에 눈에 띄는 강자가 없어 주목을 받지 못했던 영남일보는 리그 초반부터 무섭게 질주하며 선두를 유지했고 챔피언 결정전에선 신성건설을 2: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최감독의 리더쉽과 선수들간의 끈끈한 팀워크가 우승의 열쇠였다는 평이다.
최규병 감독은 개막식 인터뷰에서 "우리 팀은 젊은 패기로 무장한 만큼 혹독하게, 무식하게, 무지막지하게 스파르타 식으로 팀을 조련해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한 호언장담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10위 새로운 시도, 지지옥션배 대흥행
2007년 조용히 나타나 바둑계를 발칵 뒤집었던 기전이 있었다. [제1기 지지옥선배 여류 대 시니어 연승대항전], 1억 8천만원의 소박한(?) 규모에 이창호, 이세돌도 참가하지 않는 마이너 기전이었지만 팬들의 호응은 여느 세계대회 못지않았다.
45세이상의 시니어기사 12명과 여류기사 12명이 연승전을 펼친다는 기발한 발상으로 시작한 지지옥션배는 연일 화제를 모으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특히 여자기사들이 기대 이상으로 맹활약하며 시니어 기사들을 이겨나가자 팬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새로운 대회방식과 대국자의 사인 바둑판을 경매에 부쳐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벤트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성공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후원사도 결과에 큰 만족을 표했다. 지지옥션의 강명주 회장은 1회 대회가 성공리에 끝나자 "회사 규모가 바둑대회를 유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둑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기대이상으로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며 "지지옥션배를 계속 개최함은 물론 규모도 차차 늘려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지옥션배의 성공은 넉넉하지 않은 규모에도 참신한 기획과 열정이 있다면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좋은 예가 됐다.
후기
10대 뉴스를 선정하기 위해 모인 사이버오로 컨텐츠팀은 많은 고민을 했다. 이미 월간바둑과 한국기원에서 10대 뉴스를 발표한 마당에 내용이 중복됨은 물론이고 매년 연례행사처럼 발표하는 10대 뉴스에 팬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고심 끝에 한국기원이 월간바둑을 통해 발표한 10대 뉴스와 사이버오로의 10대 뉴스가 다르기 때문에 중복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발표 해야 된다는 의견에 뜻을 모았다. 또한 이를 포함해 '올해의 인물 10선'을 따로 발표해 식상함에서 벗어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선정이 대충 마무리 되자 누군가 "어! 이창호 9단에 대한 내용이 하나도 없네?"라고 놀라며 말했다. 이창호 9단이 슬럼프에 빠져 성적이 예년만 못한 때문이지만 그만큼 한국바둑계가 다양해지고 풍성해졌다는 뜻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새로운 타이틀 홀더가 출현하고 목진석 9단, 이민진 5단 등의 기사들이 새롭게 부각된 2007년은 중국세에 다소 밀리는 모습을 보였던 2006년에 비해 바둑팬들에게도 즐거운 한 해였다.
2008년에는 바둑올림픽 응씨배가 열린다. 이세돌, 박영훈 9단의 활약은 물론 부진에 빠져 최악의 한 해를 보낸 이창호 9단과 최철한 9단의 화려한 부활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