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 봉미산(鳳尾山) 신륵사(神勒寺)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어느날 원효 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원효 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 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 여강은 물살이 세고 홍수가 나면 많은 피해를 입었던 곳이라, 물을 말로 비유하여 사나운 말을 굴레로 다스렸다는 데서 유래한 절 이름이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보물1791호 목조아미타삼존불(극락보전)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불이문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아금강역사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흠금강역사가 그려져 있다. 강가의 강월헌(江月軒) 정자 바로 옆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신륵사의 상징인 벽돌로 만든 다층전탑(多層塼塔)이 있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나옹선사의 다비식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다층전탑은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의 전탑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명부전·심검당·적묵당·봉송각·삼성각·종각·구룡루 등이 있다. 경내로 들어가는 누각은 구룡루(九龍樓)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자리를 뜻하는 듯하다. 누각 옆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이고 이 은행나무는 660여년 전에 나옹선사께서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뒤로는 금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있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목조아미타삼존불) 극락보전 앞 마당에는 660년된 은행나무가 신도를 맞이하고 있다. 극락보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심검당이 있고 왼쪽에는 적묵당이 있다. 극락보전 뒤쪽으로는 조사당, 명부전, 관음전이 있고, 오른쪽 뒤로는 삼성각이 있다. 명부전 옆에는 재를 모신 후 영가들을 전송하는 봉송각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이 가운데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건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 신중탱화, 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은행나무에는 벼락을 맞은 줄기가 마치 관세음보살처럼 보여서 신기하다. 이곳 은행나무는 숫나무이다. 은행 꽃이 필 때 오면 많은 수꽃을 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많은 은행 열매를 맺는 것과 대조적이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조사당에는 나옹선사의 스승인 지공(指空)화상와 나옹화상,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사당은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인데도 대들보가 없는 전면 1칸, 측면 1칸의 특이한 건축물이다. 조사당 뒤편의 언덕 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부도인 석종과 석종비 석등이 있다. 풍수지리학에 능했던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잡은 명당 자리라고 한다. 석종은 통도사 금강계단과 유사하게 넓은 기단의 전면과 측면에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석종비에는 목은 이색 선생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고, 당대의 권력자들인 염제신, 이인임, 최영, 이득분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신륵사가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이 호상(護喪)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년)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1469년(예종 1년)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후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년) 2월에 대규모 중창 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년)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년)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과 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