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2000년] 한국 천주교 200여년동안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문건 '쇄신과 화해' 발표
한국 천주교회가 200년 역사에서 저지른 잘못을 민족 앞에 고백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공식문건을 2000년 12월 3일 발표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쇄신과 화해`라는 문건을 통해 천주교회는 구체적인 개별사건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조상제사 금지, 병인양요, 안중근의사 의거의 `살인` 규정, 권위주의와 외적 성장에의 지나친 관심 등의 내용이 사실상 함축된 일련의 잘못을 포괄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이같은 참회는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로오2세가 지나간 2000년 역사를 통해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교황청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참회`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이같은 참회 문건은 비록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고 일부 마땅히 언급해야 할 내용이 빠져있다`는 종교학계 등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적으로나 민족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중대 결단이었다. /조선
[1997]대인지뢰 금지협약 서명
“그냥 가면 어떡해.”
“네가 가랬잖아.”
“가까이 오지 말랬지, 언제 가라고 그랬어.”
“…….”
“살려주세요.”
“울지 마라, 야.”
2000년 최고 흥행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명장면. 비무장지대(DMZ)를 수색하다 대인지뢰를 밟은 한국군 이수혁 병장(이병헌)과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의 대화.
관객은 웃음을 터뜨리고 주적(主敵) 관계였던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한반도 냉전의 상징인 DMZ의 지뢰 덕분에.
이런 낭만적 역설을 현실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실제 지뢰를 밟으면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입 밖에 낼 틈도 없이 발목이 잘리거나 몸통이 날아가 버린다.
지뢰는 방어용 무기다. 그러나 광란의 살인자이기도 하다. 핵과 미사일 공격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만 지뢰는 그런 능력이 없다. 베트남전쟁에서 지뢰 때문에 다치거나 숨진 미군 6만4000명 중 90%가 미군이 묻은 지뢰의 희생자라는 통계가 있다.
더구나 지뢰 피해자의 80%는 민간인이다. 특히 연평균 피해자 2만4000명 중 어린이가 약 1만 명(41.7%)이라고 국제적십자사는 밝혔다. 전쟁 중 피해자보다 전후 피해자가 10배나 된다. 이래서 ‘전쟁은 유한하나 지뢰는 영원하다’는 말도 생겨났다.
대인지뢰 1개를 만드는 데 3~5달러밖에 안 든다. 그러나 제거 비용은 개당 300~1000달러가 필요하다. DMZ와 그 주변에 매설된 약 100만 개의 지뢰를 모두 제거하려면 3조~10조여 원이 든다.
인간이 설치했으나 인간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버린 지뢰. 1997년 12월 3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채택된 ‘대인지뢰전면금지협약(오타와 협약)’은 이런 비극적 역설을 극복해 보려는 국제적 노력의 결정체다.
협약 가입국은 현재 144개 국.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주한미군)의 예외적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며 동참하지 않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주요 지뢰 보유국도 ‘미국이 가입하지 않으면 효율성이 없다’는 이유로 가입하지 않았다. 물론 남북한도 미가입국.
한반도 지뢰의 비극적 역설이 스크린 속 남북 병사의 이야기처럼 낭만적으로 풀릴 날은 언제일까.
[1995년] 전두환 전대통령 구속
전두환 전대통령이 1995년 12월 3일 군형법상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 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및 미수, 초병살해 등 6개 혐의로 고향인 합천에서 검거돼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는 전날인 12월 2일 전두환 전대통령이 검찰 소환에 불응하며 연희동 골목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후 고향 합천으로 내려간 전 전대통령을 검거하기 위해 사전구속영장을 받았다.
검거반은 주민들과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전대통령이 묵고 있는 내실로 들어가 영장을 집행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집행은 3일 오전 6시34분 검-경 합동으로 작전이 개시된지 37분 만에 전격적으로 끝났다. /조선
[1992년] 유엔안보리, 소말리아 군사개입결의안 채택
기아에 허덕이는 소말리아에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투입됐다. 1991년 1월 바레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시작된 내전속에서 지금까지 35만명이 기아와 질병, 전쟁으로 죽어갔고 2백만명이 아사직전에 놓여있었다.
유엔 안보리가 1992년 12월 3일 소말리아에 대한 병력파견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어 9일 미해병대가 수도 모가디슈에 상륙하면서 `희망회복` 작전이 시작됐다. 다국적군의 주 임무는 구호물자의 안전한 수송, 구호반원 및 민간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로, 인도적 차원에서의 군사개입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군사개입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조선
[1984년] 인도 보팔시 유독가스 유출 대참사 발생
← 1984년 12월 3일 인도 보팔에 소재한 미국 유니언 카바이드사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 3000여명이 희생됐다.
인간이 개발에만 몰두하고 환경에 무관심할 때 어떤 대가를 치러야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 大참사가 인도 보팔市에서 발생했다. 1984년 12월 3일 새벽 0시반, 보팔市에 소재한 미국의 다국적기업 유니언 카바이드社에서 농약제조 원료인 유독가스 메틸이소시안이 누출되기 시작, 불과 2시간 만에 36만톤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 도시전체를 뒤엎었다.
조용히 잠자다 변을 당한 사람이 이날 하루에만도 2천800여명에 이르렀고, 시간이 흘러 숨진 사람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무려 7천명~1만명에 달했다. 60여만명의 부상자 가운데 약 5만명은 치유 불가능한 불구상태라고 한 보고서는 전한다.
환경재난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이 사고는 높은 압력과 저온 상태를 항상 유지해야 하는 저장탱크의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기경보체제도 작동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 한가운데에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장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민들은 이처럼 위험한 시설이 자신들의 주변에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어처구니 없이 사고를 당한 것이다. 유니언 카바이드사는 피해자들에게 인도정부가 요구한 금액의 12분의1에 불과한 4억7천만달러를 보상했지만 다국적기업의 공해산업수출 문제는 여전히 불안요인으로 남아 있다./조선
[1967년] 바너드, 최초로 심장이식 성공
← 바너드(1968)
1967년 12월 3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흉부심장외과 의사 크리스티안 바너드가 인간을 상대로 한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심장병 치유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1958년 노먼 에드워드 셤웨이가 최초로 개에게 시술한 심장이식이 성공했지만 인간에 대한 심장이식은 1967년에야 이루어졌다. 바너드는 외과의사 20명으로 수술팀을 구성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던 루이스 와슈칸스키에게 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심장을 이식했다.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루이스는 폐렴에 걸려 18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면역 체계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뒤에 시도한 심장이식 수술은 점차 결과가 좋아져서 1970년대 후반부터는 상당수의 환자들이 수술 후 수년간 생존했다./브리태니커
[1964년] 남산 자유센터 개관
서울 중구 장충동(奬忠洞)에 있는 장춘단공원(奬忠壇公園)에는 영빈관이 들어서 있고, 영빈관 앞쪽에는 장충체육관을 세웠고,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왼쪽에는 호텔 신라 ·자유센터 ·타워호텔 등이 늘어서 있으며, 맞은편 남산 기슭에는 국립극장 ·국립국악원이 자리잡았고 남산 제2터널 입구에 유관순(柳寬順) 동상이 서 있다. 1919년에 공원이 되었다. /Google
<자유센터 - 건축가 김수근이 1963년에 만든 작품>
국립극장 맞은편은 타워호텔, 그 아래는 자유센터. 타워호텔과 자유센터는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건축물이다.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에 불과하던 최빈국(最貧國)의 지도자가 초강대국 미국을 향해 애절한 구애(求愛)를 한 결과물이었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미국 정부는 그의 과거 남로당 참여 경력을 근거로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박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자신이 반공세력임을 과시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김종필은 아시아반공연맹 창설을 구상했고 한국을 그 종주국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장충단공원 한쪽을 아시아반공연맹 콤플렉스로 만들기 위해 국제회의장, 본부, 숙소를 짓기로 한다. 숙소는 6.25전쟁 참전 16개국을 의식해 현관 1층을 제외한 16개층으로 설계했다. 숙소 17개층과 자유센터는 각각 1963년에 태어난다. 하지만 컨벤션센터는 예산 부족으로 건설되지 못했다. 숙소는 훗날 한국관광공사에서 매입해 호텔로 개조해 오늘의 타워호텔이 된다. 유신정권 시절 북한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후락(李厚洛) 정보부장은 북측 대표단의 숙소를 타워호텔로 정했다.
서른세 살의 천재 건축가 김수근(金壽根)이 설계한 자유센터는 정문에서 보는 것과 현재 자유센터 웨딩홀 주차장으로 쓰이는 운동장에서 보는 것이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정문에서 보는 자유센터는 남산과 어울리는 기막힌 건축미를 보여주지만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자유센터는 가공할 위압감을 뿜어낸다. 누구나 운동장에서 계단을 올려다보면 압도된다. 반면 자유센터에서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면 누구나 아래를 내려다 보며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고 싶어진다. 일부에서는 김수근의 작품 자유센터를 ‘국가주의 건축양식의 극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자유센터에는 자유총연맹, 예지원 등이 들어 있다. 운동장 옆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사무처. 18년 권력의 기반을 다진 상징적 건축물과 그 권력의 종언을 예언하는 대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장충단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자유센터 주차장은 밤에는 자동차극장으로 바뀐다. 서울 중심가에서 가장 가까운 자동차극장이 이곳이다. 그 아래쪽은 회원제 서울클럽. 1904년에 만들어졌을 때는 외국인 전용이었지만 현재는 내외국인 구분이 없다. 분위기가 조용하고 손님들이 점잖다. 서울클럽 아래는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 (주간조선)
[1937년] 헝가리의 시인 요제프/Jozsef Attila 사망
1905.4.11 ~ 1937.12.3
부다페스트 출생.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17세 때 시인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한 때, 빈 ․파리로 유학하고 귀국한 후 빈곤 속에서 사회적 부정에 대한 분노와 항의, 실의와 절망을 표현한 많은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그는 비합법하의 공산당에도 접근했으나 생활고와 정신병의 두려움, 혁명운동 속에서의 사상적인 혼미 등으로 끝내 철도자살로 생애를 마쳤다.
1,000여 편의 작품은 시집 《미(美)의 거지 A szpsg koldusa》(1922) 《뒷골목의 밤 Klvrosi j》(1932) 등에 수록되어 있다.
[1930년] 프랑스 영화감독 고다르 Jean-Luc Godard 출생
1930년 12월 3일 태어남 ~ .
"영화란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 아니다. 영화는 삶과 예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영화는 그림이나 문학과는 달리 삶과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나는 영화에 이 개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문학이나 그림은 시작부터 예술로 존재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 장 뤼크 고다르
고다르는 프랑스 '누벨 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양식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의 최초 주창자이자 이론가였던 인류학자 장 루쉬의 영향을 받았다. 1960년 각본 없이 촬영한 첫 장편영화 <네 멋대로 해라 Breathless>로 장 비고 상(Prix Jean Vigo)을 수상했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제작을 맡은 이 영화는 즉흥적인 기법 등 고다르 특유의 실험 정신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다. 이후 고다르의 영화는 인간의 변덕․자유분방함․이데올로기와 예술이 저지르는 사기행위를 의미 있는 현실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제를 그려내었다. 그는 경비가 극히 적게 드는 야외촬영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국제적인 '예술영화'계에서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 1968년에 일어난 파리의 학생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허구와 미학에 쏟았던 관심을 돌려 점차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면서 정치적인 영화들을 생산해내기도 했다. 그는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창작자로서 매우 개성적인 작품들로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 영화계에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브리태니커
[1932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발행
셔우드 홀은 결핵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실(Seal)” 운동을 계획하고 1932년 12월 3일 남대문을 그린 ‘실’을 한국 최초로 발행했다.
남대문은 한국의 상징이며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城樓)로 나타낸 것이다. 원래 첫 도안(圖案)은 거북선에 대포를 배치하여 한국의 적(敵)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는 그림으로 제작하였으나. 거북선에 패한 일본의 반발이 문제시되어 변경되었다. 그 후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성공을 거두며 계속 발행되었다.
그러나 1940년, 서기로 표기한 연호를 일본 연호로 바꾸라는 압력 때문에 실 발행 9년차 의미로 로 수정되기도 했다. 이것이 셔우드에 의한 마지막 실 발행이었다.
1938년 5월 1일부터 효과적 결핵 예방운동 차원에서 “療養村”이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시편 번역자 피터스 부부도 동참했다. 1939년 피터스 부인은 부회장으로 피터스 목사는 사업부장을 맡았다. 1940년 8월에는 ‘화진포’ 그의 별장에서 영국 신부(캐럴)를 만나고 동해안 지역 사진을 촬영했다는 협의로 간첩 누명을 쓰고 일제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월 또는 천$ 벌금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을 강제로 떠나야 했다.
1941년 11월 한국을 떠나 인도의 변방 마르다(Marda) 연합결핵요양원에서 결핵 퇴치사업을 계속하다가 1963년 은퇴하였다.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가 1991년 4월 5일 98세로 별세했다.
4월 10일 리치먼드 사우스 암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결핵협회는 1993년 11월 10일 셔우드 홀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양화진에 공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캐나다인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라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 퇴치에 헌신할 것을 결심, 토론토의대 졸업 후 역시 의사가 된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하여 1926년 함께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해주 구세병원에 부임했으며 한국 최초로 1928년에 근대적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 될 때 까지 결핵환자 치료와 실 발행을 계속했으며, 한편으로는 모범농장을 일구어 새 영농기술을 보급하고 의창학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대에 걸쳐 한국인에게 봉사한 공을 찬양해 1984년 한국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울시에서는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 대한결핵협회, 한국결핵사, 1998.2.28)
[1921년] 조선어연구회 발족
← 주시경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가 발족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원래 1908년 국어연구학회로 처음 출발했으며, 이후 배달말글 몰음(1911), 한글모(1913)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7년부터 활동이 침체되자 1921년 12월 3일 임경재·장지영·이규방·신명균 등이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49년 9월 지금의 명칭인 한글학회로 되었다. 한글날의 시초인 가갸날의 제정(1926),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1929) 등이 조선어연구회 시절에 이루어졌다. 이 학회가 한글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하려 애쓰자 일제는 ‘조선어학회사건’(1942)을 일으켜 조선어사전 편찬 관계자 등 학회 관계자 33명을 내란죄로 몰아 투옥하고 애써 만든 우리말 사전의 원고를 압수했다. 해방 후에는 1953년 정부의 ‘한글간소화안’에 대한 반대성명을 낸 이래 여러 차례 건의하여 1955년 한글간소화안을 철회하게 함으로써 한글파동(1953∼55)을 일단락지었다./브리태니커
← 국내서 가장 오래된 한글학회 학회지 ‘한글’ 창간호
1921년 12월 3일 오후 2시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최두선, 권덕규, 장지영, 이승규 등이 서울 휘문고보에 모여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한다.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들에게 모국어는 민족 얼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휘문학교는 주시경이 한때 한글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했다. 12월 2일자 조선일보는 ‘회원들이 우리말과 글에 기준이 될 통일성이 없어 유감’이라는 설립 이유를 싣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기관지 ‘한글’(1927년 2월 10일)이 창간되고,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념해 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이 1926년 9월 29일(음력)에 정해진 것도 이들의 공로다. 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1930년 12월)하고 조선어사전편찬회(1929년 10월)도 조직했다. 조선어연구회는 이후 조선어학회(1931년)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벌인 문맹퇴치운동에 발맞춰 우리글과 우리말 보급에 진력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문화 말살정책에 혈안이 된 일제가 '눈엣가시'와도 같은 조선어학회에 칼을 들이댄다. 일제는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자백을 근거로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등 33명을 내란죄로 연행하고 이 가운데 10명에게는 각각 2년에서 6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윤재와 한징은 재판 도중 고문으로 옥사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1949년 9월 5일)로 발전하며 지금까지 우리말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조선
[1920년] 조지훈/趙芝薰 출생
1920. 12. 3 경북 영양~1968. 5. 17 서울.
시인.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동탁(東卓).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생.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내면서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이듬해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8․15 이후 전국문필가협회․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 활동하였다. 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62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어,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 발간을 기획, 추진하였다. 이후 61년 동국대학교 역경원(譯經院) 심의위원, 67년 한국시인회장 등을 지냈다. 시작활동은 39~40년 사이에 《문장(文章)》지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가 추천된 이래, 전아한 한국어의 묘미를 살리면서 민족정서, 전통에 대한 향수, 불교적 선미(禪味)를 표현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여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하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시집 《역사 앞에서(1957)》는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일대 시적(詩的) 전환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지사(志士)인 학자이며 논객(論客)으로, 문화․예술․사상․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였다. 81년 고향인 영양군 일월면(日月面) 주곡동(注谷洞)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저서로 시집으로 〈역사 앞에서〉(1959), 수필집으로 〈창에 기대어〉(1958)·〈시와 인생〉(1959)·〈돌의 미학〉(1964)·〈지조론〉(1963), 평론집으로 〈시의 원리〉(1953)·〈한국문화사 서설〉(1964) 등이 있다.
[1919년]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 사망
△ 이레느깡단베르 양의 초상 △ 테라스에서(1879)
← 1913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촬영한 사진. 만성류머티즘으로 오그라든 그의 손을 볼 수 있다.
반짝이는 색채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림, 우아하고 부드러운 필치... 근대최대의 색채 화가이자 인상파의 대가였던 르누아르가 1919년 12월 3일 프랑스 남부 카뉴에서 78세로 눈을 감았다.
죽는 그 순간에도 그의 손은 평생 지병으로 앓아오던 만성 류머티즘으로 오그라질대로 오그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체의 장애도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식힐 수는 없었다. 그는 끈으로 붓을 손에 묶어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다.
일찍이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챈 부모는 그가 13살 되던 해 그를 도자기 공장에 보내 회화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1862년, 본격적인 회화 훈련을 위해 에콜 데 보자르의 야간부에서 소묘 및 해부학 강의를 듣던 중 시슬레와 모네 및 바지유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현실 생활에 좀더 충실하고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을 꿈꾸고 있었다. 바로 이 사조가 ‘인상주의’ 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모네가 그룹전에서 발표한 ‘해돋이 인상’이라는 작품을 보고 한 기자가 다음날 이들 작품을 ‘인상파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혹평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오늘날 ‘인상주의’는 사물의 형태에 연연하기보다는 사람 또는 사물을 볼 때 받는 인상과 느낌을 순간적으로 눈에 비치는대로 자유롭게 그려내는 사조를 의미하는 데, 그 대표적인 화가로 모네마네피사로르누아르드가세잔고갱고흐 등이 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사물의 윤곽이나 얼굴 등이 희미해지는 이러한 ‘인상주의’ 기법에 의문을 갖기 시작, 1880년대 중엽부터는 인상파와 결별하고 초상화와 인물 등 좀더 엄격하고 형식적인 기법을 적용한 여인상에 관심을 갖고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 ‘물렝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피아노 앞의 아가씨들’ 등을 비롯해 ‘목욕 하는 여인들’ ‘우산’ ‘테라스에서’ 등이 있다./조선
[1906년] 소설가 최정희(崔貞熙) 출생
← 소설가 김동리와 최정희
1906. 12. 3 함북 성진~1990. 12. 21 서울.
여성 특유의 감각으로 심리묘사에 뛰어난 글을 썼다. 호는 담인(淡人). 15세에 함경남도 단천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살았으며, 192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듬해 서울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했다. 한동안 유치원 보모로 근무하다 1930년 일본에 건너가 학생극예술좌에 참여했다. 귀국 후 〈삼천리〉 기자로 일했으며 1934년 2차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 검거시 맹원도 아니면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6·25전쟁 때는 여자의 몸으로 공군종군작가단에 참가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국세청 자문위원, 한국여류문학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정당한 스파이〉(삼천리, 1931. 10)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초기에 발표한 〈명일의 식대〉·〈성좌〉 등은 자기고백적인 작품이다. 이어 〈문장〉에 발표된 〈지맥〉(1939)·〈인맥〉(1940)·〈천맥〉(1941)은 여성의 불행한 운명을 다루는 등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 3부작이라 불린다. 여주인공들의 불행의 원인이 그들 개인에게 있고 도덕적 성실과 인내로 극복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8·15해방 후에는 사회의 혼란과 농촌의 궁핍함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는데, 〈점례〉(문화, 1947. 4)·〈풍류잡히는 마을〉(백민, 1947. 9)·〈청량리역 근경〉(백민, 1947. 11) 등이 대표작이다. 소설집으로 〈녹색의 문〉(1954)·〈바람 속에서〉(1955)·〈인간사〉(1964)·〈찬란한 대낮〉(1976) 등이 있다. 1958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64년 여류문학상, 1971년 예술원상, 1983년 3·1문화상 등을 받았다.
[1905년] 곤충학자 조복성(趙福成) 출생
1905. 12. 3 평남 평양~1971. 3. 19 서울.
1945년 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의 곤충학을 포함한 동물학의 발전을 주도했다. 1929년 〈울릉도산 인시목(麟翅目)〉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한국 사람이 쓴 것으로는 최초의 곤충학 관계 논문이었다. 주전공은 딱정벌레목의 분류학이었으며 대상 지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몽골도 포함되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1924), 보통학교 훈도(지금의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후 경성제국대학 예과부 조수(1930~41), 의학부 조수 등을 거쳐 중국의 난징[南京] 박물관 연구원, 중국 항저우[杭州] 시후[西湖] 박물관 지도원, 국립과학박물관장(1945~50)을 지내고, 성균관대학교․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동물학회회장․한국곤충학회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 북만주․간도(間島)․중국․타이완[臺灣]․일본 등을 답사하여 83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으며, 《동물분류학》 《한국동물도감》 《일반곤충학》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서울특별시교육공로상․학술원상․국민훈장동백장을 받았다.
[1894년] 영국의 소설가, 시인 스티븐슨/Stevenson, Robert Louis Balfour 사망
1850.11.13~1894.12.3
1883년 대표작의 하나인 《보물섬 Treasure Island》이 출간되자, 이야기 작가로서의 그의 문명은 한층 높아졌고, 이어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The Strange Case of Dr.Jekyll and Mr. Hyde》(1886) 《발란트래경(卿) The Master of Ballantrae》(1889) 등 많은 화제작을 계속 발표하였다.
1888년에 고국을 떠나 남태평양의 사모아섬에 베일리마(Vailima)라는 저택을 짓고 정주함으로써, 한때 건강도 회복되었으나, 《허미스턴의 둑 Weir of Hermiston》을 완성하지 못한 채 뇌일혈로 죽었다.
[1869년] 독립운동가․정치가 이시영(李始榮) 출생
1869. 12. 3 서울~1953. 4. 17 부산.
서울 출신.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909년까지 형조좌랑․궁내부수석참의․평안남도관찰사․한성재판소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지냈다. 관직에 있으면서 근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쓰는 한편,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만주로 망명,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2년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 20년 폐교 때까지 수많은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법무총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에 힘썼다. 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다. 31년 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있기 전에 먼저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33년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 등과 임시정부의 부흥책을 논하고 직제개편을 단행, 주석을 윤번제로 정하였다. 이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을 지냈다. 34년 한국사의 주체성을 강조한 《감시만어(感時漫語)》를 발간하였으며, 이후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45년 귀국,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이 되었다. 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51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 사퇴하였다. 52년 제 2 대 대통령선거 때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755년] 미국의 초상화가 스튜어트/Gilbert (Charles) Stuart 출생
1755. 12. 3 미국 로드아일랜드 노스킹스타운~1828. 7. 9 보스턴.
로드아일랜드 노스킹스타운 출생.
뉴포트에 체재 중이던 스코틀랜드인 화가에게 사사하였다. 1776년 런던으로 가서 B.웨스트에게 사사하고 초상화가로 독립, 1793년까지 런던 ․더블린 ․아일랜드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다.
낭만적인 성격묘사에 독자성을 발휘하였으며, J.레이놀즈나 T.게인즈버러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귀국 후는 초상화에 자유로운 해석과 새로운 시도를 곁들여 18세기적인 초상화법에서 벗어났다.
그가 그린 3점의 워싱턴대통령상은 그 뒤 수없이 그려진 대통령상의 원형이 되었다.
그밖에
1998년 국내, B형간염 치료제 '헤파가드' 개발
1997년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총550억달러의 긴급자금지원에 합의
1992년 유엔안보리, 소말리아 군사개입결의안 채택
1991년 일본 중의원, 자위대의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안 가결
1990년 방글라데시 대통령 에르샤드 사임
1987년 중부고속도로 개통
1985년 10차 남북적십자본회담 서울개최
1983년 부산 다대포 앞바다 무장간첩선 격침
1983년 백악관 콘크리트방벽 설치
1981년 교대와 국립사대 통합발표
1981년 시스케이국 독립
1980년 부산대. 동래서 가야시대의 금동관 발굴
1978년 캄보디아의 반(反) 폴 포트세력이 캄보디아 구국민족통일전선을 결성
1973년 파이오니어 10호 최초로 목성 탐사
1970년 북한 박성구 소좌. 미그15기 몰고 귀순
1962년 쿠바의 소련폭격기들 철수 개시
1961년 미국 네바다 사막서 지하 핵실험
1960년 일본-영국 문화협정 조인
1959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유럽-아시아 방문 등정
1956년 영국-프랑스, 이집트로부터 즉시 철수 발표
1952년 유엔총회. 한국전포로 중립지대 인도안 가결
1948년 상해부근에서 피난민들이 탄 배가 폭발침몰. 3천9백20명 사망
1946년 미국-영국 군사동맹 체결
1943년 미국-영국-소련 3거두 테헤란선언
1522년 1622년 3월 12일 성인으로 추증된 근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자 하비에르 사망