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만 金鎭萬(1876 ~ 1934)】 "1916년 대한광복회 대구권총사건"
1876년 8월 24일 경상북도 대구부(大丘府) 남산동(南山洞)에서 김재양(金在穰)과 전주 이씨 춘옥(春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분성(盆城)이며, 호는 긍석(肯石)이다. 문인화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달성 서씨 서우순(徐佑淳)의 장녀 서복(徐福)과 결혼하여, 영조(永祚)·영우(永祐)·영기(永祺)·영정(永禎)의 4남과 필순(畢順)·분조(粉祚)·순분(順分)의 3녀를 두었다. 동생 김진우(金鎭瑀)와 달성친목회, 대한광복회 활동을 같이 했다. 또한 아들 김영우(金永祐)도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손자 김일식(金一植)도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대구지역의 유명 예술가인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1년 서병오가 중국을 방문할 때 동행하여 중국의 웨이하이(威海)·쑤저우(蘇洲)·난징(南京) 등지를 다니며, 당시 중국의 명필가 우창스(吳昌石)·치바이스(齊白石) 등을 만났다. 이 여행을 통해 중국 화단에 대한 식견을 키우는 한편, 중국과 서구 문물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9월 결성된 달성친목회는 대구를 중심으로 각지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 교육과 실업 장려를 표방하였던 계몽운동단체였으나, 실제는 유망한 청년들을 단결시켜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위한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1915년 1월 15일 서상일(徐相日)을 중심으로 한 달성친목회 회원들이 국권회복을 목표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같은 해 7월 15일 박상진(朴尙鎭) 등이 풍기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지원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투쟁으로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들 단체의 단원인 동생 김진우와 서상일·윤창기(尹昌基)·정운일(鄭雲馹)·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6년 8월 박상진·이시영·정순영(鄭淳榮)·홍주일(洪宙一)·정운일·김재열(金在烈) 등과 대구의 최병규(崔丙圭)·최준명(崔俊明)·김진우, 그리고 서우순의 아들 서상준(徐相俊) 등과 함께 장인 서우순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9월 4일 김진우를 비롯하여 정운일·최병규 등과 함께 장인 서우순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방문에 놀란 서우순의 비명소리에 집사 우도길(禹道吉)이 달려오자 일행은 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그들은 얼마 후 모두 붙잡혔다. 이른바 ‘대구권총사건(大邱拳銃事件)’이었다.
이 일로 1917년 4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8년 3개월이 넘게 옥에 갇혀 있다가 1924년 6월 24일 풀려났다.
이후 1934년 1월 12일 사망할 때까지 세상을 은둔하며 그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자신에 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집안이 부유했으나 가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썼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괴석도(塊石圖)」, 「기명절지10폭병풍(器皿折枝十幅屛風)」, 「난화도(蘭花圖)」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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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만에 대한 판결 보도(『매일신보』 1917. 4. 28)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