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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
드디어 논어다. 유학, 유교, 한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공자다. 그리고 공자의 말씀이 적혀 있다는 논어다. 한문/한자하면 공자, 논어인 게다. 그리고 한문을 한다고 하면 논어는 정말 외울 정도로 읽어야 한다. 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도 외워지지 않는 머리를 타고 나서 나는 지금도 몇 구도 머리에 암기하고 있지 못하다. 책을 펴고 글자를 봐야 기억이 나는 사람이다. 한문학과를 졸업했다고 해도 논어 20편 제목을 다 못 외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나 역시도 ‘學而’ 다음 편 제목도 가물가물하다.
논어는 책 제목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헷갈린다. 어느 시대에 간행이 되어 나왔는지에 잘 살펴야 되는 책이다. 책 제목을 보면 간행 시대를 유추할 수 있고 책의 변화 흐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우리들이 그 정도까지 알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냥 논어하면 공자가 말한 책으로 집에 굴러다니는 논어 책 정도로 아는 게 다이다. 바로 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논어집주”라는 책이다. 주자가 주를 달고 여러 제현들의 주석을 끌어모아 놓은 거다. 그래서 지금 읽어 보는 서문 또한 ‘序’라고 하지 않고 ‘序說’이라고 달면서 다른 학자의 설을 가지고 와서 서문을 엮어 놓고 자기 말이 없다. 여기서 가져온 사람의 글이 사마천의 “사기”에 있는 내용인 “세가 열전”에 실어 놓은 여러 인물들 중 “공자”의 글을 인용해 왔다. 사마천의 글을 신뢰한다는 말이겠다. 공자의 일대기를 나이순으로 정리해 놓은 글이다. 이걸 잘 읽고 이해를 해야 논어라는 책을 읽기가 편하고 쉬운데, 무슨 이름과 연도와 지명들이 그렇게 이해가 어렵다. 2천여 전의 사람들 이야기를 적어 놓으니 그 시대 상황도 잘 모르겠고, 어디서 누구랑 무슨 사건이 있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으니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공자가 살아왔던 춘추전국시대를 잘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 논어를 읽으면 공자의 말이 좀 더 와닿는다.
공자가 한 일이 논어에 나오는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말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서설을 통해 그의 업적을 뽑아 보자면,
1)敍書傳禮記, 2) 刪詩正樂, 3)序易彖繫象說卦文言, 4)作春秋
하, 은, 주 요순우탕 임금들의 일인 서경을 찬술(敍)하신 일, 시를 뽑아 가려서 시경을 만들어 낸 일, 악경은 지금 볼 수 없으니 모르겠다. 음악을 바로 잡은 일, 주역이라 부르는 역경의 십익전을 쓴(序) 일, 그리고 춘추를 지은 일이다. 정말 공자가 이 경전들을 정리하고 차례를 잡고 부언을 했는지 공부를 깊게 하지 못해 나는 말을 못 하겠다. 한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믿고 있다. 이렇게 큰 업적을 세운 공자였기에 추앙을 받는 거라 생각한다. 그 제자들과 손자 자사에 의해 道가 이어지고 맹자에게까지 내려오다가 그만 도통이 끊어졌다는 거다. 그러다 한나라, 당나라를 거쳐 새롭게 유학을 퍼뜨리고 공부를 하고 考證學이 흥왕하고 그랬던가 보다. 송나라 주자에 와서는 그것이 신유학이니 성리학이니 하면서 부리는 거라고 내 스스로 정리하고 있다.
주자가 살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학문과 철학, 통치 이념과 체제, 종교적 분위기가 주자의 사상에 그리고 그의 언어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도 신조어나, 세속어나 비속어, 또래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않나.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주를 달 때도 그랬을 것이다. 남을 설득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당대의 유행하는 말이나 그 시대에 통용되는 단어들, 그리고 자주 사용되는 유행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불교가 성행했다고 하니 불교 용어가 나올 수도 있는 거라고 본다. 이렇게 알고서 우리가 논어집주를 읽어 나가 봐야 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서설의 글은 바로 서설 마지막 부분에 붙은 정자(정이천)의 말이다.
程子曰 讀論語에 有讀了全然無事者하며 有讀了後에 其中得一兩句喜者하며 有讀了後에 知好之者하며 有讀了後에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니라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논어》를 읽을 적에,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전혀 감명을 받지 못한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句(구)를 얻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너무 즐거워〉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程子曰 今人은 不會讀書로다 如讀論語에 未讀時도 是此等人이요 讀了後에도 又只是此等人이면 便是不曾讀이니라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었을 적에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않은 것이다.”)
이 구절은 읽을 때마다 사람을 후려치고 후벼 파는 기세가 있다. 움찔 놀라고 갑자기 초라해지고 기분이 묘해진다. 나는 누구며, 지금까지 뭘 읽었던 거지? 나는 책을 읽은 게 맞나? 나는 뭐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 게 된다.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史記世家曰 孔子는 名丘요 字仲尼니 其先은 宋人이라 父는 叔梁紇이요 母는 顔氏니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十一月庚子에 生孔子於魯昌平鄕郰(鄹)邑하니라 爲兒嬉戱에 常陳俎豆하고 設禮容이러시니 及長爲委吏하사는 料量平하고-委吏는 本作季氏史로되 索隱云 一本에 作委吏라하여 與孟子合하니 今從之하노라 爲司職(樴)吏하사는 畜蕃息하시니라-職은 見周禮牛人이라 讀爲樴이니 義與杙同하니 蓋繫養犧牲之所라 此官은 卽孟子所謂乘田이라- 適周하사 問禮於老子하시고 旣反而弟子益進이러라
《史記(사기)》의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이름이 丘(구)요 字(자)가 仲尼(중니)이니, 그 先代(선대)는 宋(송)나라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叔梁紇(숙량흘)이요 어머니는 顔氏(안씨)이니, 魯(노)나라 襄公(양공) 22년(B.C.551) 庚戌年(경술년) 11월 庚子日(경자일)(21일)에 공자를 노나라 昌平鄕(창평향) 鄹邑(추읍)에서 낳았다.
공자는 어려서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조두)를 진설하고 禮(예)를 행하는 容貌(용모)를 베풀었다. 장성하여 委吏(위리, 창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요양)을 平(평)하게 하시고,-‘위리’는 본래 季氏史(계씨사)로 되어 있으나, 《史記索隱(사기색은)》에 ‘ 一本(일본)에 위리로 되어 있다’ 하여 《孟子(맹자)》와 부합하므로 이제 이것을 따른다.- 司樴吏(사직리, 축산 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職(직)’은 《周禮(주례)》〈牛人(우인)〉에 보이는바 樴(직)으로 읽으니, 뜻이 杙(익, 말뚝)과 같으니, 희생을 매어놓고 기르는 장소이다. 이 벼슬은 바로 《맹자》의 이른바 乘田(승전)이라는 것이다.- 周(주)나라에 가서 老子(노자)에게 禮(예)를 물으셨고, 돌아오자 제자들이 더욱 많이 찾아왔다.
昭公二十五年甲申은 孔子年三十五라 而昭公奔齊魯亂하니 於是에 適齊하여 爲高昭子家臣하사 以通乎景公하시다-有聞韶問政二事라- 公欲封以尼谿之田한대 晏嬰이 不可라하니 公惑之어늘-有季孟吾老之語라- 孔子遂行하사 反乎魯하시니라 定公元年壬辰은 孔子年四十三이라 而季氏强僭하고 其臣陽虎作亂專政이라 故로 孔子不仕하시고 而退修詩書禮樂하시니 弟子彌衆이러라
昭公(소공) 25년(B.C.517) 甲申(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齊(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라로 가시어 高昭子(고소자)의 家臣(가신)이 되어서 景公(경공)에 通(통)하였다.-〈제나라에 계시면서〉 韶樂(소악)을 들으신 것과 〈경공이 공자께〉 정사를 물은 두 가지 일이 있다.- 경공이 尼谿(니계)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는데, 晏嬰(안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齊 景公(제 경공)이 공자를 대우하며 말하기를 “계씨처럼 대우함은 내 하지 못하겠으나〉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 하고는 “내가 늙었으니, 〈그의 말을〉 쓰지 못하겠다.”라고 한 말이 있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셨다.
定公(정공) 원년(B.C.509) 壬辰(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양호)가 난을 일으켜 정권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시》 · 《서》와 《예》 · 《악》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九年庚子는 孔子年五十一이라 公山不狃(뉴)以費畔季氏하고 召孔子어늘 欲往而卒不行하시니라-有答子路東周語라- 定公이 以孔子爲中都宰하니 一年에 四方則(칙)之라 遂爲司空하시고 又爲大司寇하시다 十年辛丑에 相定公하사 會齊侯于夾谷하시니 齊人歸魯侵地하다 十二年癸卯에 使仲由爲季氏宰하여 墮(휴)三都하고 收其甲兵이러니 孟氏不肯墮成이어늘 圍之不克하다
정공 9년(B.C.501) 庚子(경자)는 공자 나이 51세였다. 公山不狃(공산불뉴)가 費邑(비읍)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 고 공자를 부르자, 가시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子路(자로)에게 〈나를 써 주는 자가 있으면 나는〉 東周(동주)를 만들겠다고 대답한 말씀이 있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중도)의 邑宰(읍재)로 삼으니, 1년 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司空(사공)이 되시고 또 大司寇(대사구)가 되셨다.
정공 10년(B.C.500) 辛丑(신축)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경공)와 夾谷(협곡)에서 會盟(회맹)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에게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정공 12년(B.C.498) 癸卯(계묘)에 仲由(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이 되어 세 도읍의 성을 허물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孟氏(맹씨)가 成(성) 땅의 성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四年乙巳는 孔子年五十六이라 攝行相事하사 誅少正卯하시고 與聞國政하시니 三月에 魯國大治라 齊人이 歸女樂以沮之하니 季桓子受之하고 郊又不致膰俎於大夫한대 孔子行하시니라-魯世家에 以此以上이 皆爲十二年事라- 適衛하사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하시 다-孟子에 作顔讎由라- 適陳하실새 過匡하시니 匡人以爲陽虎而拘之하다-有顔淵後及文王旣沒之語라- 旣解에 還衛하사 主蘧伯玉家하사 見南子하시다-有矢子路及未見好德之語라- 去適宋하신 대 司馬桓魋(퇴) 欲殺之어늘-有天生德語及微服過宋事라- 又去適陳하사 主司城貞子家하시고 居三歲而反于衛하시니 靈公이 不能用하다-有三年有成之語라- 晉趙氏家臣佛肹(필힐)이 以中牟畔하여 召孔子어늘 孔子欲往이라가 亦不果하시다-有答子路堅白語及荷蕢過門事라- 將西見趙簡子라가 至河而反하사 又主蘧伯玉家러시니 靈公이 問陳이어늘 不對而行하사 復如陳하시다-據論語하면 則絶糧當在此時라-
정공 14년(B.C.496) 乙巳(을사)는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섭행, 대행)하여 少正卯(소정묘)를 죽이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미녀 樂工(악공)을 보내어 저지하니, 季桓子(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교제)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大夫(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자, 공자께서 노나라를 떠나셨다.-《사기》〈魯世家(노세가)〉에는 이 이상을 모두 12년의 일이라 하였다.- 衛(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顔濁鄒(안탁추)의 집에 주인을 정하셨다.-《맹자》에는 顔讎由(안수유)로 되어 있다.-
陳(진)나라를 가실 적에 匡(광)땅을 지나니, 광땅 사람들은 陽虎(양호)라고 여겨 拘留(구류)하였다.-〈공자가 광땅에서 경계하는 마음을 품고 계실 적에〉 顔淵(안연)이 뒤에 떨어져 있었으며, “文王(문왕)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文(문)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라는 말씀이 있다.- 풀려나자 衛(위)나라로 돌아와 蘧伯玉(거백옥)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南子(남자)를 만나보셨다.-〈공자께서 南子(남자)를 만나보시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으니, “내 맹세코 잘못된 짓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하시리라. 하늘이 나를 싫어하시리라.”라고〉 자로에게 맹세하셨고, 또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다.-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시니, 司馬(사마)인 桓魋(환퇴)가 죽이고자 하므로-“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라는 말씀과 微服(미복)으로 송나라를 지나간 일이 있다.- 또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사성정자)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영공)이 등용하지 못하였다.-〈공자께서 “만일 나를 등용해 주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니,〉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내용이 있다.- 晉(진)나라 趙氏(조씨)의 가신인 佛肹(불힐)이 中牟(중모)땅을 가지고 배반한 다음 공자를 부르니, 공자는 가서 만나시려고 하였으나 또한 결행하지 않으셨다.-자로에게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라고 한 말씀과 삼태기를 멘 자가 공씨의 문 앞을 지나간 일이 있다.- 장차 서쪽으로 가서 趙簡子(조간자)를 만나 보려고 하시다가 黃河(황하)에 이르러 돌아와 다시 거백옥의 집에 주인을 정하셨는데, 영공이 陣法(진법)을 묻자 대답하지 않고 떠나 다시 진나라로 가셨다.-《논어》를 근거해 보면 양식이 떨어진 것이 마땅히 이때에 있었을 것이다.-
季桓子卒에 遺言謂康子호되 必召孔子라하더니 其臣止之한대 康子乃召冉求하다-史記에 以論語歸與之歎으로 爲在此時라하고 又以孟子所記歎辭로 爲主司城貞子時語라하니 疑不然이라 蓋語孟所記本皆此一時語어늘 而所記有異同耳라- 孔子如蔡及葉(섭)하시니라-有葉公問答子路不對와 沮溺耦耕과 荷蓧丈人等事라 史記云 於是에 楚昭王이 使人聘孔子하여 孔子將往拜禮어늘 而陳蔡大夫發徒圍之라 故로 孔子絶糧於陳蔡之間이라 有慍見及告子貢一貫之語라 按是時陳蔡臣服於楚하니 若楚王來聘孔子면 陳蔡大夫安敢圍之리오 且據論語컨대 絶糧이 當在去衛如陳之時라- 楚昭王이 將以書社地로 封孔子러니 令尹子西不可라하니 乃止하니라-史記云 書社地七百里라하니 恐無此理라 時則有接輿之歌라- 又反乎衛하시니 時에 靈公已卒하고 衛君輒이 欲得孔子爲政하며-有魯衛兄弟及答子貢夷齊, 子路正名之語라- 而冉求爲季氏將하여 與齊戰有功한대 康子乃召孔子어늘 而孔子歸魯하시니 實哀公之十一年丁巳而孔子年六十八矣라-有對哀公及康子語라-
季桓子(계환자)가 죽을 적에 康子(강자)에게 유언하기를 ‘반드시 공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하자 강자는 마침내 冉求(염구)를 불러왔다.-《사기》에는 《논어》의 돌아가야겠다는 탄식이 이 때에 있었다고 하고, 또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 탄식한 말씀이 사성정자의 집에 계실 때의 말이라고 하였는데, 옳지 않을 듯하다. 《논어》와 《맹자》에 기록한 말씀은 본래 모두 한때의 말씀인데, 기록한 내용이 異同(이동)이 있을 뿐이다.- 공자는 蔡(채)나라로 가시어 葉(섭)땅에 이르셨다.-葉公(섭공)과 정치를 문답하였고,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으며, 長沮(장저)와 桀溺(걸닉)이 함께 밭을 갈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지나가실 적에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한 일과 지팡이로 대바구니를 멘 丈人(장인) 등의 일이 있었다. 《사기》에 이르기를 “이때 楚(초)나라 昭王(소왕)이 사람을 시켜 공자를 초빙하자 공자가 장차 찾아가서 절하는 예를 행하려 하였는데, 陳(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가 군대를 징발하여 포위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졌다.” 하였다. 자로가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뵌 것과 子貢(자공)에게 一以貫之(일이관지)를 고해준 말씀이 있다. 살펴보건대 이때에 진나라와 채나라가 초나라에 신하로 복종하였으니, 만약 초왕이 와서 공자를 초빙하였다면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어찌 감히 공자를 포위하였겠는가. 또 《논어》를 근거해 보면 양식이 떨어진 것이 마땅히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갈 때에 있었을 것이다.-초나라 소왕이 장차 書社(서사)의 땅을 가지고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令尹(영윤)인 子西(자서)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사기》에 이르기를 “서사의 땅이 7백 리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이치가 없을 듯하다. 이때 초나라 광인인 接輿(접여)가 孔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며 노래한 일이 있다.-공자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영공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輒(첩)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사는 형제간이라는 말씀과 자공에게 伯夷(백이)와 叔齊(숙제)의 일을 대답하시고 자로에게 명분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대답하신 말씀이 있다.-염구가 〈노나라〉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세우자, 康子(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애공) 11년(B.C.484) 丁巳年(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애공과 강자에게 대답한 말씀이 있다.-
然이나 魯終不能用孔子하고 孔子亦不求仕하사 乃敍書傳禮記4)하시며-有杞宋, 損益, 從周等語라- 刪詩正樂하시며-有語大師及樂正之語라- 序易彖繫象說卦文言하시니라-有假我數年之語라- 弟子蓋三千焉에 身通六藝者七十二人이러라-弟子顔回最賢이나 蚤死하고 後惟曾參得傳孔子之道라- 十四年庚申에 魯西狩獲麟하니-有莫我知之歎이라- 孔子作春秋하시니라- 有知我罪我等語라 論語에 請討陳恒事도 亦在是年이라- 明年辛酉에 子路死於衛하고 十六年壬戌四月己丑에 孔子卒하시니 年七十三이라 葬魯城北泗上하다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로되 惟子貢은 廬於冢上하여 凡六年이러라 孔子生鯉하시니 字伯魚라 先卒하고 伯魚生伋하니 字子思니作中庸하시니라-子思學於曾子하고 而孟子受業子思之門人하니라-
그러나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書傳(서전)》과 《禮記(예기)》를 敍(서)하시고,-“夏(하)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杞(기)나라가 충분히 증명하지 못하며, 殷(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송나라가 충분히 증명하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는 말씀과 “은나라가 하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가감)한 것을 알 수 있으며, 周(주)나라가 은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씀과 “주나라는 하 · 은 二代(이대)를 보아 가감하였으니, 찬란하게 문채롭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등의 말씀이 있다.- 《시》를 刪定(산정)하고 樂(악)을 바로잡으시며,-노나라 大師(대사)에게 음악에 대해 고해 주신 말씀과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음악이 바루어졌다.”는 말씀이 있다.- 《周易(주역)》의 〈彖傳(단전)〉 · 〈繫辭傳(계사전)〉 · 〈象傳(상전)〉 · 〈說卦傳(설괘전)〉 · 〈文言傳(문언전)〉을 차례로 지으셨다.-“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을 배우게 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제자가 3천 명이었는데, 몸소 六藝(육예)를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다.-제자 중에 顔回(안회)가 가장 어질었는데 일찍 죽었고 뒤에 오직 曾參(증삼)이 공자의 도를 전하였다.- 애공 14년(B.C.481) 庚申(경신)에 노나라에서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으니,-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탄식이 있었다.- 공자께서 《春秋(춘추)》를 지으셨다.-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 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다.’라는 등의 말씀이 있다. 《논어》에 陳恒(진항)을 토벌할 것을 청한 일이 또한 이 해에 있었다.- 이듬해 辛酉(신유)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었으며, 애공 16년(B.C.479) 壬戌(임술) 4월 己丑日(기축일)(11일) 에 공자가 별세하시니, 나이가 73세였다. 노나라 도성 북쪽 泗水(사수)가에 장례하니, 제자들이 모두 心喪(심상) 3년을 입고 떠났으나 오직 자공만은 무덤가에 廬幕(여막)을 짓고서 모두 6년을 지냈다. 공자는 鯉(리)를 낳으니 字(자)가 伯魚(백어)였는데 먼저 죽었고, 백어가 伋(급)을 낳으니 자가 子思(자사)로 《中庸(증용)》을 지으셨다.”-자사는 曾子(증자)에게 배웠고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하였다.-
何氏曰 魯論語는 二十篇이요 齊論語는 別有問王知道하여 凡二十二篇이요 其二十篇中章句도 頗多於魯論이라 古論은 出孔氏壁中하니 分堯曰下章子張問하여 以爲一篇하여 有兩子張하니 凡二十一篇이요 篇次不與齊魯論同하니라
○ 하씨(何晏(하안))가 말하였다.
“《魯論語(노논어)》는 20편이고, 《齊論語(제논어)》는 별도로 〈問王(문왕)〉과 〈知道(지도)〉 두 편이 있어서 모두 22편이며, 20편 가운데의 章句(장구)도 《노논어》보다 상당히 많다. 《古論語(고논어)》는 공씨(孔安國(공안국))의 집 벽 속에서 나왔는데, 〈堯曰(요왈)〉 아래 장의 ‘子張問(자장문)’을 나누어 한 편을 만들어서 두 〈자장〉이 있으니 모두 21편이며, 편의 차례도 《제논어》나 《노논어》와 같지 않다.”
程子曰 論語之書는 成於有子曾子之門人이라 故로 其書獨二子以子稱하니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논어》 책은 有子(유자)와 曾子(증자)의 문인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유독 두 분만을 子(자)라고 칭하였다.”
程子曰 讀論語에 有讀了全然無事者하며 有讀了後에 其中得一兩句喜者하며 有讀了後에 知好之者하며 有讀了後에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니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논어》를 읽을 적에,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전혀 감명을 받지 못한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句(구)를 얻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너무 즐거워〉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程子曰 今人은 不會讀書로다 如讀論語에 未讀時도 是此等人이요 讀了後에도 又只是此等人이면 便是不曾讀이니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었을 적에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않은 것이다.”
程子曰 頤自十七八로 讀論語하니 當時已曉文義러니 讀之愈久에 但覺意味深長이로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나는 나이 17, 8세 때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 뜻을 알고 있었지만, 읽기를 더욱 오래함에 다만 의미가 심장함을 느꼈노라.”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주희(朱熹)
史記世家曰: “孔子, 名丘, 字仲尼. 其先, 宋人. 父, 叔梁紇; 母, 顔氏(名 徵在).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及長爲委吏, 料量平; 爲司職吏, 畜蕃息.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而弟子益進.
사기의 공자세가에 이르길, 공자는 이름이 구고 자는 중니다. 그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숙량흘이고 어머니는 안씨(이름은 징재)다. 노양공 22년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공자를 낳았다. 어릴 적에 소꿉놀이를 하면 항상 도마와 목기를 펼치고 점잖은 용모를 차렸다. 장성함에 이르러 위리(창고관리)가 되었는데 헤아림이 공평하였고, 말뚝(職)을 맡은 관리가 되었는데 가축이 많이 번식하였다.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돌아온 후 제자들이 더욱 많이 들어왔다.
新安陳氏曰 司馬遷史記有孔子世家 朱子纂其要於此
신안진씨가 말하길, “사마천의 史記에 孔子世家가 있는데, 주자가 여기에 그 요점을 모았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孔子父禱於尼丘山而生孔子 故以爲名 若字
신안진씨가 말하길, “공자의 아버지가 尼丘산에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삼았으니, 字와도 같다.”고 하였다.
孔子六世祖 孔父嘉爲宋督所殺 紇遂遷于魯
공자의 6대조 공보가가 송독에게 살해되었고, 흘이 마침내 노나라로 옮겨왔다.
新安倪氏曰 孔子之生 左氏春秋不書 但於哀公十六年夏四月己丑書 孔丘卒 杜預註 魯襄二十二年生至今七十三也 公羊穀梁傳 皆於襄公二十一年書 孔子生 乃己酉歲也 與史記杜註皆不合
신안예씨가 말하길, “공자의 출생에 관하여 좌씨 춘추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애공 16년 여름 4월 기축일에 공자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예가 주석을 달기를, 노나라 양공 22년에 출생하여 지금 73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공양전과 곡량전에는 모두 양공 21년에 공자가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곧 기유년이다. 이는 사기와 두예의 주석과 더불어 모두 합치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委吏本作季氏史 索隱云 一本作委吏 與孟子合 今從之 史記索隱 司馬貞作
위리는 본래 계씨사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색은에 이르길, 어느 한 본에 위리로 되어 있고, 맹자와도 부합하니, 지금 이를 따른다고 하였다. 사기색은은 사마정이 지었다.
職見周禮牛人 讀爲樴 義與杙同 蓋繫養犧牲之所 此官卽孟子所謂乘田
職은 주례 우인 편에 보이는데, 직(樴)으로 읽고, 뜻은 말뚝(杙, 익)과 같다. 대체로 희생제물을 묶어놓고 기르는 곳인데, 이러한 관리는 곧 맹자가 말한 승전(乘田)이다.
雲峯胡氏曰 此以後 多用論語證 以經證史也 此二事 論語無所見 則證之孟子 亦以經證史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이 이후에 많이 논어를 이용하여 증명하였는데, 이는 경전으로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이 논어에서 보이는 바가 없으니, 곧 맹자에서 증명하는 것은 이 또한 경전으로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周禮地官司徒上 牛人掌養國之公牛以待國之政令 凡祭祀共其享牛求牛 以授職人而芻之 註 享牛 前祭一日之牛也 求牛禱於鬼神 祈求福之牛也 職讀爲樴 樴謂之杙 可以繫牛 樴人者 謂牧人充人 與芻牲之芻 牛人擇於公牛之中 而以授養之
주례의 지관사도상에, “우인은 나라의 公牛를 기르는 일을 관장하여 나라의 정령을 기다린다. 무릇 제사에는 그 향우와 구우를 함께 직인에게 주어 꼴을 먹이게 한다.”고 되어 있다. 주석에는 享牛(제사에 쓰일 소)란 제사 하루 전의 소이고, 求牛란 귀신에게 빌어 복을 빌어 구하는 소라고 하였다. 職은 樴으로 읽는데, 樴은 말뚝을 말한다. 이로써 소를 붙들어 맬 수 있다. 樴人이란 사람은 목인과 충인을 말하는데, 풀을 먹는 희생제물의 풀을 주는 일을 한다. 우인이 공우 안에서 골라 이들에게 주어서 기르도록 한다.
問何以問禮於老子 朱子曰 老子曾爲柱下史 故知禮節文 所以孔子問之 聃雖知禮 然其意以爲不必盡行 行之反以多事 故欲絶滅之
누군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노자에게 예를 물었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노자는 일찍이 주하사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의 節文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물었던 것이다. 老聃은 비록 예를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뜻은 반드시 다 행할 필요는 없으며, 행한다면 도리어 일만 많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것이 멸절되기를 바랐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昭公二十五年甲申, 孔子年三十五, 而昭公奔齊, 魯亂. 於是適齊, 爲高昭子家臣, 以通乎景公. 公欲封以尼谿之田, 晏嬰不可, 公惑之. 孔子遂行, 反乎魯. 定公元年壬辰, 孔子年四十三, 而季氏强僭, 其臣陽虎作亂專政. 故孔子不仕, 而退修詩書禮樂, 弟子彌衆.
소공 25년 갑신년에 공자 나이는 35세였고, 소공이 제나라로 도망쳐 노나라가 어지러웠다. 이에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제경공과 교통하게 되었다. 제경공은 니계의 밭을 식읍으로 봉해주고자 하였으나 안영이 불가하다 하니, 제경공이 의혹하게 되었다. 공자는 마침내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정공 원년 임신년에 공자 나이는 43세였는데, 계씨가 강성하여 참월하였고, 그 가신 양호는 난을 일으켜 정치를 제멋대로 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벼슬하지 않았고, 물러나 시서예약을 닦으니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有聞昭問政二事
昭樂을 들은 일과 정치를 물은 일 등 두 가지 일이 있었다.
有季孟吾老之語
계손씨와 맹손씨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거나 나는 늙어서 기용하지 못하겠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問齊景公欲封孔子田 楚昭王欲封孔子地 晏嬰子西不可 使無晏嬰子西 則夫子還受之否 朱子曰 旣仕其國 則須有采地 受之可也
누군가 묻기를, “제경공이 공자에게 밭을 봉해주고자 하였고, 초소왕이 공자에게 땅을 봉해주고자 하였는데, 안영과 자서가 불가하다고 하였다. 만약 안영과 자서가 없었더라면, 공자께서는 그래도 그것을 받았을까요?”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이미 그 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면, 모름지기 采地를 갖고 있어야 하니, 받아도 괜찮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九年庚子, 孔子年五十一. 公山不狃, 以費畔季氏, 召孔子, 欲往而卒不行.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則之. 遂爲司空, 又爲大司寇. 十年辛丑, 相定公, 會齊侯于夾谷, 齊人歸魯侵地. 十二年癸卯, 使仲由爲季氏宰, 墮三都, 收其甲兵. 孟氏不肯墮成, 圍之不克.
9년 경자년에 공자 나이는 51세였다. 공산불뉴가 비읍으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불렀는데, 가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가지 않았다. 정공은 공자를 중도읍의 읍재로 삼았다. 1년이 되자 사방에서 그를 본받았고, 드디어 사공이 되고, 다시 대사구가 되었다. 10년 신축년에 정공을 도와 제나라 임금과 협곡에서 회맹하였는데,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에 침략한 땅을 돌려주었다. 12년 계묘년에 중유(자로)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이 되어 삼도의 성을 허물고 그 갑병을 거두도록 시켰다. 맹씨는 성성(成城)을 허물려 하지 않자,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有答子路東周語
자로에게 내가 가면 동주를 만들 것이라고 대답하는 등의 말이 있었다.
朱子曰 聖人欲往 是當他召聖人之時有這些好意思來接聖人 聖人當時亦接他好意思 所以欲往 然他這箇人終是不好底人 所以終不可去 如陰雨蔽翳 重結不解 忽然有一處 略略開霽 雲收霧斂 見得靑天白日 這些自是好
주자가 말하길, “성인께서 가고자 하신 것은 그들이 성인을 불렀을 때 이러한 좋은 생각을 갖고서 와서 성인을 모시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성인께서도 역시 당시에 그들의 좋은 생각을 접하였기 때문에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끝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시커멓게 내리는 비가 일산을 덮어버리듯 거듭 묶여서 풀지 못하다가, 홀연히 한 곳이 조금씩 비가 개고,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물러가서 푸른 하늘과 하얀 해를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런 것들은 저절로 좋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成旣不墮(휴) 夫子如何別無處置了便休 朱子曰 不久夫子亦去魯矣 若使聖人久爲之 亦須別有箇道理
누군가 묻기를, “成성을 이미 무너뜨리지 않게 되었음에도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다른 처치를 함이 없이 곧 그만두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얼마 못 가서 공자께서도 또한 노나라를 떠났기 때문이다. 만약 성인께서 오랫동안 하셨다면, 역시 모름지기 다른 도리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四年乙巳, 孔子年五十六. 攝行相事, 誅少正卯, 與聞國政. 三月, 魯國大治. 齊人歸女樂以沮之, 季桓子受之, 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行.
14년 을사년에 공자 나이는 56세였다. 재상의 일을 대리하여 행하였는데, 소정묘를 주살하였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었다. 3개월 만에 노나라가 크게 잘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대를 보내어 이를 저지하였으니, 계환자가 이를 받았고, 제사를 지내고도 제사에 쓴 고기를 대부에게 보내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魯世家 自此以上 皆爲十二年事
사기의 魯世家에서는 여기부터 이상은 모두 12년의 일로 삼았다.
問設若魯亦致膰於大夫 則夫子果止乎 朱子曰 也須去 只是不若此之速 必須別討一箇事故去
누군가 묻기를, “만약 노나라 공실에서 대부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왔다고 가설한다면, 공자께서는 과연 그치셨을까요?”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그래도 반드시 떠났을 것이다. 단지 이렇게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달리 구실로 삼을 일을 하나 구하여 떠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是時政在季氏 夫子攝行相事而已 非爲相也 與聞國政而已 非爲政也 定公素不能立 季孫旣有所惑 其不足與有爲 可知也 故不容於不行
호씨가 말하길, “이 당시에 정치는 계씨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공자는 그저 재상의 일을 대신할 뿐이었지, 재상이 된 것은 아니었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었을 따름이지 정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정공은 평소 임금노릇을 할 수 없었고, 계손씨는 이미 미혹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더불어 훌륭한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떠나지 않음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適衛,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 適陳, 過匡, 匡人以爲陽虎而拘之. 旣解還衛, 主蘧伯玉家, 見南子. 去適宋, 司馬桓魋欲殺之. 又去適陳, 主司城貞子家, 居三歲而反于衛, 靈公不能用. 晉趙氏家臣佛肹, 以中牟畔, 召孔子. 孔子欲往, 亦不果. 將西見趙簡子, 至河而反. 又主蘧伯玉家, 靈公問陳, 不對而行, 復如陳.
위나라로 가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의 집에 유숙하였다. 다시 진(陳)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났는데, 광 사람들이 양호라고 여기고 붙잡았다. 이미 풀려난 후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유숙하였고 남자(南子)를 만났다. 떠나서 송나라로 갔는데,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하였다. 다시 떠나서 진나라로 가서 사성정자의 집에 머물렀고, 3년을 기거한 뒤 위나라로 돌아왔으나, 위령공이 기용하지 못하였다. 진(晉)나라 조씨의 가신 필힐이 중모에서 모반하고서 공자를 불렀다. 공자가 가려고 하였지만 역시 가지 않았다. 장차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를 만나고자 하였지만 황하에 이르러 돌아왔다. 다시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는데, 위령공이 진에 대하여 묻자, 대답하지 않고서 떠났고, 다시 진나라로 갔다.
顔濁鄒: 孟子作顔讎由
안탁추에 대하여 맹자는 안수유라고 적었다.
有顔淵後及文王旣沒之語
안연이 뒤쳐져서 죽은 줄 알았다는 것과 문왕이 이미 죽었으나 그 文은 여기에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有矢子路及未見好德之語
南子를 만난 것에 대하여 자로에게 맹세한 일과 덕을 여색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有天生德語及微服過宋事
하늘이 덕을 내게 낳아주셨다는 말과 미복차림으로 송나라를 지나갔다는 일이 있었다.
有三年有成之語
삼년이면 이룸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有答子路堅白語及荷蓧過門事
자로에게 진짜로 굳은 것은 갈아도 닳지 않고 진짜로 흰 것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한 말과 하조장인이 대문 앞을 지나간 일이 있었다.
朱子曰 夫子於公山氏之召 却眞箇要去做 於佛肹之召 但謂其不能浼我而已
주자가 말하길, “공자께서 공산씨의 부름에 대해서는 도리어 진짜로 가서 하고자 했다. 그러나 필힐의 부름에 대해서는 그저 그가 나를 더럽힐 수 없다고만 말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據論語 則絶糧當在此
논어에 따른다면, 양식이 떨어졌던 것은 마땅히 여기에서였을 것이다.
季桓子卒, 遺言胃康子, 必召孔子. 其臣止之, 康子乃召冉求. 孔子如蔡及葉. 楚昭王, 將以書社地, 封孔子. 令尹子西不可, 乃止. 又反乎衛, 時靈公已卒. 衛君輒, 欲得孔子爲政. 而冉求爲季氏將, 與齊戰有功, 康子乃召孔子, 而孔子歸魯. 實哀公之十一年丁巳, 而孔子年六十八矣.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乃敍書傳禮記, 刪詩正樂, 序易彖繫象說卦文言.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 七十二人. 十四年庚申, 魯西狩獲麟, 孔子作春秋. 明年辛酉, 子路死於衛, 十六年壬戌四月己丑, 孔子卒, 年七十三.
계환자가 죽으면서 유언을 하여 계강자에게 말하길, 반드시 공자를 부르라고 하였으나, 그 가신이 이를 저지하자, 계강자는 이에 염구를 불렀다. 공자는 채나라에 갔다가 섭 땅까지 갔다. 초소왕이 장차 서사의 땅으로 공자를 봉해주고자 하였으나, 영윤 자서가 불가하다고 하자 그만두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는데, 당시 위령공은 이미 죽은 뒤였다. 위나라 임금 첩은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계강자는 이에 공자를 불렀고,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실로 애공 11년 정사년으로, 공자 나이는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는 결국 공자를 기용하지 못하였고, 공자 역시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이에 서전과 예기를 서술하고, 시경을 산삭하고 악경을 바로잡으며, 주역의 단, 계, 상, 설괘, 문언을 차례로 서술하였다. 제자는 대략 3천이었는데, 스스로 6藝에 통달한 사람은 72명이었다. 14년 경신년에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을 사냥하여 잡았고, 공자는 춘추를 지었다. 그 다음해 신유년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었고, 16년 임술년 4월 기축일에 공자가 졸했는데, 나이는 73세였다.
史記以論語歸與之歎爲在此時 又以孟子所記歎詞爲主司城貞子時語 疑不然 蓋語孟所記本皆此一時而所記有異同耳
사기는 논어의 ‘돌아가자’는 탄식이 이 때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또 맹자가 기록하였던 탄식의 말은 사성정자의 집에 유숙할 때에 한 말이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의심된다. 대체로 논어와 맹자에 기록된 것은 본래 이 한 때의 일이었지만 기록한 바에 다르고 같음이 있었을 뿐이었으리라!“라고 하였다.
有葉公問答 子路不對 沮溺耦耕荷蓧丈人等事 史記云 於是楚昭王使人聘孔子 孔子將往拜禮而陳蔡大夫發徒圍之 故孔子絶糧於陳蔡之間 有慍見及告子貢一貫之語 按是時 陳蔡臣服於楚 若楚王來聘孔子 陳蔡大夫安敢圍之 且據論語 絶糧當在去衛如陳之時
섭공과의 문답과 자로가 대답하지 못한 일, 장저와 걸닉에게 나루터를 물은 일과 하조장인이 문을 지난 등등의 일이 있었다. 사기에 이르길, “이에 초소왕이 사람을 시켜 공자를 초빙하였고, 공자는 장차 가서 절하여 답례하고자 하였으나,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이 무리를 발동하여 포위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졌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로가 성을 내며 공자를 뵈었다는 것과 자공에게 一以貫之을 알려주는 말이 있었다. 살펴보면, 이 때에 진나라와 채나라는 초나라에 신하의 나라로 복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초나라 왕이 공자를 초빙해 오는 것이라면,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이 어찌 감히 공자를 포위하였겠는가? 또한 논어를 근거로 하자면, 양식이 떨어진 일은 마땅히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갈 때에 있었을 것이다.
史記云 書社地七百里 恐無此理 時則有接輿之歌
사기에 이르길, 서사의 땅은 700리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런 이치는 없을 것이다. 이 때에는 곧 초나라 광인 접여가 공자의 수레를 지나가며 노래를 부른 일이 있었다.
新安陳氏曰 索隱云 古者二十五家爲里 里各立社 則書社者 書其社之人名於籍 蓋以七百里書社之人封孔子也 故冉求云 雖累千社而夫子不利 是也 饒氏云 書社猶今人所謂書會也 蓋卿大夫所當得底地 謂之采地 如這箇却是君之所特與 故謂之書社地 言以此養其徒也 便如齊王欲中國授孟子室 養弟子以萬鍾 相似
신안진씨가 말하길, “색은에 이르길, 옛날에는 25家를 1里로 하였고, 里는 각자 社를 세웠으니, 곧 書社라는 것은 그 社의 사람들 이름을 籍에 적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700개 里의 書社 사람들로써 공자에게 봉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염구가 말하길, 비록 1천개의 社를 쌓더라도 공자께서는 이롭다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쌍봉요씨가 말하길, 書社는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書會와 같은 것이다. 대체로 경대부가 당연히 얻는 땅은 이를 일컬어 采地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임금이 특별히 주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書社地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로써 그 무리들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마치 꼭 제나라 왕이 나라 가운데에 맹자에게 집을 주어 만종으로 제자를 기르게 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有魯衛兄弟及答子貢夷齊子路正名之語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처럼 닮았다는 말과 자공에게 백이숙제에 대하여 대답하고 자로에게 명분을 바르게 한다고 대답한 말 등이 있었다.
有對哀公及康子語
애공과 계강자에 대해서 한 말이 있었다.
雲峯胡氏曰 讀此者 要看太史公書法 又要看文公刪後書法 如孔子在他國 皆不書年 若干惟他國反魯及在魯 則歷歷書之 豈以在他國則歲月無所考 故不書邪 然去魯適陳 太史公書曰 是歲魯哀公三年而孔子年六十矣 又自楚反衛 太史公書曰 是歲也 孔子年六十三而魯哀公六年也 文公皆刪之 至孔子晩年歸魯 文公乃持書曰 實哀公之十一年丁巳而孔子年六十八矣 言外慨歎之意於書法 可見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이것을 읽는 사람이라면 태사공의 書法을 살펴보아야 하고, 또 다시 文公(한유)이 刪削한 후의 서법도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공자가 타국에 있을 때에는 모두 나이를 쓰지 않았고, 약간이라도 오직 타국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거나 노나라에 있으면 곧 낱낱이 기록하였다. 이 어찌 타국에 있으면 그 세월을 상고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노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을 적에 태사공이 기록하여 말하길, 이 해는 노애공 3년이면서 공자 나이 60세였다고 하였고, 또 초나라에서 위나라로 돌아갔을 적에 태사공이 기록하여 말하길, 이 해는 공자 나이 63세이면서 노애공 6년이었다고 하였으나, 문공 한유는 이를 모두 刪削하여 버렸다. 공자가 晩年에 노나라로 돌아옴에 이르자, 문공 한유는 도리어 이를 유지하면서 기록하며 말하길, 실로 애공 11년이자 공자 나이 68세였다고 하였으니, 言外에서 개탄하는 뜻을 서법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孔子當周衰時可以有爲否 朱子曰 聖人無不可爲之時也 便若時節變聖人又自處之不同 問孔子豈不知時君必不能用己 曰 聖人豈有逆料君能用我與否 到得後來說 不復夢見周公與吾已矣夫 聖人自知其不可爲矣
누군가 묻기를, “공자가 주나라가 쇠퇴한 때를 당하여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성인에게는 할 수 없는 때란 없는 것이다. 만약 시절이 변하면 성인께서도 또한 스스로 처신하는 바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공자께서도 어찌 당시 임금들이 반드시 자신을 기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성인께서 어찌 임금이 나를 기용할 수 있을지 여부를 미리 헤아렸겠는가? 나중에 더 이상 꿈에 주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는 다 끝났다라고 말하는 때에 이르러서, 성인께서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有杞宋損益從周等語
기나라와 송나라의 禮가 주나라의 예와 비슷하되 약간의 가감이 있으나 나는 주나라의 예를 따르겠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有語太師及樂正之語
태사에게 해준 말과 악이 바르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有假我數年之語
나에게 몇 년을 빌려준다면 주역을 배우겠다는 말이 있었다.
弟子顔回最賢蚤死後惟曾參得傳孔子之道
제자 중에 안회가 제일 현명하였으나, 일찍 죽었고, 오직 증삼이 공자의 도를 터득하여 전하였다.
有莫我知之歎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탄식이 있었다.
有知我罪我等語 論語請討陳恒事 亦在是年
나를 알아주고 나를 죄 주는 것은 오직 춘추일 것이라는 등의 말이 있었고, 논어에서 진항(田常)을 토벌하자고 주청한 일 또한 이 해에 있었다.
葬魯城北泗上,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 惟子貢廬於塚上, 凡六年. 孔子生鯉, 字伯魚, 先卒. 伯魚生伋, 字子思, 作中庸.”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 가에 장사지냈는데, 제자들은 모두 3년 동안 마음으로 복상한 뒤 떠나갔으나, 오직 자공만은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복상하였는데, 모두 6년이었다. 공자는 아들 리를 낳았는데, 자는 백어이고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을 낳았는데, 자는 자사이고, 중용을 지었다.
子思學於曾子而孟子受業子思之門人
자사는 증자에게서 배웠고,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 受業하였다.
何氏曰: “魯論語, 二十篇. 齊論語, 別有問王知道, 凡二十二篇. 其二十篇中章句, 頗多於魯論. 古論, 出孔氏壁中, 分堯曰下章子張問, 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篇次不與齊魯論同.”
하씨가 말했다. “노나라 논어는 20편이다. 제나라 논어는 問王과 知道편이 더 있어서 모두 22편이다. 그 20편 안의 장구도 노나라 논어보다 꽤 많다. 고논어는 공씨집 벽속에서 나왔는데, 요왈편을 나누어 아래 장의 子張問을 1편으로 함으로써 2개의 자장편이 있으므로 모두 21편이다. 편차도 제나라 논어나 노나라 논어와 같지 않다.”
何氏名晏字平叔魏南陽人
하씨는 이름이 晏이고 자는 평숙이며, 위나라 남양 사람이다.
或問今之論語 其魯論與 朱子曰 以何晏所敍篇數 考之 則信爲魯論矣 但據釋文 則其文字亦或有不同者 如以必爲瓜之類 豈何氏亦若鄭註就魯論篇章 而又雜以齊古之文與 然唐藝文志 已不載齊古篇目 六氏蓋於諸家說中得之耳
혹자가 묻기를, “오늘날의 논어는 노나라 논어이겠지요?”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하안이 편수를 차례 매긴 바를 가지고 고찰한다면, 노나라 논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다만 釋文에 근거한다면, 그 문자가 간혹 같지 않은 것이 있는데, 예컨대 必자를 瓜로 여겼던 것과 같은 부류다. 그러니 하씨도 역시 정씨처럼 노나라 논어의 편장에 나아가 주석을 달면서도 또한 제나라 논어와 옛 논어의 글을 섞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예문지에는 이미 제나라 논어와 옛 논어의 편 제목이 실려 있지 않게 되었으니, 육씨는 대체로 여러 분들의 말씀 중에서 그것을 터득하였을 따름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 鄭氏: 鄭玄(後漢) 論語註
※ 陸氏: 陸德明(唐) 經典釋文 論語音義
程子曰: “論語之書, 成於有子曾子之門人, 故其書獨二子以子稱.”
정자가 말했다. 논어라는 책은 유자와 증자의 문인에게서 완성되었기에, 고로 그 책에서 오직 두 분만 子로 호칭하였다.
程子曰 論語爲書 傳道立言 深得聖人之學者矣 如鄕黨形容聖人 不知者 豈能若是
정자가 말하길, “논어를 책으로 만들어 도를 전하고 말을 세운 것은 성인의 학문을 깊이 터득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향당에서 성인을 형용한 것 같은 경우는 알지 못하는 자라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問論語以何爲要 曰要在知仁 孔子說仁處最宜玩味 曰孔子說仁處甚多 尤的當是何語 曰皆的當 但其門人所至有不同 故其答之亦異
누군가 묻기를, “논어는 무엇을 요지로 여깁니까?” 대답하기를, “요지는 仁을 아는 것에 있다. 공자께서 仁을 말한 부분이 제일 마땅히 음미해야 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공자께서 仁을 말씀하신 부분이 매우 많으니, 더욱 적당(的當: 꼭 들어맞음)한 것은 어떤 말씀입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길, “전부 다 적당하지만, 그 문인들이 이른 경지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답한 바도 역시 다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程子之說 皆出於柳宗元 其言曰 諸儒皆以論語孔子弟子所記 不然也 孔子弟子 曾參最少 又老乃死 而是書記其將死之言 則其去弟子之時甚遠 而當時弟子略無存者矣 吾意孔子弟子 嘗雜記其言而卒成其書者 曾子弟子 樂正子春 子思之徒也 故是書之記諸弟子 必以字而曾子不然 蓋其弟子號之云爾而有子亦稱子者 孔子之歿 諸弟子嘗以似夫子而師之 後乃叱避而退 則固嘗有師之號矣 凡此柳氏之言 其論曾子者得之 而有子叱避之說 則史氏之卑陋無稽 而柳氏惑焉 以孟子攷(考)之 當時旣以曾子不可而寢其議 有子曷嘗據孔子之位而有其號哉 故程子特因柳氏之言 斷而裁之以爲此說 此所以不著柳說 而獨以程子爲據也 楊氏又謂 此書首記孔子之言 而以二子之言次之 蓋其尊之亞於夫子 尤爲明驗 至於閔損冉求 亦或稱子 則因其門人所記而失之不革也與
주자가 말하길, “정자의 말은 모두 유종원에게서 나온 것이니, 그가 한 말은 이렇다. 여러 유생들은 모두 논어를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공자의 제자 중에 증삼이 제일 젊었고 또 늙어서 마침내 죽었는데, 이 책에서 그가 장차 죽으려 할 적의 말을 기록하였으니, 이 때는 제자들 때로부터 떨어진 것이 대단히 멀었으므로, 당시에 제자들 중 생존하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공자의 제자들이 일찍이 그 말씀을 섞어 기록해 놓았다가 마침내 그 책을 완성한 사람은 증자의 제자인 악정자 春과 자사의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여러 제자들을 기록할 적에는 반드시 字로써 하였지만 증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체로 증자의 제자들이 그를 호칭하며 이렇게 말하였음에도, 유자도 역시 子를 칭한 것은 공자가 돌아가신 다음 여러 제자들이 일찍이 공자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가, 나중에 도리어 질타를 받고 회피하여 물렸으니, 원래부터 일찍이 스승의 호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이것이 유종원의 말인데, 그 중 증자를 논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유자가 질타를 받고 회피하였다는 말은 역사가의 비루함과 황당무계함으로 인해 유종원이 그에 미혹된 것이다. 맹자로 상고하자면, 당시에 이미 증자가 불가하다고 하여 그 논의를 잠재웠는데, 유자가 어찌 일찍이 공자의 지위를 근거로 하여 그러한 호칭을 갖고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정자는 단지 유씨의 말을 바탕으로 재단함으로써 이 말을 만들었으나, 이 때문에 유종원의 말은 드러내지 않고 그저 정자만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양씨가 또 말하길, 이 책의 첫머리에 공자의 말을 기록하였고, 2子의 말을 그 다음에 놓았으니, 대체로 그 높이는 것이 공자에 버금간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징험되었다. 민손(閔子騫)과 염구에 이르러서 역시 간혹 子를 칭하는 것은 그 문인들이 기록한 것을 따르면서 삭제하지 않는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라고 하였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정자가 말했다. 논어를 읽을 적에 다 읽고서도 전혀 아무런 일도 없는 사람이 있고, 다 읽은 후 그 중에 한두 구절을 얻어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며, 다 읽은 후에 그것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도 있으며, 다 읽은 후에 그야말로 손이 춤을 주는지 발이 구르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程子曰 論語之書 其辭近 其指遠 辭有盡 指無窮 有盡者 可索之於訓詁 無窮者 要當會之以神 譬諸觀人 昔日識其面 今日識其心 在我則改容更貌矣 人則猶故也 坐是故難讀 蓋不學操縵 不能安弦 不學博依 不能安詩 不學雜服 不能安禮 唯近似者 易入也 彼其道高深博厚 不可涯涘也 如此 儻以童心淺智窺之 豈不大有逕庭乎 方其脅肩諂笑以言餂人者 讀之 謂巧言令色 寧病仁 未能素貧賤而恥惡衣惡食者 讀之 豈知飯蔬飮水 曲肱而枕之 未妨吾樂 注心於利 末得已 不已而有顚冥之患者 讀之 孰知不義之富貴 眞如浮雲 誨而諄諄聽我藐藐者 讀之 孰知回不惰師書紳爲至識服膺 過此而往 益高益深 可勝數哉
정자가 말하길, “논어의 글은 그 말이 가깝고 그 뜻은 멀며, 말에는 다함이 있으나 뜻에는 끝이 없다. 다함이 있는 것은 훈고(訓詁: 주석)에서 찾을 수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은 마땅히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사람을 살펴보는 것에 비유하자면, 옛날에 그 얼굴을 알았다가 오늘은 그 마음을 아는 것이니, 내게 있어서는 용모를 바꾸는데, 남은 옛날 그대로인 것과 같다. 마침내(坐) 이런 까닭으로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대체로 操縵(명주실 붙잡는 일)을 배우지 않으면 현악기에 편안해할 수 없고, 박의(博依:의지함을 넓히는 일)를 배우지 않으면 詩에 편안해할 수 없으며, 雜服(잡다한 복식)을 배우지 않으면 예에 편안해할 수 없으니, 오직 近似한 것만이 쉽게 들어가는 법이다. 그러나 저기에 있는 그 道는 높고 깊으며 넓고 두터워서 그 끝에 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만약 어린아이의 마음과 얕은 지혜로 그것을 엿본다면, 어찌 큰 차이가 생기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어깨를 웅크리고 아첨하며 웃는 얼굴로 사람을 낚는 말을 하는 자가 논어를 읽는다면, 巧言令色하여 오히려 仁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貧賤을 바탕으로 하여 그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읽는다면, 어찌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팔을 구부려 베게를 베더라도 내 즐거움에 방해가 되지 않음을 알겠는가? 이로움에 마음 기울임을 끝낼 수 없어서, 끝내지 않고 어두운 데로 넘어지는 근심을 가진 자가 읽는다면, 어찌 의롭지 못한 부귀가 진실로 뜬구름 같은 것임을 알겠는가? 깨우쳐주기를 정성스럽게 해도 내 말을 멀게만 듣는 자가 읽는다면, 어찌 안회가 게으르지 않고서 스승의 말씀을 허리띠에 써서 지극한 식견으로 삼아 가슴에 담고 다님을 알겠는가? 이런 것들을 넘어서 간다면, 갈수록 높고 갈수록 깊어지는 것이니, 가히 다 셀 수 있겠는가?
朱子曰 學者須著實循序讀書以論語爲先 一日只看一二段 莫問精粗難易 但只從頭看將去 讀而未曉 則思 思而未曉 則讀 反覆玩味 久之必自有得矣 今學者於論語二十篇中 尙不耐煩看得之 況所謂死而後已者 又豈能辦得如此長遠工夫耶
주자가 말하길,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착실하게 순서에 따라 책을 읽어야 하는데, 논어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하루에 단지 한두 단을 읽되, 정밀하고 거칠음이나 어렵고 쉬움을 불문하고, 다만 처음부터 보아 나가야 한다. 읽었으나 깨우치지 못하면 곧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깨우치지 못하면 곧 읽는데, 반복하여 음미하기를 오래하면, 반드시 저절로 터득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 배우는 자는 논어 20편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번거로움을 참고서 보아서 터득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른바 죽은 후에나 끝나는 것에 있어서랴! 또한 어찌 이처럼 길고 먼 공부를 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嗜之而飽饜 充足其樂 有不可形容者 是以見於手舞足蹈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그것을 아주 좋아하다가 실컷 먹어서 그 즐거움을 충족시켰으니,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손이 춤추고 발이 춤추는 것에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讀論語者 有此四等人 初是全無知者 第二是略能知者 第三是知而好之者 第四是好而樂之者
운봉호씨가 말하길, “논어를 읽는 자에는 이런 4등급의 사람이 있다. 처음은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자이고, 둘째는 약간 알 수 있는 자이며, 셋째는 알면서도 좋아하는 자이며, 넷째는 좋아하면서도 즐기는 자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정자가 말하길, “지금 사람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만약 논어를 읽을 적에 읽지 않을 때도 이런 사람이고 읽은 후에도 또한 그저 이런 사람이라면, 이는 곧바로 읽은 적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讀論語 須有疑然後能進 今人讀書 元不知疑 所以不及古人 孔門弟子 如子夏問巧笑倩兮 美目盼兮 直推至於禮後 樊遲問仁 知直推至於擧皐陶伊尹而不仁者遠 始能無疑 今人多於言上認了 又安能疑
정자가 말하길, “논어를 읽을 적에는 모름지기 의문을 가짐이 있은 연후에 능히 나아갈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적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가질 줄 모른다. 그래서 옛사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공문제자들 중에 예컨대 자하는 ‘巧笑倩兮 美目盼兮’를 물으면서 곧장 禮後(예를 뒤로 함)에까지 미루어갔고, 번지는 仁을 물으면서 곧장 고요와 이윤을 들어 기용하니 不仁者들이 멀어졌다는 것에까지 미루어갈 줄 알았는데, 비로소 의문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말에서 인식하고 말아버리니, 또 어찌 의문을 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問論語如何讀 曰 這也使急不得也不可慢 所謂急不得者 功效不可急 所謂不可慢者 工夫不可慢
누군가 묻기를, “논어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급하게 해서도 안 되고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이른바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공효를 급하게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이른바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程子言雖近而意則切 使讀書者 自知所以求益 不至虛費工夫也 須是熟讀涵泳 使之通貫 浹洽然後 有日新之功 如是 則氣質變化 月異而歲不同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정자는 말은 비록 천근하지만 뜻은 간절하다. 책을 읽는 자로 하여금 유익함을 구할 방법을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허비함에 이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모름지기 熟讀(익숙하게 읽음)하고 涵泳(완전히 젖어듦)하여 그것이 두루 통하게 하고 흡족하게 된 연후에 나날이 새로워지는 공효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기질이 변화하는 것이니, 달마다 다르고 해마다 다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頤自十七八, 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
정자가 말하길, “나(정이, 程頤)는 십칠팔 세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당시에 이미 글의 뜻은 깨우쳤다. 그러나 그것을 오래 읽을수록, 단지 그 의미가 깊고 길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하였다.
和靖尹氏曰 論語之書 迺集記孔子嘉言善行 苟能卽其問答 如己親炙于聖人之門 默識心受而躬行之 則可謂善學矣
화정윤씨가 말하길, “논어라는 책은 곧(迺: 내, =乃) 공자의 훌륭한 말씀과 좋은 행실을 모아서 기록한 것인데, 만약 능히 그 문답에 나아가, 자신이 성인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전수받아 몸소 실행할 수 있다면, 훌륭한 배움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延平李氏曰 人之持身當以孔子爲法 孔子相去千餘載 旣不可得而親之 所可見者 獨論語耳 論語蓋當時門人弟子所記孔子言行也 每讀而味之 玩而繹之 推而行之 雖未至升堂入室 亦不失爲士君子也
연평이씨가 말하길, “사람의 몸가짐은 마땅히 공자를 법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공자와는 서로 떨어지기가 천여 년이나 되니, 이미 직접 만나 뵐 수는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논어일 따름이다. 논어는 대체로 당시에 문인제자들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매번 논어를 읽으면서 음미하고, 玩賞하면서 演繹하고, 미루어 나가면서 실행한다면, 비록 堂에 오르고 室에 들어가지는 못할지라도, 또한 선비나 군자가 되는 것에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所謂深長意味也 別無說 只是涵泳久自見得
주자가 말하길, “이른바 깊고 긴 의미라고 말하는 것은 달리 말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涵泳(오래도록 젖어듦)하기를 오래 하면 스스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論語讀著越見意思無窮 今日讀得些意思 明日讀又長得意思
논어는 읽기가 착실할수록 더욱 그 뜻을 알아봄이 무궁할 것이니, 오늘 읽어서 몇몇 뜻을 터득하였다면, 내일 읽으면 또 더 멀리 뜻을 터득할 것이다.
朱子曰 論語中程先生及和靖說 只於本文添一兩字 甚平淡 然意味深長 須當仔細看 要見得他意味方好
주자가 말하길, “논어 안에서 程선생과 和靖이 말한 것은 그저 본문에 한두 글자를 첨가하는 것이라, 대단히 평범하고 담백하지만, 그러나 의미가 深長하니, 모름지기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의미를 알고자 해야만 바야흐로 좋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已下論解論語)
이하는 논어 풀이를 논한 것이다.
問謝氏說多過不如楊氏說最實 曰 尹氏語言最實 亦多是處 但看文字亦不可如此先懷權斷於胸中 如謝氏說十分有九分過處 其間亦有一分說得恰好處 豈可先立定說 今且須虛心玩理
누군가 묻기를, “謝氏의 말에는 지나침이 많으니 楊氏의 말이 제일 신실한 것만 못한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尹氏의 말이 제일 신실하고, 또한 옳은 곳이 많다. 다만 글자만 살펴본다면, 또한 이와 같이 먼저 權衡을 품고서 胸中에서 단정해버려서는 안 된다. 예컨대 謝氏의 경우, 말한 것의 10분의 9는 지나친 곳이지만, 그 사이에 또한 10분의 1 정도는 매우 합당하게 말한 곳이 있으니, 어찌 미리 세워서 단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또한 모름지기 허심탄회하게 이치를 음미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集註中 解有兩說 相似而少異者 亦要相資 有說全別者 是未定也
집주 안의 해설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서로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것은 또한 서로 의지해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말이 완전히 다른 것이 있으면, 이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論語集註 如秤上稱來 無異不高些不低些 自是學者不肯用工看
논어의 집주는 마치 천칭 위에서 재는 것처럼, 조금 높지도 않고 조금 낮지도 않는 등 다름이 없지만, 본래 배우는 자가 애써 살펴보려고 하지 않을 따름이다.
問集註有兩存者 何者爲長 曰 使某見得長底時 豈復存其短底 只爲是二說皆通 故幷存之 然必有一說合得聖人之本意 但不可知耳 又曰 大率兩說前一說勝
누군가 묻기를, “집주에 둘이 함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좋은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길, “만약 某人(주자)이 보아서 어떤 것이 좋을 때라면, 어찌하여 또 다시 그 나쁜 것을 보전시켰겠는가? 그저 이 두 학설이 모두 통하기 때문에, 그것을 병존시킨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어느 한 설이 성인의 본래 뜻과 부합할 것이지만, 단지 알 수 없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대개는 두 학설 중에 앞에 있는 학설이 낫다.”고 하였다.
某於論孟逐字稱等 不敎偏些小 學者 將註處 宜仔細看
某人(주자)이 논어와 맹자에 대하여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서 등급을 잰 것은 사소함에 치우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배우는 자라면 주해한 곳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마땅하다.
集註添一字不得 減一字不得 不多一箇字不少一箇字
집주는 한 글자도 더할 수 없고, 한 글자도 줄일 수 없으니, 한 글자도 많지 않고, 한 글자도 부족하지 않다.
讀集註 只是要看 無一字閑 若意裏說做閑字 那箇正是緊要字
집주를 읽음에 있어, 단지 한 글자도 한가한 것이 없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뜻 안에서 한가한 글자를 말했다면, 그것은 바로 긴요한 글자인 것이다.
集註至于訓詁 皆仔細看 蓋要人字字思索 到莫要只作等閑看 便了
집주는 訓詁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살펴봐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로 하여금 글자 하나하나마다 사색하도록 하여, 어떤 것 하나라도 그저 등한히 보고자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곧 다 된 것이다.
問註 或用者字 或用謂字 或用猶字 或直言其輕重之意 如何 曰 者謂是恁地直言者 直訓如此 猶云者 猶是如此 胡氏曰 某某也 正訓也 某猶某也 無正訓 借彼以明此也 某之爲言某也 前無訓 釋 特發此以明其意也 爲言 謂其說如此也 引經傳文以證者 此字義不可以常訓通也
누군가 묻기를, “집주에서 혹은 者자를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謂자를 사용하기도 하며, 혹은 猶자를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그 경중의 뜻을 직접 말하기도 하는데,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者와 謂는 이렇다고 곧장 말하는 것인데, 직접적으로 뜻풀이함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猶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이와 같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호씨가 말하길, “무엇은 무엇이라고 한 것이 바로 뜻풀이 한 것이다. 무엇은 무엇과 같다고 한 것은 곧바로 뜻풀이함이 없이 저것을 빌려서 이것을 밝힌 것이다. 무엇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뜻풀이가 없으므로 특별히 이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뜻을 밝힌 것이다. 爲言은 그것을 설명함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경전의 글을 인용하여 증명하는 것은 이 글자의 뜻이 일상적인 뜻풀이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集註於正文之下 正解說字訓文義與聖經正意 如諸家之說有切當明白者 卽引用而不沒其姓名 如學而首章先尹氏而後程子 亦只是順正文解下來 非有高下去取也 章末用圈而列諸家之說者 或文外之意而於正文有所發明 不容略去 或通論一章之意 反復其說 切要而不可不知也
집주는 正文의 아래에다 글자의 뜻과 글의 의미, 그리고 聖經의 올바른 뜻을 바로 풀이해 놓았고, 여러 학자들의 학설 중에 절실하고 합당하며 명백한 것의 경우는 곧 인용하되 그 성명은 감추지 않았다. 예컨대 學而 편의 첫 장에서 윤씨를 앞으로 하고 정자를 뒤로한 것, 또한 그저 정문에 따라 풀이해간 것일 뿐이지, 높고 낮음으로 제거하고 취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의 끝부분에 동그라미를 이용하여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열거한 것은 간혹 글 밖의 뜻이지만 정문에 대하여 드러내어 밝혀주는 바가 있어서 생략하여 제거함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한 장의 뜻을 통틀어 논하고 그 설을 반복하기도 하는데, 이는 절실하고 요체인 것이어서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集註內載前輩之說於下句者 是解此句文義 載前輩之說於章後者 是說一章之大旨及反覆此章之餘意 胡氏曰 字義難明者 各有訓釋 一章意義 可以分斷者 逐節註之 一章之後又合諸節而通言之 欲學者先明逐字文義 然後明逐節旨意 然後通一章之旨意也 每章只發本章之旨者 附註後 或因發聖人言外之意者 別爲一段以附其後 亦欲學者先明本旨而後及之也
집주 안에 선배들의 학설을 아래 구절에 게재한 것은 이 구절의 글 뜻을 풀이한 것이고, 선배들의 학설을 장의 뒤에 게재한 것은 이 한 장의 큰 뜻을 말하거나 이 장의 남은 뜻을 반복한 것이다. 호씨가 말하길, “글자의 뜻을 밝히기 어려운 것은 각자 뜻풀이를 두었고, 한 장의 의의에 있어서, (절을) 구분하여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절을 따라 주해를 붙였고, 한 장의 뒤에 다시 여러 절을 합하여 통틀어 말하였으니, 이는 배우는 자가 먼저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 글의 뜻을 밝힌 다음 각 절을 따라 그 뜻을 밝히고, 그런 다음 한 장 전체의 뜻을 통달하기를 바란 것이다. 매번 장마다 단지 本章의 뜻을 드러낸 것을 주해로 붙인 다음, 간혹 성인께서 하신 言外의 뜻을 드러낸 것을 바탕으로 별도의 한 단락으로 만들어 그 다음에 붙이기도 하였으니, 이는 배우는 자가 먼저 본래의 뜻을 명확히 한 다음 그것에 미치기를 바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